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OULNET-391화 (391/492)

00391  제 98 장 - 오라클  =========================================================================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엘리스,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소울은 제가 잘 지킬게요.”

자신의 팔에 착 달라붙어서 한 손을 어머니에게 마구 흔드는 엘리스의 의욕이 좀 과한 것 같다.

내가 엘리스를 지켜야지, 왜 엘리스가 나를 지킨단 말인가?

그리고 어머니의 저 믿겠다는 표정은 뭐지?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까지 가는 동안 자신의 의문은 봄눈 녹듯 사라진다.

그녀는 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기세로 전부 자신에게 조잘대기 시작했다.

혹시 나를 살아있는 일기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뭐 그렇게 나에게 전부 털어놓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나 뭐라나…….

어찌됐던 엘리스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학교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의 남자들이 너무도 부러워하는 오직 나만의 특권이다.

“하이, 엘리스!”

“하이!”

“엘리스! 좋은 아침이야.”

“엘리스, 너 오늘 얼굴 너무 좋다.”

“오늘도 안녕! 엘리스.”

“엘리스, 여기 한번만 봐줘!”

“오! 여신 엘리스가 떴다. 엘리스 굿 모닝!”

…….

나의 특권은 딱 여기까지다.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의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한마디로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모든 사람들이 ‘엘리스’를 외쳐대며 환호하지만, 반대로 나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해버린다.

“자기야, 나 그럼 가볼게. 이따가 봐?”

“응,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

“응, 알았어. 자기도 좋은 하루 보내. I love you!”

“I love you, too.”

쪼옥!

절대 보내고 싶지 않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도장을 찍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젊고 싱싱한 활기가 넘치는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의 미녀그룹들 사이로 사라져간다.

“헤이, 소울! 오늘도 엘리스와 같이 왔어?”

“응.”

“그런데 엘리스는 어디 있어?”

“벌써 갔지.”

소울은 고개를 쑥 위로 빼고는 엘리스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찾는 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는 존을 내버려두고 자신의 교실을 찾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울, 기다려! 같이 가!”

“…….”

저것도 친구라고 같이 다니는 자신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한심해 보였다.

두꺼운 안경을 연신 치켜들고 있는 쫓아오는 존이 그의 옆에 바짝 붙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첫 수업 뭐야? 수학이지?”

“그래.”

“나도 수학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소울이 차갑게 말하자 존은 뻔뻔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화났냐? 너도 알잖아. 우리 여신을 보지 않으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는 것 말이야.”

“아무리 그게 네 징크스라고 해도 남의 여자 친구를 노골적으로 그렇게 찾는 것은 매너가 아니라고 본다.”

“미안해. 그래도 난 절대 엘리스를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은 하지 않아. 줄리 라면 몰라도.”

“에라 이 죽일 놈아!”

소울은 존의 목을 팔로 조이면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살려줘! 한번만 살려줘!”

그의 애원을 하는 소리에 슬쩍 힘을 풀자 존은 잽싸게 빠져나가더니 10m 쯤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본다. 아니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이 짓도 매일 반복하니 지겹기 그지없다.

소울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르르르르릉!

마침 수업시간이 시작된다는 벨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자 존은 슬그머니 교실로 들어와 소울의 옆자리에 앉는다.

이쯤 되면 더 이상 화도 낼 수 없다.

멜라니 선생님의 수학시간을 시작으로 3교시의 수업이 빠르게 물 흐르듯 지나갔다.

즐거운 점심시간이 되자 책들을 가방에 쓸어 담고 교실을 나선다.

그의 옆에는 자신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들 소울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알고 있는 존이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다.

“오늘은 또 뭐 먹지?”

존의 말에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소울은 카페테리아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느새 카페테리아는 많은 테이블 수에도 불구하고 한창 식욕이 왕성한 남녀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소울, 여기야!”

“어, 엘리스!”

엘리스가 그를 바라보며 한손을 높이 들고 흔들자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학생들의 물결을 산란기의 연어처럼 잘도 거슬러 오르며 오늘도 목적지를 향해 전진했다.

카페테리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창가의 테이블은 비어 있어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의 최고 미녀 엘리스와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인 줄리의 지정석이다.

굳이 누가 그렇게 앉아야 한다고 정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이 학교의 불문율이다.

물론 누군가 그 자리에 굳이 앉더라도 엘리스와 줄리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냥 옆에 있는 빈 테이블로 옮겨 앉으면 된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그 누군가는 다시는 카페테리아로 식사를 하러 올 수 없게 될 정도로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된다.

만약 소울이 엘리스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면, 존이 소울의 베스트 프렌드로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감히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의 최고 명당자리인 이 테이블에 앉아서 점심식사를 하는 영광은 결코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쪽!

엘리스는 대뜸 소울에게 안겨와 입술박치기를 한다.

몇 시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그녀에게는 꽤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나?

그녀가 자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떨어져 나가는 순간, 고개를 돌려보면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엘리스를 보는 것이겠지.

남자들의 눈빛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뻔하다.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있는 것이다.

여자들의 눈빛은 좀 다르다. 이해할 수 없다는 황당함과 특이한 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모르긴 해도 자신에게 뭔가 있으니까 엘리스가 좋아할 것이라고 믿는 눈치다.

처음에는 수백 명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압박감에 불면증이 걸릴 정도였었다.

하지만 바퀴벌레 같은 사람의 적응력은 곧 이것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취급하며 무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뭐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면 명약(名藥)인 셈이다.

“자기야, 오늘 뭐 먹을 거야?”

“난 그냥 햄버거 스테이크 먹을래.”

그녀는 항상 내가 뭘 먹을 지를 먼저 물어본다.

대답을 해주면 그녀는 내가 먹을 요리에 맞는 음식을 선택한다.

“그래? 그럼 난 연어 샐러드 먹어야지.”

엘리스가 점심 메뉴를 선택하자 존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난 뉴욕 스테이크 먹을건데.”

“존, 엘리스가 너한테는 안 물어봤어.”

“아! 그, 그래.”

존은 엘리스 옆에서 싸늘하게 말하는 줄리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존은 줄리가 뭐라고 말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다.

엘리스의 베스트 프렌드 줄리는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엘리스에 버금가는 백인미녀이기 때문이다.

터질 것 같은 두 가슴, 하트 모양으로 힙업된 탱탱한 엉덩이,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엄청난 글래머 줄리로 인해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의 남자학생들은 매일 본의 아니게 코피를 쏟고 있다.

사실 엘리스만 없었다면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 최고의 미녀는 당연히 줄리가 됐을 것이다.

소울도 가끔 줄리의 빵빵한 가슴과 남미의 미녀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엉덩이에 시선이 가긴했다. 하지만 그건 엘리스가 옆에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래 줄리가 글래머 미녀라고 해도 엘리스가 옆에 서 있으면 그녀의 섹시함과 매력은 순식간에 반감된다.

“난 버팔로윙과 어니언링 그리고 오렌지 쥬스를 마실 거야. 존, 네가 좀 사다줄래?”

“그, 그럴게.”

줄리는 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울은 오늘도 기꺼이 줄리의 호구가 된 존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엘리스 것은 내가 사올게.”

“아니야. 자기 것은 내가 사올래.”

“그러지마. 나 돈 가져왔어. 어?”

소울은 말하다가 말고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시작했다.

“왜 그래?”

“지, 지갑을 집에 놓고 왔나봐.”

“호호호, 그럼 잘 됐네. 그냥 내가 사올게. 앉아있어.”

“아! 이것 참.”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지갑을 안 가져왔으니 자신이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됐다. 내가 존하고 같이 가서 사올게. 너희들은 그냥 앉아 있어.”

“줄리, 네가 왜?”

“그냥 네가 돈 쓰는 게 싫어서 그래. 내말대로 그냥 네 남자친구와 앉아있어!”

철썩!

“꺄아!”

줄리는 엘리스의 찰진 엉덩이를 한손으로 후려치고는 존의 팔을 잡아끌고 주문대로 걸어갔다.

엘리스는 자신의 엉덩이를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소울의 옆에 앉아 찰싹 달라붙었다.

“엘리스, 많이 아파!”

“아냐. 그냥 좀 놀란 것뿐이야.”

“줄리는 왜 저래?”

“모르겠어. 제가 가끔 저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해.”

엘리스의 말에 소울은 줄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리스가 돈을 쓰는 것이 싫다고? 애인도 아닌 게 왜 저딴 소리를 하는 거지? 줄리가 엘리스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설마 레즈비언은 아니겠지?’

그의 상상은 엘리스가 소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돌리면서 끝났다.

가끔 이렇게 상상을 시작하면 멍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엘리스는 얼굴을 자신 쪽을 향하게 돌리고 키스를 한다.

그럼 바로 미망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멍 때리는 것이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엘리스가 그냥 키스가 하고 싶어서 그랬나보다.

줄리는 오렌지 주스 하나만을 들고 느긋하게 걸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카트를 가득 채운 상태로 조심스럽게 밀고 오는 존의 모습이 보였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그냥 존이 사주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엘리스가 가득 찬 카트를 보고 놀라자 줄리는 별거 아니라며 손가락으로 존을 가리켰다.

나는 안다.

쫀쫀 대마왕 존이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아마도 줄리가 그의 팔을 잡자 순식간에 몸과 마음의 무장이 해제되어 흐느적거렸던 것 같다. 아니 그게 틀림없을 것이다.

“존, 고마워! 잘 먹을 게.”

“아, 아니야.”

“고맙다. 번번이 신세를 지네?”

“헤헤!”

존은 줄리를 훔쳐보며 바보 같이 웃기만 한다.

그의 아버지가 꽤나 부자라서 뭐 이 정도로 그의 용돈을 거덜 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줄리로 인해 번번이 존에게 얻어먹게 되자 소울은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에 다니는 학생 중에 소울처럼 평범한 가정은 무척 드문 것 같다.

다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뭐 하나 부족하게 없이 자라온 녀석들이라 씀씀이가 무척 크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호텔 몇 개를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줄리의 씀씀이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그녀가 존을 시켜서 점심식사를 내게 하다니 참으로 그녀는 능력자다.

‘능력자!’

소울은 갑자기 능력자라는 단어에 뭔가 확 꽂혔다.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질거렸다.

“자기야, 뭐하고 있어?”

“어? 아니야. 먹자.”

마침 엘리스가 존이 가져온 요리로 테이블 세팅을 끝내고 묻는 바람에 그의 생각이 중단됐다.

“맛있겠다.”

“잘 먹을게.”

“먹자. 먹어.”

“예스!”

그들은 곧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접시에 담긴 음식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창 자랄 때라서 그런지 다들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특히 소울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팠다.

“뭐야? 소울,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먹어? 너 그동안 굶었어?”

“아니. 그냥 오늘 입맛이 좋아서 그래.”

줄 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울은 엘리스가 잘라주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자기야, 너무 많이 먹지 마. 그러다 배탈 나.”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배탈 나면 소화제 하나 먹으면 되잖아.”

“히잉, 그래도.”

소울은 자신을 바라보면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엘리스가 귀여워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쳐줬다.

그러자 엘리스는 언제 걱정했냐는 듯 금세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어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점심식사 끝나고 뭐할 거야?”

“나와 줄리는 치어리더 연습하러 가야해.”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그걸 하고 있어?”

“이번에 전미 치어리더 대회가 있어서 그래.”

엘리스의 말에 소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 학기 장학금을 받으며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을 허가받은 엘리스다.

남은 시간동안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에서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선호작, 추천, 코멘트, 쿠폰,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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