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1-1. NPC를 좀 믿어 주십시오 (1) (1/88)



〈 1화 〉1-1. NPC를 좀 믿어 주십시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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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이 안개 속을 허우적거린 지도 벌써 몇 세기가 지난 건지 모르겠어.

높은 산꼭대기, 깊은 바다 밑, 드넓은 대지에 펼쳐진 도시의 우뚝 선 마천루. 우리가 처음 만났던 외딴 별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은 새 지저귀던 아담한 정원.

그래 정원. 상처에 바르던 연고도, 너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잘 수 있던 사과나무 그늘도, 너의 노랫소리도 모두 그곳에 있었지.

여기서 내려다보니  모든 게 하염없이 작아 보이지 않아? 우린 너무도 멀리 와버렸어. 매우 유감스럽지만 너도, 나도, 그녀도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어. 하지만 이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 네가 선택해야 해. 네가 결정해야 해. 나와 그녀가 멈춰 선다한들 네가 계속 앞을 향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끝이야.

아닌가? 사실 우리는 오래전에 진작 끝나있었고, 너는 이미 날 포기했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써 부정하는 것일 뿐일까?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어.
이 서신이 닿는다면 대답해줘, 루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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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루나칼립스 학원 이사장 시리우스님께


존경하는 시리우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안개전쟁 때 수많은 전장을 누빈 마법사로써 이름을 떨치고, 지금은 시리우스 재단의 설립자로써 젊은 마법사들을 양성해나가는 선생님께서 친히 저희의 고객이 되어주시니 저희 No Problem Company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 No Problem Company에서는 어떤 일이건 맡겨만 준다면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만능 도우미인 ‘No Problem Crew’ 이른바 NPC를 다양한 업체에게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사, 탁아, 배달, 건설 같은 허드렛일부터 회계, 통역, 암호 해독 같은 고급 기술 노동뿐만 아니라 호위, 암살, 추적 등의 전투 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의뢰를 수행해내는 다재다능한 인재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비상 상황 발생 시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원의 크고 작은 관리 업무를 수행할 NPC를 필요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 마법사 양성의 성지에 걸맞는 우수한 NPC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파견될 NPC에게는 이미 귀 학원 측에서 첨부한 업무 매뉴얼을 숙지시켰습니다. 3일 이내로 학원에 도착하여 업무에 착수할 예정이니 작업복과 숙소를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No Problem Company를 이용해 주셔서 다시  번 감사드리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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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roblem Company 고객 서비스 부문 앞.

일주일 전에 학원 관리를 맡길 NPC를 주문했던 루나칼립스 학원 총괄이사장 시리우스입니다. 미사여구로 색칠한 형식적인 인사말은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보내주신 NPC는 정말 형편없습니다.

몸가짐과 언행은 단정하지 못하고, 인사성이나 친절함도 찾아볼  없을뿐더러,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고자 하는 태도마저 결여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본원 루나칼립스 학원은 여학원인데 보내주신 NPC는 불친절한 남자다 보니 학생들의 불만이 솟구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귀사에서는 NPC에게 제가 보냈던 학원 업무 메뉴얼을 숙지시켜뒀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근무 이행 태도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 마법사 양성의 성지에 걸맞는 우수한 NPC를 보내겠다고 호언하셨는데, 귀사가 보기에 본원의 수준이 딱 이 정도인 건지 의심마저 들고 있습니다.

귀사가 판매처인 입장인 만큼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NPC를 고용하고 유지하는 비용은 적지 않습니다. 기숙사 하나를 신축하고, 강당을 리모델링할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을 투자했는데 얻은 거라고는 청소 하나 제대로  생각이 없는 게으름뱅이라면 구매자의 기분이 어떠할지는 굳이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시일이라도 빨리 다른 성실하고 용모단정한 여성 NPC로 교환해주지 않으면 본원은 법적으로 취할  있는 모든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만, 모쪼록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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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루나칼립스 학원 이사장 시리우스님께

보내주신 편지는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선생님께서 NPC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니 대단히 유감스럽고  당혹스러운 심정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점은, 저희 No Problem Company에서는 귀 학원과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마음을 담아 최상위권 NPC를 준비해드렸다는 점만큼은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하신대로 해당 NPC는 음침하고 생기 없는 인상에, 의욕도 없고, 태도도 불량하다는 점은 백번 동감하는 바입니다만, 그럼에도 저희 업체에 단 세 명뿐인 S급 NPC 중 한 명인 그의 유능함만큼은 가히 업계 1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딱 한 달만 저희를 믿고 해당 NPC를 지켜봐주십시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 NPC를 교환하기를 희망하신다면, 기꺼이 해당 NPC를 고용하는 데에  모든 비용을 환불 배상해 드리고 여성 NPC로 무상 교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No Problem Company를 이용해 주셔서 다시  번 감사드리며, 다음에는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NPC에게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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