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5 제 109 장 - 마세도냐 =========================================================================
언제 수지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어야지 알 것 아닌가?
서로 만나기만 하면 불타오르는 통에 두 사람은 실제로 서로에 대해서는 호구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해봐야 같은 차원의 사람도 아니라서 답도 없었고.
“부모님이 노스트라에 살고 계세요.”
“정말?”
“네. 동생이랑 다 같이 살고 있어요.”
“그럼 보고 싶겠구나?”
“많이 보고 싶죠. 제가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데…….”
수지가 약간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소울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왜 같이 안 사는데?”
“말 못할 사정이 있어요.”
“그렇구나.”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는 굳이 수지에게 그것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수지는 그런 소울이 고마웠다.
그러다 갑자기 수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이건 신의 계시 같아요.”
“엥?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도 노스트라로 가야겠어요.”
“응? 정말?”
“네, 가서 이제 가족들과 같이 살아야겠어요. 죽어서 같이, 살아도 같이, 가족 곁에 있을래요.”
“흐음, 그건 뭐 잘 생각한 것 같네. 역시 사람은 가족과 같이 사는 것이 좋아.”
“혹시 내일 떠날 때 마차로 가세요?”
“응, 큰 마차를 하나 사서 가려고 해.”
“제가 탈 자리 하나 줄 수 있어요?”
“수지가 탈 자리?”
“네.”
소울은 괜히 수지를 태워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수지는 그의 그런 걱정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노스트라에 가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움직이시겠어요? 정보는 또 어떻게 얻고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그래도 제가 도와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마차를 이용하는 값은 노스트라에서 마스터를 도와주는 것으로 갚을게요.”
“흐음.”
그녀의 말에 살짝 구미가 당긴다.
솔직하게 상당히 많이 끌린다.
그가 고민하는 표정을 보이자 수지가 확인사살을 한다.
“가는 동안 저를 언제든지 이용하실 무료이용권을 드리지요. 그리고 원하신다면 절대 마스터와 제 관계를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 맹세할게요. 아시잖아요? 저 그렇게 경우 없는 년 아니라는 것 말이에요?”
“좋아. 그렇게 하지.”
소울은 단번에 승낙했다.
절대 수지가 준다는 무료이용권 때문이 아니다.
노스트라에서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믿어 주기 바란다.
“그럼 2차전 어때요?”
“방금 전은 의무방어전 아니었어?”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는 마스터가 도전하는 것으로 하죠?”
“좋아. 승리가 보이는군.”
“아직 저 시작도 안했어요.”
“그래? 그럼 아까 죽은 것은 정말 호랑이란 말인가?”
“어디서 정신 나간 호랑이가 왔다갔나 봐요.”
“흐음, 다시 한 번 확인해봐야겠군.”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한다.
마주치는 뜨거운 시선에 마치 불이라도 붙을 것 같다.
서로에게 침몰되어 가자 곧 어디선가 고양이와 호랑이들이 몰려온다.
마틴은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어야했다.
나중에 술집에서 자신이 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절대 얘기해서는 안 되는 ‘문밖실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전실례’보다 더욱 비참한 단계라는 것을 알게 된 마틴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에게도 오늘의 얘기를 말하지 않았다.
새벽에 몰래 속옷을 빠는 마틴의 처량한 모습을 까뮤가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 * * * *
성벽이 있는 도시를 빠져 나가면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
임프나 위밍, 워울프와 다크에나 같은 온갖 몬스터가 들끓는다.
대형 상단이 작심을 하고 용병대를 고용해서 움직일 때 같이 따라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도시와 도시사이를 이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어딜 가나 예외는 존재한다.
두 대의 이두마차가 엔팔 시(市)의 성문을 빠져 나온다.
엘라즈라 왕국의 남북을 잇는 왕국대로를 타고 북상하자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
뒤에 먼지를 잔뜩 일으키면 달려가는 마차는 신명이라도 난 듯하다.
성벽 위에서 마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동정이 어린다.
죽으러 작정을 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 참 안쓰럽다.
육중한 북문이 냉정하게 닫힌 이상 자비는 없다.
이제 밖은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적용되는 야생(野生)의 세계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드르르르륵 드르르르륵!
달리는 말의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푹신한 수지의 허벅지를 베게처럼 머리에 대고 누워있는 소울의 모습이 무척 편해 보였다.
옆에서 카렌이 도끼눈을 뜨고 수지를 노려보지만 험한 세상에서 이미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어 본 수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울을 자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다.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반대로 돌리는 카렌의 행동에 그제야 수지가 옅은 미소를 짓는다.
“히어로님은 인기 많아서 참 좋겠네요.”
소울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은 모른 척 하는 것이 신상에 좋다.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잡고 있는 마틴만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살펴볼 뿐이다.
두 대의 마차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빠르게 달렸다.
뒤쪽의 마차는 샤를이 고삐를 잡고 있는데 그 옆에는 본이 앉아있다.
샤를은 왠지 모르게 계속 본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하지만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소냐와 그녀의 두 동생은 기대와 희망으로 눈이 반짝거린다.
마차는 한 시간을 달리다가 잠깐 쉬고 다시 한 시간을 달리다 쉬는 방식으로 질주해나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정오가 됐다.
“점심식사 하고 가자.”
“네, 마스터.”
소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일행 중에 먹고 가자는데 싫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엘라즈라 왕국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왕국대로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마차를 세운 그들은 곧바로 즐거운 식사준비를 했다.
수지를 중심으로 소냐, 카렌, 세라까지 여자들이 총출동해서 식사를 준비하자 금세 향긋한 스프냄새가 퍼져나갔다.
“메뉴가 뭐야?”
“오늘의 메뉴는 야채스프에요. 떠나기 전에 사온 부드러운 빵도 넉넉히 있으니 많이 드세요.”
“고마워.”
역시 수지를 데리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카렌과 소냐는 요리에 젬병이고 세라는 요리에 그다지 소질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지는 요리 솜씨가 뛰어났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수지다.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위장에 부담을 주는 음식은 좋지 않다.
이렇게 야채스프와 빵을 먹고 디저트로 과일과 쿠키를 먹으니 참 좋다.
30분쯤 쉬고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달리는 대로의 주변은 허허벌판이다.
황무지처럼 보이는 이곳이 사실은 왕국의 식량창고 역할을 톡톡히 했던 평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대로를 따라 존재하던 마을도 모두 몬스터로 인해서 초토화되고 평원은 황폐화되어 이제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엔팔 시에서 마세도냐 시까지는 말을 타고 하루 종일 가야한다.
마차로 간다면 이틀이 걸리는 셈이니 반드시 한번은 야영을 해야 한다.
중간에 야영지가 있긴 하지만 이미 몬스터들에 의해 점령이 된 곳이라 그들은 다른 곳을 찾아야했다.
해가 서편으로 기울자 주홍빛 석양이 구름을 자기 색으로 물들이며 마지막 힘을 내본다.
“마스터, 저기 바위 언덕 위가 좋겠습니다.”
“저기에서 불을 피우면 몬스터들 보고 다 찾아오라고 광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런가요? 그럼 언덕 뒤쪽으로 가면 어떨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소울과 소냐는 빠르게 결정을 하고 대로의 오른편에 있는 낮은 언덕 뒤쪽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움푹 파인 지형이라 야영을 하기에는 적합해보였다.
마차를 가로로 세우고 만약을 대비했다.
말은 안쪽에다 풀어놓아 풀을 뜯어먹게 했다.
중앙에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불을 피우자 그것으로 야영준비가 끝났다.
“저녁식사로 바비큐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지.”
수지가 저녁식사 메뉴를 말하자 소울은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돌았다.
역시 야영은 바비큐에 맥주가 있어야 한다.
“맥주는?”
“마차 뒤에 준비해뒀어요.”
“마틴, 맥주 통을 가져와.”
“네, 마스터.”
마틴이 마차 뒤에서 큼직한 맥주 통을 가져오자 소울은 카렌을 쳐다봤다.
“카렌, 이 맥주 좀 시원하게 만들어줘.”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그냥 물의 정령에게 얼지 않을 만큼만 차갑게 해달라고 부탁해.”
“네.”
소울은 맥주 통의 주둥이를 열고 커다란 잔에 차가운 맥주를 부었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딱 넘어가는 맥주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있다.
꿀꺽꿀꺽!
첫잔은 무조건 원 샷으로 끝냈다.
“카아!”
차가운 맥주가 위장 속으로 들어가자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다.
“이거 맛있네?”
“제가 마스터를 위해서 몇 통 준비했어요.”
“역시 수지야! 수지 최고!”
“호호호!”
소울의 말에 수지가 웃자 카렌이 볼에 공기를 불어 넣었다.
“내가 차갑게 해줬는데…….”
“그럼 카렌도 최고!”
그제야 카렌의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유치하긴 하지만 이래야 조용해질 것 같아서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외쳤던 것이다.
에이, 여자들이란…….
두꺼운 쇠꼬챙이에 꾀여 횃불에 돌아가는 새끼 통돼지 한 마리가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지고 있다.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자 횃불은 ‘앗 뜨거워라!’ 하고 불똥을 튀기며 춤을 춰댄다.
소냐의 두 동생인 루안과 세라가 홀린 듯이 익어가는 바비큐를 바라보고 있고 샤를도 그 옆에서 연신 침을 꼴딱거리며 삼키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칠흑 같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박혀있고 경쟁하듯 반짝여댄다.
동서로 가로지른 별들의 물결을 보니 은하수가 틀림없다.
메시엘 행성에서 보는 저 은하수는 우주의 또 어떤 은하들일까?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툭툭 치고 흔들어 장난을 치고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다.
“마스터, 불청객입니다.”
“뭐?”
언덕 위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마틴이 소리를 친다.
이제 바비큐가 거의 다 되어 막 먹으려고 했는데 누가 찾아오고 있는 것일까?
소울은 속으로 밥 먹을 때 찾아오는 매너 없는 놈들이라며 욕을 해대곤 빠르게 언덕 위로 달려갔다.
이미 해가 진 상태라 사방은 그저 어둡기만 하다.
그러나 멀리서 뱀처럼 빛을 내며 길게 움직이는 줄이 하나 보인다.
“저건 또 뭐야?”
“움직이는 속도를 보니 말을 타고 있습니다.”
“야밤에 말을 타고 움직인다고?”
밤에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낙마의 위험도 있지만 말 자체가 발을 헛디뎌 넘어져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횃불은 아닌 것 같고 발광석을 소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거 꽤 비싼 것 아냐? 저 정도면 모두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아무래도 마적 같습니다.”
“그렇겠지?”
둘이 적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을 때, 카렌과 소냐가 올라왔다.
“헉, 마적이군요?”
“소냐는 어떻게 알아?”
“엔팔과 마세도냐 사이에 악명을 떨치는 마적이 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얘깁니다.”
“그래?”
소냐의 말에 소울은 적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쪽으로 똑바로 오는군요. 목표가 우리 맞습니다.”
마틴의 말에 소울은 짜증이 확 솟구쳤다.
바비큐에 시원한 맥주를 먹으면서 오늘 저녁을 별빛과 즐겨보려 했다.
눈치도 없이 자신의 운치 있는 저녁식사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나타나자 소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몬스터들이 판을 치는 들판에서 마적 질을 하는 놈들이라니……. 보통 놈들은 아니겠군?”
“별명이 붉은 악마인 마적 떼로 걸리면 단 한 명도 살려주지 않고 모조리 죽이기로 유명한 놈들입니다. 아주 잔인한 놈들입니다.”
“그럼 다 죽여도 되겠군.”
소울의 말에 소냐가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소냐는 지금 붉은 악마라는 마적 떼를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자신이 히어로인 소울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소냐, 내려가서 동생들을 챙겨서 숨어있어.”
“네, 마스터.”
소냐는 소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 내려가 루안과 세라 그리고 수지를 데리고 안쪽 바위틈 깊숙이 몸을 감췄다.
============================ 작품 후기 ============================
* 매일 매일 광참이네요. 아낌없이 추천 쾅쾅쾅! 찍어주세요.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쿠폰, 후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