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0 제 118 장 - 그리즐리 웨이브 =========================================================================
고개를 돌려보니 포리너스 부대원들이 서로 협력해서 통나무를 타고 올라오는 그리즐리들을 침착하게 잘 막아내고 있었다.
특히 티거족의 전사들은 그리즐리와 일대일 상황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덕분에 그리즐리들은 아예 성벽 위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일쑤였다.
전투는 치열했다.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팔다리가 뜯기고 목이 물려 떨어져 나가는 처참한 싸움이 이어졌다.
붉은 피와 보라색 피가 바닥에서 섞이고 누군가의 손가락과 머리통이 굴러다녔다.
살기와 광기에 휩싸인 인간과 마수는 그렇게 서로를 향한 살의를 곱씹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전황은 점점 그리즐리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숲속에서 계속 그리즐리 원군들이 몰려와 전력이 증원되었고, 끊임없는 파상공격으로 인해 히어로와 병사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세토라 사령관은 크게 당황했다.
엘라즈라 왕국의 다음 국왕이 될 것이 분명한 벤자민 왕세자에게 큰 소리를 빵빵 쳐놓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풍전등화(風前燈火) 속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부임한 최초로 마수들에게 제3요새를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석기를 쏘아라.”
“발리스타로 공격해라.”
“성벽에 기대어 있는 통나무를 밀어서 떨어뜨려라.”
“통나무를 불태워라.”
세토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광분한 것처럼 병사들을 지휘했다.
만약 여기서 정말 뚫려버리면 자신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문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토라는 이번 방어전에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돌연 세토라의 눈에 소울과 그의 부대가 방어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지간한 히어로 몇 사람 몫을 해내고 있는 포리너스 부대의 전투력을 보니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소울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의 부하 하나와 히어로로 보이는 자가 움직이자 그리즐리 두 마리가 순식간에 정리됐다.
그 모습에 세토라는 입을 딱 벌리고 놀라워했다.
‘도대체 저 마스터라는 자는 뭐지? 어떻게 그의 부하들이 제3요새의 5강(强)이라고 불리는 히어로들과 비슷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세토라는 갑자기 강하게 촉이 왔다.
오늘 자신을 위기에서 구원해줄 자는 마스터라고 불리는 저 히어로가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마침 소울이 고개를 돌려 세토라를 쳐다봤다.
세토라는 흠칫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얼른 한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세우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소울은 세토라를 쳐다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저 새끼 혹시 남색이 취향인가? 하는 짓이 영 징그럽네.’
세토라는 소울에게 잔뜩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부끄럽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울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른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를 쳐다봤다.
그리고 앞으로 세토라 사령관과는 말도 섞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즐리의 일제공격이다.”
“저놈들이 모두 성벽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빨리 통나무를 밀어버려라.”
그리즐리들은 마치 소울이 성벽 아래를 내려다볼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시간에 맞춰서 일제공격을 시작했다.
전황을 살펴본 소울은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그냥 놓아두면 그리즐리들이 통나무를 타고 넘어와 성벽 위를 점령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웬, 통나무를 다 태워버려!”
“네, 형님.”
“마틴, 너도 도와서 통나무를 치워라.”
“네, 마스터.”
일단 오웬과 마틴을 투입했다.
그러자 세로 성벽 주변의 통나무가 불타고 잘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소울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뭔가 획기적인 전환점이 없으면 전투는 극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과 히어로들을 잠시나마 쉬게 해줘야했다.
[본, 소환!]
[마이로드, 부르셨습니까?]
[본, 저기 아래로 내려가 하얀 털이 난 그리즐리들을 기습해라.]
[예스, 마이로드.]
[여유가 되면 그리즐리 킹과 마법사도 잡아 죽이고 후방에서 마음껏 휘젓도록 해.]
[상황을 보아하니 스켈레톤 기병대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점이군요. 그리즐리의 정수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한다.]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지략가답게 본은 소환되어 나오자마자 한번 쓱 주변을 훑어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본은 성벽 위로 뛰어오르더니 바로 세로 성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마치 스키장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자세를 낮춰 세로 성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씨웅!
탓!
휘이익!
중간에 바닥이 없는 곳은 훌쩍 뛰어올라 허공을 걷는 것처럼 두 다리를 휘저으며 넘어갔다. 허공을 날아간 그는 건너편 세로 성벽 바닥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본의 몸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곧 원형의 작은 요새 안으로 떨어져 내리더니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원형의 작은 요새 안은 하얀 연막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연막은 조금씩 원형의 요새를 넘어 바깥쪽으로 뻗어나갔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그리즐리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지만 그 중 몇 마리는 순식간에 연막 안으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즐리들은 성벽을 향한 일제공격을 하느라 그런 기이한 현상을 주목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리즐리들이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제3요새 공략작전에 작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켈레톤 기병대의 숫자제한은 소울의 레벨이 올라가자 조금씩 풀렸다.
80명의 숫자제한이 어느새 100명으로 늘어나자 본은 20명의 숫자를 죽은 그리즐리 시체를 일으켜 그리즐리 언데드 병사를 만들어 채웠다.
본은 이들에게 둔기와 방패를 주고는 서넛씩 묶어서 그리즐리를 상대하게 했다.
일대일로 싸워도 지지 않을 그리즐리를 그리즐리 언데드 병사 넷이 무장을 한 채로 공격하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80명의 스켈레톤 기병대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연막이 퍼지는 것에 맞춰서 밧줄과 갈고리를 날려 주변에 대기 중인 그리즐리들을 연막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무리 강력한 그리즐리라고 해도 시력이 봉쇄되고 청력에 혼란을 주는 연막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 눈먼 봉사에 귀머거리가 될 뿐이다.
굳이 그리즐리 언데드 병사가 아니더라도 그리즐리 한두 마리는 스켈레톤 기병들 몇 명에게 휩싸이면 순식간에 잘 다져진 고기처럼 다져져 버렸다.
본은 그리즐리 언데드 병사의 숫자를 모두 채우자 이제는 목표인 변종 그리즐리인 그리즐리 힐러를 향해 연막을 뿌려댔다.
슬금슬금 다가간 연막은 어느 순간 그리즐리 힐러들을 확 덮어씌울 기세로 다가오더니 밧줄과 갈고리를 날려 재빠르게 연막 안으로 끌어들였다.
꾸히이익 꾸훼에엑 꾸이이이잉!
연막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그리즐리 힐러들이 구슬픈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변고를 눈치 챈 그리즐리들이 일제히 연막 앞으로 달려와 막아섰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본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리즐리 힐러들의 앞을 막은 그리즐리들이 한꺼번에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한번 연막 안으로 끌려들어간 그리즐리들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편, 그리즐리의 일제공격으로 인해 성벽 위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성벽의 중앙을 제외한 양쪽은 아직도 걸쳐진 통나무가 꽤 있어서 이것을 타고 그리즐리들이 성벽 위로 마구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발톱을 성벽에 박아대며 성벽을 기어오르는 그리즐리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성벽 위로 올라온 그리즐리들은 어떻게든 공간을 확보하려고 온몸을 던져대며 난동을 피웠고, 반대로 이를 막아내려는 병사들의 눈물어린 희생은 점점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히어로들이 능력을 쏟아내자 기울어가던 전황은 다시 백중지세의 상황으로 변해갔다.
특히 제3요새의 5강(强)이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히어로의 전투력은 놀라웠다.
각각 불, 물, 바람, 전격, 크레센트로 대변되는 이들의 공격은 성벽을 넘어오는 그리즐리들을 추풍낙엽처럼 떨어뜨렸다.
화염구가 날아가 폭발하고 얼음창이 떨어져 휩쓸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그리즐리의 목을 치고 벼락과도 같은 전격이 그리즐리들에게 브레이크 댄스를 추게 만들었다.
특히 오러 블레이드와 비슷한 마나 크레센트(초승달)를 뿌려대는 프로이드의 활약은 단연 발군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벌이고 있는 것은 소울이다.
마틴과 오웬을 비롯하여 본과 스켈레톤 기병대 그리고 포리너스의 활약까지 다 합치면 제3요새의 위기를 실질적으로 틀어막고 있는 수훈갑이라 할 것이다.
파앙!
파공성이 터지며 소울의 몸이 성벽 위에서 날뛰고 있는 그리즐리 한 마리를 향해 폭사됐다.
촤악!
클레이모어가 번개처럼 대각선으로 그어졌다.
마치 공간을 잘라버린 것 같은 푸른 선이 허공에 잠시 그려졌다 사라진다.
그 뒤로 그리즐리의 상체가 보라색 피를 뿜어내며 대각선으로 잘려 미끄러진다.
뜨거운 내장이 바닥에 쏟아져 내리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나타난 순간, 소울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선 맹수처럼 성벽 위를 광폭하게 질주하며 그리즐리들을 사냥하고 있다.
소울은 그 자체로 성벽 중앙을 지키는 단단한 파수꾼이었다.
쾅!
그때, 성벽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뭐야?]
[강력한 마나의 유동이 있었습니다.]
[혹시 마법인가?]
[그리즐리 마법사가 성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소울은 마틴의 보고에 기가 막혔다.
[정말 이 마수 새끼들 가지가지 하는구나. 본! 그리즐리 마법사를 저격해라.]
[예스, 마이로드.]
소울의 명령에 본이 바로 반응했다.
하얀 연막 속에서 스켈레톤 기병대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왔다.
우두두두두두두!
성문을 향해 막 거대한 화염구를 날리고 있던 그리즐리 마법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기병들이 튀어나오자 크게 놀란 것이다.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그리즐리 마법사는 멜론만한 수정이 달린 나무지팡이를 든 채 쏜살같이 숲속을 향해 도망쳤다.
그리즐리 마법사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호위들이 돌진해오는 스켈레톤 기병대를 보더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겁 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인지 아니면 기병의 공격을 처음 겪어본 놈들인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콰쾅 콰지직 콰직!
쿠웩 쿠힉 쿠화아악!
스켈레톤 기병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와 정면을 가로막는 그리즐리들을 향해 그대로 들이 박았다.
스켈레톤 기병대의 차지공격에 당한 그리즐리들이 쓰러지자 그 위로 해골마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말발굽으로 짓이겨 놓았다.
천하에 두려움이 없을 것 같았던 그리즐리들은 해골마들의 무시무시한 말발굽 세례에 잘 다져진 고깃덩이로 변해 이승을 하직했다.
물론 그리즐리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스켈레톤 기병과 해골마가 넘어져 그리즐리들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스켈레톤 기병대는 일반 기병대와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명백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방식의 살벌한 공격방식은 기병대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유리하다.
점으로 작용했다.
기병대의 강점은 기동력, 기병대의 약점은 돌파가 저지를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아니 아예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스켈레톤 기병대의 돌격은 돌파가 저지당할 염려가 거의 없었다.
쿠헤엑!
결국 그리즐리 마법사는 스켈레톤 기병대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커다란 대도가 그리즐리 마법사의 목을 치고 나자 뒤이어 달려오던 해골마들에게 몽뚱이가 자근자근 짓밟혔다. 맨 뒤에서 오던 스켈레톤 기병 하나가 고깃덩이 옆에 떨어진 수정지팡이를 집어 전리품으로 건졌을 뿐이다.
쿠화아아아아아앙!
그때, 드래곤피어 같은 무시무시한 포효가 제3요새를 뒤흔들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히어로들조차 그 살벌한 포효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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