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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5) (10/88)



〈 10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5)

아름다운 사람이 머무는 자리는 첫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기숙사감 엘리아가 사무를 보기 위해 머무르는 이곳 사감실이 그렇다. 정성껏 로스팅 된 원두, 연유와 각설탕, 화분에 핀 꽃, 만년필의 잉크. 엘리아의 흔적 하나하나가 남기는 향기는 사감실에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만든다.

덕분에 한껏 나른해져서 푹신한 소파에 드러누워있던 에반 플루토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에반은 엘리아의 책장 한 귀퉁이에서 기숙사 사생 벌점 장부를 꺼냈다.

"슬슬 또 점호하러 갈 시간이네."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자, 여기 오늘의 커피를 준비했어요."

엘리아가 에반에게 미리 준비해둔 보온병을 건넸다.

"부탁하신대로 연유의 양을 줄였습니다."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아무튼 고맙다고."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응?"

점호를 하러 나가려던 에반을 엘리아가 불러세웠다.

"오늘부터는 혼자 점호를 돌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와줄 사람이 있거든요."

"도와줄 사람이라고?"

똑똑똑, 사감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 사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너머에서 앙칼진 소녀 목소리가 엘리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엘리아가 들어오라고 부르자  학생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그 학생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하게 되는 곳은 단연 민트색 머릿결이였다. 북부 지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머리색인지라 신비롭고도 이국적인 첫인상을 자아냈다. 노려보듯 치켜 뜬 두 눈에서는 야무진 기백이 느껴졌고, 다른 학생들이 편한 사복을 입고 있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구김새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말끔한 교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예의 바르게 꾸벅 목례를 하고 들어오는 걸음걸이에서는 다른 귀족, 재벌 학생들과는 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사교 모임에 어울리는 우아함이 아니라, 잘 훈련된 제식과 같은 절제된 기품이었다.

"금일 취침 전 점호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엘리아 사감님, 그리고... 이반 씨."

"에반이다."

"아아. 에반 플라톤 씨."

"플루토다."

사감실에 들어온 그 학생은 에반인지 이반인지 관심 전혀 없다는 태도로 적당히 인사하고는 곧장 엘리아에게로 향했다.

"어서와요, 루밀리 양. 제 부탁을 들어줘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엘리아 사감님, 도움을 보탤 수 있어서 기쁩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세요. 전 사감보조니까요."

그녀는 엘리아 앞에 서자 조금 전까지의 박력이 마치 연기라도 됐던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온도차에 에반은 미묘한 괘씸함을 느꼈다.

"에반 씨, 소개할게요. 이쪽은 사감보조인 루밀리 아이텔소드 양입니다."

"아이텔소드...."

보조사감 루밀리는 다시 격식을 차려 에반에게 꾸벅 목례했다. 물론 엘리아 앞에서 보이던 해맑게 풀어진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루밀리 양, 말씀드렸듯이 오늘부터 사감대리인 에반 씨를 보조하여 점호를 할 겁니다. 모쪼록 무리는 하지 마시고 에반 씨의 지시를 잘 따라주세요. 아시겠죠?"

"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세요. 절대로 엘리아 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그럼 에반 씨, 루밀리 양과 함께 점호를 해주세요."

"그래, 그 잔의 커피가 식기 전에 전부 해치우고 온다."

에반은 루밀리를 데리고 사감실 밖으로 나갔다. 사감실 문이 닫히자 엘리아라는 연결고리가 없어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불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복도를 걷는 동안  마디도 안 하던 루밀리가 사감실에서 충분이 떨어진 로비로 나오자 에반을 가로막았다.

"뭐? 왜?"

"......"

쏘아보는듯한 눈빛으로 에반을 훑어본 루밀리가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카라가 반듯하지 못하고, 안의 셔츠가 삐져나와서 지저분해 보입니다. 단추도 채울 거면 채우고 말거면 마세요, 어정쩡하게 두지 마시고요. 단정한 옷차림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입니다. 이 정도면 제 기준으로 충분히 품위 유지 권고 사항입니다만, 아쉽게도 사감대리에게 벌점을 줄 권한이 제게 없군요."

루밀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에반의 복장을 다시금 점검했다.

"사생들의 바른 생활을 선도해야 할 사감대리가 정작 자신의 품위를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자격으로 사생들을 지도할까요? 당신은 말 그대로 엘리아 님의 대리인입니다. 엘리아 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점 명심하셔야 앞으로도  기숙사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무섭게 좀 굴지 마라. 어서 가자고."

에반이 이 깐깐한 소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라도 빨리 점호를 끝내러 가려 했는데 또 다시 루밀리가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또 왜?"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세요. 걷는 자세만 봐도 사람의 그릇이 보이는 법입니다. 당신이 걷는 자세는 너무 경박해요. 오늘 수업 시간에 교실에 들어왔다가 모두에게 지적을 듣고도 느끼신 게 없나요?"

"알겠으니까 이제 좀 가자. 이러다 날 새겠어."

"엘리아 님이 당신의 지시를 잘 따르라고 부탁하셨으니 일단은 당신의 말을 듣겠지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엘리아 님은 당신을 사감대리로 임명하셨어도, 저는 당신을 사감대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아..."

기껏 유리아가 가고 나니 이번에는 더 한 녀석이 왔다. 에반은 루밀리를 관찰하듯 쳐다봤다. 시선을 의식한 루밀리가 잔소리를 멈추고 뒷걸음질 쳤다.

"왜 그렇게 보시죠?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하세요. 빤히 보고만 있지 마시고."

애써 눈빛에 힘 주며 카리스마를 만드려는 점이라던가, 품행에 강박적으로 신경 쓰고, 윗사람의 신임에 목말라 있으며, 제식을 연상시키는 걸음걸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텔소드라는 성씨.

"너 기사 가문이지? 그것도 이스티아 쪽."

에반의 물음에 루밀리가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건 왜 물어보시죠? 당신도 절 신분이나 출신지만 보고 모멸하실 셈입니까?"

"왜 그렇게 되는데? 그런 얘기는 한 마디도  했어."

".... 아니면 됐습니다. 과민하게 반응해서 죄송합니다."

"어쩐지 너한테 잔소리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 난다 싶더만... 에휴."

"그게 무슨 의미죠?"

"몰라도 돼. 이제 점호나 하러 가자. 쫌."

로비 중앙에 도착한 에반은 곧장 루밀리와 반대 방향의 계단을 향하며 말했다.

"둘이 같이 다녀봤자 비효율적이야. 특히나 너하고 내가 붙어서 다니면 더더욱 말이지. 그러니까 나눠서 움직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나 4층 5층, 너 2층 3층."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신다면...."

루밀리는 당돌한 눈빛으로 에반을 올려보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달라는듯이 손짓했다.

"벌점 장부를 제게 주세요. 점호는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있으니까요."

"뭐?  굳이? 여기 혼자서  돌기에는 여간 귀찮은 게 아닌데?"

"사실 취침 전 점호는 사감보조의 역할인데 엘리아 님은 저 혼자서 점호를 돌게 두기 불안하셨어요. 그러니 당신이 사감대리로 들어오고 나서야 제게도 점호를 맡기신 거예요. 하지만 저 혼자서도 충분히 엘리아 님의 도움이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릴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이만 물러나 주셔야겠습니다."

"응, 그래. 고맙다. 자, 여기 장부."

"어엇??"

에반은 망설일 것도 없이 벌점 장부를 루밀리에게 넘겨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로비로 향했다. 그것도 꿀빨 생각에 아주 신나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쉽게 물러나실 생각이십니까? 정말로요?"

"뭐가? 네가 요구했잖아? 나는 들어줬을 뿐이고. 서로  됐네. 난 편하고, 넌 엘리아에게 인정받고. 거기에 사생들도 남자 지도원이 방에 들어오는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되고.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야. 안 그래?"

"그렇지만..."

"그럼 잘 해봐, 사감보조 씨. 무슨  생기면 바로 도와주러 간다. 어젯밤에 한바탕 조져놔서 아마 별일 없겠지만. 열심히 하면 엘리아에게는 내가 잘 말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에반은 루밀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잽싸게 로비 중앙으로 가버렸다. 분명 로비 중앙에 놓인 쉼터에서 노닥거릴 생각이겠지. 역시 마음에  들어. 루밀리는 에반의 영 못미더운 뒷모습에 대고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분명 먼저 제안한 건 루밀리 본인이다. 루밀리는 불만을 접어두고 장부를 펼치고 기숙사를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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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 말고 일어나세요."

루밀리의 앙칼진 목소리가 쉼터 테이블에 앉아서 졸고 있던 에반을 깨웠다. 루밀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벌점 장부를 돌려줬다.

"학생에게 일을 떠넘기고 자신은 졸고 있는 모습을 엘리아 님이 보셨다면 어쩌려고 하셨나요?"

"나 그렇게 허술한 사람 아니다. 대책이야 얼마든지 있지. 그나저나 뭐 이리 오래 걸렸어? 기다리다 깜빡 잠들었잖아. 나였으면 진작에  바퀴는 더 돌았겠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의 업무에 요구되는 덕목은 세심함과 성의라고요."

"그래서 세심하게 잘 보고 왔냐?"

"물론이죠."

"별  없었고?"

"당연히 없죠. 저희 기숙사의 사생들이 얼마나 몸가짐에 신경을 쓰는데요."

"그렇게 몸가짐에 신경을 써서 어제는 남학생이 22명이나 잡혔냐?"

"그건! 그거는... 오르토스 쪽에서 멋대로 숨어들어온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오늘은 음흉한 남학생 같은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라."

"아직  끝났습니다. 순찰 돌아야죠."

"꼬꼬마 녀석이 자야 할 시간에 순찰은 무슨 순찰이야? 내가 맡을 테니까 넌 가서 자라. 잘 자야지 무럭무럭  자라지."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세요. 곧 정식으로 기사가 되면 전장에 나가서 경계 임무도 수행할 겁니다. 기숙사에서 미리 경험해두면  나중을 위한 도움이 되겠죠."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엘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네가 자기를 도와준답시고 제때 잠도  자고 생활 주기를 망가뜨린다면 엘리아가 과연 좋아할까?"

"으윽... 중요한 일을 맡는 사람은 그에 따르는 수고도 막중한 법이겠죠..."

"그러니까 그 막중한 수고는 이 S급 사감대리님께 맡겨주시고 얼른 가서 자라."

에반은 루밀리를 숙소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장부를 챙겨서 사감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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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꼼. 복도에 늘어선 숙소 문들 중 하나가 살짝 열리더니 문틈 사이로 루밀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확인한 루밀리는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복도로 나오고는 룸메이트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자, 이제 순찰을 돌아볼까?"

루밀리는 편한 사복으로 환복하지 않고 여전히 교복 차림으로 있었다. 그녀는 보는 사람 하나 없는 복도를 거닐면서도 반듯한 제식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썼다.

"사감대리 님이 유능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엘리아 님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바로 나야. 머지않아 엘리아 님도 아시겠지."

중등부에서 부터 보여온 각별한 노력 덕분에 고등부에 올라오자마자 기숙사 사생위원회의 회장이자 사감보조가 되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엘리아의 신임을 독차지하는 일 뿐이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굴러먹던 건지 모를 NPC가 기숙사에 와서는 하루 아침만에 사감대리의 명찰을 달고 엘리아의 신뢰를 받고 있다. 루밀리는 자신의 기분을 알지도 못하고, 아니 알 생각도 없이 요령을 피우는 에반을 볼 때마다 울화가 올랐지만 엘리아의 결정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흥, 점호도 순찰도 다 내가   있어. 사감대리가 하는데 사감보조는 못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루밀리는 최대한 발소리를 낮추며 복도를 순찰했다. 몇몇 잠 없는 올빼미 공부족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잠들었을 깊은 밤, 고요한 복도를 거니는 루밀리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지금 이곳 사람들의 평안한 밤을 지키고 있다, 내가 뜬눈으로 이곳을 지켜보는 동안 이곳의 사람들은 단잠을 이룰  있다. 그런 기사 심리에서 나오는 뿌듯함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녀가 소소한 성취감을 만끽하는 걸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파츠츠츳! 전송 마법의 술식이 구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소리를 들은 루밀리는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곧바로 달려갔다.

"3층 로비 쪽이었어. 마력도 느껴져. 틀림없어...!"

누가 보면 넘어질까 겁날 정도로 거침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간 루밀리가 3층의 넓은 로비로 나와보니 야외정원이 딸린 휴게실 쪽에서 수상한 빛이 나는 게 보였다. 루밀리가 황급히 휴게실로 가보니 한쪽 벽에 커다란 마법진이 나타나고 있었다. 루밀리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활성화된 마법진은 시전자에게 길을 열어주는 좌표 포탈이 되었다.

이윽고  무리의 침입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개구멍을 뚫었으니 떳떳한 용건이 있어서  사람들일 리는 없었다. 야외정원 한쪽 구석에 숨은 루밀리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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