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2 제 118 장 - 그리즐리 웨이브 =========================================================================
서걱!
쿠화아아악!
그리즐리 킹이 급히 자신의 다리를 오므리며 크게 비명을 터트렸다.
마틴이 번개같이 다가와 보라색으로 빛나는 클로로 그리즐리 킹의 오른쪽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린 것이다.
찐득한 피의 권능이 스며들어간 그리즐리 킹의 아킬레스건은 트롤을 능가하는 엄청난 재생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재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상처가 벌어지며 출혈이 심해지고 있었다.
휘익 휙휙휙 휘익!
그리즐리 킹은 이빨을 앙다문 채 정신없이 사방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콰콰쾅!
얼마나 힘이 좋은지 땅바닥에 박은 주먹으로 인해 폭음이 울리고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그걸 보니 빗맞아도 사망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장님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에 맞을 마틴이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가 빈틈이 보이자 순식간에 달려들어 왼발의 아킬레스건까지 잘라버렸다.
서걱!
쿠헤에에에엑!
그제야 그리즐리 킹이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쩔뚝거리며 주먹질을 멈췄다.
그리즐리 킹의 기세가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두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 모습에 마틴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방향이 그리즐리 킹 쪽이 아니라 그리즐리 킹의 호위전사들이 모여 있는 방향이었다.
마틴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주변 일대는 곧 그리즐리 전사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해졌다.
땅바닥에는 보라색 피를 흘려대는 수십 마리의 그리즐리 전사들의 사체가 가득했다.
[본, 마틴, 이제 그만 마무리하자.]
[예스, 마이로드.]
[네, 주인님.]
소울은 남은 그리즐리 전사는 그리즐리 언데드 전사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리즐리 킹을 향해 다가갔다.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부상을 당했어도 그리즐리 킹은 만만치 않은 강력한 마수다.
괜히 방심했다가 한방에 훅 가버리면 자신만 억울한 원귀가 될 뿐이다.
소울은 좌 마틴, 우 본을 거느리고 그리즐리 킹을 향해 다가갔다.
확실히 다른 놈들과는 달리 자신을 향해 뭔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챘는지 긴장하는 빛이 보였다.
그들은 그리즐리 킹의 코앞까지 다가가 섰다.
순간, 그리즐리 킹은 뭔가를 느꼈는지 곧바로 주먹을 휘둘러왔다.
붕!
스팟!
하지만 소울은 그리즐리 킹의 주먹보다 더 빨리 순간이동을 했다.
그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그리즐리 킹의 옆머리 위였다.
소울은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하자마자 바로 클레이모어를 빠르게 그었다.
촥!
그리즐리 킹은 소울의 클레이모어가 자신의 목 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기겁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클레이모어가 그리즐리 킹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 가죽이 조금 잘려서 보라색 피가 튀긴 했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즐리 킹을 공격한 것은 소울만이 아니었다.
그리즐리 킹의 커다란 동체 양 옆으로 마틴과 본이 스쳐지나가며 날카로운 클로와 대검을 휘둘렀다.
서걱! 촤악!
쿠아아악!
그리즐리 킹의 양쪽 옆구리가 길게 잘려나가며 보라색 피가 쏟아졌다.
그리즐리 킹은 고통에 입을 딱 벌리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이 잘린 두 다리로 그의 무거운 몸을 지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그리즐리 킹의 행동이 스스로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뒤로 자빠지게 만들었다.
쿵!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그리즐리 킹은 입안으로 차가운 클레이모어의 검신이 깊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리즐리 킹의 이빨에 클레이모어가 걸리기도 전에 위쪽으로 파고드는 클레이모어의 날카로운 칼날이 입천장을 비스듬히 쑤시고 들어와 뭔가를 갈라버렸다.
그 순간, 그리즐리 킹은 의식이 뚝 끊기며 새까맣게 암전되고 말았다.
털썩!
[주인님, 멋진 마무리이십니다.]
[마이로드, 판타스틱 한 공격이었습니다.]
[고맙다.]
소울은 마틴과 본이 차례로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자 그리즐리 킹의 냄새나는 입안에서 클레이모어를 뽑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깥 상황이 걱정된다. 빨리 마무리를 짓고 나가자.]
[네, 주인님.]
[예스, 마이로드.]
그리즐리 킹이라는 대적(大敵)을 생각보다 쉽게 처치했다.
본과 상성이 좋지 않은 그리즐리 킹에게 본의 연막은 쥐약으로 작용했다.
이번 일로 소울은 무조건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만약 그리즐리 킹이 이미 죽은 그리즐리 마법사를 무시하고 제3요새의 성벽을 직접 공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히어로들이 모두 힘을 합쳐 막아낸다고 해도 아마 극심한 인명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본은 일단 그리즐리 킹의 목을 잘랐다.
사체는 악어 입을 만들어 흡수해놓고 그리즐리 킹의 머리통은 긴 창에 꽂아 한손에 들었다.
본은 해골전투마를 소환해서 타고 원형의 요새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뒤를 그리즐리 언데드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소울과 마틴은 원형의 요새 남쪽으로 달려갔다.
세로성벽으로 이어진 길이 그곳에 있었다.
둘은 빠르게 세로성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 제3요새 성벽의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성벽의 상황은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상황으로 보인다.
물론 그리즐리의 공격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미 천 단위를 훌쩍 넘긴 그리즐리의 공격은 충분히 제3요새를 위기로 몰아넣을 만큼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우두두두두두두!
본이 그리즐리 킹의 목을 꽂은 창을 높이 들고 달려가 스켈레톤 기병대에 합류했다.
그 뒤로 그리즐리 언데드 전사들까지 합류하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우와아아악!
본이 입을 활짝 벌리고는 제3요새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3요새 성벽을 공격하고 있던 그리즐리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본이 쥐고 있는 창끝을 쳐다봤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그리즐리 킹의 머리가 보이자 그리즐리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 간단한 행동에 전황은 단박에 뒤집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3요새의 인간들을 다 잡아 죽일 때까지 절대로 멈출 것 같지 않던 살벌한 공세가 마치 잘 흐르던 강물이 중간에 뚝 끊겨버린 것 같이 멈췄다.
살기와 광기가 섞인 눈빛으로 무섭게 공격을 해오던 그리즐리들이 이제는 살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마수들이 전의(戰意)를 잃었다.”
“총공격하라!”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토라 사령관은 목청이 찢어져라 크게 소리쳤다.
와아아아아아!
제3요새 병사들은 세토라 사령관의 명령에 반응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그리즐리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에 맞춰 히어로들도 사력을 다해 그리즐리를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화르르르륵!
휙휙 휘익 휘이힉 휙휙휙!
핑 피피핑 핑 피피핑!
쾅 휘이이잉 콰쾅!
제3요새의 안과 성벽 위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남은 힘을 일시에 쏟아 부은 공격은 그리즐리들의 꺾인 전의를 사정없이 짓밟아버렸다.
그리즐리들은 이제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북부대산맥으로 이어지는 숲속으로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병사들은 신나게 창을 던지고 도끼를 던졌다.
투석기와 발리스타도 열심히 쐈다.
히어로들은 마지막까지 남은 능력을 쥐어짜서 능력을 날렸다.
포리너스의 엘프들도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활시위를 당겼다.
본과 스켈레톤 기병대가 도망치는 그리즐리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목을 쳤다.
전에는 동족이었던 그리즐리 언데드 전사들이 숲속 안까지 쫓아 들어가 그리즐리들을 학살했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제3요새의 성벽 위에서 거센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력한 마수인 그리즐리들이 꽁지가 빠지게 북부대산맥을 향해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얼싸 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결국 전투는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
제3요새가 마수의 침공을 막아내고 승리한 것이다.
수천 마리로 추산되는 거센 그리즐리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살아났으니 제3요새의 병사들과 히어로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서 춤을 춰댔다.
[주인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이로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본, 마틴, 너희야 말로 정말 수고가 많았다.]
소울은 본과 마틴의 뛰어난 전공에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냈다.
[본, 그리즐리 킹과 호위전사의 사체를 챙겨라.]
[예스, 마이로드.]
[마틴도 가서 전리품을 챙겨라.]
[네, 주인님.]
본과 마틴은 즉시 원형의 요새 안으로 뛰어가서 그리즐리 킹과 호위전사의 사체와 정수를 각각 챙겼다.
소울의 명령을 완수하자 본은 즉시 악어 입을 만들어 스켈레톤 기병대와 그리즐리 언데드 전사들을 흡수했다.
그때에 맞춰 소울은 본을 소환해제 하고 까뮤를 소환했다.
[본 소환해제! 까뮤 소환!]
[부르셨어요? 주인님!]
[정수와 전리품을 챙겨라.]
[네, 주인님.]
까뮤는 소환된 즉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방에 그리즐리 사체가 널려 있으니 당연히 정수를 뽑아내고 쓸 만한 전리품을 챙겨야 하는 것이다.
소울은 잠시 까뮤가 전리품을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마스터!”
“히어로 마스터!”
성벽 위에 올라가자 벤자민 왕세자와 세토라 사령관이 소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오기라도 한 듯 두 눈에서 하트를 뿅뿅 발사하며 감격해했다.
벤자민 왕세자가 소울의 오른손을 잡자 세토라 사령관이 그의 왼손을 잡았다.
“마스터는 그리즐리 웨이브를 막은 일등공신입니다.”
“마스터가 제3요새를 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협력해서 이뤄낸 결과입니다.”
소울은 벤자민과 세토라가 자신의 양쪽 손을 꼭 잡고 얘기하자 겸손하게 대답하며 손을 살짝 뺐다.
하지만 벤자민과 세토라는 소울의 엄청난 활약에 경악을 한 상태라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입에 거품을 물면서 칭찬을 했다.
“마스터와 마스터의 부대가 보여준 활약은 히어로 열 명보다 더 대단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히어로를 봤지만 이런 놀라운 소환능력을 보여준 히어로는 단연코 없었습니다. 정말 오늘 제가 새롭게 안계(眼界)를 넓혔습니다.”
“아니 뭘 또 그렇게나…….”
소울은 아까부터 자신의 얼굴에 침을 튀겨대는 세토라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것을 꼭 참고는 뒤로 다시 한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소울의 능력에 단단히 반했는지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이제는 팔짱까지 끼며 우의를 다졌다.
소울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그저 썩소를 지으며 둘이 하는 얘기를 어쩔 수 없이 듣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벤자민 왕세자와 세토라 사령관의 이런 호의와 칭찬이 앞으로 어떤 비극을 몰고 올지 이때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 * * * *
“반갑습니다. 제4요새 사령관 트란실라 백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히어로 마스터입니다.”
둘은 서로의 손을 가볍게 마주잡고 한번 흔들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고맙네.”
트란실라 백작의 서기관 큐란이 소울에게 자리를 안내해주자 소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으로 트란실라 백작이 앉자 마틴이 소울의 뒤로 와서 시립했다.
트란실라 백작은 마틴의 얼굴을 보자 곧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마틴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먼저 자네의 불행에 대해 사과를 하지.”
“트란실라 백작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소울은 트란실라 백작과 마틴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틴의 표정을 보니 트란실라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트란실라 백작을 살펴봤다.
‘트란실라 백작도 진혈의 뱀파이어인가 보구나.’
소울은 비록 능력 & 잠재능력 확인 스킬을 쓸 수 없었지만 트란실라 백작의 몸에서 나오는 기세만 봐도 S클래스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 자리에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네가 딜란을 소멸시켰다지?”
“내가 아니라 주인님이 소멸시키셨습니다.”
“주인님?”
“마스터께서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트란실라 백작은 마틴의 말에 속으로 크게 놀랐다.
설마 진혈의 뱀파이어인 마틴이 스스로 주인을 선택해서 섬길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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