소설리스트

〈 14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9) (14/88)


  • 〈 14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9)

    루나칼립스 학원에는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는 지도원들이 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오후 수업까지 모두 끝나 학생들이 하교하고 나면 슬슬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기숙사의 지도원인 에반은 상황이 반대였다. 학생들이 모두 수업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여유롭게 일과를 처리할 수 있지만,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기숙사에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엘리아를 보좌해야 한다.

    에반 입장에서는 혼자서 학원 잡무를 보는  훨씬 나았다. 업무 자체야 기숙사의 업무가 훨씬 편하고 적성에 맞다 할 수 있는데다가, 사감의 대우 또한 좋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마주치느라 서로 불편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게 너무 성가셨다.

    그들의 심경을 이해 못하는  아니다. 애들 상대로 화내가며 자존심 챙길 정도로 속좁은 어른은 아니니까. 허나 에반이 이해해 줄  있다고 한들 이곳의 학생들은 대체로 에반을 꺼리고, 기숙사의 사생들은 그가 자신들의 생활 반경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유리아나 루밀리처럼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를 이해하려고 할까?


    모르겠다. 그렇게 해맑은 낙관회로를 돌리며 머릿속에 무지개를 그리기에는 구내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에 밟힌다. 그런 일이 여기서는 늘 벌어지던 일상일까? 아니면 학원의 통제가 점점 약해지거나 혹은 아예 학생들을 방임하고 있다는 신호로 나타난 이변일까?

    이것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에반은 일단 이 학원에 대해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야만 본사가 이 학원과 협약을 맺고 S급씩이나 되는 NPC를 파견하는 이유가 감이 잡힐 것이다. 결국 지금의 에반은 학생들을  이해해야 한다. 학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본사에서 통보한 한 달의 유예 기간 동안 학원의 신뢰를 따내기 위해서. 어느 쪽이든 여간 성가신 일은 아니리라 예상됐다.


    “실례합니다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낯선 여학생 하나가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던 에반의 앞을 막아 섰다. 아그루스의 의복 문화와는 확연히 다르고, 루나칼립스의 교복은 더더욱 아닌 이국적인 복장. 분명 조금 전에 구내식당에서 봤던 동방인 무리가 입고 있던 복장과 같았다.

    다만 얼굴은 구내식당에서 못 봤던 얼굴이다.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표정은 과묵하고 차분해 보이고 눈매는 시니컬했다. 같은 동방인인 아선의 명랑함과는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허설이라고 합니다. 동방 유학생들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기숙사의 신규 지도원이 당신 맞습니까?”

    “맞긴 한데. 무슨 용건으로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내 퇴근길을 가로막는 거지?”

    “우르르 몰려오다니요? 지금 여긴 저와 지도원  둘뿐이잖습니까?”

    “나 바보 아니니까 떠보려고 하는 거면 그만 둬라. 애들 때문에 뒤통수 따가워서 못 견디겠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12명."


    "......"


    잠시 말문이 막혔던 허설이 가볍게 손짓하자 곧 어디서 뛰어내린 건지 모를 여러 여학생들이 일제히 착지 하더니 신속하게 대열을 짜서 에반을 둘러쌌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봤던 얼굴들도 여럿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허리에서는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저마다 불온한 자기과시를 하고 있었다.


    "어이구.  그래도 박봉인데 제발 월급만큼만 일하자 응?"


    허리에 보란 듯이 칼을 차고 있는 수상한 학생들에게 둘러싸이자 에반이 귀찮은 일에 말려들었다며 한숨 지었다. 허설은 여전히 기계 같을 정도로 표정 없는 얼굴로 에반을 응시했다.

    "당신을 눈여겨보기로 한 수장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눈치채신 건가요? 그것도 구체적인 인원수까지 말이죠. 마법을 쓰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데."


    "뭔가 자신이 납득 못하는 일이 벌어지면 바로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는 거 되게 나쁜 습관이다. 마법 아니어도 사람 속이는 방법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아니?"

    "좋은 가르침이군요. 귀담아 들을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말이야. 니들은 뭐냐? '수장님'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무슨 패거리 같은데."

    "여기는 진득하게 이야기 나누기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 나눌 상대 또한 제가 아니라....."

    "아아, 지도원 씨!"

    느닷없이 울려 퍼진 당돌한 목소리가 허설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선이었다. 그녀는 뾰로퉁한 얼굴로 에반 앞에 튀어나와 소리쳤다.

    "제 칼 돌려주세요! 저희들에게 있어서 그 칼은 자존심이라구요! 그런데 저 혼자만 허리춤에 칼이 없다니. 지금 저 완전 갈기를 다 밀려버린 사자에요."


    "갈기털 난 사자는 수컷인데?"


    "어라? 아무튼! 그 칼은 저희 '곤룡회'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중요한 징표니까 반드시 돌려받겠어요. 아무리 지도원 씨라고 해도 봐주지 않습니다! 안 된다 하신다면 힘으로라도....아으윽읏윽흣?!!!"

    허설이 아선의 뒷목을 잡고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꽈아아악! 허설이 무감정한 얼굴로 말없이 아선을 응징하자 아선이 고통에 파닥파닥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야야앗아윽...! 아아, 허설 언니, 아니 허설 선배, 아니 존경하는 허설 선배님!! 제가 잘못했으니까 놔주시는 끄악?!"

    허설이 손에 힘을 풀자 아선은 욱신거리는 뒷목을 부여잡고 신음하면서 다른 학생들 틈으로 퇴장했다. 흠흠! 허설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하던 말을 다시 이었다.

    "방금 말씀 드렸지만 장소를 바꿨으면 합니다. 당신과 이야기 하고 싶으신 분이 있습니다.”

    "너희들의 수장님 말이냐?"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양반다리 하고서 앉아있기 싫고, 양갱도 입에 안 맞거든? 그러니 같이 차 한잔 빨면서 다도를 즐길 사람을 찾는 거라면  데 가서 알아봐. 그럼 난 이만 가봐도 되지?"


    "수장님께서 하찮은 용건으로 당신을 찾는 게 아니십니다."

    "그럼 본인이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해. 수장님, 수장님 해봐야 니들한테나 수장님이지 나한테는 그냥 학생인데, 지도원더러 이리 와서 앉아보라고 시키는 거냐?"


    "그런 무례를 범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오래 시간을 뺏지 않겠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내키지 않으시거나, 바쁜 용무가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안내 해. 어디 너희 수장님인지 뭔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재고에 감사 드립니다."


    "대신 시덥잖은 얘기 한다 싶으면 바로 돌아갈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앞장서서 안내하겠습니다."


    허설이 선두에 서고 그녀의 바로 뒤에 에반, 그리고 나머지 학생들이 무리 지어 에반의 뒤에 따라붙었다. 마치 에반이 도망치지 못하게 커버하는 모양새였다. 허설의 태도로 보아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에반은 일단 순순히 허설을 따라갔다.

    허설이 에반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국제교류 학관이라는 신축 건물이었다. 이름대로 제국 외부에서 온 유학생들이 학원에서 제시하는 커리큘럼을 수행하는 곳이며 유학생 전원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나름 기숙사 비슷한 생활 공간도 구비되어 있었다.

    국제교류 학관 건물은 반으로 나뉘어진 구조라 정문으로 들어가면 중앙홀인데 중앙홀에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설국인들이 사용하는 시설이고, 1층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방인들의 시설이었다.

    복도 안쪽을 지나 동방인들의 공간에 들어와보니 더 이상 제국의 요소는 찾아볼  없을 정도로 인테리어가 확 변했다. 마치 동쪽 세계에 발을 들인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의 목조 회랑이 쭉 뻗어져 있었고, 회랑을 따라 쭉 늘어선 종이 등불들이 작은 불빛을 아른거리고 있었다.


    회랑에는 유학생들이 손수 가꾸는 것으로 추정되는 분재 화분들이 살포시 구름을 머금고 늘어서 있었고, 벽에는 여러 서예 작품들이 즐비해있었다. 듣기로는 동방에서는 붓솜씨가 좋은 사람을 교양인으로 여긴다던데, 유학생 무리의 수장 또한  자질을 입증하기 위해 서예에 대한 조예를 요구 받는 모양이다.

    에반이 회랑을 거닐면서 벽에 걸린 서예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가늠할  있다.  글이 필자의 명상을 담은 서예라면 더더욱. 벽에 걸린 서예 작품들은  가지 서체에 구애 받지 않고 여러 서체로 힘있게 갈겨져서 호연한 기개가 담겨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집착에 가까울 만큼 극도로 절제된 먹선 농담법에서는 의도불분명한 요사스러움마저 느껴졌다.

    짧은 감상을 마친 에반은 복도 끝에 있는 종이로 된 미닫이문 앞에 이르렀다. 허설이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정좌하고는 문에다 대고 말했다.

    "수장님, 허설입니다. 분부하신 대로 예의 그 지도원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내 취급은 예의 그 지도원인가... 그나마 뒤에다 님자라도 붙여준  고맙게 생각해야 하려나.'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출입을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허설이 미닫이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한  몸을 일으켰다. 에반이 허설의 안내를 받고 방 안에 들어가자 제법 넓은 공간 안에 좌식과 입식이 타협하며 기묘하게 뒤섞인 동방풍 인테리어의 집무실이 나왔다.

    집무실의 주인으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응접용 테이블에 앉아서 에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쾌활한 아선이나 침착한 허설과는 다른 영민함과 잔망스러움이 담긴 눈매, 부채로 입을 가려서 상대에게 자신의 표정을 완전히 내보이지 않는 영악함. 첫인상만으로도 동방인 무리의 리더임을 과시하는 소녀였다.

    “당신이 학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곳의 흐름이 비틀리는 것만 같았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네요.”


    ‘수장님’ 이라고 불리는 그 학생이 에반을 보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허설 양. 지도원 님께 차를 내어드리겠어요?”


    허설은 에반을 자리에 앉도록 안내하고 엽차를  잔 내어왔다. 에반은 허설이 가져온 찻잔에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그 속내 모를 학생을 쳐다봤다.

    “식기 전에 한 잔 맛보시는  어떻습니까? 뭔가 이상한 걸 탔으리라는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음식으로 장난치는  저희의 취미가 아니니까요.”

    “나 역시 너희들 취미에 어울려주러 여기 온 게 아니야. 사람을 불렀으면 분위기 잡기 전에 통성명부터 해야지?”

    “이런, 실례했습니다. 자기소개가 늦어졌군요. 저는 유학생회 동방측 대표 ‘아라한’ 입니다.  학원의 모든 동방인들을 대표해서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네 이름은 뭔데?”

    “…….”


    눈웃음 지으며 인사하던 아라한이 에반의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조용해졌다. 그녀는 실눈을 치켜 뜨고 에반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인사말을 건넬 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교직원들과는 달리… 동방 세계에 대해서 문외한은 아니신 모양입니다.”


    “익명 희망이냐? 존중해줄 의향은 얼마든지 있다만.”


    “한. 저를 한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라한은 찻잔을 집어 들기 위해 부채를 내려놨다. 그녀가 차를 마시기 위해 잠시 부채를 내린 순간에야 그녀의 얼굴을 온전히  수 있었다. 제국인의 도도함과는 어딘가 다른 색기가 연출되는 인상이었다.

    “유학생회 동방측 대표면 대표님이라고 불러야지 왜 수장님이라고 불리나? 그게 더 있어 보여서?”


    아라한은 대답 대신 위를 살짝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학생들이 차고 있던 단검의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저희는… 그러니까  학원의 모든 동방 유학생들은 다들 ‘곤룡회’ 에 속해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곤룡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채택됐죠.”

    “곤룡회? 뭐야 그건. ‘죽은 용들의 사회’ 중에서 그런 분파는 못 들어봤는데.”

    “거기까지 알고 계시다니. 역시 기숙사 세탁기 고쳐줄 사람이 필요해서 고용된 지도원은 아닌 게 확실하네요. 네, 맞습니다. 저희는 죽은 용들의 사회와는 무관합니다. 그도 그럴 게 저희는 ‘동방을 떠나서’ 제국에 온 게 아니라, ‘동방이 보내서’ 제국에 왔으니까요.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지도원 님 정도라면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흐음..."


    “구내식당에서 저희 쪽 아이들이 실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총책임자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사과 인사나 한 마디 하려고 애들 우르르 풀어서 데리고 온 건 아니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기를 선호하는 성향이시군요.”

    허설이 에반과 아라한 사이에 정사각형 나무판 하나를 깔았다. 격자 무늬가 그려진  보니 바둑판이었다. 허설이 작은 항아리를  개 가져와서 뚜껑을 여니 역시 바둑돌이 안에 들어있었다.


    “분위기를 좀 풀고 싶은데, 이야기 하면서 오목이라도 두죠. 바둑은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요.”

    아라한은 검은 돌이 담긴 항아리를 에반 쪽으로 밀어줬다.


    “흑은 지도원 님께 양보해드리도록 하죠. 잘 어울리는 색이니까요.”

    “필요 없어.”

    에반은  돌이 든 항아리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자신이 있으신가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꽤 잘 두는 편인데.”

    “알겠으니까 빨리 둬.”

    “마음에 드는군요. 그럼 제가 흑을 받겠습니다. 다만, 연주(連珠)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3-3, 4-4, 장목은 지도원 님만 가능합니다.”


    아라한이 바둑판의 정가운데에 검은 돌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자, 보여주시죠. 기대하게 만드셨으니 책임지고 실망스럽지 않은 대국을 보여주시기를.”


    에반은 흰 바둑돌을 하나 꺼내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위에 놓았다. 그가 바둑돌을 올려놓은 자리는 아라한이 놓은 돌과는 한참 떨어진, 그리고 전혀 뜬금없는 위치인 바둑판 가장 구석자리였다.

    “….”


    아라한은 에반이 돌을 어디에 놓을지에 따라 전략을 이미 몇 수 앞까지 계산하고 있었지만, 생뚱맞게 바둑판 구석에 짜박힌  돌이 그녀가 세운 모든 전략을 깨버렸다. 그것도 다소 어처구니 없는 의미로.

    아라한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돌 옆에 나란히 두 번째 돌을 늘어놓은 뒤 에반의 수를 지켜봤다.

    에반은 돌을 집어들지 않았다. 대신 검지를 엄지에 걸어서 알까기 손가락을 만들더니 바둑판 구석에 놨던 자신의 돌을 튕겨냈다. 딱! 에반의 손가락이 돌을 튕기자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아라한이 놨던 두 돌들이 모두 바둑판 밖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일타쌍피. 아라한의 돌을 전부 떨어뜨린 에반은 바둑판 중앙에 위풍당당하게 홀로 남은 자신의 돌을 집어들어 다시 항아리에 집어넣었다. 아라한은 장난치지 말라고 따지거나, 웃어넘기는 등의 반응을 일절 보이지 않고 여전히 속내 모를 무표정을 유지한  침묵했다. 에반이 항아리의 뚜껑을 닫아버리며 한 마디 했다.

    "이런 돌장난으로 사람 떠보기나  거면 이게 내 대답이다."

    ".......치우세요."

    아라한이 말하자 허설이 다가와 바둑판과 기물들을 전부 정리해서 회수해 갔다. 수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에반의 행동에 난감함은 곤룡회 학생들 몫이었다. 아라한은 감정이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네요. 정말로 재밌어요. 이 정도로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은 얼마만일까요? 너무 재미있어서 당신의 무례함마저 즐겁군요."


    "네가 하도 뜬구름만 잡으니까 그냥 내가 먼저 말하련다. 묻고 싶은  있는데, 오늘 구내식당에서 있었던 일 말인데. 늘상 벌어지던 일이야?"


    "그렇습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말이죠."


    "근래에 들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올해부터죠. 올해 첫학기부터 로제 같은 열심당원을 중점으로 연대한 귀족 학생들이 저희 유학생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도발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올해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럴까요? 계기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유리아 릴리스의 학생회장 당선."

    "정확합니다. 아직  학원에 오신지 얼마 안 되셨을 텐데 굉장한 통찰력이군요. 그렇습니다. 원래 학생회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였고, 학생회를 독점한 귀족들은 학원의 지배계층을 자처했습니다. 참 우스운 일이죠. 하지만 루나칼립스의 폭군이라 불리며 절대적인 권한을 발휘하던 핵심인물이 여러 이유로 휴학하게 되면서  공백을 메울 사람을 구하지 못했죠."

    "갑작스런 폭군의 부재. 그리고 절대적인 적임자였던 그 폭군을 대체할 인물로서의 자질과 정통성에 대한 갑론을박. 귀족들이 분열되고, 학생회는 와해. 그런 시나리오겠네."


    "이해가 빠르시니 설명할 수고를 덜어주시는군요. 맞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학생회장이  유리아는 계산이 빠른 상인과 공직자 집안의 학생들을 학생회에 앉혀서 학생회를 관료화시켰습니다."

    "물갈이 한바탕 했다 이거네."

    "그렇다면 학생회에서 밀려난 지금도 저희를 이렇게 핍박하려고 안달  귀족들이 학생회를 장악하고 학원의 지배계층을 자처하던 시절에는 대체 얼마나 저희들을 괴롭혔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뭐하러 괴롭혀? 그냥 신경 안 썼겠지. 유학생들이 밥을 먹건, 빵을 먹건, 춤을 추건 안중에도 없었겠지."


    "정답입니다."


    "유학생들을 몰아내자느니, 기사나 상인이나 관료 집안 학생들에게 주제를 가르쳐 무릎꿇게 하자느니, 불순물을 걸러내고 제국의 질서와 학원의 순수성을 되찾자느니. 그런  전부 뿔뿔이 분산된 귀족 학생들 세력을 다시 뭉치게 하려는 선전 아니겠냐."

    "오늘 구내식당에서 벌어졌던 일은, 그리고 이 학원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실  세상을 작게 축소시킨 광경이라고 봐요. 난폭한 제국, 이를 가는 동방, 방관하는 설국."

    "이 학원에 이런 학관이 있는 것도 신기하다. 그 전쟁이 끝난지도 불과 12년 밖에 안 지났는데 제국의 상류층 학원, 그것도 전쟁영웅이 이사장인 학원이 동방인을 유학생으로 받고 있다니."

    "목적이 뭘까요? 두 세계의 평화와 화합에 대한 소망? 외부 세계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적 관점 학습?"


    "그럴 리가."


    "그렇죠? 이것이 저희 곤룡회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학생회장이 누가 됐건 어차피 저희와는 불편한 관계고, 학원에서 시키는 국제교류 커리큘럼도 못 미덥고, 교직원들이 저희를 대하는 태도하며, 다른 제국인 학생들의 시선하며. 그러던 중에 지도원 님이 오셨습니다."

    "나?"


    "그 천방지축 오만방자한 로제를 두 번 씩이나 꼬리 내리게 만들었다면서요? 이곳의 지도원들은 하나같이 귀족 학생들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쥐새끼 이하들 뿐인데 말이죠."


    "날 포섭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포섭이라니 우리 그런 어려운 말은 쓰지 말죠. 저희는 그저 저희의 입장을 잘 헤아려주고 목소리를 내줄 지도원이 간절히 필요한 학생들일 뿐이랍니다."


    "그게 바로 포섭이라는 거다, 이 능구렁이 같은 아가씨야."

    "손해볼 건 없을 텐데요? 다른 학생들은 지도원 님을 언짢게 여기지만, 여기는 얼마든지 기쁘게 당신을 환영할 학생들이 잔뜩 있으니까요. 저희가 티 내기 부끄러워서 평소에는 표정을 이렇게 하지만, 사실 작은 성의로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냐?"


    "글쎄요? 그건 어떨까요?"


    상황을 대강 파악한 에반이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구석으로 치웠다.

    "아무래도 네 마음에 들만한 답변은 못해주겠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찾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 걸요. 그래도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 아니지. 제게 좀 더 기대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번 주 토요일. 토요일까지 답변이 없으면 거절 의사를 확고히 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뭘 멋대로 정하냐고 말할까 싶었지만, 그냥 무시하면 알아서 거절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니 굳이 따지지 않았다. 얘기를 더 길게 할 필요를 못 느낀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라한이 그를 불렀다.


    "지도원 님."

    에반이 뒤돌아 보자 아라한이 부채를 거두고 표정을 온전히 드러냈다.


    "저는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다음에는  더 솔직해질 테니까, 모쪼록 저희를 잘 지켜봐주세요."


    말을 마친 아라한은 다시 부채를 펼쳐 하관을 살짝 덮어 표정을 가렸다. 처세술에는 처세술로 대응한다. 에반은 따로 대답을 하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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