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1-1. NPC를 좀 믿어 주십시오 (4)
“밥값 벌 시간이구나. 먹은 건 감자밖에 없으니 딱 감자만큼만 일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넓은 아량으로 참아줄까나?”
“아량 보충에 도움이 되라고 소소하나마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기숙사 소등을 앞둔 밤 시간. 자신의 부름을 받고 사감실을 찾아온 에반에게 엘리아가 간식을 대접해줬다. 연유를 섞은 커피와 마카롱이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진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고, 빛깔 좋은 마카롱이 시각을 자극했다.
“역시 나 챙겨주는 건 당신 밖에 없네. 그럼 잘 먹을게.”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문 에반이 미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달다. 아니 원래 단맛에 먹는 거긴 한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좀 과하게 단 걸? 게다가 꼬끄 크기도 위아래가 비대칭이고. 꼬끄가 달면 크림 필링이라도 퓨어한 맛을 내야하는데 얘 마저 엄청 달잖아. 이런 건 가게에서 돈 받고 팔만한 물건은 아니야. 어디서 산거야?”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여윽시 당 떨어지는 야밤에 일할려면 이렇게 단걸 먹어줘야지! 일한다 인슐린, 일한다 나 자신! 이런 건 가게에서 돈 받고 팔만한 물건은 아니야, 나 혼자서 다 처먹어야 하니까.”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마카롱을 입에 우겨넣는 에반과는 달리 엘리아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에반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미안타. 내가 사교능력이 워낙 쓰레기여서 사적인 얘기는 잘 나눌 줄 모른다. 일 얘기나 할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셔서 참고가 되었으니 감사하고 싶습니다. 다음번에는 피드백을 해서 더 개선된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어.”
건조하지만 따뜻한 엘리아 특유의 호의가 에반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더 어색해지기 전에 당신의 제안대로 일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엘리아는 파일철로 된 장부 한 권을 꺼냈다. 라벨에는 <사생 벌점 관리 장부> 라고 적혀있었다.
“여기 아가씨들도 벌점 받을 짓을 하긴 하나보구나.”
“지위와 배경이 어찌되었건 10대니까요. 어른들이 정한 룰을 모두 지키며 살기에는 젊음이 아깝겠죠.”
“흐흐 못된 어른 노릇을 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나려 해. 이런 좋은 물건이 있는 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
벌점 장부를 받은 에반은 보기 드물게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생들이 기를 쓰고 당신을 밀어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거 같군요.”
“그걸 이제야 알다니 사감님 치고는 감이 늦으시네. 아무튼 일단 한 번 정독을 해볼까?”
에반이 파일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에는 벌점 대상 지정 기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다.
“벌점 제도의 목적과 의의. 사생들의 교칙 위반에 대한 경각심 고취를 통해 명문 루나칼립스 학생으로서의 품위 유지에 기여하며 어쩌구저쩌구.... 전형적인 탁상공론식 서술이네.”
“참고로 그 서식지를 작성한 건 접니다.”
“글에서 벌써 현명함이 느껴져. 누군진 몰라도 이런 훌륭한 사람을 탁상에 앉혀놨으니 학원의 미래가 밝구나 밝아.”
에반은 더 추해지기 전에 그냥 입을 닥치기로 결심하고 파일을 읽어나갔다. 주요 벌점 대상 내역은 크게 ‘교칙 위반 경고’와 ‘품위 유지 권고’로 나뉘어져 있었다. 교칙 위반 경고에 해당하는 사항은 무단 외박, 무단 외출, 통금 시간 미준수, 기숙사 내 음주 및 흡연 등이 있었고, 품위 유지 권고에 해당하는 사항은 청소 상태 불량, 복장 불량, 늦잠으로 인한 지각 혹은 결석, 기숙사 내 고성방가, 사생 간 싸움 등이 있었다.
“어디, 어디 내 앞에서는 온갖 고상한 척을 떨던 애들이 무슨 사유로 벌점을 받았나 구경 좀 하자.”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당신에게 그 장부를 준 건 업무를 위해서지 불순한 만족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어디 볼까..... 음???”
캐시 룬워터 <벌점 15점> 사유 : 교칙 위반
(기숙사 내 이성교제)
래니 샤인빌 <벌점 15점> 사유 : 교칙 위반
(기숙사 내 이성교제)
로라 퓨어리 <벌점 15점> 사유 : 교칙 위반
(기숙사 내 이성교제)
제인 핸슨 <벌점 15점> 사유 : 교칙 위반
(기숙사 내 이성교제)
피아 루이스 <벌점 15점> 사유 : 교칙 위반
(기숙사 내 이성교제)
“어떻게 벌점 사유가 이렇게 한결 같냐?”
“우리 기숙사의 사생들은 학교에 있는 동안에나, 사생활에서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는 영애들이기에 실수로라도 벌점을 받을 일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철저하고 가지런한 사생들조차 뿌리치지 못한 유혹은 바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였죠.”
“낭만적이다. 싹 다 뿌리를 뽑아버려서 응원해주고 싶어.”
에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벌점 장부를 넘겨봤지만 모든 페이지가 이성 교제로 일관되게 도배되어 있었다. 열띤 청춘들의 흔적을 본 에반이 쓴웃음을 지으며 장부를 덮었다.
“사실 루나칼립스 학원의 교칙은 ‘교내에서의 연애 금지’ 입니다. 그냥 ‘연애 금지’ 와는 다르죠. 학원 바깥에서 학생 신분임을 드러내지 않으면 건전한 선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 이성 교제를 허용합니다.”
“허용하는 게 아니고 금지할 수 없는 거겠지. 다들 학원 바깥에선 상류층 영애들인데. 한창 가문끼리 혼사가 오고 갈 나이잖아.”
“말씀하신대로입니다. 그런데 학생 시절의 풋풋함이니 청소년기의 추억이니 뭐니 하면서 굳~이 교복 차림으로 만나서 굳~이 교정 안에서 연애를 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얘들은 기숙사 방에서 몰래 밀회를 하다 걸린 애들이란 말이지? 내가 봤을 때 얘들은 금단의 과실을 따는 짜릿한 스릴을 추구하는 부류들이야.”
“사감으로서 반드시 엄격히 지도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일을 당신에게 의뢰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 동안은 그 벌점 관리 장부를 당신께 위임할 테니 몰래 기숙사에서 남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사생들을 지도해주세요.”
“맡겨만 달라고. 근데 생각해보니 여긴 여학교인데 남학생들이 어디서 오는 거야?”
“당신은 정말로 이 학원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모양이군요. 시리우스 재단의 마법학원은 이곳 루나칼립스 외에도 남자학교인 오르토스 학원이 있습니다. 두 학원 간의 거리가 가까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르토스의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은 과감하게 기숙사를 빠져나와 이곳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 길 찾아온 손님대접을 소홀히 할 순 없지.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줘야겠네.”
“철부지들이라고는 해도 시리우스 재단의 남학생입니다. 마법에 재능과 소질을 타고난 영재들이라는 뜻이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이들은 더 영리하게 허점을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네가 감당 못 할 정도로?”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마법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사감이 된 것이 아닌 만큼 ‘학생’이 아닌 ‘마법사’를 지도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입니다.”
“걱정 마. 내가 잘 보필해줄 테니까.”
벌점 장부를 챙긴 에반이 싱긋 웃었다.
“당신에게 맡겨도 괜찮은 걸까요? 솔직한 말씀으로 전 당신을 잘 모릅니다. 과거도 이력도 밝혀진 게 없는데다가 전투 특화라고는 들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하는지도 알려진 게 없으니까요.”
“그런 건 몰라도 돼. 굳이 알 필요 없으니까. 우리 회사 캐치프라이즈가 뭔지 알아?”
엘리야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에반이 엄지를 척 치켜 올리며 말했다.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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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사감 엘리아가 사생 여러분께 안내말씀드립니다. 지금부터 10분 뒤 야간 점호를 실시하오니 사생 여러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금일 점호는 제가 아닌 NPC 에반 플루토 씨께서 진행할 예정이니 사생 여러분은 착오가 없으시길 바라며, 사감대리의 권한을 위임 받은 에반 플루토 씨의 지시를 잘 따르도록 당부하는 바입니다.]
엘리아가 공지사항을 전하는 목소리가 반향 마법을 통해 기숙사 전체에 울려퍼졌다. 기숙사 중앙 로비 소파에 앉아있는 에반은 한손에는 벌점 장부를, 다른 한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점호를 위해 기숙사로 귀가한 학생들이 사감의 장부를 들고 앉은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에반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10분 뒤 점호 시작이라. 그래, 10분 안에 꼭꼭 숨어라 이 늑대 녀석들아. 나랑 하는 숨바꼭질은 엘리아가 술래일 때랑은 달라도 완전 다를 거야.”
혼잣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반을 몇몇 사생들이 영 좋지 못한 시선으로 흘겨보고 지나갔다. 물론 고깝지 않은 시선에 익숙해진 그는 그러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점호 시작 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엘리아가 챙겨준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 고여 있는 액체에서 폭신한 단내와 원두의 향기가 곰실곰실 피어났다.
“이게 그 연유커피라는 건가? 우유커피랑은 좀 다른 모양이지?”
한 모금 홀짝 마시고는 혓바닥을 골고루 적시도록 퍼뜨린 에반이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보온병 뚜껑을 도로 닫아버렸다.
“커피연유라고 부르는 쪽이 더 적절하겠어.”
연유의 경쾌한 단맛이 커피의 쓰면서도 중후한 매력을 가진 향을 완전히 압도해버리고 있었다. 아마 연유커피를 세상에 처음 선보인 자가 기획한 의도는 단맛과 쓴맛의 기묘한 공존이 포인트였으리라. 그렇다면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한쪽 선호에 치중한 이 연유커피는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에반이 학원에서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호의였기에 그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엘리아 녀석, 어지간히도 단걸 좋아하나보다. 나중에 로쿰이라도 하나 사줘야겠어.”
댕-- 댕-- 댕--
중앙 로비의 괘종시계가 정각을 알리는 중후한 종소리를 냈다. 점호시간이다.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감대리 씨.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엘리아가 목에 걸어줬던 목걸이는 착용자끼리 텔레파시를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드는 특수한 아티팩트였다. 에반은 엘리아가 보내온 텔레파시에 응답했다.
[잘 들려. 내 목소리도 잘 들리지?]
[연결 상태가 양호하군요. 텔레파시의 사용법은 이미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왜? 육성으로 대답하는 실수라도 할까봐 걱정한 거야?]
[그렇다고 말한다면 자존심 상하실까요?]
[글쎄 조금은.]
짧은 텔레파시를 주고 받는 사이에 에반은 사생들의 숙소가 늘어선 긴 복도에 도착했다. 이 복도에 4인실이 12개 있으니 이론상 총 48명의 사생들이 점호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에반은 느낄 수 있었다. 그 48명에 해당되지 않는 추가 인원이 숨어있다는 것을.
[어떻습니까?]
[4명. 이 층에만 4명이 있어. 위층에 3명이 더 있으니 총 7명.]
[벌써 인원수를 파악하신 겁니까?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아시는 거죠?]
[업계 베테랑의 노하우지. 여기 오기 전까진 추적이 주요 의뢰였으니까.]
[불신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 당황스러울 따름이군요. 제가 점호를 할 때는 어쩌다 한두 명 발견했는데 7명이나 있다니.]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미리 기숙사에 들어와서 점호가 끝날 때까지 숨어있는 작전을 쓰는 커플만 일곱 팀이니, 점호가 끝난 뒤 심야에 순찰이 뜸해질 무렵 숨어들어오는 팀이 합류한다면 더 많아지겠지.]
[최근엔 불시 순찰을 좀 더 자주 돌았는데 좀처럼 숨어들어오는 기색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선도 더 다양하게 짰었는데 그런 거로는 부족했던 걸까요?]
[어쩔 수 없어. 너 혼자 신경 쓰는 거랑, 약삭빠른 젊은 애들 여럿이 모여서 잔머리 굴리는 거랑 붙으면 어느 쪽이 이기겠니? 그냥 120명 있는 기숙사에 지도원이라고는 관리사감 딱 한명 붙여놓은 학교 윗선이 머저리인 거야.]
[그렇다고 기숙사 행정 보고서에 ‘너희는 머저리다’ 라고 써서 제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지금은 당신이라는 인력이 붙은 걸 다행으로 여기는 수밖에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주는 거야? 그거 감동이네. 인정을 받았으면 실망시켜선 안 되겠지?]
에반은 첫 번째 방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점호하겠습니다.”
에반이 문을 열자 가지런하게 정돈된 방 안에서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은 네 명의 여학생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편하게 쉬는 공간이라면 어느 정도 흐트러진 게 보일 법도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사생들에게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각지게 정돈된 이불하며,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심지어 간식거리들도 오와 열을 맞춰서 늘어서 있었다.
에반이 그녀들의 부지런함에 속으로 내심 감탄하던 차에 사생 중 한명이 에반을 힐난했다.
“아무리 엘리아 님이 임명하신 사감대리더라도 남자가 사생활 공간에 들어오는 것은 불쾌합니다. 점호를 마치셨으면 힐끗힐끗 둘러보지 마시고 어서 나가주세요.”
“남자가 들어오는 게 불쾌하다니? 웃기네.”
“뭐가 웃기다는 거죠?”
“그렇잖아? 같은 남잔데 쟤는 되고 나는 왜 안 돼?”
“쟤....라고요?”
에반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아무것도 없는 벽이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감대리 님. 혹시 남들 눈엔 안 보이는 게 보이신다던가 하시나요?”
“허허.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이 침착함, 이 태연한 연기력. 과연 엘리아가 넘어갈 만하구나.”
그렇게 말한 에반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안 넘어간다, 아가야.”
에반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스파크가 방의 한쪽 벽을 직격했다. 그러자 억! 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튕겨져나간 남학생 한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격을 맞고 바닥을 뒹굴었던 그 남학생은 잽싸게 창문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으윽!!”
“카모플라쥬 미러. 난반사를 유도하는 아티팩트. 마법이 아니라 광공학적 착시현상을 일으키니까 수상한 마력을 발산하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지. 하지만 빛을 모으는 성질 때문에 광선이나 전격계열의 마법에 추가피해를 받기도 해.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에반은 분한 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학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전류는 근육을 수축시켜. 그러니 손에다 때리면 물건을 못 쥐게 할 수 있고, 혀에다 때리면 영창을 못 외우게 할 수 있고, 다리에다 때리면 서있지도 못하게 할 수 있지. 그래,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에반은 자신의 손가락을 휘감은 푸른 번개의 불빛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벌점 장부를 펼쳐서 조금 전에 자신을 힐난한 그 여학생에게 건넸다.
“저 녀석 네 남자친구지? 여기에 네 이름 적고 서명해.”
“왜 저라고 단정 짓는 거죠?”
“나 바보 아니다. 기숙사내 아티팩트 소지 허가 장부쯤은 진작에 다 정독했어. 네가 등록한 아티팩트가 바로 저 카모플라쥬 미러고. 엘리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너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서 점호 때마다 방을 샅샅이 뒤지지는 않은 거야. 하지만 난 얄도 짤도 없어.”
“......”
할 말을 잃은 사생은 결국 벌점 장부에 이름을 적었다. 목적을 달성한 에반은 바닥에 누워있는 남학생을 질질 끌고 방밖으로 나왔다.
“넌 임마, 다리에 힘 돌아오면 사감실 가서 지도사감 한번 보고 가라. 그냥 가버려도 상관은 없어. 나한테 안 잡힐 자신만 있다면. 알겠냐?”
에반은 남학생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복도 한 구석에 앉혀놓은 뒤 점호를 마저 이어나갔다.
“점호하겠습니다.”
에반은 문을 열고 안에 네 명의 사생들이 모두 다 있는 걸 확인하기만 하고는 곧바로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10초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절차상으로는 명단을 확인하고, 책상과 바닥과 화장실의 청결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소지품 검사까지 진행하는데 에반은 그런 거 없이 쿨하게 머릿수만 맞는지 세보고는 휙 가버렸다. 방 안에 있던 사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미 에반은 다음 방으로 가버렸고, 더 이상 그녀들의 개인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점호하겠습니다.”
그 다음 방도 문 열고 인원수만 확인하고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점호하겠습니다.”
그 다음 방 역시 열린 문이 닫히기 까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만약 앉아있는 사생 중 하나가 학업의 피로 탓에 잠깐 졸았더라면, 그녀는 사감대리가 점호하러 왔다간 것도 눈치 못 챘을지도 모른다.
“점호하겠습니다.”
그렇게 2분도 안 돼서 4개의 방의 점호를 마친 에반이 다음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점화하겠습니다.”
콰쾅!! 에반의 손끝에서 솟구친 불길이 문짝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안쪽에서는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커플 두 쌍과, 그들이 푸는 이야기를 경청하던 두 사생이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놀란 나머지 그대로 굳어서 에반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문틈에다가 포탈을 슬쩍 열어놓았네? 점호하러 온 사감은 엉뚱한 방으로 보내버리고, 자기들은 안에서 하하호호 할 생각이였나 본데. 포탈 같은 건 매개체가 되는 문을 그냥 이렇게 날려버리면 그만이지.”
에반이 벌점 장부를 내밀었다. 이렇게 두 커플 더 잡았다. 사감실로 보낸 뒤 점호를 재개했다.
“점호하겠습니다.”
에반이 문을 열고서 인원수만 확인한 뒤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에반이 떠나자 안에 있던 사생들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예상이 적중했어.”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씨익 웃었다.
“저 NPC는 마법이나 아티팩트로 수작을 부려놓은 방은 귀신같이 눈치를 챘지만 그렇지 않은 방은 대충 훑어만 보고 가버렸지. 그러니 그냥 화장실에만 잠깐 들어가 있게 하면 안 걸리고 넘어갈 수 있어.”
“역발상의 승리랄까.”
“됐으니까 이제 나오라고 하자. 딱 좋은 부분에서 끊었던 웬디의 데이트 에피소드를 마저 들어야지.”
“그래, 그래, 기다려봐. 허니~~ 여자화장실 구경은 실컷 했어? 이제 나와 허니~~”
사생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에반 플루토가 벌점 장부를 내밀고 서있었다.
“꺄아아아!!"
“이 허니가 니 허니냐? 그럼 이 벌점은 니 벌점이다.”
에반은 한쪽손으로 축 늘어진 남학생의 뒷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아마 그 체격 좋은 남학생은 에반의 겉모습만 보고 얕본 모양이다. 에반을 힘으로 이겨보려다 역으로 제압당해서 세면대에 얼굴 박고 물구경한 흔적이 역력했다.
“자 이쪽 층은 마무리 되었으니 위로 올라가볼까?”
벌써 60점의 벌점을 긁어모은 에반이 더 뿌듯한 성취감을 찾으러 기숙사 2층 복도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르토스 학원의 남학생들은 어떤 수문장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루나칼립스 학원의 기숙사로 청춘을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