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3)
"프릴? 무슨 일이야? 기분이 안좋아보여."
시무룩하게 책상에 앉아있는 프릴 루에리아의 옆에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학생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소피아 안녕."
"역시 목소리 부터가 평소와는 달라. 기운 없는 거 맞지? 그치?"
"지금 나 그렇게 쳐져 보이는 거야?? 어른이 되려면 자신의 기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난 어른이 되긴 한참 먼 거 같아."
"괜찮아, 괜찮아! 어른 같은 거 될 필요 없어! 넌 계속 이렇게 작고 귀여운 나의 프릴로 있어주면 되는 거야!"
소피아가 프릴을 힘껏 끌어안았다. 육체적으로는 숨쉬기 힘들어서 괴롭고, 정신적으로는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괴로운 프릴이였다.
"프릴. 혹시라도 네가 쑥쑥 커버리면 난 정말 속상할 거야."
"소, 소피아... 숨막혀..."
"아차차! 미안."
소피아의 포옹이 풀리자 프릴은 헥헥거리며 막혔던 숨을 몰아 쉬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이렇게 기운이 없는거야? 이제 곧 네가 좋아하는 역사 수업이잖아?"
"그렇지만 아민어 단어장을 잃어버렸어. 저번에 학교 가는 길에 사감대리님과 마주치는 바람에 겁먹어서 떨어뜨렸는데...."
"아민어 단어장이라면 네가 엄청 아끼는 소중한 물건이잖아? 네 말대로라면 아마 그 사감대리 NPC가 주워서 보관하고 있겠지. 달라고 해봐."
"그치만 사감대리님은......"
"남자구나. 너도 정말 중증이네.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돌려달라고 말할 엄두도 못낼 정도라니."
"응....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아는데, 그런데도..."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내가 찾아가볼게."
"아냐. 내 성격의 부족한 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움직여야 한다니. 그런 건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해."
"전혀 그렇지 않아. 서로의 부족한 면 때문에 오히려 한발 더 움직일 수 있는 게 바로 친구 사이란 거라고."
"소피아..."
"말 나와서 말인데, 그 사감대리라는 사람도 참 재밌는 거 같아. 저번 점호 때 커플들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시켰다며? 오르토스의 바보들은 여자가 보는 앞에선 허세 장난 아닌데 어떻게 다 물리쳤을까?"
"시리우스 이사장님이 고용한 사람이잖아. 분명 평범한 NPC는 아니겠지."
"재밌는 사람이 들어왔네. 앞으로가 기대되는 걸. 그보다도 지금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교과서는 아닌데."
프릴이 보고 있던 건 낡은 공책이였다. 페이지에는 기하학적인 디자인의 구조물이 연필 소묘로 그려져있었다. 어떤 페이지에는 섬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어떤 페이지에는 건물의 내부 설계도를 간략하게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프릴, 혹시 네가 그린 거야?"
"응."
"굉장하잖아! 진짜 잘 그렸다! 넌 정말 재능이 많구나."
소피아는 프릴의 폭신한 머리카락을 마구마구 쓰다듬어주었다. 부끄럼을 탄 프릴의 두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래서 뭘 그린거야?"
"이게 뭐냐면 말이지!"
무엇을 그렸냐는 질문 한 마디에 지금까지 어버버 부끄럼만 타고 있던 프릴의 눈동자에 불이 확 들어왔다. 작게 기어들어가던 목소리도 갑자기 커지는 통에 기세 좋던 소피아가 순간 움찔하고 놀랐다.
"이게 바로 녹사르 제도의 대략적인 지도를 그린 거야! 오늘 수업의 주제가 안개전쟁이니까 안개전쟁의 중심에 있던 이 섬에 관한 스케치를 가져왔지! 이거 봐, 여기 이 7개의 섬 중에 가장 큰 본도(本島)가 보이지? 여기에 아민 제국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그 유명한 '녹사르의 빈 무덤' 유적이 자리잡고 있어!"
"어, 어어.... 그렇구나."
"녹사르 제도가 참 신기한 점이 뭐냐하면 말이지, 원래 섬이라는 건 화산 활동이나, 지각판의 움직임 같은 규모 큰 지질학적 사건을 통해 형성되는 지형이야. 그렇기 때문에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있는 땅덩어리인 게 아니라 대륙과 붙어있는 구조지. 하지만 이 녹사르 제도는 대륙봉과 붙어있지 않아. 넓은 바다의 해수면 위에 덩그러니 떠있기 때문에 잠수를 하면 섬 밑을 지나서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어! 신기하지 않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녹사르 제도는 해류에 밀려나지 않고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어. 마치 그 밑에 중요한 것이 가라앉아 있다는 걸 알리는 부표처럼 말이야."
신나서 설명하고 있는 프릴의 노트를 덮어버리며 소피아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알겠어, 알겠어. 누가 보면 네가 푸그앙 교수인 줄 알겠어."
"어.... 다음 페이지가 더 재밌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래, 그래. 자세한 건 수업시간에 들어야겠어. 이 그림들은 다 교과서 설명을 토대로 상상해서 그렸어?"
"그럴 리가. 라비나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들을 찾아봤지."
"무슨 도서관?"
"라비나 도서관. 아그루스 국립대학의 도서관. 제국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방대한 서적과 논문을 보유하고 있는, 그야말로 지혜의 방주라 부를 수 있는 곳이야. 아쉽지만 나는 외부인이라 도서대출이 안 되니까 책을 보고 공책에다가 삽화를 베껴 그릴 수 밖에 없었어."
"그걸 위해 갈고 닦은 그림실력이라는 거야? 정말이지 너의 학구열을 누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 여기 있는 학생 모두가 다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
"으응? 그럼 난 여기 학생이 아닌 건가?"
"소피아도 성적 관리를 해야해. 이번 시험 결과가 더 나빠지면 이제 포옹은 금지야."
"뭐~?? 그건 너무하단 말이야. 그럼 시험기간이 되기 전에 지금 많이 안아 둬야겠는걸."
"저리가...."
투닥거리는 두 사람 위로 그림자가 짙어져왔다. 학급위원장 유리아 릴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피아는 황급히 프릴을 얽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아, 유리아 양. 미안해요. 우리가 좀 시끄러웠죠? 방해해버렸네요."
"괜찮습니다.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요. 오히려 제가 두 사람을 방해했군요. 실례지만 그 노트,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어? 물론이죠!"
유리아에게 노트를 펼쳐 보여주는 프릴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반면에 유리아는 여전히 색깔 없는 무표정으로 찬찬히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림은 혼자서 익히신 겁니까?"
"맞아요! 아그루스 국립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이렇게 도서관의 책을 스케치 해야할 테니까요."
"굉장하군요. 흑연을 사용한 명암 조절만으로 이렇게 입체적인 원근감을 줄 수 있다니. 거의 실제 모습이랑 차이가 없어 놀라울 따름입니다."
놀랐다는 감탄의 표현 치고는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하지만 프릴의 얼굴에는 감탄사가 보일 지경으로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실제 모습? 녹사르 제도에 가본 적 있나요??"
프릴이 큰소리로 묻자 교실안의 학생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지금 뭐라고?"
"녹사르에 가본 적 있다고? 유리아가?"
"녹사르? 거기는 아그루스 고고학회가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는 곳이잖아?"
학생들의 이목이 프릴과 유리아에게 쏠렸다. 웅성거리는 주변을 둘러본 유리아가 일이 귀찮게 되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봉쇄구역으로 지정되기 전의 일입니다. 3차 발굴작업이 시작되기 전인 시점이였죠."
"그래서? 실물로 본 녹사르의 빈 무덤 유적은 어땠어요?"
프릴이 유리아에게 바싹 달라붙어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유리아는 그 시선에 부담감을 느껴 고개를 살짝 돌렸고, 질투심 많은 소피아가 그런 프릴을 집어 당겼다.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최악의 악몽이였습니다."
기대감에 가득하던 프릴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유리아의 발음은 아주 또박또박했다.
"어째서?"
"확실히 유적의 외견 자체는 장엄한 그 규모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 그 모습을 보고도 감탄하지 않을 이는 없겠죠. 하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루에리아 양이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 이명(異鳴) 현상."
"역시 모를 리가 없죠."
"마법사라면 알고 싶지 않아도 누구나 알게 되는 거니까요."
이명 현상. 유물이나 아티팩트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경우 나타나는 신체적, 정신적 이상반응. 그 양상은 유물이 발휘한 마력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경미한 이명 현상의 경우 어지럼증, 메스꺼움, 구토, 발열 등의 증상을 유발한다. 정도가 심할 경우 이유를 모를 불안감을 호소하며, 격한 환청으로 인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증상을 호전시키지 못하고 오래 방치하면 만성적인 정신적 피폐에 시달리고, 심할 경우에는 정신의 붕괴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명 현상은 녹사르 유적지에 함정이나 위험한 장치가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발굴작업 도중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유이며, 유물의 힘을 어리석게 활용하는 이들이 대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다. 더 나아가서 마법 또한 고대 아민의 힘을 현세에 빌려오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분별한 마법의 남발 역시 이명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신체적 침식을 초래한다.
무궁무진한 신비와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마법을 꺼려하고 아민 제국으로의 진출을 망설이는 데에는 바로 이 이명 현상에 대한 공포가 기저에 깔려있다.
"처음에는 배멀미를 좀 심하게 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상륙하고 나서는 고된 항해에 지친 건 줄 알았죠. 섬을 수색할 때에는 낯선 환경이라 느껴지는 불안감인 줄 알았습니다. 유적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미지와의 조우가 주는 전율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선발대가 확보한 유적의 진입로 앞에 선 순간 전 깨달았습니다. 그건 분명한 메세지를 가진 속삭임이라는 걸."
어느샌가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서 유리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프릴 역시 유리아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유리아는 악몽 같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뒤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겉잡을 수 없이 구토를 하는 저를 유적 안으로 들여보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수색대는 절 베이스캠프에 남겨두었죠. 전 그들에게 제가 겪은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때에는 이명 현상이라는 것이 학계에 알려지기 전이였기에 수색대는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린 나이에 겁을 너무 먹어서 헛것을 들은 것으로 여기고 유적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을까요? 루에리아 양, 알고 계신가요?"
"2차 발굴 탐사대의 생존자 구출 및 유해 수습을 위한 수색대 파견. 결과는 4명 생존, 26명 사망. 임무 실패."
"그런 것까지 외워두고 계시다니. 어쩌면 참가자였던 저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계시겠네요."
"몰랐어요. 수색대의 일원이였을 줄은."
"견습이였을 뿐입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전 유적 내부에는 발자국 조차 남기지 못하고 도망친 겁쟁이입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져 여기에 이렇게 서있는 거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린 나이에 녹사르의 땅을 밟아본 건 대단한 성과에요! 설마 고고학회의 수색대원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니! 나도 꼭 유리아 양처럼 두 눈으로 직접 녹사르 유적을 보고 파헤치고 싶어요."
"파헤쳐서 어떻게 할 셈이죠?"
"그 다음에는 저 바다밑에 있는 아민의 도시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요. 그들이 살던 세계는 어떤 곳이였는지 그 거리를 거닐어 보고, 그곳에 남아있는 모든 책들을 찾아 읽고 싶어요. 그게 내가 마법을 공부하는 이유에요."
"루에리아 양. 제가 한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들으신 거죠?"
순간 유리아의 얼굴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일순간 교실 안에 차가운 정적이 스쳐지나갔다. 프릴의 눈동자가 당황스러움에 흔들렸다.
"어어... 유리아 양?"
"녹사르의 유적이 아무리 장대하다 해도 결국은 아민 문명의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건축물 하나가 속삭이는 이명 만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거대한 제국 전체가 내지르는 합창 소리는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유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프릴의 노트 페이지를 넘겼다. 그 페이지에는 아민 제국이 위치한 심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이명 현상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길잡이의 역할도 해주었죠. 시속 20km 남짓할 정도로 느린 심해의 심층해류가 간헐적으로 빠르게 솟구치는 현상이 일어날 때가 있는데, 이때 심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이명 현상과 동일한 종류였기에 아민 제국의 위치를 심해로 특정지을 수 있었던 겁니다. 1만 1천 미터라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바닷속에서도 우리에게 그 메아리가 닿을 정도라면, 그 정도로 큰 함성을 바로 앞에서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치만...."
"저번 수업시간 때 아민 제국의 영토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는 질문에 다들 뭐라고 대답했죠? 세계정복, 우주진출, 천하통일. 아뇨, 모두 틀렸습니다. 실상은 모닥불에 황홀해하며 날아드는 나방이 될 뿐이라고요."
유리아는 노트를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침울해져 있는 프릴의 손에 노트를 쥐어주었다.
"루에리아 양. 당신의 탐구가 정신과, 학구열은 분명 본받아 마땅합니다. 자신이 왜 학업에 열중하는가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도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닿아버려서는 안 되는 영역도 분명히 존재해요."
"이명 현상을 극복할 방법은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귀 기울여선 안 되는 음성을 듣고 미쳐버린 연구원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에리아 양. 당신은 정말로 위험한 이명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통제 가능한 범위 안의 이명만 겪어봤기에 그걸 '연구' 한다는 게 얼마나 정신나간 짓인지 모를 겁니다."
"그럼 지금 저에게 포기를 권유하러 온 건가요? 아니면 제가 평생을 간직해온 마법사로서의 가치관이 잘못 됐다고 부정하실 생각인가요?"
유리아가 프릴의 말에 흠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모두가 탐내는 그 아민이라는 과실이 실상은 얼마나 위험한 유혹인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탐나는 게 있으면 손을 뻗는 게 뭐가 나빠서요? 지금 우리가 가진 유물들 만으로는 더 이상 마법을 발전시킬 수 없어요. 새로운 자료를 찾으러 길을 개척해야 해요."
"저 바다밑에, 녹사르 유적의 진입금지 구역에, 어떤 것이 묻혀져 있을지 우린 상상도 못합니다. 만약 우리 문명이 힘을 합쳐도 감당못할 존재의 잠을 깨워 버린다면 어떡할 거죠?"
"어째서 그런 부정적인 가능성이 모든 시도를 단념하게끔 내버려두는 거죠?"
"모험을 떠나고 싶으면 혼자만 죽는 모험을 떠나세요. 게임이 좋으면 딱 자기 목숨만 베팅하시고요."
"결국 유리아 양은 마법사면서 마법이라는 학문이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하는 것 밖에 못하고 있어."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도 기묘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리아 말이 맞아. 나쁜 놈 한 명이 유물을 손에 넣는 것 만으로도 온갖 사건이 벌어지는데 굳이 새로운 유물을 차지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설령 아민의 유산을 차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만큼 인류가 성숙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그래. 애초에 마법이라는 게 바다에서 유물이랑 유적지 건져내려는 목적으로 익히는 게 아니잖아? 굳이 감당못할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겠어? 지금 있는 걸 좀 더 유용하고 안전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무슨 소리야? 루에리아의 말이 맞아. 엘리트 마법사가 되기 위한 학교를 다니면서 너무 위험하니 마법의 개척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동감이야. 유리아는 수색대 때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어."
"그건 말이 좀 심했어. 유리아의 주장은 경험을 근거로 두고 있으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걸."
"물론 설득력이 있지. 나도 공감이 가. 그렇지만 마법의 발전에 기여하는 건 결국 유리아 같은 신중론자가 아니라 루에리아 같은 탐구가겠지."
어느샌가 교실은 '유리아 파'와 '루에리아 파'로 나뉘어진 토론의 장이 되었다. 대조적인 의견으로 파벌이 갈라진 학생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시시비비를 논하기 시작했다. 별 생각 없이 떠들러 왔던 소피아는 난데없는 붕당 현상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기, 이렇게 우리끼리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다투는 건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푸그앙 교수님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푸그앙 교수님이라면 루에리아의 의견에 찬성하겠지. 아민 제국의 영토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가능할 거라고 저번 수업 때 말씀하셨으니까."
"그래도 교수님이 이명에 대한 걸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 유리아가 말했던 걸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물어보신 걸 보면 분명히 뭔가 있는 거 같아."
"우리끼리 추측할 필요 있어? 어차피 곧 교수님이 들어오실 텐데 바로 질문해보자고."
"그래, 그렇게 하자."
논쟁이 일단락 되자 학생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수업 준비를 했다. 얼떨결에 불구경한 소피아도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유리아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던 프릴은 유리아가 자리로 돌아가자 마자 스위치가 내려간 것 마냥 추욱 늘어져버렸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 교실 안은 폭풍전야와 같이 고요했다. 평소대로라면 옆사람과 간단한 담소를 주고 받느라 나타나는 생기있는 풍경을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논란을 종식시킬 심사위원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드르륵 하고 교실문을 열리는 소리가 났다.
'왔다!'
하지만 이내 곧 교실에 등장한 사람이 모두가 기다리던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한손에는 낡은 서적을 든 중년 신사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만사 다 귀찮은 표정을 한 더벅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NPC 에반 플루토였다.
"뭐지? 여기는 왜 온 거야?"
"표정은 또 왜 저러는 걸까? 저런 얼굴을 남 앞에서 보일 수 있다니."
학생들의 의문 섞인 불만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유리아가 그들을 대표해서 에반에게 말했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오신 거죠?"
"그니깐. 내 말이 그 말이야."
"장난 치지 말고 제대로 답변해주세요."
"아그루스 제국사 강의를 담당한 푸그앙 교수가 학회에 참석하느라 부득불 오늘 강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학생들을 지도해달라는 교무부의 지시가 내려왔지. 아 거참 표정들 좀 펴, 나도 이런 거 하기 싫다고."
결국 유리아 대 루에리아 논쟁은 심사측의 불참으로 인해 무승부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