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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7) (12/88)



〈 12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7)

낡아빠진 숙소에서 썩고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화창한 어느 날, 에반이 오프타임 동안 꿀같은 낮잠을 마다하고 찾아온 곳은 '누르워'라는 이름을 가진 번화한 상점가였다. 이곳은 루나칼립스와 오르토스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입지적 특성과 더불어 학원에서 멀리 떨어진 라쿠이르 시내 중심에 버금가는 경제 중심지라는 점 때문에 두 학원의 학생들이 모임이나 식사 자리를 갖기 위하여 찾아오지만, 지금은 아직 방과후가 아니라 비교적 한산했다.

"이야. 상점가 이름이 누르워(Nurwhar)라 그런지 사탕 가게가 엄청 많네. 어디 괜찮은 데 있나 볼까나?"


누르워라는 지명은 단맛이라는 뜻을 가진 아민어 누르위아(nuruia)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기에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사탕 가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학생들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상점가인 만큼 전통 사탕이 아니라 신세대 스타일의 단과자를 취급하는 가게도 많았다. 하지만 에반은 의외로 미식가적인 안목이 있었기에 그 많은 가게들 중에서 그의 눈에 들어올 만큼 훌륭한 가게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부잣집 아가씨, 도련님들 치고는 무늬만 그럴싸한 싸구려랑 진짜배기를 구분하는 눈썰미가 전혀 없잖아. 이런 근본 모를 물건을 아민 전통 사탕이라고 우기는 가게가 유명 순위권에  정도라니."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리는 에반은 대로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골목에 이르렀다. 여유롭게 골목을 거닐던 그의 눈에 한 과자가게가 들어왔다.


"천설당(天雪堂)?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이름인데? 어디 볼까?"


가게의 외견과 인테리어는 아그루스 제국과 동방 세계의 중간계에 위치한 설국의 문화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렇기에 아그루스 토박이 학생들에게는 낯설고도 이국적인 인상을, 머나먼 동방 세계에서 온 유학생들에게는 익숙한 향수를 남겨줄 수 있는 가게였다. 홀로 진열대 앞에  에반 플루토는 그 둘 중 어느 곳도 속하지 않았지만 그런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가게의 과자 진열대는 다른 가게와 사뭇 다른 구조로 되어있었다. 얼음이 녹지 않도록 찬 공기를 잡아주는 냉장 진열대와, 반대로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주는 보온 진열대로 이분되어 있다는 점이 이목을 끌었다.

에반이 대조를 이루는 두 진열대 안에 늘어서 있는 과자들을 찬찬히 감상했다. 그때 마침 인기척을 느꼈는지 덩치 좋은 근육질의 사내가 주방에서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여기는 빙과도 취급하는 모양이네."

"그렇습니다. 추운 지역이다 보니 얼음을 활용한 디저트 종류가 발달했죠. 반대로 몸을 덥히기 위한 따뜻한 디저트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고, 열악한 기후를 극복하기도 하는, 조화와 강인함의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닌 설국의 문화를 엿볼 수 있지요."


"멋지네. 여기 빛깔 좋은 녀석들은 다 한 번씩 먹어봐야겠어. 괜찮겠지?"

"얼마든지요. 자리에 앉으시죠. 금방 세팅해드리겠습니다."

에반이 테이블에 앉자 점장은 도자기 접시에 과자 몇 개를 담아왔다. 어여쁜 과자들이 다소곳하게 접시에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꽃이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과자는 처음 보네."

에반이 구슬을 숟가락으로 들어올리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구슬의 겉면은 유리처럼 맑고 깨끗했지만 안에는 새하얀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얼린 우유를 눈처럼 곱게 으깬 걸 뭉친 다음, 겉을 설탕옷 입혀서 살짝 코팅한 걸 액화질소에 급속냉동 시켜 만들었습니다. 눈꽃진주라고 하는데, 설국의 전통 과자 중 하나죠."

"전통 과자? 설마 액화질소도 전통 기법인 건가?"


"그렇진 않습니다만, 이곳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온화하다보니 제 고향의 혹한을 흉내 내려면 액화질소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죠."


"오호 그렇구나. 그냥 빙결마법을 쓰면 안 되나?"

"작위적이고도 정성이 결여된 마법으로 과자를 만질 수는 없지요. 과자는 정성을 들인 만큼 맛으로 보답하기에 섬세한 손길을 필요로 하니까요."


"어라? 그거 전에 정원 쓸다가 엘리아한테 들어본 대사인데?"


나같은 아웃사이더 놈은 모르는 모종의 유행어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반은 구슬을 입안에 넣었다.


톡! 종이장처럼 얇은 두께의 얼음코팅은 혀의 뜨거운 온도와 닿자마자 깨져버렸다. 그러자 코팅 안에 있던 눈꽃우유들이 입안에 퍼지더니 눈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허무할 정도로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뒤에는 부드러운 단맛과, 우유의 신선한 끝맛이 아른아른 입속을 맴돌았다.


"허 세상에."

"마음에 드셨습니까?"

"방금 먹은 이 구슬, 선물용으로 하나 포장해줘."


구슬만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에반의 지갑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번 별천지를 맛본 에반은 다른 과자들도 차례대로 먹어보았다.

"미쳤다. 말이 안 나오네. 진짜 이건 또라이 아닌가? 말이  되잖아.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정신 나갔어. 정녕 이게 사람이 만든 거라고? 내가 봤을 때 여기 주인장은 사람 새끼가 아니야. 과자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몬스터 새끼인 게 틀림없어."


"허허허. 이렇게 격한 찬사를 받고도 안 기쁜  또 처음이군요."


그렇게 단맛이 강한 과자들을 한 접시 순식간에 비웠는데도 전혀 물리지가 않는다. 다시금 솜씨에 감탄한 에반이 점장에게 물어보았다.


"주인장, 여기 로쿰도 팔아? 예쁘게 포장한  선물용으로 하나 필요한데."


"로쿰이라. 안목이 있으시군요. 물론 있지요."

점장은 리본이 달린 예쁜 유리병에 포장된 로쿰을 하나 꺼내왔다. 오색빛깔의 정육면체 사탕들이 하얀 설탕가루를 입고 있어서  눈으로만 봐도 달짝지근했다.


"종류별로 있습니다. 견과류 들어간 것도 있고, 장미꽃 향이 강한 버전도 있죠. 말씀만 해주세요."

"제일 단 걸로 부탁해."

"로쿰이라는 사탕 자체가 상당히 단맛이 강합니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단 걸로. 진짜 말도 안 나오게, 터무니없게, 혀가 당황해야 하는 건지 황당해야 하는 건지 분간 못할 정도로, 충치균 조차도 이거는 도가 지나쳤다 하고 단식 들어갈 정도로 달게 해줄 수는 없을까?"

"혹시 췌장이 두개 달려있는 몬스터 새끼십니까? 인슐린이 그렇게 남아돌아요?"


"거 인생사 씁쓸하면 좀 달달한 거 찾을 수도 있지. 몬스터 새끼는 좀 단어선택이 너무하는 거 아니냐?"


"좀 달달한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무튼 찾으시는 물건은 여기 포장해드리겠습니다."

"있다고? 한 번 보여줘봐."


점장이 꺼낸 로쿰은 제일 처음 보여줬던 것과 별반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비주얼은 평범한 블럭형 오색 로쿰이였다.

"생김새는 그냥 평범한ㄷ....."

에반이 유리병의 뚜껑을 열자 마치 오랜 봉인이 풀린 듯이 난폭한 단내가 빠져나와 날뛰기 시작했다. 에반은 황급히 뚜껑을 덮었다.


"주,주인장... 이건 대체?!"

"한때 젊은 오기에 단맛의 극한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죠. 그러나 단맛의 극한에 닿기도 전에 혈당치의 한계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병원 신세를 잠깐 졌었죠. 제 흑역사나 다를 바 없어서 숨겨둔 이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날이 올 줄이야."


"거 봐. 당신 과자 만드는 몬스터 새끼 맞잖아. 사람 새끼면 사탕 만들어 먹다 병원 실려가겠어?"

"한대 때려드리고 싶지만 영수증 봐서 참겠습니다."


"음... 그러고보니 여기 따뜻한 종류의 디저트도 있다고 했었지? 혹시 빵도 파나?"

"비단 설국식 디저트 뿐만이 아니라 빵이나 케이크 종류는 전부 취급합니다. 재료만 있다면 주문이 들어오는대로 준비해 드리죠."

"보니까 화덕이 하나 있던데.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로 큼직한 거로 말이야."


"네, 있죠. 화끈하게 예열을 해뒀는데 식기 전에 한 번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오늘은 안 되겠네.  나면 갈아입을 옷이 없어."

"아쉽군요."


"아무튼 그 화덕에 포카치아 하나 구울  있을까 해서."

"포카치아 말입니까? 물론 되죠. 큼지막하게  덩이 준비해 드릴까요?"


"올리브 듬뿍 넣어서 부탁해."


점장은 에반의 주문을 받자마자 잘 휴지된 반죽을 눌러 펴서 구멍을 송송 낸  올리브를 넣었다.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여러 허브와 함께 화덕에 밀어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식욕을 돋구는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잠시 뒤 점장이 화덕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포카치아를 꺼내 종이상자에 포장했다. 계산을  에반은 포장된 과자들을 챙겼다.

"애들 반응이 좋으면 다음에  온다. 아니지, 어차피  마음에는 들었으니까 애들 반응 상관 없이 또 쳐들어오겠네."

"네, 네. 돈만 낸다면 오는 손님을 싫어할 이유야 없죠. 그보다도 포카치아는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니 식기 전에 어서 썩 가시죠."

에반은 종이백을 챙겨서 골목을 빠져나왔다. 뚜껑을 닫았는데도 로쿰의 단내가 새어 나오는 건지, 아까 전에 맡았던 단내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 건지, 에반은 코끝에 사탕 냄새가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엘리아라지만 이런 걸 줘도 괜찮은 걸까? 건강을 생각해서 하루에 하나만 먹으라고 신신당부 해둬야겠다. 누르워의 한산한 거리를 거닐며 에반은 루나칼립스 학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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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다."

학원에 돌아온 에반은 곧바로 기숙사 사감실로 향했다. 대충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숙사감 엘리아와 사감보조 루밀리가 안에 있었다. 여전히 사감실은 들어오자마자 진한 커피 향이 반기는 곳이었다.


"잠깐! 당신 지금 뭐하시는 거죠?"

루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반을 막아섰지만, 에반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루밀리 옆을 지나쳤다.

"뭐가?"

"노크를 하고나서는 들어오라는 말이 있기 전까지 잠시 기다려야지 바로 들어오면 안 되죠. 아주 기본적인 예절이잖아요."


"사감님, 단 거 좀 사왔어. 좋은 가게를  곳 찾았거든. 커피랑 곁들여서 먹어봐."


"무시하지 마세요!"

"자, 네꺼도 사왔어."


"피, 필요 없거든요?"


"필요 없다고? 진짜로? 올리브 듬뿍 들어간 포카치아인데?"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루밀리가 올리브 포카치아라는 말에 움찔 반응했다.


"진짜로 필요 없어? 이스티안 허브 솔솔 뿌려서 설국식 화덕에 단숨에 구운 거라 속이 아주 그냥 보드라우면서도 쫄깃한 게 탄력이 살아있는데? 사장님한테 올리브 많이 넣어달라 했는데? 진짜로 필요 없어?"


"으으윽....!"


"따뜻할  먹어야 맛있으니까 식지 말라고 서둘러서 왔는데. 진짜로 필요 없어?"


휙! 루밀리는 에반의 손에서 포카치아가 든 종이백을 낚아챘다.

"받을께요. 제 생각 해서 사오신 건데 성의를 무시하면 실례잖아요? 저기, 그... 고마워요."


루밀리는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에반은 피식 웃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엘리아는 알록달록한 큐브 로쿰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집어들고 이런 사탕은 처음 본다는 반응을 하고 있었다.


"예쁘게 생겼네요."

"그거 엄청 달다. 보통 단 게 아니니까 건강 생각해서라도 하루에 하나씩만 먹으라고."


"으음...."


엘리아가 유리병을 빤히 들여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언젠가 하루가 유독 쓴맛이 나는 날이 오면 하나 꺼내서 입에 물겠습니다. 감사히 받을께요."


"자, 그럼  것도 먹었으니 머리가 좀 돌아갈 때 일 얘기를 해볼까?"

"일 얘기요?"

"어젯밤의 그 로제라는 녀석 말이야."

에반은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포카치아를 맛보는 루밀리를 내버려두고 엘리아와 둘이서 얘기를 나눴다.

"로제 양 말입니까... 사실 그녀가 문제 행동을 일으킨 게 처음은 아니지만 사감실에 찾아와서 징계를 받겠다고 수긍한 건 처음 있는 일이네요."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어?"


"벌점 부여 같은 형식적인 경고 이외에는 별다른 제재를 가할  없었죠. 기숙사에 침입했던 그 오르토스 학생들이 그녀가 불러들여서 왔다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루밀리 양을 폭행한 건 밖에는 다른 명목이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사생간의 불화 및 싸움은 징계 수위가 높지 않고요."

"경징계로 끝냈다 이건가."

"그래도 로제 양이 당신을 간단하게 휘두를  없다고 판단한 점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학생이 교직원들을 제멋대로 구워삶으려 드는데 교장이야 그렇다쳐도 시리우스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나?"


"시리우스 이사장 님은 어지간해선 직접적인 중재를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빚은 이 학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관망하십니다. 마치 샬레 위에 배양한 곰팡이나 세포를 관찰하듯이 말이죠."

"그래도 일단은 학원에 있는 동안에는 학원의 규칙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로제 같은 녀석들이 저렇게 활개치게 내버려두면 교육기관으로써의 질서가 엉망이  텐데도?"


"제가 우려하는 상황이 바로 그겁니다. 다만... 시리우스 이사장 님은 지키라고 교칙을  정하신  아닙니다. 그저 질서 앞에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지 관찰하기 위함입니다."

"돌겠네. 관음증 걸린 대마법사의 샌드박스라니. 참 재밌는 곳에 파견 와버렸어."


에반은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무심결에 엘리아가 타놓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입에 들어오는 순간 무자비한 단맛이 혀를 덮쳤다. 정신이 번쩍  에반이 몸을 비틀며 커피잔을 내려놨다.

"으으윽?! 아앗... 어흠!! 크흠!!"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커피 덕분에 잠이 번쩍 깼어. 아무튼...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저 말입니까? 제가 이 학원 내에서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습니다. 전 그저 기숙사감일 뿐이니까요."


"기숙사감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 학원의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에서 생활하잖아. 특히나 저 멀리 도시에서 내려온 귀족 애들은 거의 전원이 기숙사에 있다고 봐야지."


"그렇죠."


"그렇다는 건 그 많은 상류층 아가씨들이 졸업할 때까지 여기서 씻고 자고 한다는 거잖아? 수발 들어줄 시종도 들일 수 없는 이곳 기숙사에서. 성격  맞고, 계급도 다르고, 속한 가문의 파벌도 다른 룸메이트들이랑 몸부대끼며 공동 생활."


"그렇습니다."

"케어 제대로 못하면 개판되는 거 한 순간이겠네. 그치?"


"맞습니다."

"아..... 집은 없지만 집에 가고 싶어."

에반은 땡겨오는 뒷목을 주무르고 다시 엘리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알겠지? 이번 로제 건은 단순히 고집 센 영애가 말썽 일으킨 정도의 문제가 아니야. 이곳 기숙사 내에서 '질서'가 이길지 '권력'이 이길지가 달렸다고. 지금까지 불편한 점, 마음에  드는 점, 아니꼬운 점 전부 교칙이라는 질서 때문에 참아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 봐."


에반이 심각하게 말했지만 엘리아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담담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잔에 든 커피를 음미할 뿐이었다. 에반은 그런 엘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니 아까 했던 질문이지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홀짝. 커피를 음미한 엘리아가 잔을 살짝 내려놨다.

"저는 분명 눈이 좋은 편인데 그럼에도 학생들의 계급이나 출신이나 신분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모두들 그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제겐 보이지 않더라고요. 기사의 아이와 귀족의 아이가 구별이 되지 않아요. 상인의 아이와 관료의 아이가 구별이 되지 않아요. 아이들이 얼마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게 보이지 않아요."


"부러운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군."


"그러니 저는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어른스러운 자세로 대해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 느끼지만... 어른스럽다는 게 뭘까요? 권력도, 파벌도, 갈등도, 지배도 전부 어른들이 만든 거예요.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그대로 따라할 뿐이죠. 그런 아이들에게 어른스럽게 대해준다는 게 뭔지 이젠 혼란스럽네요."


엘리아는 벌점 장부에 스크랩 된 로제의 프로필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에반이 그 벌점 장부를 집어들었다. 벌점 장부의 맨앞 페이지에는 엘리아가 작성한 교칙 준수 강령이 찍혀있었다.


"간단해. 여긴 너만 어른이야.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도 네가 믿는대로 해봐. 그게 어른스러운 거니까. 내가 사감대리로 이곳에 있는 동안 애들 지켜보면서 널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우리 회사 캐치프라이즈가 뭔지 이제는 알지?"

엘리아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은 엄지를 치켜세워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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