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4) (9/88)



〈 9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4)

학회 사정으로 강의를 하지 못하게  푸그앙 교수를 대신해서 학생들을 지도하러  에반 플루토는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의 열렬한 보이콧과 마주치게 되었다.  고귀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된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루나칼립스의 학생들인 만큼 자신들을 '가르칠' 사람에게 요구되는 기대치는 여간 높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의 평가 기준으로 에반은 자격 미달 판정이었다. 에반이라고 해서 딱히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겠다는 다짐으로 교실에 발을 들이진 않았지만, 역시 이런 눈총을 한몸에 받으면 그나마 있던 의욕도 빠져나갈 수밖에.

"젠장, 이럴게 뻔해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희도 내키지 않습니다. 당신에겐 푸그앙 교수님을 대신해서 저희에게 수업을 가르칠 권위가 있습니까?"

"동감이에요. 교수님들이 이곳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얼마나 까다로운 심사를 걸쳤는지 아시나요? 애초에 당신 같은 NPC가 아그루스 제국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자 얼마나 자세히 알까요?"

"걱정 마라. 나도  가르쳐 줄 생각으로  거 아니니까."

에반은 교탁이 있는 곳에 의자를 끌고 와서는 삐딱한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자습해. 졸린 사람은 고개 쳐박고 잠이나 자던가."

몇몇 학생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수근거렸지만 에반은 신경쓰지 않았다. 유리아 릴리스는 그런 에반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일전에 그와 한 약속이 있으니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에반이 학생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자습할 교재를 뒤적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에반 쪽을 보고 있던 작은 학생 하나가 에반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맞은 순간 그 학생은 고개를 휙 돌리고  본 체 했지만, 에반은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불렀다.

"거기 너."

"네...?! 저요?"

에반이 부르자 그 학생은 과장될 정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며 대답했다. 기숙사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에반이 인사하는 목소리를 듣고 겁먹던  모습 그대로였다.

"네가 프릴 루에리아 맞지?"

"네, 맞아요..."

조용히 자습을 하던 다른 학생들 중 몇몇이 흠칫 놀란 반응을 보이며 에반과 프릴을 번갈아 살펴봤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물론이고 학생회장인 릴리스 양에게도 경어를 쓰지 않더니, 설마 루에리아 양에게 마저 반말을 할 줄이야."

"배짱 하나 만큼은 높이 쳐줘야겠네요. 적어도 상대를 봐가면서 예의를 차리는 졸렬함보다는 낫잖아요?"

"뭐 루에리아 양이라면  NPC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넘어가 주겠죠."

"루에리아 양에게는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로  NPC가 선을 넘는 걸 보고 싶네요. 분명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겠죠."

일부 학생들이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주고받았지만 에반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에반은 프릴의 단어장을 꺼내서 보여줬다.

"이거 네가 떨어트린  맞지? 와서 가져가."

자신의 단어장을 본 프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뭔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이 있는 곳까지는 온 프릴이었지만, 에반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마침내 남자를 상대할 때 본능적으로 유지하는 거리에 부딪히자 그녀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에반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프릴의 반응을 지켜봤다. 프릴은 자신의 단어장을 바로 앞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었다.

"던질 테니 잘 받아라."

"던지면  돼요, 소중히 다뤄주세요!"

"거 참 피곤하네."

에반은 안절부절 못하는 프릴과 자기들끼리 무어라 숙덕이는 다른 학생들을 번갈아 봤다. 에반의 눈에 비친 프릴은 그저 남자와 거리를 좁히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여학생이었다. 이  많고 자그마한 아이가 수많은 교직원과 남학생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이라고? 대체 어떤 면모에?

지금 당장 살펴봐서는 이해할  없었다. 아마 스위치 들어가는 순간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다던가, 본인은  자각이 없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무시무시한 일면이 있다던가 그런 부류가 아닐까.

"자, 여기다 둘 테니까 가져가."

에반은 단어장을 교탁에 올려놓고서는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에반이 단어장에서 충분히 떨어지고나자 그제서야 프릴이 걸음을 뗐다. 슬금슬금. 단어장과 거리를 좁히면서도 끊임없이 에반의 눈치를 살피는 프릴이었다. 에반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프릴을 기다려줬다.

덥썩! 마침내 단어장을 집어든 프릴이 에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작게 기어들어가는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잘 보관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소심한 인사로 감사를 표한 프릴은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반은 멋쩍은듯 웃는 얼굴로 딴청을 피우며 중얼거렸다.

"허 참, 내가 선생님 소리를 다 듣게 될 줄이야."

한편 프릴이 자리에 앉자마자 단어장을 펼쳐서 페이지를 사라락 훑어보니 찢어지거나 유실된 부분은 없었다. 페이지마다 손떼와 메모로 가득한 자신의 애장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상기되어 있었던 프릴의 표정이 밝게 펴졌다. 선생님 소리를 듣고 기분이 들떴겠다, 프릴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참견을 하고 싶어졌는지 에반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아 실례지만 말이야. 그 단어장에 써놓은 이름 말인데, 루에리아의 철자가 틀렸어."

"....네??"

프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봤다.

"네 이름 '루에리아' 에서 '리' 발음은 L이 아니라 혀를 굴리면서 내는 R 발음이야. 아그루스어는 '루' 하고 '리'  둘의 발음상의 차이가 불분명해. 특히 북부 지역으로 올라갈수록 이런 경향이 흔해지지. 자, 이렇게 써야 맞아."

에반이 칠판에 기하학적인 디자인의 고대 문자를 휘갈겨 썼다. 독서나 과제를 하던 다른 학생들도 분필이 칠판을 딱딱 두드리는 소리에 버릇처럼 반응했는지 앞을 보게 됐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에반이 칠판에 써놓은 글씨를 알아봤다.

"저건... 아민어?"

"그것도 전상 문자인데. 일개 NPC가 전상 아민어를 읽고 쓸  안다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틈에서 루에리아가 순수한 호기심에 질문했다.

"선생님... 아민어를 할 줄 아시나요?"

"뭐 그럭저럭. 가끔 일하다보면 필요할 때가 있거든. 썩 내키진 않지만 말이야."

"어디서 배우셨나요? 누가 가르쳐줬나요?"

"으음? 글쎄...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그냥 알아서 터득했는데."

"책이나 단어장 같은 건 주로 뭘 보셨어요?"

"안 봤는데."

"네...?? 안 봤다고요?"

"엉. 한곳에 진득하게 앉아서  읽는 건 내 성향이랑  맞아. 남이 책 읽는 걸 보는 건 좋아하지만."

"그러지 말고 제게도 알려주세요."

"아니 진짜로  보고 혼자 터득했어...."

에반의 답변에 프릴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반은 애써 프릴이 반응을 보일만한 화제를 둘러댔다.

"그러고보니 희한하네. 루에리아의 철자가 잘못된  모르고 있었다니.  단어장에 루에리아 정도는 나오지 않니?"

"네? 제 이름이 단어장에 나온다고요?"

다행히 프릴은 에반이 던진 화제를 덥썩 물었다.

"네 성씨인 루에리아 말이야. 단어장에 나와있지 않아? 꽤 자주 쓰이는 편인데."

"아뇨? 전  이름이 아민어에서 유래했는지도 몰랐어요."

프릴이 단어장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루에리아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있었더라면 진작 알아보고 인상 깊게 기억해 뒀을 것이다.

"아민어가 이미 사멸한 언어라고는 해도 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언어 체계의 어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니깐. 아그루스에서 흔하게 쓰이는 이름들 중 아민어에서 유래한 이름은 생각보다 많아."

"예를 들면요?"

"아민어의 명사는 실체를 가진 현존 명사와 추상적인 관념 명사로 나뉘는데, 관념 명사는 모두 그 발음이 -ia로 끝나.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이름 찾아보기 어렵지 않잖아? 예를 들자면..."

에반이 의자를 스윽 밀고 일어나서는 강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학생들 틈에 앉아서 에반을 지켜보고 있던 유리아를 가리키며 불렀다.

"유리아."

프릴은 물론이고 에반의 설명에 귀기울이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유리아에게로 집중되었다. 유리아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 시선을 돌렸다.

"유리아. 그 뜻은... 순백(Yuria). 저렇게 온통 검은 색인데 이름은 순백이야. 마음씨 만이라도 하얗기를 바란다는 뜻인가? 흠흠."

에반은 도망치듯 유리아의 시선을 피해 자리를 옮기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 기숙사의 사감인 엘리아(Elia). 그 뜻은 생명. 그밖에도 Sofia(온화), Klaria(투명), Hanatia(세상). 이런 이름들이 다 아민어에서 건너왔지."

"그럼....  이름은요?"

"Lueria. 그 뜻은 '기억'."

프릴은 말로 형용 못할 벅찬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샘솟는 호기심과 의문점이 그녀를 덮었다.

"하지만 선생님. 제 단어장을 보면 기억이라는 뜻을 가진 아민어 단어는..."

"Tagnia라고 말하려는 거지?"

에반이 그 질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보이자 프릴의 말문이 막혔다.

"아민어가 왕족들이 궁중에서 사용하는 전상어(殿上語)와, 일반인들이 널리 쓰는 민간어(民間語)의 구분이 뚜렷하다는 건 배웠나?"

"네. 둘은 사용하는 문자부터 어휘까지 확연히 다르다고 책에서 봤어요."

"여기서 문제는 민간어야. 아민 제국의 영토가 워낙에 방대하다 보니까 소수 방언도 난립할  밖에 없어. 그러니 모든 피정복 실효지배 국가에서 쓰일 단 하나의 절대적인 표준공용어가 필요했지. 이 표준공용어가 제정되는 과정에서 왕실에서만 쓰이던 전상어가 적극적으로 민간어에 유입된 거야."

"아아,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아민어가 바로 표준공용어겠네요?"

"그랬다면 편하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다소 복잡하다."

"네?"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원래 주제로 돌아와서... 아무튼 표준공용어 제정을 위해 전상어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 어휘들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이럴 때에는 전상어 단어 쪽을  깊은 의미를 가진 개념으로 치기로 정해졌어. 그러니 민간어 어휘인 tagnia는 단순히 생각이 나는 걸 의미하지만 lueria는 좀 더 고차원적으로 망각에 대항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뜻하게 된 거야."

"망각에 대항하기 위한 모든 노력?"

"쉽게 비유하자면 tagnia는 의지나 노력에 관계없이 그냥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이야. '너 그 여자 이름 기억나?' 하면 tagnia를 써서 'Hal ed adna est tagnia un irid nomia y'eha kod?' 인 거고, 반면에 lueria는 잊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의 기억이지. '그녀는 내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할까?' 를 아민어로 하면 lueria를 써서 'Hal ed eha hamiso est  lueria un irid rugetia ma irid ayasa el rugetu kost?' 이런 식으로. 이해했지?"

"기억. 잊지 않고자 하는 의지..."

"서기관, 기록보관자, 계승자. 그야말로 문인을 대표하는 가문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야. 어쩌면 너에겐 딱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굉장해요.... 이런 건 푸그앙 교수님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인데."

프릴이 감탄하고 있던 그때 다른 학생 하나가 의구심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아민어는 원어민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서적조차 구할  없는 언어에요. 워낙 자료가 적다보니 학계의 연구도 진작 한계에 부딪친 상태고, 저희 학원에서도 기초적인 수준만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방금 설명한 것들은 정보의 출처가 어떻게 되죠?"

"출처는 없어.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걸 얘기했을 뿐이야."

"아는 걸 말하는 것이더라도, 참고 서적이라던가 문헌이나 논문 같은 걸 읽어봤으니 아는 게 아닌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앉아서 그런 먹물 자국들을 진득하게 읽을만한 사람이 아니야."

"말이 안 나오는군요. 지금 당신이 서있는 곳은 루나칼립스의 강단입니다. 그런 곳에 서서 목소리를 내실 생각이라면 학술적으로 검증된 사실 만을 입에 담으셔야죠."

몇몇 학생들은 에반이 마치 아민어 원어민이라도 되는 양 떠든다며 그를 비난했다. 다른 일부 학생들은 에반이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 같지는 않고 참고할 가치가 있는 견해라며 반론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에반이 앞에서 뭐라 떠들건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프릴의 눈동자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심드렁한 에반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녀는 자신의 단어장의 빈 공간에 에반 플루토라는 이름을 잘 보이는 색으로 적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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