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0 제 115 장 - 아이란 전투 =========================================================================
“마스터가 원하는 곳이 있다면 구해서라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뭐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로는 겸양을 떨고 있었지만 소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대한 뜯어낼 생각이었다.
벤자민도 소울의 생각을 읽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스트라 주변에 왕실직영지도 있고, 시(市) 안팎에 별궁과 왕실 소유의 저택들이 있습니다. 도착하면 같이 돌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직접 골라도 됩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소울은 따로 돈 내고 빌릴 생각이 전혀 없어서 벤자민의 제안을 호의로 감사히 받았다. 물론 벤자민도 소울에게 그냥 주면 줬지 빌려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마스터, 노스트라에 도착하시면 나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일은 아니고, 그저 북부대산맥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으음, 특별히 몬스터를 많이 잡아야할 이유가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다음 대에 국왕이 되어야 할 자는 반드시 노스트라로 가서 몬스터 사냥을 해야 합니다. 몬스터를 많이 잡으면 잡을수록 능력 있는 군주로 인정받고 백성의 신임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엘라즈라 왕국과 왕실의 전통입니다.”
“재미있고 또한 유익한 전통이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덕분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몬스터 사냥을 하게 생겼습니다.”
벤자민은 호전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몬스터 사냥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다고 욕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소울에게 이런 제안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국의 군주가 될 자가 호전적이지 않고 적당히 욕심이 있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내가 왕세자 전하의 진영에 합류하기를 바라는군요.”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소울은 처음으로 벤자민에게 전하라는 표현을 썼다.
벤자민도 그것을 느꼈는지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증폭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엘라즈라 왕국의 정치에 휘말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잡은 몬스터의 사체는 모두 왕세자 전하에게 넘기도록 하지요.”
“아! 고맙습니다.”
벤자민은 크게 실망했다가 마지막말에 다시 얼굴이 환해졌다.
잠재력이 있는 히어로가 당장 자신의 캠프에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돕겠다는 얘기를 했다.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시간을 두고 친밀감을 높이면 미래에 합류할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장의 정리가 끝나자 어느새 세상은 어둠에 휩싸였다.
노스트라 원정대는 달빛아래 불을 피우고 솥을 내걸었다.
스프를 끓이고 안에 고기를 듬뿍 집어넣었다.
빵과 쿠키를 나눠주는 등 평소보다 넉넉히 배급을 했다.
전투로 인해 체력이 빠진 용병들과 왕국군 정예병은 다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빵을 씹고 스프를 떠먹었다.
벤자민과 유익한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소울의 모습에 그의 일행과 포리너스 부대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소울은 그들이 식사를 중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어나지 말고 계속 식사해라.”
“네, 마스터.”
그는 오웬과 소냐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짐마차 사이로 몸을 뺀 그는 노스트라 원정대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걸어갔다.
[주인님, 이쪽입니다.]
노스트라 원정대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마틴이 땅에서 불쑥 솟아나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파인 큰 구덩이가 보였다.
[이런 곳을 용케도 찾았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소울의 말에 마틴은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돌리자 보라색 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베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팔다리는 도저히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 채 떨리고 있었고 얼굴은 예전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이 깨지고 부어있었다.
[결론은?]
[마족이 맞습니다.]
[하급마족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이놈의 이름은 베레스로 메시엘에선 마계로 불리고 있는 헬레니즈 행성에서 왔습니다.]
[헬레니즈 행성?]
마계라고 불리는 곳의 이름으로는 뭔가 잘 어울리지 않게 들렸다.
[헬레니즈 행성에는 13명의 마왕이 있는데 베레스는 그 중 제13마왕인 위리놈의 부하입니다.]
[헬레니즈 행성은 원래 저 마족 놈들의 고향별인가?]
[아닙니다. 이들의 고향별은 마고라고 합니다.]
[역시 그랬군.]
소울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마고라는 별에서 헬레니즈 행성을 정복한 거네. 맞지?]
[네, 주인님. 베레스의 말에 따르면, 마고의 마족들이 헬레니즈 행성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 이백년 전으로, 완전히 정복한 것은 백 년 전입니다. 백년이 지난 현재 헬레니즈 행성은 마족이 살아가기 최적의 환경으로 바뀌었고 물자와 식량도 풍부해서 마족의 인구는 현재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소울은 마틴의 설명에 뭔가 가슴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남의 일 같지가 않네. 지구도 잘못하면 메시엘 꼴이 나는 것 아니야? 아니 어쩌면 헬레니즈처럼 될 수도 있겠구나.’
그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지구가 보라색 행성으로 뒤바뀌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털어버리며 강하게 부인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가만히 놓아두진 않을 거야.’
소울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지구의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서머너즈 길드와 소울 디펜스는 물론이고 소울메탈, 소울투자, 소울푸드 등 자신의 소유 회사에 대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엘리스, 아니 오라클의 함정에 빠진 후유증으로 인해 마음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엘로 유희를 온 것이 그 와중에 가장 나은 선택이란 생각이 든 것은 우연일까?
‘결국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고향이구나.’
깨달음이라고 말한다면 꽤 큰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막 하나가 걷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간신히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리콜펜타곤과 메시엘의 시간 비율이 1:24 로 고정되어 있어 참 다행이구나.’
소울은 자신이 메시엘에서 아직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메시엘에서 24일을 보내도 지구의 시간은 단 하루만 흘러가기 때문이다.
[마틴, 궁금한 것이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놈은 어떻게 헬레니즈 행성에서 메시엘로 넘어온 거지?]
[마계소환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베레스를 소환했다는 말인데?]
[그렇습니다. 베레스가 말에 의하면 최소한 중급마족이 메시엘에 소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급마족?]
소울은 마틴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마족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전투력을 가진 종족이다.
하급마족인 베레스를 잡기 위해서 마틴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그런데 이제는 중급마족이라니…….
베레스와 직접 손속을 나눠본 소울은 중급마족이 얼마나 강할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가만 중급마족이 온 것이 아니라 소환됐다고?]
[네, 주인님. 마족은 히어로처럼 메시엘로 소환되어 오는 것입니다. 본체가 넘어오진 않습니다.]
[만약 본체가 넘어온다면 어떨까?]
[마계소환진으로 넘어오는 마족들은 본신의 힘을 최대 50% 밖에 발휘하지 못합니다. 본체라면 아마도 100%의 힘을 발휘하겠지요.]
소울은 마틴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결국 베레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50%의 힘만으로도 노스트라 원정대로 파고들어 벤허기사단을 농락하고 벤자민 왕세자를 암살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이번 노스트라 원정대에 소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럼 언젠가는 본체가 올 수도 있겠네?]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습니다.]
[왜?]
[한번 생각해보세요. 소환된 능력으로도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굳이 목숨을 걸어가면 본체를 현신시켜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 그렇군.]
마틴의 말을 들어보니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경우만 봐도 굳이 본신을 메시엘로 현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비록 원래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도 유희를 즐기는 것은 차고도 넘쳤다.
거기에다 이번에 북부대산맥이 있는 노스트라로 가면 마나석과 젬스톤도 얻을 수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두 가지는 스피엘상점이나 큐브상점에서 아주 큰 포인트를 주면서 적극적으로 구매해가는 아이템들이다.
‘유희도 하고 마나석과 젬스톤도 얻고……. 잘하면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일석이조가 되겠구나.’
소울은 밤이 새도록 마틴과 함께 베레스를 취조했다.
굳이 계속 고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틴이 피의 권능을 이용해서 블러드볼을 하나 만든 뒤, 메시엘와 헬레니즈 어느 쪽에도 나타날 수 없게 아예 봉인해버린다는 협박에 베레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술술 풀어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마족에게는 애초에 충성심과 의리라는 것이 없다. 오히려 마족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언어도단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 알려줬으니 그만 나를 좀 죽여줘.”
“그래. 약속대로 하지.”
베레스는 깨끗이 목숨을 포기했다.
어차피 소환된 상태에서 죽는 것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실 봉인이 더욱 두려운 일이다.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이 될지 모르는 봉인은 자유분방한 마족에게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저주였다.
마틴이 손을 들자 소울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잠깐, 이놈의 몸을 뒤져봐라.”
“네.”
베레스는 소울의 말에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비위를 건들지 않았다.
그가 히어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틴은 아예 베레스의 몸에서 옷을 몽땅 벗겨냈다.
그리고는 뿔끝에서 발톱까지 샅샅이 뒤졌다.
마족의 몸에는 기이한 문신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계의 13마왕이라는 위리놈의 소유라는 표식 같았다.
[까뮤, 이놈의 몸에 있는 문신과 문양을 잘 기억해놓도록 해.]
[네, 주인님.]
소울은 혹시 몰라 까뮤에게 베레스의 문신과 문양을 기억해놓으라고 지시했다.
[주인님, 이놈이 입고 있는 로브가 보통 로브가 아닙니다. 거기에다 이 검은 돌도 그냥 돌이 아닙니다.]
[무구(武具)라는 건가?]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마법이 인챈트 되어 있는 아티펙트 같습니다.]
[물건 하나 제대로 건졌군.]
소울의 말에 마틴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로브보다 이 검은 돌이 더 귀해 보입니다.]
[그럼 저놈에게 이게 뭔지 물어봐.]
마틴은 소울의 말에 베레스가 입고 있던 로브에서 나온 검은 돌을 손에 쥐었다.
“이게 뭐지?”
“이제 보니 도둑이로군.”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모르는 거야?”
베레스는 소울과 마틴이 둘 다 검은 돌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보이자 오히려 황당해했다.
“그건 차원석이잖아. 어떻게 차원석을 몰라?”
“그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차원석의 용도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
마틴의 뛰어난 임기응변에 소울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걸 물어보는 거였어? 그건 무한의 주머니야.”
“아공간 차원석인 모양이군.”
“그래. 정말 어렵게 구한 물건이지.”
“그럼 당장 초기화시켜.”
“안에 아끼는 물건들이 좀 있는데…….”
“그래서? 하기 싫다고?”
“아, 아니야. 당장 초기화 시켜주지.”
베레스는 입맛을 다시다가 마틴이 살기를 흘리자 얼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틴은 그것이 주문이 아니라 아공간 차원석의 보안을 푸는 암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쿵 쿠쿠쿵!
베레스의 주문의 끝나자 그들의 옆에 은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금속상자들이 떨어져 내렸다. 아공간 차원석 안에 들어있던 베레스의 소유물이었다.
“이건 미스릴로 만든 상자 아냐?”
“그래. 맞아. 미스릴이야. 안에는 오리하르콘과 아다만티움도 좀 있어. 저 옆의 상자에는 마나석과 젬스톤도 들어있지. 어휴! 이걸 꼭 가져오라고 했는데……. 정말 이번에는 엄청 욕을 들어먹겠구나.”
베레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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