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1-1. NPC를 좀 믿어 주십시오 (5)
점호가 끝난 늦은밤. 루나칼립스 학원의 경비대 눈을 피해 잽싸게 담을 넘는 그림자가 둘. 자신의 줄리엣을 찾으러 온 오르토스 학원의 철없는 로미오들이 또 기숙사에 숨어들어왔다.
“시엘,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아.”
“여기까지 와놓고서 그게 무슨 소리야? 담까지 넘었는데 이대로 그냥 돌아가자는 거야?”
“담을 넘었다니? 그런 얘기를 선생님들이 들었다가는 벌점이 더 끼얹어질 거야. 우린 그냥 그.... 문이 아닌 쪽으로 들어온 것일 뿐이라고.”
그게 그거잖아. 한 마디 태클 걸려고 했던 시엘은 그냥 한숨을 쉬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어, 같이 가!!”
“큰 소리 내지마 이 멍청아.”
“멍청이라니.... 나도 상위권은 아니여도 나름 성적 나쁘지 않은 편인데.”
“어휴 됐다. 너랑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들키겠어. 따라올 거면 잠자코 따라오라고.”
“시엘. 아무래도 난 그냥 돌아가야겠어.”
“뭐?? 오늘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설레발치던 건 너였잖아? 왜 니가 빼는 건데?”
“난 새로 온 사감대리인 NPC가 초짜 허당일 줄 알고 그랬던 거지. 근데 기숙사에 미리 숨어있던 선발대가 점호 때 전멸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고.”
“흥. 날 그 모질이들이랑 동급으로 보지 말라고. 절대로 들키지 않는 비장의 수를 가져왔다고.”
“그 비장의 수라는 게 여장이야?”
“으윽?!! 시끄러!! 불만 있냐?!”
“아니 불만 있다는 게 아니라... 왜 화를 내고 그래 흑...”
시엘은 또래 평균보다 작은 체구와, 가느다란 다리, 뽀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여자로 오해 살 법한 곱상한 외모를 갖고 있는데 여기에 스커트와 검정 스타킹, 가발까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는 여학생이 완성되었다.
“대체 루나칼립스 교복은 어디서 구한거야?”
“누나 졸업할 때 슬쩍 챙겨뒀다 왜?”
“그렇게 해서까지 유리아 릴리스를 만나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건 묻지 좀 마. 기필코 유리아를 만나서 내 이름을 기억하게 할 테니까. 그보다도 어때? 이 정도 여장이면 그 사감대리인지 뭔지도 속일 수 있겠지?”
“물론이지! 오히려 진짜 여학생이였다면 사귀고 싶을 정도라구!”
“닥쳐 역겨우니까.”
“힝.....”
친구를 한바탕 매도한 시엘은 빈정 상한 그를 내버려둔채 정원 뒤쪽의 어두운 길을 타고 기숙사 본관 건물에 진입했다. 기숙사에 들어오는데 성공한 시엘은 더 이상 어두운 쪽길을 따라 움직이지도, 몸을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걷기 시작했다. 선발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마법이나 아티팩트를 써서, 혹은 속임수를 써서 자신을 숨기려고 했기에 역으로 수상한 냄새를 풍기고 만 것이다. 그러나 시엘은 자신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어야 마땅한 존재인 마냥 행동했다.
여장이 잘 받는 천성적인 외모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이 결합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손쉽게 기숙사 3층에 까지 도달한 시엘은 유리아 릴리스의 방 앞에 섰다.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하고는 문을 두드린다.
“누구시죠?”
잠시뒤 열린 문 너머에서는 편한 사복 차림의 유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윤기있게 찰랑이는 흑발, 구슬처럼 맑지만 탄환처럼 힘있는 눈동자. 그날 그 순간 시엘의 심장을 거꾸로 뛰게 만들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그녀였다. 시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누구시죠? 저희 기숙사에선 못 보던 얼굴이군요. 이런 늦은 시간까지 아직도 교복 차림인 걸 보면 기숙사 분이 아니신 건가요?”
“저기, 난....”
여장이 확실하게 잘 된 모양이다. 유리아도 시엘을 루나칼립스의 여학생 중 잘 모르는 누군가로 보고 있었다.
“곤란하군요. 기숙사 개방 시간이 아닌 때에 외부학생이 출입하는 것은 교칙에 위배됩니다. 이번 한 번만은 제가 특별히 못 본 체하고 넘어가드릴 테니 어서 빨리 돌아가세요. 용건은 내일 듣도록 하겠습니다.”
시엘에게 그토록 강렬한 기억을 남긴 것과는 반대로 차분하고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유리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저희가 아는 사이였는지요? 적어도 저에겐 편하게 반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인 사람이 없습니다만.”
“그럴 수가. 유리아는 친구 없는 거야?”
친구 없냐는 그 한 마디에 유리아의 표정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 짙어졌다.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당황한 시엘이였지만 아무리 마법을 통달한다 하더라도 뱉어놓은 말을 주워 담는 재주는 부릴 수 없었다.
“절 놀리러 온 것이 용건이라면 목적을 달성하셨군요. 그럼 이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공부에 방해됩니다.”
“잠, 잠깐!”
문을 닫으려는 유리아를 시엘이 황급히 말렸다.
“유리아, 넌 날 기억 못하겠지만 난 널 잊을 수 없어. 줄곧 널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학교를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으니까.”
“학교를 빠져나온다니 그게 무슨 의미죠? 죄송합니다만 지금 말씀하시는 의미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겠지.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해. 사실대로 다 말할게.”
시엘은 가발을 벗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가발을 벗은 시엘과는 달리 유리아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였다. 시엘 딴에는 이 정도면 여장을 풀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고 생각했지만, 유리아의 눈에는 그냥 장발 여학생이 단발 여학생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체 뭐하자는 걸까? 아닌 밤중에 찾아와서 뜬구름만 잡고 있는 눈앞의 소녀(는 아닌 것)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뿐인 유리아였다.
“어? 어어?”
“그냥 실례를 무릅쓰고 직설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돌아가 주실 겁니까?”
“유리아,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혹여나 당신을 상처 입혔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정말로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럴 수가! 나야, 나! 시엘 밀리우스!”
“시엘? 시엘 밀리우스라면....”
“이제야 기억이 나는 거야?”
“아니요. 확실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닌 것 같지만 역시 모르겠습니다.”
이쯤 되니 시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그때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상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싸웠다고요? 이렇게 제 방에 까지 다시 찾아오신 걸 보면 그때의 제가 정말 큰 실례를 범했던 모양이군요. 경위를 기억하지 못해 더더욱 화를 돋군 모양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어째서 사과하는 건데?!! 그런 게 아니야! 선발리그 순위권 진출전에서 너랑 맞붙었던 걸 말하는 거야.”
“선발리그라면 유성제(幼星祭) 말입니까? 순위권 진출전에서 전 분명히 빙결마법을 주력으로 쓰는 얼음의 창을 든 마법사를 상대했었는데.”
“그래 맞아! 그게 바로 나라구!!”
“그렇지만 그 빙결 마법사는 오르토스 학원의 학생이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남학생일 터.”
“난 남자라니깐.”
“...??!! 그럼 그 교복은? 스커트는? 스타킹은?”
“여장이지.”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유리아의 얼굴이 귀 끝 까지 새빨개졌다. 이유는 남자 앞에서 잠옷차림을 보였다는 점도 있겠지만, 여장을 하면서까지 이성 기숙사에 출입한다는 파렴치함을 이해하기엔 그녀의 사고방식이 봉건적이라는 점이 더 컸다.
“당장 돌아가 주세요!! 사감을 부르겠습니다.”
“잠, 잠깐! 유리아?!!”
“그렇게 편하게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주세요! 혹시나 친구 사이로 오해받을까봐 겁납니다!”
“너무하잖아! 애초에 친구 없다고 했으면서.”
“적어도 여장 취미를 가진 저질변태가 친구인 것보다는 없는 쪽이 낫습니다.”
“저질변태라니!! 널 만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럼 더 싫습니다!!! 왜 저랑 엮으시는 겁니까?”
둘이 옥신각신 하는데 복도 끝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이렇게 시끄럽냐?”
“이 목소리는?! 사감대리입니다!”
“젠장!”
시엘은 황급히 가발을 썼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변조하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잠시 뒤, 사감대리 에반 플루토가 안 자고 기숙사 복도에 멀뚱멀뚱 서있는 두 여학생(처럼 보이는 남학생 한 명과 진짜 여학생 한 명) 앞에 도착했다.
“........”
“.........”
에반 플루토와 시엘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오고갔다. 에반을 마주보고 있는 그 학생은 오똑한 콧날과 부드러운 어깨선을 가진데다가 표정에서도 여성미가 드러나는, 루나칼립스 학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학생이었다. 거기에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시리’ 하는 표정을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메소드 급 뻔뻔함까지 결합되니 금상첨화였다.
문제는 상대가 에반 플루토였다는 점이다.
“티는 전혀 안 나는데, 역시 결정적인 부분에서 어설프다.”
에반은 시엘을 여기저기 훑어보고서 그렇게 한 마디 했다. 시엘은 순간 속으로 움찔했지만 천연덕스럽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기분 나쁜 시선으로 훑어 보고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은 중징계 대상인 거 모르시나요?”
“몰라. 오르토스 학원 교칙의 징계사항을 내가 어떻게 아냐.”
“오, 오르토스 학원?? 무슨 뜻이죠?”
“내가 좀 전에 너의 여장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어설프다고 했지? 다음부터는 속옷까지 여성용으로 입고 오라고. 그러면 ‘아아 이 새끼는 진짜구나’ 하고 성의 정도는 인정해 줄 테니까.”
역시 들켰다. 시엘이 손짓하자 바닥이 얼어붙더니 복도 끝까지 이어지는 빙판이 생겨났다. 빙판에 발을 디딘 시엘은 순식간에 복도 끝 계단 앞까지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간 시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5초 남짓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잽싸네.”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을 때입니까? 안 잡으러 가시나요?”
“잡으라고? 네 남자친구 아니야?”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유리아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사실 에반도 다 알고 일부로 장난치려고 던진 말이지만, 유리아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상상 이상으로 냉담했다.
“전 고민할 게 많은 사람입니다. 학업에 집중하기도 벅찬 이 시기에 이성교제 같은 데에 할애할 시간은 없습니다. 더욱이 상대가 저런 여장취미의 불량아라면 논할 거리도 없겠죠.”
“그냥 던져본 말이야. 하여간 싸늘하긴. 자, 따뜻하게 이거나 마셔.”
에반은 유리아에게 보온병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죠?”
“커피야.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생각해둬.”
유리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온병 뚜껑을 열자 달짝지근하고도 온화한 커피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웬일로 당신이 배려심을 발휘하시는 거죠?”
“무슨 말이 그래? 난 언제나 배려심 넘친다고. 그러니 이렇게 사감대리로 엘리아에게 인정받은 거 아니겠어?”
“엘리아님은 현명하신 분이지만 솔직히 이 번 만큼은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군요. 전 당신을 지도원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이 예이 맘대로 하셔요.”
“여전히 그 천박한 말투는 교정이 시급하군요. 게다가 당신이 주신 이 커피는 대체 뭐죠? 터무니없이 달잖습니까? 절 커피 맛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시는 건가요?”
“그 정도야?”
“당신 수준을 알만하군요. 그래서 이건 당신 작품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수준 낮은 안목으로 고른 카페에서 사온 건가요?”
“응 엘리아가 직접 만들어 준거야.”
“........”
“너의 시식평은 엘리아에게 잘 전달해줄게.”
“역시 당신이라는 사람은 상대할수록 저만 손해군요. 시간이 아까우니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도 여기서 절 놀리는 거 말고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네 말이 맞네. 지금쯤 여장을 하고 여학교 기숙사를 쏘다니고 있을 용자를 잡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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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달려도 복도가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계단을 내려왔는데도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진다. 루나칼립스의 기숙사는 3층짜리 건물이라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내려온 계단을 모두 세면 체감상 10층은 넘을 것이다. 도망치느라 바쁘던 시엘이 숨이 차오기 시작하자 위화감을 눈치 챘다.
"미궁인가. 그렇지만 교수도 아니고 일개 지도원이 공간에 간섭하는 마법을 부린다고?"
시엘은 이번에는 반대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려 하던 그때 에반 플루토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그렇게 부지런히 가시나? 세상은 둥그니까 그렇게 자꾸 걸어 나가면 한 바퀴 빙돌고 제자리로 돌아와도 눈치 채지 못하겠는걸."
에반 플루토가 아래층 계단을 통해 시엘이 있는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분명 시엘은 꼭대기층에서 그를 마주쳐서 한참을 내려가며 도망쳤는데, 따돌린 줄 알았던 그가 아래층에서 올라온다니, 역시 이 공간은 왜곡되어 있다.
"얌전히 나를 따라 사감실로 가서 경위서를 쓴다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주마."
"싫다면?"
"초면부터, 그것도 지도원을 상대로 반말이라니. 인성머리는 남성복 주머니에 넣어두는 바람에 놓고 왔나보구나."
"흥. 나는 내 학교 선생이나 교수들에게도 존댓말 안 써."
"아 그래? 그렇다면 인정이지. 인정. 난 만인에게 싹바가지 없는 타입의 캐릭터를 싫어하지 않아."
"본인과 비슷해서?"
"정답."
"그럼 사양하지 않고 싹바가지 없이 굴어야지."
시엘이 에반을 향해 손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보석처럼 투명하고도 단단한 얼음결정이 맺혀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유부리며 서있던 에반이 거대한 얼음덩어리 안에 꼼짝도 못하고 갇혀버렸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얼음은 일반적인 얼음과 다르다. 원소에 대한 이해도가 깊고, 풍부한 마력까지 갖춘 마법사가 만들어낸 얼음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내구도를 가질 뿐만이 아니라 불 속에서도 잘 녹지 않는다.
시엘은 설국인답게 오로지 빙결마법만을 고집스럽게 전념해온 마법사다. 그는 에반을 얼려버린 자신의 얼음을 손으로 두드려보았다. 이 정도면 암석보다도 견고하다. 흡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시엘은 이 미궁의 출구를 찾기 위해 뒤돌아섰다.
"기숙사 내에서 허가받지 않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금칙 사항이야."
"...?!!?!"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가. 뒤를 돌아서자 그곳에는 물 한 방울 묻은 흔적조차 없는 에반 플루토가 서있지 않은가? 경악한 나머지 목소리도 안 나온 시엘이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텅 빈 얼음덩어리가 있었다. 불과 뒤로 돌아서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빙결상태를 풀고, 얼음덩어리를 깨뜨리지도 않고 빠져나와서는, 자신의 바로 등 뒤에 서 있다고?
선발대가 점호 때 전멸했다는 소식이 문득 떠올랐다. 시엘은 눈앞의 사감대리가 자신과는 레벨이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사감대린데, 왜?"
"농담하지 말라고. 고작 사감대리 비정규직 지도원이 이렇게 공간을 가지고 노는 수준의 마법을 다룬다고? 당신 정체가 뭐야?"
"거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데 사감대리 무시하지 말자."
시엘이 에반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천장을 향해 위로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한겨울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숨쉬어라. 우즈라스(Ujlas)."
복도를 덮친 한기가 한층 더 강해졌다. 시엘의 손끝에 아름다운 얼음의 결정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꿰뚫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겨울의 창 우즈라스가 그 자태를 갖추었다. 창을 바로잡은 시엘이 그 선단을 에반에게 겨눴다. 우즈라스를 본 에반이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울의 창을 본 딴 아티팩트라... 모조품이지만 엄연히 차기 왕권 후보자를 상징하는 무기인데. 귀하신 분께서 무슨 일로 이런 늦은 시간에 누추한 기숙사를 다 찾아오셨을까? 그것도 치맛자락 살랑거리시면서.”
“남의 집안사정 참견하는 것도 사감대리가 하는 일인가?”
“하긴 그건 아니지. 그나저나 괜찮겠어? 아무리 남의 학원이라 해도 교직원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네 이미지에 타격이 클 텐데?"
"상관 안 해! 왜냐하면 내 이미지는 원래 이렇거든."
"설마 넌 오르토스에서도 이렇게 망나니인거냐?"
그렇다는 대답을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시엘은 에반을 찌르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에반은 물러서지도, 가드를 올리지도, 방어자세를 취하지도, 반격할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뭐하는 거지? 이미 무언가를 설치해둔건가? 아니면 단순한 블러핑인가? 젠장 속내를 도저히 모르겠잖아.'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서있는 에반을 보며 시엘의 머릿속이 불안함에 찼지만, 심리전 따위에 넘어가지 않고 찌를게 있다면 찔러버린다는 자신의 성향에 집중하기로 했다.
'할 테면 한 번 해봐라 이거지? 그럼 사양하지 않고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어느덧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에반이 우즈라스의 리치 안에 들어왔다. 시엘은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에반을 힘껏 찔렀다. 어차피 충분히 강해보이던데 이 정도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지는 않으리라.
텅! 저돌적으로 쇄도하던 우즈라스가 갑자기 무언가에 막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어어...어??"
시엘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데에도 시간이 잠시 걸렸겠거니와, 파악하고 나서도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는 데에 또 시간이 필요했다.
에반은 우즈라스의 창끝을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골렘에게도 상처를 입힐 만큼 예리하고, 살짝만 스쳐도 그 자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그 우즈라스의 창끝을 맨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일격을 위해 참 많은 생각을 해야 했겠지. 어째서 방어를 하려 하지 않는가? 꿍꿍이가 있어서? 함정인 것인가? 만약 공격이 성공한다면 남의 학교 교직원을 다치게 한 책임을 어떻게 지지? 그럼에도 너는 그런 생각들이 공격을 망설이게 하게끔 내버려두지 않았어. 오로지 타겟만을 바라보는 직선적인 움직임. 랜서의 소양을 갖추었구나. 하지만....."
에반이 창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겨울의 창 우즈라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경악한 시엘은 거의 누웠다고 봐도 될 정도로 체중을 실어서 창을 잡아당겼지만, 날카로운 날붙이를 꽉 쥐고 있는 에반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어설픈 건 여장하는 솜씨만 그런 게 아니구나."
에반이 창끝을 준 손에 주먹을 꽉 쥐자 우즈라스가 고드름 마냥 간단하게 금이 가버렸다.
쨍그랑! 하는 청명한 파열음과 함께 시엘의 멘탈도 조각이 나버렸다. 그는 자신의 창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부분은 다 깨져버렸다. 좌절감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그는 못쓰게 된 자신의 아티팩트를 거두었다.
"일어나라. 천방지축 까불고 다니려면 그에 따르는 쓴맛을 감당할 수는 있어야할 거 아니야."
"씨... 말하지 않아도 일어날 거거든."
시엘은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분하다는 듯이 에반을 노려보지도 않았고, 소중한 아티팩트가 망가졌다며 울지도 않았다.
"사감실로 가자. 아직도 대가를 치를 게 남아있다면 또 반항해도 괜찮다."
"됐어. 그냥 사감실로 갈 테니까 너희들 교칙대로 실컷 혼내라고."
에반은 기세가 꺾인 시엘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토록 끝도 없이 펼쳐지던 계단이 이번에는 한번만 내려오자 1층 로비로 이어졌다.
"당신! 이름이 뭐야?"
사감실로 가던 도중 시엘이 에반을 노려보며 그렇게 물었다.
"내 이름을 기억해서 뭐하려고?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몹시도 싫어하는지라."
"그렇지만 나는 기억해둬야겠어!!"
"흠...."
잠시 생각에 빠진 에반이 입을 열었다.
"에반 플루토.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불리고 있다."
"본명은 아니란 거지. 뭐 됐어. 에반 플루토, 절대로 이 이름을 잊지 않을 거야."
그렇게 오르토스 제일의 악동도 새로운 사감대리 에반 플루토 앞에서 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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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감실 소파에 앉은 에반 플루토가 어젯밤 기숙사에서 펼쳤던 자신의 무쌍담을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떠벌떠벌거리는 에반을 무시하며 엘리아는 벌점장부를 찬찬히 읽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엉? 왜 한숨이야?"
"불순한 이성교제로 벌점을 받은 사생이 단 하루에 22명이나 나오다니, 칭송받는 루나칼립스 기숙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이게 다 사감인 저의 부덕함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 한창 그럴 때인 애들인데 네가 부덕하고 자시고가 있겠나. 아무튼 이번 점호 일로 내 유능함이 입증되었겠지? 그렇지?"
"안 그래도 그거와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던 참입니다."
"기대되네. 뭔데 뭔데?"
엘리아가 책장 한 곳에 정리해놓은 갈색 서류봉투에서 문서를 꺼냈다.
"우선 신규 NPC의 배치 부서를 기숙사로 고정하는 데에 대한 2차 여론조사 결과입니다."
"지난번 투표 때는 반대표가 압도적이였다고 했지?"
"이번 2차 투표 결과는 말이죠. 반대표의 비율이 더 늘어났습니다."
"아니 어째서!!!"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닐까요? 달콤한 시간을 방해받은 여학생들의 원망이 반영되었을 테니까요."
"흥. 철딱서니 없는 애들 의견 난 관심없어."
"어른들 의견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당신이 작성한 벌점 장부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교무부 측에서 신뢰하지를 않더군요. 당신이 무고한 학생들을 모함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으니 자세히 조사해서 보고서를 수정하라는 지시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아 그리고 저번에 원인불명의 화재로 전소되어 버린 기숙사 응접실 말입니다. 그것도 당신 책임인 것으로 교무 회의 때 결정이 났습니다."
"아 뭔데!!! 왜 열심히 일했는데 도리어 여론이 더 나빠지는 거야아아!!!"
에반 플루토는 자신의 새 파견지가 격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는 루나칼립스의 교정에 에반의 외침소리가 덧없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