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OULNET-456화 (456/492)
  • 00456  제 114 장 - 레이첼  =========================================================================

    털썩!

    레이첼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레이첼은 수지를 한번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님에게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흐음,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군. 수지, 잠깐 나가있어.”

    “네, 마스터.”

    소울의 말에 수지는 레이첼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곧 마차 밖으로 나갔다.

    [마틴!]

    [네, 주인님.]

    [마차 근처로 다가와서 레이첼이 하는 말을 같이 듣도록 하자.]

    [네, 주인님.]

    마틴은 소울의 명령에 귀신처럼 날아와 마차의 마부석에 앉았다.

    귀족들이 과시욕으로 돈을 처바른 고급마차라서 그런지 방음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틴이 들으려고 마음을 먹으면 못들을 것도 없었다.

    “원하는 나 혼자 남았으니 이제 용건을 꺼내봐!”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도와주세요.”

    “응?”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소울은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분명히 레이첼이 자신에게 거래를 제의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에밀리 왕국의 비술이다 뭐다 하며 마차로 기어들어와 결국은 자신의 처녀까지 바친 것이라 이해했다.

    그런데 자신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나자 심경에 변화가 생겼는지 거래 대신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이래서는 미리 마음속으로 준비한 노고가 헛된 일이 되고 만다.

    “뭘 도와달라는 얘긴지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말을 해야 알아먹지?”

    “제 가족을 구해주세요.”

    “가족을 구해달라고?”

    “부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와 저의 자매들은 아직 살아있어요.”

    “이미 누군가의 노예로 팔렸을 텐데?”

    “십중팔구는 그렇게 됐겠죠.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제가 듣기로는 노스트라 시(市)에 있다고 했어요. 제발 우리 가족을 찾아 구해주세요.”

    레이첼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표정으로 소울을 쳐다봤다.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놓은 마차의 창문 틈 사이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달빛에 반사되어 상아처럼 빛나고 있었다.

    달밤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애처롭게 애원을 하고 있다.

    아마 세상엔 이런 미녀의 애원을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철석간담의 사내는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내가 왜 레이첼을 도와야하지?”

    “그, 그건…….”

    레이첼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소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복잡하게 말 돌리지 말고 본론을 꺼내도록 해. 나에게 대가로 뭘 줄 수 있지?”

    “비록 에밀리 왕국이 망하기는 했지만 왕국의 힘이 뿌리 채 뽑힌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에밀리 왕국에 숨겨진 왕실의 비밀창고가 있어요. 위치는 오직 저만 알고 있어요.”

    “그 비밀창고의 문은 레이첼만 열 수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레이첼 가족을 구해주는 조건은 왕실의 비밀창고에 들어있는 에밀리 왕국의 보물인가?”

    “전부는 아니고 50:50 이에요.”

    “비율은 내가 정한다.”

    “저희도 꼭 필요해요.”

    “저희? 하하하! 레이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에밀리 왕국을 다시 일으키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소울의 웃음에 레이첼은 허겁지겁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기어왔다.

    그러곤 소울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했다.

    “에밀리 왕국을 점령한 노라 왕국은 에밀리 왕국의 백성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리며 수탈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어요. 거기에다 북부대산맥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막을 생각도 하도 않고 에밀리 왕국의 중남부의 곡창지대만 지키고 있어요. 그로 인해 에밀리 왕국 북부는 몬스터로 큰 피해를 입고 있어요.”

    “북부대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는 북부대장벽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았나?”

    “북부대장벽이 쏟아져 나오는 모든 몬스터를 다 막아주지는 못해요. 산을 타거나 절벽을 올라 넘어오는 놈들까지 무슨 재주로 막겠어요.”

    “흐음, 그럼 다른 왕국에서 항의를 하거나 문제제기를 할 텐데?”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놈들이었다면 지금 저런 만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예요.”

    레이첼은 노라 왕국의 행사에 절대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레이첼의 입장일 뿐이었다.

    부왕(父王)이 죽었다고 했으니 분명히 노라 왕국의 기사에게 살해당했거나 아니면 처형당한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를 죽인 자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레이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보물을 얻기 위해 함부로 에밀리 왕국의 일에 개입하면 나중에 노라 왕국과 필연적으로 분쟁을 일으킬 염려가 있었다.

    “레이첼!”

    “네, 주인님.”

    “에밀리 왕국을 계승할 혈통은 살아있는 거야?”

    “네, 막내 동생이 살아있어요.”

    “왕자겠지?”

    “그렇습니다.”

    “어디에 있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제가 노스트라로 가면 연락이 올 겁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그림이 그려졌다.

    “에밀리 왕국에도 마나석 광산과 젬스톤 광산이 있나?”

    “으음.”

    레이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마나석 광산과 젬스톤 광산의 유무와 위치는 국가의 기밀 중에 기밀이니 당연히 함부로 발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라 왕국에서 이미 접수했나보군.”

    소울이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러자 레이철이 덥석 물었다.

    “아닙니다. 마나석 광산과 젬스톤 광산은 에밀리 왕국의 미래를 담보할 중요한 보물입니다. 그런 것을 노라 왕국 놈들에게 호락호락 넘겨주진 않습니다.”

    “그럼?”

    “극소수만이 그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너고?”

    “네, 맞습니다.”

    “다 넘기면 생각해볼게.”

    “네?”

    “나한테 도움을 청하려면 전부를 걸라는 말이야.”

    “제가 전부를 드리면 에밀리 왕국을 도와주시는 겁니까?”

    “아니. 이미 망해버린 왕국의 부활 따위는 내 알바 아니야. 하지만 레이첼의 가족, 특히 여자들은 구해주도록 최선을 다할게. 왕국을 부활시키고 말고는 에밀리 왕국의 왕자와 그 잔당들이 해야지.”

    “그, 그게 무슨 뜻이죠?”

    레이첼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에밀리 왕실의 비밀창고, 마나석 광산, 젬스톤 광산을 모두 나에게 넘기면 네 어머니와 자매들을 구해주겠다. 대신 왕실의 비밀창고에 있는 보물의 일부를 넘겨주고, 마나석 광산과 젬스톤 광산을 개발하면 상품의 판매를 일부 맡기도록 하지.”

    “아!”

    레이첼은 역시 일국의 공주답게 소울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생각해보면 자신과 에밀리 왕국의 후예들은 마나석 광산과 젬스톤 광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개발할 여력이 없다.

    오히려 잘못해서 소문이라도 난다면 즉시 노라 왕국의 공격을 받아 일망타진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마나석과 젬스톤의 판매를 대행하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정체를 숨기면서 안정적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밀리 왕국의 부활을 위한 자금으로 전용될 수 있었다.

    “머리가 좋은 레이첼이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지? 노예로 팔려간 레이첼의 가족은 내가 다시 노예로 사들일 수 있어.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도울 거야. 에밀리 왕국을 다시 찾던지 부활을 시키던지 하는 일은 절대로 나와 엮지 마.”

    “알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네, 말씀하세요.”

    “레이첼은 내 노예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영원히 내 노예라고.”

    “아, 알겠습니다.”

    레이첼은 소울의 뜨거운 눈을 보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소울이 말한 그의 노예라는 의미를 그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첼은 자신이 절대 소울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소울에게 감사했다.

    당장 소울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가족을 구해낼 수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소울처럼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럼 마나석 광산과 젬스톤 광산의 위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건 굳이 내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 나중에 마틴에게 알려줘.

    “네?”

    “그것보다 아직 밤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때?”

    “아, 알겠습니다.”

    소울의 말을 이해한 레이첼은 금세 얼굴을 붉히며 다소곶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곧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이 사르르 밀려나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빙기옥골의 아름다운 여체가 소울의 눈앞에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소울의 발을 향해 레이첼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발끝에서부터 정성껏 입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위로 올라온다.

    떨리는 두 개의 수밀도가 그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창틀을 통해 하늘에 떠 있는 달님이 보인다.

    휘영청 밝은 빛을 보내고 있는 달과 그녀의 수밀도는 어쩐지 많이 닮은 듯하다.

    첫 남자를 향한 기대와 열정이 담긴 석류가 다 익어서 터지듯 열린다.

    그 사이로 달착지근하면서도 뜨거운 숨결이 열정을 더해가고 있다.

    달빛 그늘 아래 사랑이 속삭인다.

    * * * * *

    엘라즈라 왕국의 수도 라이라에서 출발한 노스트라 원정대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에릭클리, 스르마, 카이수를 거쳐 이제 하루만 더 가면 엘라즈라 왕국 북부의 관문도시인 아이란이 나온다.

    행렬은 마치 긴 뱀이 들판을 기어가는 모양으로 길게 늘어섰다.

    그동안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벤허기사단과 엘라즈라 왕국군도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하지만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고 불행은 때마다 도적처럼 잘만 찾아오는 법인가 보다. 특히 이렇게 긴장이 풀렸을 때 꼭 사달이 난다.

    두두두두두두!

    “으음?”

    “어?”

    소울과 마틴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고 한 듯 노스트라 원정대의 행군방향에서 왼쪽을 쳐다봤다.

    [마틴, 맞지?]

    [네, 맞습니다. 몬스터들입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소울은 달리고 있는 마차의 문을 열고는 몸을 날렸다.

    한손으로 마차의 윗면을 잡고 허공으로 거꾸로 몸을 솟구치자 자연스럽게 그의 몸이 원을 그리면서 한 바퀴 돌았다.

    가볍게 마차 위에 착지한 소울은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는 왼쪽 숲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마틴, 숫자가 어느 정도나 되지?]

    [족히 네 자리는 넘을 것 같습니다.]

    마틴은 마치 숲속을 뚫어보기라도 하듯 확정적으로 말했다.

    네 자리 숫자라면 최소 천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밀려오고 있다는 말이다.

    [마틴, 벤자민 왕자에게 몬스터의 습격을 알리고 즉시 방어할 준비를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소울의 명령에 마틴은 마부석에서 일어나 허공으로 치솟았다.

    중력의 법칙으로 몸이 떨어지자 두발로 대지를 박차며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소울은 마틴이 떠난 마부석에 앉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선두의 마차를 따라오는 뒤의 마차를 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카렌, 오웬, 소냐! 몬스터의 습격이다.”

    그러자 마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오웬과 카렌의 머리가 마차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몬스터의 습격이라고요?”

    “그래. 당장 전투준비해라!”

    “네, 마스터.”

    “네, 형님.”

    카렌과 오웬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본, 소환!]

    [마이로드, 부르셨습니까?]

    [몬스터의 습격이다. 위치는 왼쪽 숲속, 적의 예상규모는 네 자리 숫자다.]

    [즉시 스켈레톤 기병대를 소환하겠습니다.]

    본은 소울이 전해준 정보를 받자마자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악어 입을 만들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스켈레톤 기병대를 마구 토해냈다.

    급한 마음에 연막을 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차가 달리면서 만들어 내는 먼지구름으로 인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본이 하는 행동을 보진 못했다.

    “원정대는 방어대형으로!”

    “원정대! 방어대형!

    그때 선두에서 벤허기사단 단장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벤허기사단과 왕국군은 곧바로 복창을 하며 행군속도를 줄이고 방어대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일단 중앙에 몰려있는 짐마차가 크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거대한 원형의 방어진이 만들어졌다.

    ============================ 작품 후기 ============================

    * 드디어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ㅎㅎㅎ오자마자 매생이굴밥(매생이국+굴밥)을 먹었습니다. 맛있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쿠폰,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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