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화 〉1-1. NPC를 좀 믿어 주십시오 (3) (3/88)



〈 3화 〉1-1. NPC를 좀 믿어 주십시오 (3)

바깥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어디까지나 바깥 날씨는 좋았다. 화창하고 푸른 하늘이 드리운 바깥과는 다르게, 에반이 본사에서  서비스 관리자와 마주 앉아서 인상을 구기고 있는 기숙사 응접실 내부는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엘리아가 다과를 준비해왔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찻잔이 외롭게 식어가고 있었다. 본사에서 학원 까지 먼 길을 행차한 서비스 관리자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나무로 가공된 상자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현장직 NPC 에반 플루토 씨.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관리자가 자신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물어보았다. 크기는 암닭 한 마리가 웅크리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에, 우편함 같기도 하고, 또 새집 같기도 했다.

“모르겠습니다.”

에반이 잘 살펴보지도 않고 대강 대답했다.

“이것은 루나칼립스 학원의 학생들이 학원에 대한 건의사항을 자유롭게 작성해서 익명으로 제출할 때 쓰는 이른바 ‘우리들의 목소리’ 라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건의사항은 학생회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수리되기 때문에 이 ‘우리들의 목소리’ 에는 내용물이 생길 일이 거의 없었죠. 적어도 당신이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관리자가 상자 뚜껑을 열어서 테이블에 쏟자 종이쪽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관리자는  쪽지 무더기 중 하나를 집어들어서 소리 내어 읽었다.

“저희 학원에 NPC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이미 훌륭한 지도원님들이 많이 있는데 이력도 과거도 정체도 불투명한 수상한 남자를 들여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후우....”

관리자는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에반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쪽지를 집어 들어서 낭독했다.

“안 그래도 인상이 어두침침한데 표정도 구기고 다녀서 보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렇게 생긴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자꾸 은근슬쩍 설거지를 마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마력이 묻은 식기로 식사를 할까봐 불쾌합니다.”

“아  그 정도는 봐줘라.... 곱게 자라서 손에 물 한번  적셔 본 것들이 기숙사 사생 120명의 설거지를 매일 해야 하는 내 입장은 생각 못하는 거냐? 그리고 식기에 마력이 묻는다는 건 또 뭔 개소리야??”

“말투가 너무 상스럽습니다. 다른 지도원님들처럼 격식 있는 경어를 쓰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의 필요성을 알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일하게 둘 이유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딱 봐도 그건 유리아가 썼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재생되는 걸.”

“학원을 위해 일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은 지도원에게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인사도 안하는 새 NPC에겐 그런 아주 기본적인 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인사하면 싫어할 거면서.”

“NPC가 눈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데 기분 나쁘니까 아는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거 봐, 얨병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썅!!”

“툭하면 비속어를 남발하는 게 듣기 거슬립니다.”

“..........”

“NPC라는 거 ‘Not Person’s Child (사람 새끼가 아님)’ 의 줄임말인가요?”

“이 싸가지 없는 금수저 가시나가?!!”

“집에 가고 싶다 본사 개자식들아. 멋대로 뺏어간 내 휴가 돌려줄 땐 이자까지 쳐서 줘라. 그리고 애프터서비스 관리자는   얼어죽을 거냐 니들 노후자금이나 관리해라....?? 뭐지 이건?”

“아, 그건 제가 써서 넣은 겁니다.”

“좀 전엔 이게 뭔지 모른다고 하셨던 분이 여기다가 건의사항을 적어 넣으셨다 이겁니까?”

“모르고 넣었다고 해두죠. 솔직히 우리들의 목소리 상자라면 제 목소리도 들어갈 권리 정도는 있지 않나요?”

“흠흠...”

관리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을 골랐다.

“여하튼 말입니다. 당신을 향한 이 검은 러브레터들을 하나하나 읽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치 못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당신은 업계의 문제아라서 태도 개선 교육을 워낙 자주 받았다 보니까 굳이 교육을 또 할 필요는 없겠죠. 효율 측면에서 보나, 어차피 당신이 들을 생각이 없다는 측면에서 보나.”

관리자가 아직 첫페이지를 펼치지도 않은 직원 태도 교육 핸드북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오오 그거 깔끔하고 좋네요.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거죠?”

“아뇨, 물론 안 되죠.”

“쳇.”

“요점만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당신에게는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만약 한 달 안에 당신이 고용주와 거래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당신을 고용하는 데에 들었던 모든 비용을 배상하고 다른 NPC로 교체 투입하겠다는 게 본사가  학원에게 제시한 제안입니다.”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그냥 지금 당장 바꿔주면 되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어째서?”

관리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반 플루토 씨. 당신은 영업이라는  해본 적이 없나보군요. 장사는 신뢰를 잃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한 번 신뢰를 잃은 이상 시리우스 이사장은 우리가 어떤 NPC를 보내준다고 한들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당신 때문에 잃은 신뢰로 인해서 저희 회사와 이 루나칼립스 학원의 거래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그 영업적 손실은 가히 천문학적입니다. 시리우스 재단의 학원과 거래하고 싶어서 안달  회사는 대륙에 널리고 널렸는데 시리우스 이사장이 친히 우리를 선택했거늘, 당신 하나의 경망스러움 때문에 천우의 기회가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허.”

“이제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이 가진 무게를 실감하시겠습니까? 에반 플루토 씨.”

관리자는 찻잔에 따뜻한 물을 부어 홍차를 우려냈다. 그의 잔에서 찰랑이는 찻물 표면에 심드렁한 에반의 얼굴이 비췄다.

“방금 저 우리들의 목소리 상자를 보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당신에게 주어진 한  안에 뒤집어야할 여론이 정말 정말 안 좋습니다. 뭐 그래도 S급씩이나 되는 실력자의 수완이라면 이 정도는 난관도 아니겠죠?”

관리자는 껄껄 웃으며 홍차의 향을 음미했다. 차와 곁들여 먹을 과자는 필요 없었다. 눈앞의 유능한 젊은이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간식거리는 또 없었으니까.

“뭐 그래도 하실 말씀 있다면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제가 특별히 S급 NPC에게 예우를 갖추는 차원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본사에 전달해드리도록 하죠.”

관리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에반은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그.... 어디부터 말하면 좋을까요?? 음..... 야 이 쓰레기 새끼들아.”

“....?!!??”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쌍욕에 관리자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걸 다  책임으로 뒤집어 몰아놓겠다 이거냐? 뭐 양심은 안개전쟁 때 전사해서 고이 묻어두고 왔나? 애초에 난 니들이 강행한 혈청 투여의 후유증 때문에 휴가 낸 상태였으니 여기에 파견  거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은 못하지? 하기야 언젠 니들이 현장직의 사정 따위 생각했겠어?”

“......”

관리자는 마치  볼 걸 봐버린 듯한 얼이 빠진 표정이였다. 입에 가져다 대려다 만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보아 그는 손을 떨고 있었다. 멍하니 흐른 잠시간의 침묵 뒤 정신이 돌아온 관리자가 다시 말을 골랐다.

“흠흠!! 당신이  파견 조치에 대해 불만이 많은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불만을 이유로 파견지의 고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건 프로답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프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왜 프로인줄 알기는 해?”

“그건...”

관리자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솟구친 날카로운 그림자들이 응접실 안을 집어삼켰다. 마치 이빨과 같이 날선 어둠의 장막은 안에 있는 사람이 에반의 심기를 거스르고 허튼짓을 하는 순간 곧바로 숨통을 물어 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관리자의 얼굴에서 거만한 표정이  사라졌다.

“어째서...?! 혈청 때문에 한동안은 힘을 제대로 못 쓸 텐데..!”

“그래. 덕분에 하루 종일 뻐근하고 피로가 가시질 않아.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암만 힘을 제대로 못 쓴다고 해도 너 하나조차 요리 못할 줄 알았어?”

“다, 당신...! 허튼짓 했다가는 절대로 무사히 못 넘어가!”

에반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 관리자의 손에서 찻잔을 뺏었다. 그리고는 벌벌 떨고 있는 관리자를 내버려두고 그가 열심히 우려낸 홍차를 홀짝 마셨다. 명문 학원 응접실답게 찻잎도 고급으로 준비했는지 향이 꽤나 훌륭했다.

“내가 이래서  같은 본사 관리직 놈들을 싫어해. 현장직 NPC를 자기들 손발 마냥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현장직 NPC들이 어떻게 되먹은 녀석들인지 전혀 모른단 말이지.”

에반이 그림자를 거두자 관리자가 허억허억 숨을 고르며 말했다.

“에반 플루토...! 당신의 부적절한 행동은 모두 본사의 평가서 작성 시 사실대로 기재될 겁니다.”

“그러던가.”

“기분이 여과 없이 태도로 드러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도  드는지요? 조금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성? 애초에 지금 내 기분이 태도로 드러났으면 니가 진작에 죽었지 여태 살아서 그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었을까?”

“경망스러운 발언은 삼가십시오. 전투력이야 당신이 우위더라도 관리직인 제가 현장직인 당신보다 직급이 더 높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극상을 벌인다면 인사부에 조치를 요청할 겁니다.”

관리자가 인사부를 들먹이자 에반이 공격적인 태도를 살짝 물렀다.

“아, 이거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제가 아파서 그랬어요.”

“아프다는 건 혈청의 부작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봤을 땐 당신이 아프다고 생각될만한 구석은 전혀 없습니다만.”

“과도한 업무량, 열악한 근무환경, 부당한 처우, 수면 부족, 감자 과잉 섭취 그리고 날아간 휴가로 인한 심신미약이거든요? 지금이라도 당장 저를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해주시면 나을 것 같네요.”

후우. 하고 관리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가방에서 수상한 상자를 하나 꺼냈다. 크기는 우리들의 목소리 상자보다 작지만 고풍스러운 문양이 잔뜩 새겨진 게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당신이 이렇게 비협조적이고 불량한 태도로 나올 거라는 것은 회장님께서도 이미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이것을 빌려주셨죠.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당신 같은 S급 NPC를 상대로 절 지켜줄 정도의 물건이라면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유물이겠죠.”

관리자는 기대로 가득한 눈빛을 하며 유물상자를 쓰다듬었다.

“자, 한 번 뭐가 들었나 구경해볼까요? 들고 오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던 만큼 훌륭한 게 들어있겠죠”

관리자가 유물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정육면체의 네모난 무언가가 있었다. 상자라고 하기에는 뚜껑이 없었고, 도구라고 하기에는 마땅히 용도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좀 더 임팩트 있는 걸 기대했던 관리자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흠흠. 외관은 다소 심심하군요. 별로 대단한 유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요?”

“본인이 가져와 놓고 나한테 물어보는 건..... 잠깐?!! 그건 여제석(女帝石)이잖아!! 손대면 안 돼!!”

“여제석? 그게 무슨...... 크어어어억?!!!”

관리자가 여제석이라는 이름의 유물에 손을 가져다 대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기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반응한 유물에서 간헐적으로 방출된 에너지는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할 정도로 강한 섬광의 형태로 발현되어 응접실 전체를 집어삼켰고, 가히 압도적인 마력의 쇄도에 응접실의 목재 가구들이 순식간에 타들어가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 유물의 힘은 이윽고 멋모르고 손을 댄 가련한 인간을 지배해버렸다. 정신을 잃은 관리자의 눈이 초점을 되찾았을 때에는 이미 다른 인격이 깃들어 있음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상태였다.

“플루토.”

관리자가, 아니 관리자의 몸을 그릇으로 삼은 누군가가 에반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만을 빌려 내는 것이 아니였다. 그의 의지에 지배당한 응접실이라는 이 공간 전체, 세계의 작은 일부분이 한 목소리를 내듯이 합창하고 있는 것이였다.

“이거, 이거, 회장님께서 직접 행차하실 줄은.”

에반이 실소를 토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관리자의 육신을 매개체 삼아 잠시나마 물질세계에 현현한  존재는 에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이에 얼굴 보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찌하여 날 이렇게 피해 다니는 것이지?”

“그냥 니가 스토커 아닐까?”

“으흠. 주군을 섬기는 데에 적합한 태도는 물밑에 두고 온 모양이구나.”

“그래. 이제 와서 건지기엔 너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어. 그러니 좀 싹바가지 없어도 감안해야  거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의 시선은 평소와 달랐다. 항상 썩은 동태눈 같이 생기 없던 그의 눈에 간만에 활기가 돌아와 있었다. 긴장이라는 걸 하는 게 얼마만인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삐딱하게 서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에반은 여차하면 바로 공격할 태세를 은밀히 갖추고 있었다.

“적의를 풀어라, 플루토. 나의 이빨인 네가 나를 물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도 네가 가장 위대한 제국의 가장 위대한 여제라고 착각하고 있나본데, 지금의 넌 그저 돌덩이에 속박당한 채 빙의할 그릇을 찾아 헤매는 악령 사념체에 불과해.”

“그래. 난 사념체지. 그러니 내 사념이 남아있는 한  죽지 않고, 내가 살아있는 한 내 제국도 멸망하지 않아. 아무리 깊은 물밑에 묻어놨더라도 말이지.”

증오인가, 야망인가. 보랏빛 복수의 불꽃으로 이글이글 타들어가는 눈동자에서부터 검은 무언가가 퍼지기 시작하더니 곧 관리자의 얼굴 전체를 덮어 나갔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해. 그 잘난 사념 때문에 또 무고한 사람 송장 치우게 생겼잖아.”

“네 말이 맞군.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이 하찮은 육체가 무너져 내리겠지. 다음번에는 더 튼튼한 관리자를 구해야겠어.”

에반은 여제의 존재만으로 내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위상력이 학원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결계를 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에 대고 여제는 통보한다.

“내가 너에게 전해줄 말은 네가 방금까지 관리자에게 들었던 것과 별반 다를  없어. 이곳에서 성실히 일하고, 좋은 평판을 얻고, 시리우스의 신임을 얻어라.”

“왜? 시리우스를 그릇으로 삼을 생각인가?”

“물위의 백성의 육신에는 관심 없어. 연약하고 불완전하지.”

“그럼  학원에 건질만한 게 뭐가 있는데?”

“내가 건지고 싶은 건 내가 알아서 건져.  너의 일을 하고, 너의 몫을 챙겨라.”

“아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에반이 한껏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명문이니 뭐니 해봤자 이런 학원의 보조 지도원은 B급, A급 NPC 몇 명이면 충분해. 그런데 굳이 나를 파견했다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근데 그 이유는  알려주면서 ‘내 건 내가 알아서 건질 테니 넌 까라는 대로 까라’ 라고? 니가 뭘 건지려는 속셈인지 모르는데 내가 무슨 수로 까?”

“하찮은 불평불만은 접어둬라.  분명히 너에게 명령해두었다. 학원 내에서의 네 입지를 분명히 다지고, 이곳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어라. 시리우스가 NPC 교체를 연기하기로  기한은 이제  달 뿐이 안 남았으니 서둘러야 할 거다.”

“그래서 너나, 나에게 유익할 게 뭐가 있지?”

“우리 둘  각자가 원하는 걸 찾게 될 텐데 불만 있나? 넌 라비나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

라비나라는 그 이름을 듣자 에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꼴이 볼만 했는지 관리자의 얼굴을 빌린 여제가 웃어보였다.

“그 얼굴로 웃지 마. 열 받으니까.”

“물론이지.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면 그때에는 활짝 웃으며 널 안아 줄게, 플루토.”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주군과 이렇게 뜻이 안 맞아서야. 동기부여가 필요하겠지? 네가 한 달 안에 시리우스의 마음에 들지 못한다면 교체 NPC로는 아더레이를 지목할 생각이야.”

“하... 미치겠네.”

“아더레이가  자리를 대신해서 이 학원에 오면 무슨 재미난 꿍꿍이를 기획할지 벌써 기대되지 않니?”

“역시 당신은 악령이 맞아.”

한 번  싱긋 웃은 여제가 위상력을 거두기 시작했다.

“난 할  다했어. 이 연약한 그릇에 금이 가기 전에 어서 여길 떠나야 하니까 네 개인적인 얘기는 못 들어 주겠네.”

“어이구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습니다. 너한테 개인적으로 할 말도 없고.”

“다음에 만날 때는 칭찬할 만한 일이 있길 바라지.”

그  마디와 함께 여제는 관리자의 정신에서 떠나갔다. 보랏빛 섬광을 뿜어대던 여제석도 힘을 잃고 다시 평범한 정육면체 돌덩이로 돌아갔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관리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초토화  응접실 안의 숯더미가 된 의자 위에 앉아 있음을 발견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겁니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도 정도가 있죠!”

“아무튼 그런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죠.  어쩌다 보면 방 하나 쯤이야 홀라당 태워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건 제가 정말 많이 반성했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는 점입니다.”

“.....?”

관리자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신지배에서 풀려난 참이라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판단력이 다소 흐려진 점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갑자기 불타버린 방과,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에반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쉬운  아니였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인지기관에 단층이 생긴 것만 같았다.

“무튼 관리자님. 말씀하신 대로 한달 이내로  학원의 지도원으로 인정을 받아보일 테니 걱정 마십쇼.”

“정말 해낼 자신 있습니까? 이 학원은 학생이건, 선생이건 다들 프라이드가 장난이 아닙니다. 1달 밖에 안 되는 시간 안에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텐데?”

“S급 NPC라면 가능합니다.”

“세상에. 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얌전해지다니. 유물의 힘을 빌리면 이런 게 가능한 건가?”

“S급 유물이면 가능합니다. 덕분에 이 방이 다 불타버릴 정도로 열렬하게 반성했습니다.”

“그게 가능한 건가...??”

“S급 반성이면 가능합니다.”

“허어...”

“이제 이야기는 마무리 된 거 같으니 어서 돌아가시죠. 제가 정문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숙사 사감이 지금 이 난리통을 봤다가는......”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응접실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문짝은 정상적으로 열리는 대신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서는 반토막이 나버렸다. 박살난 문짝 너머로 엘리아가 이미 인테리어를 상실한 응접실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엘리아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천연 포커페이스의 인물이였지만, 미묘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눈썹이 그녀가 속으로는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무마하면 좋을까? 에반 플루토는 소리 없는 한탄을 삼키며 머릿속으로 S급 변명을 쥐어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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