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3 제 119 장 - 지하수맥 =========================================================================
“으음, 그럼 난 오늘 자네가 아니라 마스터와 얘기를 해야 되겠군.”
“그렇습니다. 마스터의 결정이 곧 저의 결정입니다.”
트란실라 백작이 침중한 표정으로 마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일단 내 얘기를 좀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들어봅시다.”
“감사합니다.”
트란실라 백작을 만난 것은 어차피 그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려는 것이다.
얘기가 잘되면 다행이고 수틀리면 바로 죽여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진혈의 뱀파이어인 트란실라 백작의 무력이 S클래스라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같은 S클래스의 진혈의 뱀파이어 펫인 마틴이 있으니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재 제4요새에는 일천 명의 뱀파이어가 있습니다.”
“숫자가 제법 되는군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 인간의 피를 흡혈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울은 트란실라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믿으셔야합니다.”
“뭘 보고 믿으라는 거지요?”
“이걸 보시면 아마 이해가 되실 겁니다.”
트란실라는 소울의 앞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주사기와 혈액팩을 보여줬다.
“이건 뭡니까?”
“보시다시피 주사기와 혈액팩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왜 보여주시냐는 말입니다.”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난 지금 스무고개를 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바로 얘기를 해주시지요?”
소울은 주사기와 혈액팩을 보고 트란실라가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직접 상황을 듣고 싶어서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
트란실라는 살짝 불만스런 표정을 짓더니 사실을 얘기했다.
“으음, 좋습니다. 제4요새에는 일천 명의 뱀파이어 외에도 삼천 명의 정예병사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 칠천 명도 함께 살고 있지요.”
“그럼 제4요새에 만천명이나 살고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들 삼천 명의 병사들은 모두 십년 이상 장기 근무하고 있는 정예병입니다. 이 주사기와 혈액팩을 이용해 삼천 명의 정예병의 피를 정기적으로 뽑아 일천 명의 뱀파이어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소울은 자신이 예상한대로 트란실라가 말을 하자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분명 인간의 피를 흡혈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결국 인간의 피를 흡혈하고 있지 않습니까?”
“삼천 명의 정예병에게 대가를 주고 일정한 피를 제공받는 것과 흡협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설마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정예병에게 대가를 제공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뱀파이어는 일주일에 최소한 작은 컵 하나분량의 피를 마셔야합니다. 1개의 혈액팩에는 최소 4개의 작은 컵 분량의 피가 나옵니다. 그러니 보통 정예병들은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번 정도 피를 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우린 일정량의 곡물과 고기를 제공합니다. 물론 원하는 자에 한해서 은화를 주기도 합니다.”
결국 일천 명의 뱀파이어를 살리기 위해 삼천 명의 정예병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헌혈을 한다는 말이다. 그 대가로 식량이나 돈을 받게 되니 그들에게는 큰 손해가 아니라는 논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견 타당한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4요새의 모든 뱀파이어들이 트란실라 백작이 말하고 있는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요?”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4요새에서 살고 있는 뱀파이어들 중에 이런 방식이 받아들이지 않는 뱀파이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뱀파이어들은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처형을 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4요새의 인간들이 저를 사령관으로 믿고 따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호오!”
이건 좀 의외였다.
사람들 앞에서 뱀파이어를 공개처형을 시키다니…….
자신들의 정체가 일반인에게 노출될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초강수를 둬서 민심을 얻은 트란실라 백작이 다시 보였다.
“하지만 영원히 트란실라 백작의 말을 듣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그래서 우리 일천 명의 뱀파이어들은 모두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만약 인간의 몸에 직접 손을 대서 흡혈을 한다면 즉시 심장이 터져서 죽는 것으로 말입니다.”
“으음.”
소울은 트란실라 백작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큐란이 커다란 상자를 하나 들고와 탁자 위에 놓았다.
“직접 확인하세요. 내 말이 틀린지 맞는지.”
“좋습니다.”
완패였다.
트란실라의 말은 거짓이 없었다.
소울과 마틴이 상자 안에 수북하게 쌓인 마법계약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들은 더 이상 트란실라 백작과 큐란에 대해 살기를 일으킬 수 없었다.
뱀파이어들이 이정도로 철저하게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놀랍군요. 본능을 억제하고 이렇게까지 통제가 가능하다니요.”
“쉽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연구와 노력이 따랐지요.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과 공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제4요새에 살고 있는 뱀파이어는 낮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연구진들이 개발한 약을 먹게 되면 태양을 직접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소울은 트란실라의 말에 놀라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이면서 마틴을 쳐다봤다.
마틴고 트란실라의 말에 크게 흥미가 돌았다.
자신이 낮에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전신갑옷으로 몸을 가리고 S클래스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란실라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틴도 이제 더 이상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트란실라 백작님의 말을 믿겠습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제4요새의 뱀파이어 일족을 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겠지요?”
“맞습니다. 인간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당연히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소울과 트란실라 백작은 서로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번 악수는 처음의 악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우의를 다지는 악수였다.
서로에 대한 적의가 해소되자 그들은 넷이 한 테이블에 앉아 가볍게 포도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안주로는 치즈와 육포를 꺼냈다.
“마스터,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 그게 뭡니까?”
“진혈의 뱀파이어는 마틴과 나만 남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또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딜란이 죽었다고 진혈의 뱀파이어의 맥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블, 코헤이, 새콘이 각각 뱀파이어의 가문을 이루고 있지요.”
“설마 엘라즈라 왕국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아닙니다. 이웃나라에 있습니다.”
“그럼 일단 저는 상관하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다른 나라까지 일부로 가서 그들을 쳐 죽여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마틴은 입장이 조금 다를 겁니다.”
“흐음, 그렇군요.”
소울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하늘아래 뱀파이어들과 절대 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마틴의 입장이었다.
“그건 차차 생각을 해보도록 하죠.”
“네, 그러셔야지요.”
소울은 마틴을 한번 쳐다보고는 트란실라 백작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제3요새에 그리즐리 웨이브가 일어난 것은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제4요새는 무사합니까?”
“당연히 무사합니다.”
“듣기로는 미노트 웨이브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제4요새의 방어력과 무력은 감히 제3요새와 비교할 정도가 아닙니다.”
“제4요새에 히어로가 많습니까?”
“아닙니다. 제4요새는 히어로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사하다고요?”
“하하하, 저희 종족의 무력을 너무 낮춰보고 계시군요.”
“으음.”
트란실라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보다 앞으로 해가 떨어지면 마블 족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블 족이라면 이웃나라의 진혈의 뱀파이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 엘라즈라 왕국과 이웃한 나라에 둥지를 틀고 있는 마블, 코헤이, 새콘 중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 세력입니다.”
“혹시 마블과 딜란이 무슨 친척 관계입니까?”
“마블과 딜란은 꽤나 절친한 친구사이입니다. 딜란이 죽은 것을 알면 마블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밤길 다닐 때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끄응.”
뭐가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기분이었다.
하지만 트란실라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울은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소울은 이날 트란실라 백작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서로 도울 일이 돕는 동맹관계를 가지기로 했다.
소울과 제4요새 사령관인 트란실라 백작의 비밀 회담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또한 비밀스럽게 끝이 났다.
하지만 뱀파이어, 특히 진혈의 뱀파이어인 마블족의 위협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 * * * *
쏴아아아아!
노스트라의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비가 내리고 있다.
국지성 소나기라서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들 말했지만 소울이 보기에는 폭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왠지 커피가 당긴다.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절로 운치가 느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메시엘에는 커피가 없다.
그러니 천상 커피 대신 차를 마셔야했다.
저택의 응접실을 밝히는 커다란 황촉들이 빗소리에 춤을 추자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몸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로브를 깊이 둘러쓰고 있던 세 명의 사내가 얼굴을 드러내자 응접실의 분위기는 일순 딱딱하게 굳어갔다.
“마스터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름이 뭐지? 에밀리 왕국의 레옹입니다.”
“레옹 왕자군.”
소울은 차를 홀짝거리며 눈으로는 레이첼의 남동생인 어린 레옹을 쳐다봤다.
에밀리 왕국이 망해버리지만 않았다면 꿈과 희망으로 웃음꽃을 피울 나이에 그는 누구보다도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잘생긴 소년 레옹은 이미 동심을 잃고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소울이 계속 차만 마시고 있자 옆에 앉아있던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소울의 눈치를 봤다.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려고 하다가 말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 말기를 몇 번째인 줄 모른다.
결국 말을 연 것은 레옹 옆의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었다.
“마스터, 저는 에밀리 왕국 왕실기사단의 기사 리차드입니다.”
“저는 에밀리 왕국 왕실기사단의 기사 윌리암입니다.”
“반갑다.”
소울은 리차드와 윌리암의 인사에 단답형으로 말을 했다.
그러자 두 기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시다면 본론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으음, 글쎄. 좀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번에는 레옹과 레이첼의 얼굴까지 난감한 표정이 됐다.
소울은 지금 목하 고민 중이다.
굳이 위험하게 이들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마나석과 젬스톤 광산은 탐이 났다.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마나석과 젬스톤 광산은 엘라즈라 왕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노라 왕국이 되어버린 옛 에밀리 왕국 땅에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들과 손을 잡는 것은 독배를 마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레이첼 때문에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한 것 같다. 하지만 레이첼에게 이미 허락을 했으니 지금에 와서 안한다고 쌩 깔 수도 없고……. 이거 정말 고민이네.’
소울에게는 차라리 북부대산맥 센트랄 고원 지하 대공동에 있는 노천광산을 가는 것이 더 안전해보였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레이첼에게 얘기는 들었겠지?”
“네? 아! 네.”
레옹은 소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급히 얼굴표정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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