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2)
역사 전공자 출신인 푸그앙 교수의 수업은 루나칼립스 학원의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수업 중 하나이다. 10대 소년, 소녀들이 원하는 마법이란 터뜨리고, 폭발하고, 얼리고, 휘몰아치는 그런 화려한 원소의 불꽃놀이지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이론 따위는 안중에 들어올 만한 것이 아니였다. 마법의 발달사, 아그루스 제국사, 영창 마법언어학 기초. 어느 것이건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필수기초 과목인 만큼 셋 중 어느 것도 거를 수가 없었다.
오늘도 계속되는 푸그앙 교수의 역사 강의 시간. 아침수업이라 안 그래도 졸릴 시간대에 졸음을 부추기는 푸그앙 교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겹쳐지니 학생들의 괴로운 표정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었다.
“아민 제국. 까마득히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고, 남아있는 역사적 기록도 부족하기 때문에 알려진 바가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선조들이 아민 제국 유물이 가진 섭리를 초월한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정립된 학문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한 부분을 느릿느릿한 말투로 읽은 푸그앙 교수는 별안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지금부터 집중해서 잘 보도록.”
푸그앙 교수가 꺼낸 것은 유물이나 아티팩트를 휴대할 때 쓰는 보관함이였다. 학생들이 쓰는 보관함은 은색 상자에 보랏빛 보석이 박혀있는 형태였지만, 교수의 것은 검은색 상자에 금빛 보석이 박혀있었기에 훨씬 위압감이 느껴지는 디자인이였다.
“유물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분석해서 그것 중 전체 혹은 일부를 모방하여 만든 모조품을 아티팩트라고 한다. 경이로운 힘을 지닌 유물일 수록 아티팩트를 제작하기 어려워지고 당연히 가격 또한 터무니없이 치솟지. 또한 유물의 기능과 위력을 얼마나 원본에 가깝게 모방했는지도 아티팩트의 등급 평가 요소지."
그렇게 설명을 하며 교수는 보관함에 있는 보석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주인의 지문을 알아본 보석은 곧 견고한 보관함을 활짝 열어서 안을 보여줬다. 푸그앙 교수는 보관함 안에 숨겨져 있던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검은 반지였다. 문양도 문장도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민무늬 반지였기에 외관만 보자면 투박하고 심심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학생들의 마음에 들만한 물건은 아니였다.
“반응들이 별로구나. 잠이 확 깰만한 첨언을 해주마. 이건 아티팩트가 아니야. 원본 유물이지.”
그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인데 학생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유물이라고?!!"
“진짜 유물을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거야?”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시는 게 아닌 이상 모든 유물은 고고학회가 관리하는데 그렇다는 건 설마?”
“바로 그 설마란다. 지금까지 수많은 어리석은 이들이 이 반지를 악용하다 죽었고, 숱한 주인들의 죽음을 거친 끝에 결국 내 손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나를 이 반지의 주인으로 인정해주셨지.”
푸그앙 교수는 자랑스럽게 과시하면서 반지를 자신의 손에 끼웠다.
“그 반지는 어떤 힘을 갖고 있나요?”
“보여주마.”
푸그앙 교수가 반지를 낀 손가락을 튕겨서 딱하는 소리를 내자 곧 교실 전체가 어둠에 뒤덮혀버렸다. 눈을 감은 것 보다도 더 검은 어둠에 집어삼켜진 학생들이 당황스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더니 주변을 비출 불빛을 만들기 위해 영창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학생들이 영창을 외우고 아티팩트를 기동시켜봐도 어둠속에 집어삼켜진 교실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술식은 분명히 발동이 되었는데?”
“나도 지금 아티팩트가 작동되고 있는 상태인데 왜 빛이 안 나는 거지? 이상해.”
학생들이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교실을 밝혀보려 했지만 반딧불이 한 마리 만큼의 빛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학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한 교실에서 푸그앙 교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소용없어. 살짝만 불면 꺼질 촛불도, 태양을 방불케 하는 빛줄기도 이 반지의 힘 앞에선 모두 어둠에 맞설 힘을 상실하지. 반지의 착용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칠흑세계에 빠지는 것이야.”
“드, 들어본 적 있어! A급 유물인 칠흑세계!!”
“효과범위는 사용자의 잠재력과 숙련도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만 이 반지는 모조품 따위가 아닌 진품이기에 재능이 없는 착용자도 넓은 범위에 힘을 미치게 할 수 있지. 나처럼 실력이 있는 사람이 사용법에 익숙해진다면 그 위력이 어떨지는 너희들 상상력에 맡겨두마.”
푸그앙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딱! 하고 탄지음이 울리는 동시에 교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때? 다들 잠 좀 깼나?”
교수는 흡족한 듯 웃으며 자신의 유물을 보관함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강의를 다시 이어나갔다.
“좀전에 했던 설명이지만 마법이라는 것은 이런 아민 제국의 유물이 작동하는 원리를 분석하다가 정립된 학문이다. 우리가 신비와 오묘의 정수라고 부르며 흠숭하는 마법은 사실 아민 제국의 기술 중 극히 일부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지. 오해는 하지마라. 마법이 별볼일 없는 게 아니라 아민 제국이 터무니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문명을 가진 거니까.”
교수가 칠판에 적어놓은 글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칠판에 쓰인 글씨는 악필이기 짝이 없었지만 어찌저찌 아민 제국이라고 썼음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아민 제국의 유적을 하나만 발굴해도 우리의 문명 수준은 족히 수십년을 더 진보할 수 있다. 아민 제국의 유물을 하나만 찾아내도 그 국가의 군사력을 족히 10배는 보강할 수 있다. 아민 제국의 문헌을 하나만 발견해서 해독해도 우리의 생활은 족히 10배나 풍요로워질 수 있다. 자, 그렇다면 그 아민 제국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초월적인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보물들을 모조리 독식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정복?”
“그런 건 간단하겠지.”
“우주진출?”
“시도해 볼 만 할거다. 적어도 내 믿음으로는 그래.”
“천하무적?”
“과장된 표현이 결코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별난 답변을 내놓았지만 모두 다 긍정할 수 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에도 가능성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바로 마법이기 때문이다.
“대륙 전체를 호령하며 온 천하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우리 아그루스 제국의 다음 행선지는 아민 제국의 영토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야. 고고학회의 오랜 탐사와 연구 끝에 아민 제국의 위치를 찾아내는데에 성공했지만..... 그곳은 해저 11,000m도 더 되는 심해였지.”
1만 1천 미터를 넘기는 나락 보다도 깊은 수심. 그 거리와 지리적 위치는 현재 문명의 기술력으로써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것이였다. 어쩌다 길을 잃고 육지로 드러난 일부 유물과 유적을 더듬어가며 마법이라는 학문을 개척해왔지만, 이미 손에 넣은 자료들 만으로는 깊은 바다를 헤쳐나갈 궁리를 해낼 수 없었다.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민 제국의 수몰지 바로 위 해수면에 위치한 섬인 녹사르 제도. 아민 제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지리적 거점인 동시에, 아민 제국 왕가의 무덤 중 하나가 자리잡고 있어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곳이지. 이 섬의 영유권을 두고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었고, 과격해진 분쟁에 유물의 힘까지 동원한 결과 발발한 것이 바로 안개전쟁이다. 그럼 이 안개전쟁에 대한 내용은 다음시간에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수업을 마치지.”
지루한 역사 수업을 마친다는 그 한마디에 학생들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환호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쉬는 시간을 향유하려는 학생 무리 사이로 학구열에 찬 작은 여학생 하나가 푸그앙 교수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저... 그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실습보다는 이론과 역사를 좋아하는 별난 이 공부벌레는 프릴 루에리아. 다들 지루해하는 동안 그녀는 혼자서 눈빛을 빛내며 수업에 경청하고 있었다. 다만 남자만 보면 이유도 모르게 난색을 표하며 거리를 두는 성격 때문에 푸그앙 교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말해 보거라.”
질문을 하는 것 치고는 안전거리를 과하게 확보한 프릴이였지만 교수는 이미 익숙해졌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질문을 받았다.
“저기.... 그.... 듣고 비웃으시면 안 돼요.”
프릴은 역사 수업이 끝날 때 마다 항상 질문을 했지만 그럼에도 매번 질문을 할 때마다 용기를 쥐어짜내야 하는 모양이였다. 교수는 이 점도 익숙해졌는지 인내심있게 그녀를 기다려줬다.
“결코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말하렴.”
“그..... 아민 문명의 기술력이 그렇게 진보되었다면 깊은 해저로 가라앉았어도 멸망하지 않고 수중 도시를 이루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아직도 그들은 살아있는 거겠죠?”
“유감스럽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단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으신가요? 아민 문명의 유물과 건축물들은 심해의 그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멀쩡하게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데, 그 점이 해저 문명의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아그루스 고고학회가 보유한 아민 제국의 역사 실록은 녹사르 제도의 빈 무덤에서 발견된 단 세 권의 기록 뿐이지만, 그 중의 하나는 제국의 최후를 고하며 한탄하는 애가(哀歌)의 성격을 띄고 있지. 무엇보다도 아민 제국의 수몰은 어림잡아 3천년도 더 된 과거야. 그들이 바다 밑에서 건재했더라면 진작에 지상의 보잘 것 없는 문명을 쓸어버리고도 남았을거야. 너희들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대로 세계정복, 우주진출, 천하통일 뭐든 해버렸겠지. 하지만 3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물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뜻이겠지. 죽은 문명이니까.”
교수의 말을 들은 프릴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아민 제국의 생존자가 아직도 살아서 정체를 숨긴채 지상에 숨어살고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걸까요?”
아그루스 제국 이전에도 이 땅 위에서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문화도 정치 체계도 다 달랐지만 모든 나라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들은 모두 힘을 원했다.
국가의 힘은 강한 군대에서 나온다. 더 강한 힘을 추구하는 군대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점은 결국 마법이다. 이 땅 위에서는 유물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었다. 유물을 중심으로 나라가 생겨나고, 유물을 잘못 다뤄서 나라가 사라지기도 하고, 유물을 숭배하기도 했고, 유물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문명의 슬기가 발전하면서 유물을 모방해 열화판인 아티팩트를 생산하는 데에 성공하자 인류의 기술은 획기적인 변혁을 이루어냈다. 아티팩트는 유물 확보 단계에 머물러있던 인류의 지성 수준을 모방과 응용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셈이다.
조금 더 연구하면서 인류는 자신들의 인체의 구조가 아티팩트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걸 깨닫게 되고 마침내 자기자신을 아티팩트처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니 우리는 이를 마법이라고 부른다.
모든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앞을, 미래를 향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마법 만큼은 그 반대다. 유물과 마법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과거로 향하려 몸부림친다.
유물은 대체 누가 남긴 걸까? 아그루스 제국은 '선조들이 남겼다' 고 말한다. 그러나 아그루스 제국 이전에 온 대륙이 혼란스럽던 시대에도 모든 나라들은 유물에 대해 '선조들이 남겼다' 라고 말했다. 전설의 검은 제국이 아그루스 제국보다도 더 먼저 대륙을 통일했던 암흑 시대에도 유물은 여전히 '선조들이 남긴' 것이었다.
그렇게 역행과 역행을 거듭하다가 결국 선사 시대의 벽에 가로막혔던 인류는 고대 언어인 아민어를 연구했고, 녹사르 제도의 유적에서 발견한 아민어 문헌을 해독하면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선사 시대의 벽 너머에도 문명이 있었다. 고작 유물 하나에 죽고 사는 우리가 한없이 작고 하찮게 보일 만큼 찬란한 문명이 있었다. 아민 제국. 모종의 사건을 통해 멸망하고 지금은 심해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지만 지금도 인류는 아민 제국이 남긴 그림자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렇게 굉장한 문명을 가진 제국이 과연 정말로 하루아침만에 사라질 수 있을까? 지금도 그들이 남긴 입김이 안개처럼 후대의 문명을 떠돌고 있는데 정말로 그들이 흔적도 없이, 한 명도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누군가는 살아남지 않았을까? 우리가 닿고 싶어하는 영역으로 이끌어줄 계승자가 어딘가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역사를 좋아하는 프릴에게 있어서 아민 제국은 그야말로 환상의 결집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릴이 자신의 간절한 기대를 털어놓아도 보통은 좋은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하하!! 재미있는 가설이로구나!”
푸그앙 교수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프릴의 얼굴이 귀끝까지 빨개졌다.
“비웃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으으...”
“미안하구나.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렴. 비웃은 게 아니야, 긍정적인 의미로 웃는 거지. 역사를 전공했다는 내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조차 두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구나. 오늘 수업은 내가 너에게 배우고 가네.”
“제, 제, 제게서 교수님이 배우신다니요, 그, 그런....”
“아무튼 그 질문은 나도 정답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학문적 식견을 토대로 말해주자면..... 아민 시대 고대인들의 평균 수명을 특정할 수 없으니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부강하고 거대한 제국 하나가 깊은 바다밑으로 가라앉아 버릴 정도의 대사건을 겪고도 살아남아서는, 3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후대인들의 세상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자. 그런 존재라면 ‘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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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누가 내 얘기 하나? 자꾸 귀가 간지럽네.”
사감실에 앉아서 연유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던 에반 플루토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귀를 후비적거리는 에반에게 엘리아가 주의를 주었다.
"교내에서 귀를 파는 지저분한 행위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귀 파러 일일이 학원 밖까지 나갔다가 들어와야 한다고?"
"당신을 제 후임자로 눈여겨보고 있는 제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이 품위있는 모습을 보여야하지 않겠어요?"
"아 알았어. 하여간 번거로운 부르주아의 관습이란."
그렇게 투덜거리며 연유커피를 마시는 에반에게 엘리아가 각설탕이 든 유리병을 건냈다.
"설탕 더 필요하신가요?"
"아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다고. 다음부터 내껀 연유를 4분의 1만 넣어주지 않겠어?"
"그렇게 연유를 적게 넣으면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텐데요."
"애초에 난 커피를 단맛으로 먹는 입맛이 아닌지라..... 아니 잠깐만!! 뭐하는 거야?"
엘리아는 각설탕을 넣어두는 병에 자신의 연유커피를 부어버렸다. 저 설탕병은 커피에 덜어먹을 각설탕을 보관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냥 엘리아 기준으로 한잔 분량의 설탕이였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시죠?"
"아무것도 아니야..."
태연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휘휘 젓는 엘리아를 보며 에반은 애써 경악스러운 기색을 감추었다.
"아무래도 넌 췌장이 두개 달려있나봐."
"혹은 이렇게 해야 희석이 될 정도로 쓴맛나는 삶을 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죠."
"그런가."
엘리아의 말에 뼈가 들어있는 게 느껴졌다. 쓴맛나는 삶이라. 에반은 구태여 그녀의 과거나 현재의 삶에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드러워져 있나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괜한 참견은 NPC의 임무에도, 사감대리의 업무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우습다. 자신을 밀어내고 싶어하는 이곳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될 줄이야.
"사감대리의 일은 어떻습니까?"
"사감대리라고 거창하게 말해봐야 기숙사 업무는 네가 거의 다 하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필요하다 싶으면 부담없이 맡겨줘."
"딱히 당신에게 뭘 부탁하는데 부담을 느낀 적은 없는 걸요.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만 감사하면 뭐해? 교무부 애들이 믿어주질 않잖아. 이것 좀 봐, 짜증이 확 나네!"
에반이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투덜거렸다. 기껏 기숙사에서 이성 교제하던 커플들을 다 잡아냈건만 기숙사 사생들을 모함하고 있다는 소리나 들었다. 엘리아가 오르토스 학원 측에 협조를 요청해서 이성 기숙사 무단 출입자 명단을 받아낸 덕에 반박할 자료를 손에 넣었지만, 그 자료들을 대조해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모든 불필요한 수고는 온전히 에반의 몫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다 서로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래. 바뀌는 게 없으니 생각이라도 좋게 해야지 뭐 어쩌겠나. 아 맞다. 그나저나 여기 사생중에 프릴 루에리아 라는 애 있지?"
"루에리아 양이요? 네, 혹시 루에리아 양에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그 녀석이 떨어뜨렸던 단어장을 내가 가지고 있거든. 돌려줘야 하는데 내가 방에 찾아가면 그 녀석도 그렇고, 룸메이트들도 그렇고 불편하지 않겠어?"
에반은 프릴의 단어장을 엘리아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너만 괜찮다면 이걸 그 녀석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다만?"
"가능하다면 직접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야 상관 없다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루에리아 양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있어요. 남자라면 누가 됐건 일정 거리를 두려고 하는 강박이죠."
"아아, 그러더라. 사실 이 단어장을 잃어버린 것도 갑자기 내가 불쑥 다가가서 인사하는 바람에 떨어뜨리고 도망가 버려서거든."
"도망갔다고요? 당신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도망가? 그 녀석이 도망갔지. 아무래도 남성 공포증인가? 나랑 마주치니까 불쌍할 정도로 벌벌 떨더니 내가 단어장 주워주려고 살짝만 움직였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서 도망 가더라고."
에반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설명해줬지만 엘리아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뭐야 그 반응은?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아, 실례 했습니다. 혹시 다른 학생과 헷갈리신 건 아닌지요?"
"여기 단어장에 이름도 써놨잖아. 그 녀석이 다른 학생 단어장을 들고 다녔을까?"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상하네요."
"뭐가?"
"루에리아 양이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많은 학생들이, 특히나 남학생들이 루에리아 양을 무서워하는데 말이죠."
"그 다람쥐 볼따구만한 녀석이 무서울 구석이 어딨다고? 오히려 자기가 겁먹어서 거리를 두는 거 아니야?"
"루에리아 양은 자신이 정한 거리 이상으로 남자가 다가오면 매우 불쾌해하고 언짢아합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억지로 들이댄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다들 좋게 끝나지 못했죠."
"뭐야? 내가 직접 만난 거랑, 네가 설명해주는 거랑 괴리가 너무 큰데?"
"저 역시 당신이 말한 겁먹은 루에리아 양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겠습니다."
"뭐지...?"
"아무튼 루에리아 양이 그런 강박을 가지게 된 이유와 배경은 모르지만, 바람직하다고는 못하겠죠. 그런데 만약 당신의 말대로 루에리아 양이 당신에게만 다른 반응을 보인다면.... 어쩌면 루에리아 양의 강박을 개선할 기회가 될지도..."
"신경 써주는 건 좋지만 싫다는 애한테 억지로 떠먹이지는 말라고."
"어려운 걸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루에리아 양을 따로 불러내 드릴 테니 단어장을 직접 돌려주고 결과를 제게 알려주시겠어요?"
에반은 왠지 귀찮은 일에 말려들 징조를 직감했지만, 어차피 자기가 할 일이고 또 엘리아의 부탁이니 해보기로 했다.
"알겠어. 내가 한 번 만나볼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