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8)
루나칼립스의 학생들이 점심을 먹는 방식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뉜다. 기숙사의 사생 식당을 이용하거나, 본관 구내식당의 매점을 이용하거나, 볕 잘 들고 경치 좋은 곳에서 도시락을 까거나. 누르워 같은 곳으로 나가서 먹을 수도 있지만 외출증을 끊기 위해 사유서를 작성하기도 귀찮은 일이겠거니와, 호위나 시종도 없이 혼자 식사를 하기에는 상류층의 체면이 허락하질 않다보니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이상 학생들은 학원 안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에반 플루토는 기숙사에서 조식으로 제공하는 도시락 남은 거로 아침, 점심, 심하면 저녁까지 해결하고 있지만 도시락도 이제 지겨우니 매점 구경이나 할 겸 구내식당을 찾았다.
"안은 생각보다 넓은데? 매점도 이것 저것 다양하게 있네. 햄파이를 안 판다는 점만 빼면 우리 본사 구내식당보다도 훌륭하잖아 쓰읍."
에반은 매점에서 산 먹거리 몇 가지와 기숙사 조식으로 남은 홍시를 테이블 위에 차려놨다. 주변 학생들의 식사 풍경을 살펴보던 에반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여긴 온통 외국인 애들이네? 하긴 귀족 애들이 매점에서 빵 사먹기는 체통이 허락 안 하겠지."
구내식당을 이용중인 학생들은 대부분 설국인, 동방인 유학생 무리였다. 제국인 학생들이 밀려나 유학생들이 차지한 건지, 아니면 제국인 학생들이 원래부터 잘 찾아오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유학생들의 쉼터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학원의 모든 유학생들이 전부 구내식당에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설국인 학생 무리는 멀쩡한 다이닝 장테이블과 의자를 내버려두고 한쪽 벽 귀퉁이에 쪼그리고 모여 앉아서 유리병에 든 탄산음료를 병나발째로 터프하게 들이마시고 있었고, 동방인 학생 무리는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큼지막한 냄비를 하나 가운데에 놓고 전골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나눠 먹고 있었다.
설국인 학생들도, 동방인 학생들도 구내식당에 찾아온 낯선 손님인 에반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반은 여기저기서 자신을 쳐다보는 경계심 어린 시선을 느꼈지만, 기껏 밥상을 차려놓고는 보는 눈이 부담스럽다고 짐 싸서 나가기도 귀찮으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유학생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정해져 있는지 구내식당은 설국인 자리와 동방인 자리가 딱 나뉘어져 있었고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동선까지 짜여 있었다. 에반이 유학생들이 모여있는 패턴을 살펴보니 그는 지금 동방인들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스윽. 교복 대신 동방의 전통 여성복을 개량하여 차려 입은 한 학생이 에반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제국에 정착한 이주민 혼혈이 아닌 진짜 순혈 동방인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머리 색부터 눈매, 눈동자 색까지 하나하나가 남부 지역 이스티아에서 온 루밀리보다도 훨씬 더 이국적인 인상을 풍겼다.
"당신. 잠시 실례하죠."
에반에게 다가온 그 동방인 학생은 의외로 유창한 아그루스 공용어로 말을 걸어왔다. 영역을 침범한 외부인에게 반강제적 퇴거 요청을 하러 온 걸까 싶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가있었다.
"그 감 어디서 났나요?"
그녀의 시선은 에반이 가져온 바구니의 홍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거? 기숙사 조식으로 나왔는데 좀 많이 남았어. 버리기는 아까워서 내가 챙겼지."
"이 귀한 감을 버리려 했다고요?"
"원한다면 가져가. 어차피 나는 질리도록 먹었으니까."
"정말인가요? 받아도 되겠습니까?"
에반이 홍시를 바구니째로 스윽 밀어주자 동방인 학생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바구니를 동료들에게로 가져갔다. 동방인 학생들은 화기애애하게 홍시를 나눠먹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외부인인 에반에게 텃세를 부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미묘한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설국인 무리 역시 우려했던 마찰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자 더 이상 에반 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설국 애들도, 동쪽 애들도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은 많지만,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대체로 온순한 편이지. 그나저나 나무 열매 하나 가지고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저게 그렇게 맛있나?’
동방의 학생 무리는 바구니에 있던 홍시를 금세 비웠다. 에반에게 말을 걸었던 그 학생이 바구니를 돌려주러 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물론. 안 될 이유 없지.”
에반의 옆에 앉은 그녀는 반쯤 먹은 홍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에반의 호의 덕분에 경계심을 풀었는지 처음 말을 걸어올 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선. 저는 아선이라고 해요. 이번에 새로 왔다던 지도원이 바로 당신이죠?”
“그래. 기숙사 담당으로 배치된지라 너희 같은 유학생들이랑은 마주칠 기회가 도통 없었네.”
“앞으로도 여기 오시면 자주 마주칠 수 있을 거예요. 오늘처럼 약소한 성의와 함께 찾아오신다면 금방 친해질 수 있을걸요? 우리 언니들이 티 내기 부끄러워서 평소에는 표정을 저렇게 하지만 사실 작은 선물로도 되게 좋아하거든요. 아, 물론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말하며 아선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동방인 소녀는 홍시를 한입 베어 물었다.
“감나무가 흔한 동방과는 달리 여기서는 감이 재배가 어려운 특수작물이라서 구하기 힘들던데, 그런 감이 하마터면 쓰레기통으로 갈 뻔했다니. 하여튼 아그루스 깍쟁이 녀석들, 누군 없어서 못 먹고 있는 걸 누군 소각로에 쏟아 붓기나 하고. 어디 한 번 굶어봐야 밥을 안 남기지. 안 그런가요?”
"우리 기숙사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량은 확실히 무시 못할 수준이더라. 하지만 학생들을 탓할 게 아니라 조식 체계 자체를 손봐야 할 문제겠지."
"아니에요, 다 자기들의 업이에요. 살아있을 적에 남기고 버린 음식은 모두 윤회의 문 앞에서 먹어치워야 환생할 수 있을 걸요."
"귀한 거, 비싼 거, 맛있는 거만 밥상에 오르던 녀석들인데. 환생하기 전에 극상의 만찬 한상 차려주는 건가?"
"비벼서 주겠죠."
"그러면 계산적으로 남겨야겠네. 조합을 생각해서."
"코로 먹어야 할 걸요?"
"저런."
"그래도 지도원 씨는 남에게 나눌 줄 아는 착한 분이니 아마 봐주겠죠. 내일도 오늘처럼 좋은 걸 가져다 주신다면 분명 봐줄 거예요."
적당히 에반에게 감사 표시 몇 번 하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선은 에반 옆에 눌러 앉아서 시덥잖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방금 처음 인사 나눈 사이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조용히 끼니를 때울 생각이었던 에반 입장에서는 이 수다쟁이의 친화력이 귀찮았지만, 그래도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학생이니 적당히 상대해주면서 빵을 먹었다.
그때 구내식당 안에 세 명의 여학생이 들어왔다. 그들은 표정으로 보나, 인상착의로 보나 전형적인 제국인, 그것도 귀족이었다. 귀족 학생들이 들어오자 화기애애하게 홍시를 나눠먹고 있던 동방인 무리도, 구석에 모여 앉아서 잡지 같은 무언가를 읽고 있던 설국인 무리도 분위기가 싸하게 변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에반이 오늘도 조용히 점심을 해결하기에는 글렀다고 직감했다.
“하. 얘기는 여러 차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불쾌한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린 귀족 학생 하나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니 우리 학생들이 매점을 이용하기 불편하다고 하는 거죠. 하루 빨리 청소를 해야겠네요.”
“청소요? 미화관리부 지도원이 매일 구내식당의 청결 작업을 진행하는데요. 더 신경 써달라고 건의할까요?”
“그게 아니에요. 미화원이 쓸고 닦아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그도 그럴게… 불순물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서 악취를 피우는 걸요.”
귀족 학생이 들으라는 듯이 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변의 유학생들을 째려보자 유학생들 쪽에서도 만만찮게 공격적인 시선이 쏟아졌다. 삼삼오오 모여서 제국의 것이 아닌 언어로 담소를 나누던 구내식당 안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언제 어디서 싸늘한 비수가 날아와 꽂힐지 모르는 냉담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이러니 누가 구내식당이나 매점을 이용하고 싶어하겠어요? 어울리지 않게 식탁에 모여있는 꼴이란. 본래 습성대로 땅바닥에 밥그릇을 놓고 주저앉아서 먹을 것이지.”
귀족 학생의 폭언이 도가 지나쳤지만 에반은 일단 유학생들의 대처를 지켜보기 위해 곧바로 제지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빵을 우물거렸다. 그런데 가장 먼저 행동으로 나선 건 다름 아닌 아선이었다. 에반 옆자리에서 활발하게 재잘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귀족 학생들 앞으로 다가갔다.
손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마주선 귀족 학생들과 아선.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할까? 정중하게 귀족 학생들에게 나가라고 할까? 모욕한 걸 사과하라며 화를 낼까? 유학생들도 구내식당을 자유롭게 이용할 권리가 있다며 논리적으로 주장할까?
정답은
와장창 쨍그랑!!!
‘테이블을 뒤엎는다’ 였다. 아선이 귀족 학생들 근처의 장테이블을 호쾌하게 한 방에 뒤엎자 우당탕하는 큰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비롯한 물건들이 쏟아졌다. 귀족 학생들이 화들짝 놀랐지만 아선은 태연하게 서서 그들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땅바닥에 밥그릇 놓고 주저앉아서 먹자며? 듣고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일단 니네들 먼저 앉을까?”
“어디서 감히…!”
귀족 학생이 발끈해서 아선에게 언성을 높이려 했으나 다른 귀족 학생이 그녀를 제지했다. 다른 동료들을 제지한 그 귀족 학생이 차분하게, 그러나 깔보는 표정으로 아선을 봤다. 아선 역시 제국의 귀족 영애를 상대로 꿀리지 않고 도발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로제. 요즘 친구들이 나가리 되더니 많이 심심한가 봐?”
"여전히 천박한 본성이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걸 억누르지를 못하는구나. 이래서야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지?"
"없어. 아무것도. 그러니 생각 없이 막 건드리면 물린다는 것 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 점에서는 나같은 짐승들이 너희보다 한 수 위가 아닐까? 안 물려보고 자라서 모르겠다면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스륵!! 아선의 옷소매 어딘가에서 지도원들의 소지품 검사에도 발견되지 않았던 암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선의 손에서 날붙이가 갑자기 나타나자 귀족 학생들은 뒤로 주춤 물러날 정도로 놀랐지만, 로제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칼끝을 코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벌떡! 동방 쪽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선 가까이로 합류했다. 무수한 동방인 패거리가 몰려왔지만 로제는 주눅들지 않고 여전히 고압적인 자태를 유지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설국 쪽 무리가 재미난 구경을 하는듯이 지켜보면서 휘파람까지 보냈다.
에반은 여전히 빵을 먹으며 두 학생 사이의 과열 양상을지켜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옆에 앉아서 홍시 하나 가지고 재잘대던 쾌활한 아이가 지금은 저렇게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고 칼부림을 하고 있다.
'설국 애들도, 동쪽 애들도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대체로 온순한 편이지. 하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 순간 밑도 끝도 없이 공격적이게 변한다. 특히 동쪽 애들은 명분만 정당하다 싶으면 수단을 가리질 않아.'
뻑뻑한 빵을 삼킨 에반은 매점에서 구매한 우유를 느긋하게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아선의 칼을 눈앞에 둔 로제 쪽을 봤다. 아선이 진짜로 찌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찔러봤자 받아칠 자신이 있는 건지 '할 테면 해 봐라' 라는 기고만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름값 못하는 쭉정이 녀석은 아니었네. 저런 부류의 제국인은 공사 불문하고 상대하기 쉽지 않지.'
"기사나 공무원의 자식들이 같은 교복을 입었다고 주제를 잊고 우리와 맞먹으려 드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남부 지역이나 동방에서 온 불순물들마저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구나. 유리아 릴리스 그 장사꾼 계집이 학생회장이 된 이후로 학원의 기강이 엉망이 됐어."
"알 바야? 우린 그냥 구내식당에서 우리끼리 있던 거일 뿐이야. 너희 제국인이 오건 말건 신경 안 써. 쓸데없이 입 놀리지 않고 닥치고 자기 볼일만 본다면 말이야."
"너희가 있을 곳은 여기에 없어. 구내식당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이 학원, 아니 이 제국의 땅에 너희들이 있을 곳은 없다고. 두고 봐, 기회가 찾아온다면 너희 불순물들을 이 교정에서 싹 치워버릴 테니까."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내가 딱 적당한 기회를 만들어줄께."
칼을 쥔 아선의 손이 움직였고 로제 역시 움직임이려 했다. 양쪽 사이의 긴장감이 극에 달하고 결국 충동적으로 폭발하려던 그 순간
텁! 에반이 아선과 로제 사이에 딱 끼어들었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아선의 칼날을 붙잡았고, 달려들던 로제를 미지의 힘으로 살짝 밀쳐내 물러나게 했다. 일기당천이라도 할 기세던 로제는 에반이 끼어들어 앞을 막아서자 몇 발짝 물러서고 거리를 뒀다.
한편 아선이 낑낑댔지만 칼날을 꽉 쥔 에반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반이 아선에게 짧게 한 마디 했다.
"놔."
아선이 칼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에반은 교칙에 따라 아선의 칼을 압수했다. 그럼에도 아선은 에반이 찾아오자 우군의 참전인 줄 알고 신난 기색이었다. 그러나 아선을 기다리고 있던 건
딱콩
"아윽?!!"
이마에 딱 하고 울리는 밤주먹 꿀밤이었다. 아선은 얼얼하게 울리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는 '어째서?!' 같은 얼굴로 에반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반은 아선이 뒤엎은 장테이블과 쏟아진 물건들을 가리켰다.
"니가 난장판 쳐놨으니 니가 책임지고 다 치워라."
"그, 그치만! 저것들이 먼저 시비 걸었는데..."
"그럼 내가 치울까? 현장에 있으면서도 좀 지켜보다가 이제서야 중재를 했으니 나에게도 책임은 있으니."
"아, 아 제가 할께요. 으으...."
아선을 지도한 에반은 이번에는 로제 쪽을 봤다. 로제는 흠칫 하더니 에반의 시선을 피하며 도도한 자세로 섰다. 들을 생각이 있어보이지는 않지만 에반은 로제에게도 한 마디 했다.
"넌 임마 말썽 좀 그만 일으키고 다녀라. 자꾸 보다가 정 들겠어."
"....."
로제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가 에반이 더 할 말이 없어보이자 그대로 돌아서 구내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로제 뒤에서 눈치를 살피던 귀족 학생들도 로제의 뒤를 졸졸 따라 나갔다.
상황을 마무리 한 에반이 자리로 돌아와보니 저만치에서 아선이 동료들의 도움을 사양하고 혼자 낑낑대며 장테이블을 수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엎을 때는 제국 애들 면전에 멕여줄 생각에 호랑이 기운이 솟았지만, 치울 때는 시무룩하게 힘이 빠진 모양이다.
에반은 남은 우유를 마저 비웠다.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어 보려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재수가 없는 건지, 마침 다행인 건지 구분이 잘 안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