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6)
마법진을 통해 루나칼립스 기숙사의 휴게실에 침입한 건 오르토스의 남학생 무리였다. 좌표 전이에 익숙하지 않은 몇몇 남학생이 두통을 호소하며 투덜댔다.
"으윽...!! 머리가 울리잖아! 로넨 이 자식, 지가 쓸 포탈 아니라고 성의 없기는!"
"역시 포탈 승차감은 에일 그 애송이가 깔아주는 게 제일 깔끔하고 안정적인데... 자기 포탈을 이런 데에 쓰려고 하는 걸 알면 분명 일이 귀찮아지니까 어쩔 수 없지."
"좀만 더 꼬셔보자니깐. 순진해 빠진 꼬맹이라 잘 속여서 구슬리면 됐을 텐데."
"공간 마법에 일가견 있는 애들을 '케어' 하는데에 뒷돈이 어디 한 두 푼 드는 줄 알아? 학생회에 후원금 더 찔러넣어 줄 거 아니면 아가리 닫고 있어."
"그리 신경 쓸 게 많으면 포탈 말고 다른 뒷길 좀 알아보자니깐... 루나칼립스에도 말 좀 통하는 애들 알고 있다면서 매번 멀미나게 뭐냐고 이게?"
"칭얼대지 좀 마, 니가 내성이 딸리는 거다 나약한 놈아. 뭣하면 저기 쓰레기통에 고개 쳐박고 토하던가."
파츠츳! 남학생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마지막으로 포탈을 빠져나와 모습을 나타냈다.
"전부 족쳐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소란 피우라고 데려온 거 아니다. 누가 듣고 오기라도 하면 어쩔 생각이지?"
"죄, 죄송합니다. 그라우스 님."
"로제는?"
"아직입니다. 분명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이곳이 맞지만..."
"길 닦고 마중 나와 있어도 모자랄 판에 나를 이런 식으로 성의 없이 영접하다니."
남학생 무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또각또각. 얼마 안 지나서 여학생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사치스러워 보이는 사복 차림의 여학생 한 명이 남학생들에게 다가오며 피식 웃었다.
"다들 오셨군요. 그라우스 공 그리고 떨거지 여러분."
도도하면서도 차분한 카리스마가 우러나오는 목소리였다.
"로제. 내가 이렇게 직접 나서서 찾아와야겠나? 그것도 이런 늦은 밤에?"
"그렇게 졸리시면 낮에 찾아오시지. 저도 이러고 예정에 없는 야근하기는 싫은데 말이에요. 피부 상하면 책임져 주지도 않을 거면서."
"무, 무례하다! 감히 그라우스 님 앞에서....!"
"너흰 다 닥치고 있어."
"아... 네! 죄송합니다."
로제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조소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라우스에게 말했다.
"여전히 충견들 산책 시키면서 과시하는 걸 참 좋아하시네요, 그라우스 공. 그래서... 오르토스 학생회의 잘나가는 간부님께서 행차하신 용건이 무엇일까요?"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닐 테지. 능글맞은 태도는 여전하구나."
그라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쪽 애들이 여기서 재미 좀 보려다가 전부 걸려서 징계 먹었지. 그 바람에 너희 쪽 애들과 거래를 하러 숨어들었던 우리 학생회의 임원들도 말려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실까? 이런 식으로 우리를 엿 먹일 생각인가?"
"으름장 놓지 마요, 안 그래도 우리 역시 짜증나는 참이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지도원이 사감대리를 맡으면서 한바탕 쓸고 지나갔어요. 아마 엘리아 그 고지식한 여자가 수를 쓴 거겠죠."
"엘리아? 일개 기숙사감이 신규 지도원의 인사 배치에 관여한다고? 적당히 입김 불어넣어서 기숙사 말고 다른 외진 곳에 박아뒀으면 됐잖아."
"우리가 설마 그 생각을 못 했겠어요? 슬프게도, 우리는 더 이상 학생회에 직접 관여하지 못해요. 그리고 지금의 루나칼립스 학생회는 당신들 오르토스 학생회와는 노선이 완전히 다르죠. 이게 다 유리아 릴리스가 학생회장이 되면서 학생회에 따분한 안경쟁이들을 잔뜩 앉혀놔서 아니겠어요?"
"그 신규 지도원이라는 놈은 어디 출신인데?"
"No Problem Company. 당신도 분명 익히 들어봤겠죠. 시리우스 이사장이 최근에 고용했어요. 우리 쪽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라고요. 물론 안 좋은 의미로."
"그냥 NPC잖아. 인력업체에서 보낸 파견직이라고. 루나칼립스는 족보도 근본도 없는 지도원 하나조차 똑바로 조련하지 못하는 건가?"
"우리도 예전 같았으면 이러지 않았거든요? 이미 코앞에 닥친 문제들만 해도 미간에 주름 생길 까봐 걱정인데, 이제는 어디서 굴러먹던 건지 모를 NPC가 지도원 명찰 달고 설치고 다닌다니."
"변명하면서 징징대는 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변명이라고요? 애초에 유리아 릴리스가 당선되지 못하도록 우릴 도왔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잖아요? 당신들이 리스크 짊어지기 싫어서 깔짝깔짝 간보는 사이에 결국 루나칼립스의 귀족들은 분산됐어요. 이번 기숙사 사태는 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고요. 자기들 발등에도 불이 튀니까 이제야 남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겠나요?"
"너희 루나칼립스에 목소리 큰 이물질들이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왜 우리를 탓 하지?"
"그 이물질들 통제할 엄두 안 나서 피해다니는 건 오르토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됐어, 시간 아까우니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해. 딱 일주일 시간을 줄 테니 그 NPC인지 뭔지 하는 지도원 새끼 확실하게 기강 잡아 놔. 다시는 나댈 생각 들지 못하도록 말이야."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줄래요? No Problem Company는 흔한 인력 파견 사무소가 아니에요. 제국이 면밀히 주시하는 '일그러진 별' 로 지정된 곳이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는 하나요?"
"알겠으니까 우는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너희끼리 힘이 벅차면 내 권한 안에서 애들 좀 보내줄 테니까 그 버르장머리 없는 NPC인지 뭔지 목줄 똑바로 채워 놔."
"아까부터 계속 거슬린 건데... 저한테 명령하는 건가요?"
"로제, 알 만큼 아는 사람이 어설퍼 보이게 왜 이래? 내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너한테도 좋다고. 아니면.... 이스민 님을 화나게 해도 괜찮겠어?"
"......."
"잘 하자고. 응? 알지?"
터벅터벅. 그때 들려온 발소리에 로제와 그라우스를 비롯한 남학생들이 대화를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봤다. 민트색 머릿결이 인상적인 여학생 하나가 당돌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감보조 루밀리 아이텔소드였다. 그라우스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루밀리를 보며 말했다.
"넌 뭐야?"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어째서 남학생이 루나칼립스의 기숙사에 발을 들인 것이죠?"
루밀리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힐난했지만 무단 출입자인 그라우스를 비롯한 남학생들은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루밀리가 매섭게 째려보자 그라우스도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이 밤중에도 교복 차림이라니. 갈아입을 잠옷 한 벌 없나? 뭐 하러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일에 신경 끄고 가서 잠이나 자."
"교칙을 어기고 이성의 사생활 공간에 들어와 있으면서 뻔뻔하군요. 저는 사감보조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학원의 규칙에 따라 당신들을 선도하는 것이 저의 일이겠죠."
그라우스가 부리고 다니는 남학생 무리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루밀리에게 다가갔는데 로제가 막아서며 그들을 제지했다. 남학생 무리를 몇 발짝 물러나게 한 로제는 루밀리의 앞에 섰다. 로제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루밀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로제 양, 저 불량한 남학생들과 무슨 용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바로 숙소로 돌아가주세요. 그리고 저들의 경위 진술에 따라 로제 양도 사감실로 호출되어 경위서를 작성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계셔주...."
짝!!
"......어어?"
짝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루밀리가 벙찐 표정으로 로제를 봤다. 얼마 안 되어서 한쪽 뺨에 얼얼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루밀리는 믿을 수 없었던 지금 이 상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로, 로제.... 양...?"
"로제 양? 하...! 반대쪽 낯짝도 맞아야 정신을 차릴 생각인가?"
로제는 루밀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기사 집안의 계집년이 어디서 주제 파악 못 하고 날 뛰는 것이지? 집 지키는 개면 개 답게 땅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보이기나 해라."
로제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루밀리를 매섭게 질타했다. 로제의 목소리에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변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얼리고 듣는 이의 간이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위압감이 깃들어있었다. 아직 미성년자라고 해도 과연 귀족에게는 숨겨지지도 않고 흉내 낼 수도 없는 태생적인 위엄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루밀리는 이대로 꼬리 내리고 물러날 수 없었다.
"기사가 귀족을 섬겨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또 그것이 제 본분이지만...."
"아니지. 기사 집안의 계집이라고 해도 정식으로 임관식조차 치르지 않았으니 엄밀히 말하면 넌 기사도 아니야. 평민 찌끄레기와 다를 게 없어."
"지금의 저와 로제 양은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학생 신분이고, 공동 생활하는 사생이에요. 그것이 루나칼립스와 오르토스 모두에 적용되는 교칙..."
"교칙?"
로제가 고압적인 눈빛으로 루밀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몹시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너의 말대로라면 이 학원, 이 기숙사에 같이 있는 동안에는 흐르는 피가 모두 똑같은 피로 바뀌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건...!"
"이 학원에서 정한 규칙과 제국이 정한 질서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모양이구나. 이스티아에서 나고 자란 남부 지역 원숭이라 미개한 건 어쩔 수 없나?"
"...!"
로제의 인종차별적인 모욕에 루밀리는 감정이 울컥 북받쳐 올랐지만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저만치 서서 구경하고 있던 그라우스가 로제를 불렀다.
"어이 로제,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그쯤 해두는 게 어때? 아랫것들 교육은 아랫것들에게 맡겨야지, 네가 직접 두 팔 걷어서야 되겠어?"
"그 말이 맞군요. 그러면 그라우스 공, 개들 좀 풀어보시겠어요?"
로제가 싱긋 웃자 그라우스가 루밀리를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한 번 했다. 그라우스가 거느리고 온 남학생들이 기다렸다는듯이 루밀리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그라우스의 가문을 후견 세력으로 둔 기사 가문들에 속해 있었다.
"당신들... 이런 게 당신들이 배운 기사도입니까?"
루밀리가 같은 기사 계급인 학생들에게 꾸짖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다.
"적어도 기사도는 상대를 이기고 나서나 찾으라는 것쯤이야 배웠지."
"절 위협하셔도 징계 사항만 늘어날 뿐입...."
스윽!! 챙!! 검집에서 검을 뽑을 때의 살벌한 쇳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남학생들은 차고 있던 진검을 뽑아서 루밀리를 에워쌌다. 이런 짓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루밀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따졌다.
"검...?! 아무리 기사 계급이라 해도 교내에서 살상력을 가진 무기의 소지는 교칙 위반... 아니죠. 애초에 교칙을 지킬 생각이 있었다면 이곳에 있지도 않았겠죠."
검을 들고 루밀리를 에워싼 학생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포위망을 좁혔다.
"너도 꼴에 기사 집안 딸이잖아? 뭐 없어? 칼 한 자루도 없어?"
"있겠냐? 교칙인지 뭔지 지킨다고 다 반납했겠지."
"야 그럼 교칙 때문에 칼도 안 써, 교칙 때문에 허락 받기 전에는 마법도 안 써. 그냥 맨몸이잖아?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당돌하게 쳐들어왔대?"
"몰라. 우리가 곱게 사감실로 불려가서 반성문이라도 쓸 줄 알았나 본데?"
루밀리를 빈틈없이 둘러싼 학생들은 그녀에게 검을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
"아픈 꼴 당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라우스 님께 무릎 꿇고 대가리 박고 죄송하다고 빌어. 그러면 구두 핥는 정도로 봐주실지도 모르지."
"불의에 대고 사죄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제 가문의 이름이 걸려있는 이상 저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그거 좋네. 처음에는 자존심을 좀 부려줘야 떨구는 맛이 있지."
학생 하나가 루밀리에게 손을 뻗으려 하자 루밀리가 매몰차게 뿌리쳤다. 찰싹! 루밀리가 손길을 뿌리치자 남학생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루밀리를 노려본 남학생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간 그 순간
"거기 니들."
끼이익! 누군가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루밀리를 비롯해 다른 학생들과 그라우스, 로제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문 쪽으로 집중됐다. 그곳에는 에반 플루토가 벌점 장부를 들고 서있었다.
"전부 족쳐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자는 애들 깨울 생각이야? 이렇게 소란 피울 거면 그냥 초인종 누르고 들어오지 멀미 나게 포탈은 뭐 하러 열었어?"
"그라우스 님. 그 지도원입니다."
학생들이 말하자 그라우스가 딱 한 마디로 명령했다.
"잡아와."
"네."
루밀리를 에워싸고 있던 학생들의 표적이 에반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패거리를 지어 에반 앞으로 몰려갔다. 검을 들고 에반을 위협하는 그들의 모습은 도저히 지도원을 대하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도원 형씨, 여기 온지 얼마 안 돼서 이 학원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나 본데, 처신 똑바로 안 하면 앞으로 고달프다고. 저분이 어느 집안의 후계자이신지 알기나 해?"
학생들이 그라우스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에반에게 엄포를 늘어놨다. 에반은 쥐뿔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벌점 장부를 내밀었다.
"이름이나 써. 다 쓰고 옆 사람 돌려."
대놓고 무시당한 그 학생은 에반을 위협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려고 들어올렸다. 그러나 에반은 표정 하나 까딱 안 하고 로우킥을 날려 방어가 허술한 다리를 걷어찼다. 보고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발차기였는데, 가벼운 동작에 비해 힘이 꽉 차게 실려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 쓰러졌고, 그 바람에 쥐고 있던 검을 놓쳤다.
챙! 휘이익! 에반은 그가 떨어뜨린 검을 발로 밟은 뒤 가볍게 톡 찼다. 검이 빙글빙글 돌며 가다가 루밀리의 발끝 앞에서 멈췄다. 루밀리는 검과 에반을 번갈아 쳐다봤다. 에반이 루밀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뭐해? 주워서 주인에게 돌려줘야지."
"네...?"
"네가 그걸 좀 '거칠게' 돌려주더라도 넌 어디 까지나 주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줄 겸 선도하는 것일 뿐이잖아? 안 그래?"
에반의 의도를 파악한 루밀리가 검을 주워들었다. 검의 무게를 느끼며 자세를 잡고 선 순간 루밀리의 눈빛이 변했다. 날이 벼려진 쇠붙이를 들고 있을 뿐인데 루밀리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아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의연한 자태로 몸 동작을 갈무리했다.
"뭐 하는 거야? 한 명 상대로 쫄지 마. 어차피 서열 순위권에 들지도 못한 언랭크잖아."
검을 휘두를 태세를 갖추고 루밀리와 대치한 남학생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에반은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듯이 멀찍이 물러서며 남학생들에게 말했다.
"서열 순위? 보나마나 살상 무기의 사용이 금지된 모의전 결투로 정한 순위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니들 이스티안이 진검 휘두르는 거 한 번도 못 봤지? 현역 기사들도 얼마 못 해본 좋은 경험 시켜주는 거니까 가슴에 잘 새겨두라고."
에반은 씨익 웃으며 루밀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검을 쥐고 각오를 가다듬는 루밀리의 등에 대고 한 마디 했다.
"살살 해. 알지?"
에반의 미소를 본 루밀리는 곧장 자신을 막아선 학생 패거리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리고는 검을 앞으로 향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적인 악감정은 없습니다. 딱 받았던 모멸 만큼만 돌려드리겠습니다."
팟! 루밀리가 달려들자 학생 패거리도 일제히 루밀리를 향해 돌진했다. 가장 선봉에 서서 기세 좋게 달려든 학생 하나가 검을 휘두르자 막아내기 위해 루밀리가 휘두른 검이 비취색으로 빛나는 궤적을 남겼다.
팅!! 두 자루의 검이 합을 맞추는 순간 압도적인 힘 차이에 학생이 뒤로 밀려났다. 제대로 반격할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빠르게 휘둘러진 루밀리의 검이 횡을 가르자 깡! 하는 금속음과 함께 붕 떠오른 학생이 뒤로 자빠졌다.
"제길! 대체 어떻게 돼먹은 힘이야?!"
"빠, 빠르다!"
"정신 똑바로 차려! 온다!"
"끄악?!!"
루밀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비취색 섬광이 궤적을 그리며 그녀를 막아서는 모든 보잘것 없는 방어태세를 무너뜨렸다. 루밀리가 쥐고 있는 것은 그냥 평범한 검 한 자루인데, 그것도 자신의 손에 익은 물건이 아니라 남의 것을 주워서 쓰고 있는 것인데, 그녀의 손에서 휘둘릴 때 마다 마치 위협적인 힘이 깃든 아티팩트 마냥 비범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으어억!!"
풀썩!! 마지막 학생 하나도 루밀리의 공세에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맥 없이 쓰러졌다. 루밀리는 처음 자신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손찌검을 하려 했던 그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검을 든 루밀리가 다가오자 그 학생은 완전히 위세를 잃고 하얗게 질려서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뒤로 꿈틀꿈틀 물러났다.
"오, 오지마!!"
팍!! 루밀리는 애처롭게 떨고 있는 그의 다리 사이의 바닥에 검을 힘껏 꽂았다.
"당신의 검,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이게!!!"
그는 루밀리가 뒤돌아서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땅에 꽂힌 자신의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그가 자신의 검을 어떻게든 뽑으려고 끙끙거렸지만 아무리 힘을 주고 체중을 실어서 당겨봐도 검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광경을 본 그라우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패거리를 불렀다.
"머저리 새끼들. 지도원은 고사하고 계집애 하나에게 단체로 놀아나다니."
"죄, 죄송합니다, 그라우스 님!"
그라우스는 자신이 들어왔던 벽에 다시 포탈을 열었다.
"철수한다. 애초에 오늘 당장 조우하는 건 예정에 없었으니 준비가 부족했다고 치지."
그라우스가 포탈을 타고 모습을 감추자 그의 패거리들도 허둥지둥 뒤따라 도망쳤다. 루밀리가 뒤쫓으려 했지만 에반이 제지했다.
"가게 내버려 둬."
"어째서죠? 저들은 교칙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에 응당한 징계를 받아야 해요."
"나도 알아. 힘으로 다 잡아서 끌고 갈 수도 있긴 하지만...."
찡긋. 에반이 웃으며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너무 소란스러워지면 단잠 자는 애들이 깨잖아?"
"......"
루밀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사감대리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게... 도망갈 곳 없는 녀석이 하나 있잖아?"
에반이 혼자 남겨진 로제를 보며 말했다. 로제는 닫혀서 사라져가는 포탈을 분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그라우스 이 추잡하고 비열한 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였겠지."
로제는 에반과 루밀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고압적이고 독기가 서린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반성하는 태도 같은 건 기대를 접어두는 게 좋을 듯했다. 에반은 루밀리를 뒤로 물러서게 했다.
"너 귀족을 함부로 상대 했다가는 이래저래 골치 아파지지? 여긴 나한테 맡겨둬."
에반은 루밀리를 뒤로 하고 나서서 로제와 마주 섰다.
"어떡할래? 난 정말로 족보도 근본도 없는 놈이라 너 같은 귀족을 무서워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정 분하면 내 뺨도 한 대 때려 볼래?"
"그러고 싶을 만큼 분하지만 여기서는 순순히 꼬리를 내리도록 할께. 역시 시리우스 이사장이 평범한 지도원을 모집하려고 NPC 파견 계약을 맺었을 리가 없겠지."
"예상은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라서 좀 시시한데. 조금은 오기 부리면서 날뛰어줘야 루밀리 녀석이 뺨 맞은 거 갚아줄 명분이 서는데."
"흥. 됐으니까 어서 날 사감실로 끌고 가. 너희의 방식대로 징계하라고. 망할 그라우스... 이 빚은 반드시 갚게 하겠어."
에반과 루밀리는 로제를 데리고 사감실로 이동했다. 잠시 뒤 사감실에서 몇 가지 절차를 마치고 엘리아에게 로제를 인계한 두 사람은 기숙사 로비 중앙홀로 나왔다. 루밀리는 어색한 듯 말없이 서서 쉼터에 앉아있는 에반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생했다. 맞은데는 좀 어때?"
"괜찮아요."
로제에게 맞았던 뺨은 살짝 부어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뺨의 붓기를 숨기듯이 가렸다.
"이 정도야 기사가 될 사람에게는 통증도 아니에요."
"뺨 말고."
"네?"
"마음은 좀 어떻냐고. 진정이 됐어?"
"....."
'이스티아에서 나고 자란 남부 지역 원숭이라 미개한 건 어쩔 수 없나?'
"그런 모욕 이젠 익숙해요. 출신은 바꿀 수도 없고, 바꿀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이겨내야 할 현실이에요."
"네가 참아야 할 이유도 없어."
"그래도 어쨌든 되갚아줬으니 됐어요. 그 기사의 수치인 놈들을 때려눕혔으니 충분히 후련해졌거든요.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이번 일로 귀족 학생들에게 꽤 밉보였을 텐데."
"난 여기 왔을 때부터 이미 밉보였어. 그것도 모두에게. 새삼스럽게 왜 이래?"
에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복도로 향했다.
"가서 잠이나 자. 순찰을 사감대리에게 맡기는 것 정도로 사감보조가 무용해지는 거 아니거든? 애초에 엘리아는 네가 쓸모가 있어야 예뻐하고 그럴 녀석이 아니야. 알잖아?"
".....네."
"거 꼬장꼬장하던 녀석이 풀 죽어 있으니까 되게 보기 힘드네. 난 간다."
"사감대리 님."
복도 쪽으로 가던 에반이 루밀리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
"고마워요."
루밀리가 옅게 미소지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뭐야? 너 좀 전에만 해도 날 사감대리로 인정할 수 없다느니, 여기 발도 못 들이게 하기 전에 똑바로 하라느니 하지 않았었냐? 그렇게 귀엽게 굴 줄도 알았네?"
"거기선 그냥 '별 말씀을' 한 마디 딱 해주고 가던 길 갔으면 됐잖아요. 왜 그렇게 멋없게 구셔요?"
"아 맞네. 다시 하자. '사감대리 님' 부분부터."
"싫어요."
"쳇! 잠이나 자러 가. 내일 오전수업에 침 질질 흘리면서 졸지 말고."
루밀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반의 뒤를 따라갔다. 로제에게 맞았던 곳의 통증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