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3 제 116 장 - 노스트라 =========================================================================
소울이 웃자 다이애나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뒤에 있는 엘프들에게 뭐라고 빠른 말로 지시했다.
그러자 그들은 소울에게 군례를 올리고는 즉시 저택의 입구와 창고를 향해 나눠서 달려갔다. 그들의 뒤를 울파족 몇이 빠르게 쫓아갔다.
“저택경비는 울파족도 참여하겠습니다.”
“켄!”
소울의 앞에 울파족 전사 켄이 떨어져 내렸다.
켄은 소울에게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입맛을 다셨다.
“왜? 저녁식사 때에 고기가 모자랐나?”
“아닙니다. 너무 맛있어서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야참은 없나요?”
“뭐? 푸하하하하! 내 앞에 괜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군.”
“하하하, 제가 한참 먹을 때 아닙니까?”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울파족의 전사는 지금 잘 먹어둬야 나중에 힘을 씁니다.”
켄의 천연덕스런 말에 소울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때 어디선가 망치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이 밤에 드워프들이 망치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습니다. 드워프들은 원래 망치질을 안 하면 몸에 녹이 슨다고 하지 않습니까?”
“탈칸!”
“마스터를 뵙습니다.”
티거족의 전사 탈칸은 온 몸에 땀을 흘리면서 어둠속에서 걸어왔다.
호랑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놈이 어둠속에서 노란 눈을 빛내고 다가오자 소울은 괜히 밤길에 진짜 호랑이를 만난 것 같이 섬뜩했다.
‘이놈은 가급적 밤에는 만나지 말아야겠다. 괜히 심장마비 걸리겠어.’
소울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다이애나를 쳐다봤다.
“노스트라에 입성했으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엘프와 드워프를 비롯한 수인족 노예들을 구해보도록 하자. 너희들도 적극 협조하도록 해.”
“네, 마스터.”
소울의 말에 다이애나를 비롯한 켄과 탈칸이 크게 기뻐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알렉스와 나비엘도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유사인류와 수인족 노예를 얼마나 구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구하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전력이 증강되는 것이니 좋은 일이다.
어차피 나중에 이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이 선투자한 것을 다 챙길 예정이지만 그런 얘기는 굳이 미리 말해줄 필요는 없다.
유사인류와 수인족은 동족을 구해서 좋고 자신은 충성스런 이족전사를 얻게 되니 서로 윈-윈(Win-Win)이다.
이날은 그렇게 하룻밤을 푹 쉬었다.
* * * * *
“마스터, 차를 가져왔습니다.”
“으음, 이리 가져와.”
흔들의자에 앉아 사색을 즐기고 있던 소울의 평정심이 허브티의 향기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사색이라고 읽고 멍 때리고 있다고 쓰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간만에 맞이한 혼자만의 시간이 방해를 받은 것은 조금 안타까웠다.
후루루루룩!
“하아, 좋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 레이첼을 쳐다봤다.
이제 막 동녘이 밝아오고 있는 시간이다.
언제 씻고, 곱게 화장을 하고, 저렇게 아름다운 정장까지 갖춰 입었을까?
부지런하지 않다면 절대 이 시간에 저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소울은 그녀가 관록 붙은 대기업 비서실 여직원의 포스가 느껴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총관을 시켰더니 그새 직위에 맞게 변신을 한 것인가?
“이리 앉아서 같이 마시자.”
“네, 주인님.”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둘이 있을 때는 꼭 주인님이라고 알아서 호칭한다.
자신의 주제를 파악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저러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어차피 소울에게 레이첼은 노예이건 아니건 별 상관이 없었다.
충성스럽게 일만 잘한다면 당장이라고 노예에서 벗겨줄 의양도 있었다.
“요새 좀 바쁘지?”
“네, 조금 바쁘네요.”
“다들 잠은 잘 자고 있는지 모르겠군.”
“새벽부터 좀 부산하긴 하죠?”
“그것보다 저 빵을 굽는 냄새 때문에 다들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호호호, 사실은 저도 벌써 배가 고프네요.”
요새 대저택은 전에 없이 활기(活氣)로 가득했다.
새벽같이 일어난 하녀들은 밀가루를 반죽해 빵을 굽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등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어네스트 집사는 노스트라 상인연합에서 나온 상인들과 창고에서 가격협상을 벌이고 있다.
훈련장에는 포리너스 부대원의 힘찬 구보에 이은 대 몬스터 집단전투훈련이 벌어지고 있다.
다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열심히 하고 있다.
“연락은 왔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소울의 말에 레이첼은 순간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가 펴졌다.
그녀도 가족들의 소식이 무척 궁금한 것이다.
“급하게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자고.”
“네, 주인님.”
레이첼은 소울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조급한 마음이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라이라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잘 팔리고 있나?”
“그동안 조금씩 풀면서 가격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오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매를 시작해 물건을 풀 예정입니다.”
“시장의 반응은 어때?”
“당연히 폭발적입니다. 무기, 방어구, 식량, 의약품 등은 전략물자로 취급해서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라는 법이지요.”
“그건 다행이군. 중요한 것은 대금을 최대한 마나석과 젬스톤으로 받는 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엘라즈라 왕실창고를 몽땅 털다시피 하여 가져온 물자는 언제 그렇게 소문이 났는지 노스트라 상인연합 뿐만 아니라 주변 도시와 요새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주변국의 요새도시와 거래를 하고 있는 상단들은 예상보다 많은 수량에 놀라 벌써부터 물밑접촉이 활발했다.
하지만 역시 물건 값을 높게 받으려면 경매만한 방법이 없다.
소울은 경매를 통해 가져온 물건을 처분하면서 대금으로 금은대신 마나석과 젬스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노예시장은 언제 열리지?”
“상인연합에 문의를 해본 결과 2주마다 한 번씩 열린다고 합니다.”
“유사인류와 수인족 노예를 구할 수 있다고 하던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노예시장에 나오기 전에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구매해버리려고 합니다. 상인연합을 통해 부탁을 해놓았으니 곧 노예상인들이 직접 데리고 올 겁니다.”
사실은 이미 노예상인들로부터 가격과 수량에 대한 언급을 받고 어느 정도 조율까지 끝낸 상태였다. 앞으로 꾸준히 거래를 한다는 조건을 들어 노예시장에서 팔리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량구매하기로 잠정 합의를 봤다.
똑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마틴이 들어왔다.
그는 마치 미끄러지듯 다가와 소울의 앞에 섰다.
“다녀왔습니다.”
“레이첼, 아침식사를 준비해줘.”
“네, 주인님.”
레이첼은 소울의 말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 소울이 손짓을 했다.
“이리 앉아.”
“감사합니다.”
마틴은 사양하지 않고 소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갔던 일은?”
“두 개의 지도는 강철망치족의 드워프 전사 알렉스를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위치는?”
“예상대로 북부대산맥의 한복판에 있는 심처(深處)였습니다. 센트랄 고원의 지하 대공동입니다.”
“거리가 멀다는 말이군.”
“네, 그렇습니다.”
“그럼 준비를 단단히 해서 가야겠군.”
“몬스터들이 바글대는 곳이니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마틴의 말에 소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레스의 말을 듣고 북부대산맥의 안쪽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지하 대공동일 줄은 몰랐다.
엔팔 시(市) 남쪽 동굴에서 얻은, 이름 모를 죽은 여행자의 배낭에서 나온 지도와 베레스에게 얻은 지도는 모두 기하학적인 도형과 무늬, 그리고 숫자로 가득했다.
노스트라 시(市)에 도착해 지도 분석 작업을 하던 중 두 개의 지도가 사실은 하나의 지도라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두 개의 지도가 인간이 쓰는 지도가 아니라 드워프가 제작해서 사용하는 지도라는 것도 알아냈다.
포리너스 부대의 십부장인 강철망치족의 드워프 전사 알렉스를 통해 지도를 해석한 결과 정확한 위치도 밝혀졌다. 그리고 그곳까지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
일단 위치를 알아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다.
이제는 차분히 공략방법을 연구해야할 때이다.
“그런데 수지는 왜 안보여?”
노스트라 시에 도착한 저녁에 가족을 만나러 간 수지는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코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지냈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든 소울이었다.
“사실은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게 뭔데?”
마틴은 소울에게 그동안 수지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니까 뭐야? 수지의 가족이 고리대금업자에게 처음부터 사기를 당한 거란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말도 안 되는 이자를 갚으라고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수지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지를 노리다니?”
“제 생각에는 고급 창녀로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소울은 마틴의 말에 기가 막혔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고리대금업자의 형이 이곳 암흑가의 중간보스입니다.”
“그러니까 형의 힘을 믿고 마음대로 날뛰고 있다는 말이군.”
“노스트라의 암흑가는 이곳 토박이 귀족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상납금이 들어가고 있지요.”
“흐음, 어딜 가나 돈독 오른 고리대금업자 놈들과 깡패새끼들이 문제구나.”
암흑가는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없는 것이 좋지만 절대 없어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싹 쓸어버릴 수 있지만 잡초처럼 자라나 금방 다시 채워지는 곳이다.
고래로 많은 위정자들이 암흑가에 철퇴를 날렸지만 영원히 없애는 것에 성공한 자는 하나도 없다.
결국 위정자들은 암흑가를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목줄을 잡아 치안을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뱀파이어들은 찾았어?”
“네, 찾았습니다.”
“어디에 숨어있지?”
“그게, 엘라즈라 왕국 북부요새 중 제4요새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뭐? 뱀파이어들이 몬스터를 막고 있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아까보다 더 황당한 소리를 듣자 소울은 절로 멍해졌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뱀파이어들이 인간을 위해 몬스터와 싸우다니…….
“라일라에서 노스트라까지 오는 동안 이놈들이 코배기도 안보여서 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제4요새에 모여서 몬스터와 전투를 하고 있다? 이거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아직 그곳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4요새 사령관 트란실라 백작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몬스터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답니다.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전략가에다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보기 드문 귀족이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지장(智將)에다 덕장(德將)이란 얘기네? 그놈 진짜 뱀파이어야?”
“그렇습니다. 사실은 오늘 트란실라 백작이 비서관을 보내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초대장을 가져온 비서관에게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비서관이 뱀파이어였던 모양이군.”
“맞습니다. 그런데 그 비서관의 애기로는 자신들과 엔팔의 뱀파이어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라이라 이북에 있는 도시에서 일부로 철수를 단행했다고 합니다.”
“그럼 트란실라 백작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뱀파이어 사냥을 못했던 거군.”
“그렇게 보입니다. 일단 한번 만나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틴이 보기에도 뭔가 달라 보여?”
“자신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았고 인간의 피도 빨지 않았다고 제 앞에서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피의 맹세는 사실이었습니다.”
마틴도 조금 혼란스러운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소울도 잠시 아무 말 못하고 이놈들을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려야 할지 고민 속에 빠졌다.
“제기랄, 일단 만나보는 것으로 하지.”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소울은 직접 만나보고 그들의 생사를 결정하기로 했다.
엘라즈라 왕국이 보유한 북부대산맥의 4개의 거대요새 중에 제4요새 사령관인 트란실라 백작이 클래스로 보나 보유한 전력으로 보나 소울의 생사를 결정짓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전투가 시작되면 트란실라 백작 하나는 반드시 처 죽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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