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1-2. 우리를 지켜봐주세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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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왕조의 찬란한 영광
가득한 아그루스(Agrus) 제국의 미래를 빛낼 별들이 자라나는 곳. 라쿠이르(Lakuir) 푸르른 학문의 샘에 영민한 총아들 한데 모였으니, 시리우스 아크륀의 위대한 현자성(賢者星) 그 별빛 아래 길이길이 만민의 칭송을 받을 그 이름 루나칼립스.
루나칼립스 학원의 지도원이 된 것을 축하하며, 지도원으로써 마땅히 갖춰야 할 자세를 상기시키고 긍지를 고취시키고자 해당 신규 지도원 안내서를 배부하니 항시 소지하며 바른 자세로 정독할 것.
루나칼립스 학원은 단순한 마법 연구기관이 아닌, 위대한 아그루스 제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총명한 청소년들을 유능한 지도계층으로 성장시키는 일류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지도원 역시 막중한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책임의식은 물론 알맞은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필수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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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들 있네."
이런 자뻑질 가득한 선전물이나 읽게 하려고 내 시간을 뺏었단 말인가? 에반 플루토는 첫 페이지의 서문만 읽은 신규 지도원 안내서를 휴지통에 구겨 넣었다. 에반은 만사 귀찮다는 듯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서는 자신의 낡은 숙소를 둘러봤다. 기숙사 로비 구석의 안 쓰던 다용도실 하나를 정리해 마련한 숙소는 에반의 처우를 일목에 간추려 보여줬다.
"그 잘나신 일류 교육기관의 복리후생 수준이 이렇단 말이지?"
방이 별로라고 불평할 생각은 없지만,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무성의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나마 침구류는 기숙사에서 남는 걸 가져다 놔서 그런지 아주 푹신푹신하고 상태가 좋으니 참기로 했다.
"비바람 안 맞고 머리 댈 수 있는 곳이면 됐지. 그렇긴 하다만..."
그렇긴 하다만 자기 자신이 '이만하면 됐지' 라고 말하는 것과 남이 나한테 '이만하면 됐지' 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이 학원의 교직원들은 상류층인 학생들의 편의와 복지에 사활을 거느라 에반과 같은 하급 지도원들의 복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게 확실했다.
"뭐 그런 거야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부분이지."
에반은 의자에서 일어나 로브를 걸치고 장갑을 꼈다. 복장을 갖춰 입은 그는 숙소 밖으로 나가 힘찬 걸음을 뗐다.
그래, 마음에 안 드는 파견지지만 뭐 어떠랴? 지금까지 겪어온 더럽고 처참한 파견현장에 비하면 이런 학원은 그야말로 휴양지 아니겠는가? 고작 이 정도 찬밥대우에 빈정 상하면 S급이 아니지.
상류층이라 해봐야 재수 없는 졸부들이나 귀족 꼰대 늙은이들 상대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애들이라고 해봐야 덜하겠지 설마 더하겠는가? 누가 뭐라 떠들건 백전불퇴의 베테랑인 이몸을 막을 수 없다 이거야.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일을 하러 기숙사 로비로 나온 순간 에반이 마주친 것은 허리까지 내려올 만큼 길고도 아름다운 흑발이 돋보이는 여학생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 칠흑빛 비단결 같은 흑발의 고혹적인 매력에 시선이 사로잡혔지만 에반은 얘기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게 그 흑발의 소녀가 바로 학생회장 유리아 릴리스니까. 그녀는 에반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로 로비 중앙에 서있었다. 아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기세 좋던 에반의 발걸음은 유리아를 발견하자 덫이라도 밟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힐긋. 자신이 있는 쪽에서 뚝 끊긴 발소리를 들은 유리아가 에반이 있는 쪽을 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반은 그 자리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뒤돌아 선 뒤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에반 플루토 씨"
청아하지만 차가운 목소리가 에반을 불렀다. 유리아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은 순간 에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온 에반은 문을 닫고 잠가 버리고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난 못 들었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난 누구하고도 마주치지 않았고, 당연히 아무도 날 부르지 않았어. 음, 음. 난 그저 놓고 온 물건은 없나 싶어서 확인 차 돌아온 것뿐이다.'
괜히 또 유리아의 눈에 띄었다가는 지청구만 한바탕 잔뜩 들을 게 분명하니 여기서 조금만 사리다가 가기로 했다. 아마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았을 테지. 에반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한 번 삼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 되냐? 아니 애초에 난 뭘 잘못하지도 않았잖아?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에반은 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지금쯤이면 갔겠지? 아직도 로비 중앙에 서있으려나? 설마 날 기다리는 건 아닐 테고."
에반은 문을 살짝만 열어서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려 했다. 그런데 문을 살짝 열어보니 어느새 숙소 앞으로 온 유리아가 바로 앞에 서서 에반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반은 신속하게 문을 다시 닫으려 했으나 유리아가 한발 빨리 문틈으로 발을 끼워 막았다.
"뭐 하시는 거죠?"
"너야말로 남의 방 앞에서 뭐 하는 거냐?"
"용건이 있습니다."
"누구한테?"
"누구겠습니까?"
"모르겠는데."
"당신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당신을 보고 불렀는데, 당신이 도망 치길래 당신 방에 찾아왔으니 누구에게 용건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하! S급 지도원 에반 플루토를 찾는 거였구나."
"아닙니다."
"그럼 지도원 에반 플루토를 찾는 거였구나!"
"아닙니다."
"그럼 엘리아 공인 사감대리 지도원 에반 플루토?"
"아닙니다."
"......"
에반은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럼 에반 플루토."
"그렇습니다."
"너 말이야... 그렇게까지 날 지도원이라고
부르기 싫어?"
"저번 아침에 말씀 드렸는데 아직 부족하신 모양이군요. 그때 못 다한 컴플레인을 지금 풀어볼까요?"
"아니, 그것만큼은 봐줘라."
“무의미한 잡담은 이쯤 해두죠. 당신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네가 나한테 무슨 할말이 있는데?”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에반은 내키기 않았지만 거절해봤자 좋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니 유리아를 숙소로 들였다.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숙소를 본 유리아가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계셨던 겁니까? 난방이 제대로 되긴 합니까?”
“잠만 잘 수 있으면 됐지. 침대는 푹신푹신하더라.”
“필요한 물품이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엘리아 사감님께 말씀하세요. 엘리아 사감님이 야박한 분도 아니시니 당신이 진정성 있게 부탁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해서 총무부에 품의해주실 겁니다.”
“됐어. 난 너희들처럼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니거든. 막 살아도 별 지장 없어.”
“그렇지만……”
“난 태어날 때부터 역마살이 낀 몸이라 한 곳에 오래 살았던 적이 없거든. 그러니 자기가 생활하는 공간을 꾸민다던가 이것저것 들여놓는다던가 그런 건 관심이 도통 안 생기더라. 그러니 이 얘기는 이쯤 해두자고. 날 찾던 용건이라는 게 내 걱정 해주는 건 아니잖아?”
유리아는 그의
숙소에 대해서 뭐라 더 말하고 싶었던 기색이지만 에반이 단호하게 마무리를 지은 탓에 그냥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이라고 해도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 오늘 들었던 생각을 당신에게도 확실하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생각?”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어제 당신이 사감대리 권한을 받아서 기숙사 점호와 야간 순찰을 맡았을 때 전 당신이 일을 제대로 안 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점호와 순찰이라는
작업은 꼼꼼하게 살펴봤는지, 아니면 대충 형식적으로만 했는지 결과로 보이니까 당신의 불성실함을 확실하게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야, 야, 아야… 너무 솔직하잖아, 적당히 얼버무려도 탓하는 사람 없는데.”
“그런데 당신은 기숙사에 교묘하게 숨어들어온 외부인들을 모두 적발해 엘리아 사감님께 인계했었죠. 업무를 구실로 여학생들에게 접근하거나 사생활을 방해하는 추태 또한 일절 보이지 않았고요.”
“아니 암만 내가 첫인상을 조졌어도 그렇지, 내가 그런 짓까지 할 사람으로 보였나?”
“중요한 건 제가 근거 빈약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태도는 마음에 안 들지만 당신은 맡은 일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 능력도 뛰어나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 저도 반성을 하고 생각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
그때 갑자기 유리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말을 뚝 멈췄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안 좋아지는 걸 본 에반이 이 휑하니 빈 방에서 대체 무얼 발견했길래 저러나 싶어서 그녀가 보고 있는 곳을 봤다. 유리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책상 한 구석에 놓인 휴지통이었다.
“아앗.”
에반이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굳어 섰다. 유리아는 휴지통에 처박혀있던 잔뜩 구겨진 신규 지도원 안내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차가운 시선을 에반에게 보내며 물었다.
“에반 플루토 씨, 이게 왜 여기에 있죠?”
“응, 거기가 내 책이랑 서류를 보관하는 곳이거든.”
“아아 그렇군요. 그럼 귤 껍질하고 감자 싹 도려낸 건 어디에 쓰려고 같이 보관해두셨죠?”
“아.”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이거 버리셨죠?”
“네, 버렸습니다.”
“제대로 읽어보시긴 하셨나요?”
“뭐 대충은 슥 훑어봤달까…. 어차피 뻔한 내용일 테니 적당히 넘겼달까…”
유리아는 꼬깃꼬깃해진 안내서를 펼쳐서 몇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에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했다.
"루나칼립스 학원의 교훈(校訓) 이념 세 가지를 말씀해보시죠."
"어.... 침묵, 개척, 낙원?"
"그건 고고학회의 이념이고요."
"정의, 지혜, 권능?"
"아무렇게나 찍지 마시고요."
"찍은 거 아닌데..."
"루나칼립스 학원 교가는 총 몇 절까지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4절!"
"루나칼립스 학원에는 교가가 없습니다. 국가만 제창합니다. 정말 앞부분도 읽어보지 않으셨군요. 표지는 넘겨 보셨습니까?"
"당연히 넘겨 봤지! 표지는 넘겨 봤지 응."
유리아는 기대도 안 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안내서를 덮고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다시금 에반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에반은 유리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해 먼산 바라보며 딴청 피웠다.
"에반 플루토 씨."
"네."
"제가 당신을 지도원이라 부르기 싫어하는 이유를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네..."
"에반 플루토 씨. 저는 당신에게 성과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성의를 요구하는 겁니다.
당신이 아무리 유능하다 하더라도 이런 식이면 당신의 입지는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내가 뭘 기대하겠어?"
"왜 그렇게 저희 학원을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는 겁니까? 명문 루나칼립스의 지도원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텐데 대체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딱히 이 학원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이 학원에 무슨 악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싫어할 이유는 없지. 애들이나 다른 직원들이 무시하기는 하지만 나도 삐딱하게 굴고 있는 건 사실이고. 그냥... 나는 나대로 복잡한 업계 사정이 뒤에 꼬여있어서 좋게 생각하기 어렵다고만 말해둘게."
에반이 모호하게 돌려말했지만 유리아는 더 이상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남의 업계 사정에 함부로 파고드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상인의 딸인 만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한 업계 사정은 제가 참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또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봤자 없는 마음가짐이 생겨날 수도 없겠죠."
유리아는 포기한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에반에게로 집중되었다.
"에반 플루토 씨, 저를 보십시오."
먼 산 바라보며 시선을 피하던 에반은 유리아의
부름에 그녀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리아가 보내고 있는 눈빛은 아까까지의 차갑고 날 선 눈빛이 아니였다. 무감정함을 애써 유지하는 얼굴에서 간절한 어떤 마음이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듯한, 야트막한 슬픔과 불안이 눈동자에 떠오르는 듯한, 뭐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진심이 와닿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는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말해 봐."
"저희를 잘 지켜봐주세요."
유리아의 부탁은 에반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항상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하던 유리아가 맞나 싶을 만큼 추상적이고 막연한 내용이었다.
"지켜봐달라고?"
"네. 사람들은 모두 이곳의 학생들을 구름 위에 떠있는 무지개라도 되는 양 선망의 눈길로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고, 저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막중한 역할을 짊어지고 자라왔기 때문에 남들에게 털어놓고 말할 수도 없죠."
에반은 유리아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대부호 재벌가의 2세들이 흔히 보이는 허영심이나 사치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저희 중 많은 학생들이 당신을 깔보겠지만, 부디 그런 저희를 무시하지 말고 지켜봐주세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직 고등학생일 뿐입니다. 분명 열심히 아닌 척 하던 약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외면하지는 말아주세요. 그게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한 가지입니다."
유리아는 책상에 놓았던 구겨진 신규 지도원 안내서를 다시 집어들고는 휴지통에 도로 버렸다.
"더 이상 당신의 마음가짐이니 태도니 지적해봐야 의미 없잖습니까? 이젠 당신의 평상시 태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테니, 저희에게 당신이 필요한 순간 만큼은 저희의 편이 되어주세요. 그 정도는 약속해주실 수 있겠죠?"
"학생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내주는 건가?"
"제겐 독단적으로 학생들을 대표할 권한이 없습니다. 학생 대 지도원으로 개인적인 부탁을 했다고 해두죠."
"알았어. 걱정 하지마."
"약속 꼭 지켜주세요. 오늘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리아는 꾸벅 인사를 하고 에반의 숙소에서 나갔다. 유리아가 나가고 혼자 남은 에반은 휴지통에 구겨진 채 버려진 지도원 안내서를 내려다 봤다. 그는 곤란하다는 기색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역시 마음에 안 드네. 그런 얼굴로 그렇게 부탁하면 내가 어떻게 거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