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OULNET-390화 (390/492)
  • 00390  제 98 장 - 오라클  =========================================================================

    [까뮤, 헬나이프를 줘!]

    [네, 주인님.]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계속 듣고 있다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줄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논쟁을 포기하고 그는 결판을 내기로 했다.

    허공에 헬나이프가 나타나자 소울은 번개같이 헬나이프를 쥐고는 오라클의 새하얀 목덜미를 향해 가져갔다.

    헬나이프의 칼날이 오라클의 목에 단번에 끊어버리려는 순간, 오라클의 입술이 열렸다.

    “멈춰요!”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귀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슴속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소울은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쾅 콰콰콰쾅!

    우르릉 꽝 우르르르릉!

    그때였다.

    갑자기 온 세상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땅이 진동하며 지진이 일어났고 바다가 미친 듯이 들끓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 끝내 멸망의 날이 오고 말았어요. 지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고 있는 거예요.”

    땅속 깊숙한 곳에서 폭음이 일어나더니 결국 대지가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스탄불 시(市) 사방에서 엄청난 화염기둥이 솟구치더니 뜨거운 마그마가 그 뒤를 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모, 모두 죽게 될 거예요. 지구가 붕괴되면 우린 모두 죽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조금 늦었네요. 미안해요. 어떻게든 이런 일을 막아보려고 했는데…….”

    오라클이 호수처럼 푸른 눈에서 하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소울은 그녀의 눈물의 사과를 받자 손에 쥐고 있던 헬나이프를 툭 떨어뜨렸다.

    “흑흑흑, 제가 조금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이소울 마스터를 찾아온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난 정말 일이 이렇게 될지 몰랐어. 네 말을 끝까지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오라클은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오열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맑은 이슬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그 짧은 사이에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뒤집히는 현상은 점점 더 크게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아! 무서워요.”

    오라클은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휩싸여갔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듯 몸까지 오들오들 떨어댔다.

    소울은 흔들리는 지반에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그녀를 품에 안아줬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포근하고, 아늑했다.

    화아아아아악!

    화르르르륵!

    끝내 그들이 서 있는 대지가 좌우로 갈라지며 뜨거운 화염과 마그마가 높이 치솟아 올랐다.

    “으아아아아!”

    “꺄아아아아!

    온몸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고통에 두 사람은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화룡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뜨거운 마그마가 곧 두 사람의 몸을 집어 삼키자 더 이상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구는 점차 쪼개지고 부서져 내리더니 어느 순간, 엄청난 빛을 우주로 발산시키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번쩍!

    지구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가 한순간에 우주를 환하게 밝혔다.

    시간이 지나 빛이 사그라질 때쯤, 지구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은하수만 우주라는 검은 도화지에 아롱아롱 수놓아진 채 반짝이고 있다.

    * * * * *

    쾅쾅쾅!

    방문이 부서져라 두들기고 있다.

    “아음!”

    살짝 인상을 쓰곤 옆으로 몸을 돌려 요령껏 이불을 뒤집어쓴다.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소음이 줄어들어 잠자기 편해진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잠에 빠져 드는 순간 불청객이 찾아왔다.

    쾅!

    이번에는 정말 방문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그의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큰 소리를 친다.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고 있는 거야? 오늘 학교 안 가려고 그래?”

    “아이 참, 시끄러! 잠 좀 자자. 아침부터 누가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거칠게 이불을 팔로 걷어 버리고 그는 사납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밝은 아침 햇살이 두 눈을 찌를 듯 쏟아져 들어오자 그는 얼른 한쪽 눈을 감고는 반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긴 누구야? 바로 나지.”

    “어?”

    그는 달달하고 향긋한 향기가 물씬 풍겨오자 급히 자신의 눈을 비볐다.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닮은 두 눈이 자신의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다.

    깜빡깜빡!

    두 눈을 다시 깜빡이자 서서히 자신의 앞에 뭐가 서 있는지 형상이 잡혀왔다.

    발그레한 볼에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있다.

    “으헥!”

    그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뒤쪽으로 빼다 균형을 잃고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누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잠이 좀 깼나보네? 내가 누군지 알아보셨나요?”

    몸에 딱 붙는 핑크빛 티셔츠에 새하얀 허벅지가 다 드러난 연한 녹색의 핫팬츠만 입고 있는데도 그녀의 미모로 인해 방이 환해 보인다.

    붉은 석류 같은 입술에 장난기가 가득한 그녀에게서 젊음과 활력의 아우라가 마구 발산되고 있는 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그는 멍하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본다.

    “어어? 자기야, 왜 그래? 혹시 화났어?”

    “아, 아니야, 그, 그게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장난기가 사라졌다.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던 것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저 멀리 사라져간다.

    “왜 그래? 혹시 무슨 악몽이라도 꿨어? 어디 아픈 것은 아니지?”

    그녀는 팔짱을 풀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얇고 가는 섬섬옥수를 들어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열은 없는데…….”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그녀의 손바닥이 이마를 통해 느껴진다.

    그녀는 거침없이 그의 몸 위로 자신의 상반신을 포갰다.

    풍만한 그녀의 두 가슴이 얇디얇은 티셔츠를 뚫고 위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인다.

    절로 시선이 가슴골로 향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쪽!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꾹 한번 누르고는 떨어져 나간다.

    아쉬운 마음이 슬며시 일어날 때, 그녀의 뺨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비벼왔다.

    솜털이 몽실 거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뺨의 감촉이 그의 정신을 올올히 일깨운다.

    “자기야! 아프면 안 돼. 그럼 엘리스는 너무 슬퍼져!”

    자신의 이름을 마치 남인 것처럼 3인칭으로 부르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스 존슨.

    자랑스러운 나의 여자 친구이자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 최고의 미녀다.

    어린 시절, 둘도 없이 가깝게 지내왔던 소꿉친구 두 사람이 우정을 사랑으로 발전시킨 것은 이제 겨우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엘리스, 나 하나도 안 아파.”

    “소울!”

    그의 말에 엘리스는 고개를 치켜들더니 살짝 물기가 어린 눈으로 소울을 쳐다본다.

    그녀는 마치 무슨 큰 감동이라도 받은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그에게 키스를 해왔다.

    지난 6개월 동안 정말 질리도록 한 그녀와의 프렌치 키스지만 소울은 단 한 번도 물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랑스런 엘리스와의 키스는 언제나 그에게 마음의 평화와 안돈을 주는 마법의 행위다.

    어렸을 적, 크게 아파서 며칠 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엘리스는 침대 옆에서 앉아 참 많이도 울어댔다.

    고열에 시달리던 자신이 오히려 그녀를 위로해야만 할 정도라 엘리스의 부모님들은 크면 꼭 소울에게 시집을 가야겠다며 놀리기도 하셨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엘리스가 소울이 아픈 모습에 과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 말이다.

    그때 엘리스는 의사가 되겠다며 작고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었다.

    그녀의 선언은 꿈으로 변해 이제는 당당히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해서 이미 오렌지카운티 하이스쿨 내에서는 최고의 미녀 우등생으로 통한다.

    ‘제길!’

    그렇다.

    평범한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이미 학교에서, 아니 오렌지카운티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에다 인기 최절정의 우등생이다.

    키스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자꾸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과 탱탱한 엉덩이로 간다. 아마 남자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럴 때마다 엘리스는 거절하는 법이 없다.

    원한다면 끝까지 갈 태세다.

    아니 평소에도 언제든지 원하면 자신의 처녀성(virginity)을 가져가라고 말한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욕망이 가라앉고 더 이상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그녀의 나에 대한 사랑은 깊고도 절절하다.

    얼마나 단단하고 확고부동한지 마치 깨지지 않는 콘크리트 같다.

    나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크흠!”

    그때 방문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한다.

    소울은 즉시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급히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느긋하게 키스의 여운을 즐기면서 마무리를 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차라리 날 잡아서 그냥 호텔로 가지 그러니?”

    “호호호, 저는 그러고 싶은데 소울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봐요.”

    “그래? 이런 칠칠치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침대에서 일어나 다 말려 올라간 핑크빛 티셔츠를 내리며 미소를 짓는 엘리스의 당당한 모습에 어머니는 소울을 쳐다보며 인상을 쓰셨다.

    마치 ‘줘도 못 먹는 놈’이라며 입으로 소리 안 나게 욕이라도 하시는 듯 했다.

    아무래도 정말 날 잡아서 호텔 스위트룸이라도 잡아야 할 것 같다.

    “엘리스, 잠깐만 기다려줘!”

    “응, 빨리 샤워하고 나와. 난 부엌에 가서 자기 식사 준비하고 있을게.”

    “그래. 고마워.”

    소울은 엘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엘리스의 손을 꼭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신다.

    누가 강제로 납치라도 해서 데리고 갈까봐 엘리스의 손을 꼭 잡으시는 것일까?

    엘리스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이미 며느리를 보고 계신 것 같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새 팬티와 새 티셔츠를 입고 청바지를 입은 뒤 운동화를 신었다.

    엘리스가 생일 날, 선물로 사준 선글라스를 쓰고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오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킁킁, 좋은 냄새가 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참치 샌드위치하고 크램차우더스프를 준비해봤어.”

    “그래?”

    소울은 부엌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엘리스가 그의 옆자리로 의자를 가져오더니 착 달라붙었다.

    그 모습에 어머니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자기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름다운 엘리스의 모습이 어머니가 보시기에도 사랑스러우신 것 같다.

    “내가 먹을게.”

    “아잉, 내가 떠 먹여 줄거야.”

    “내가 떠먹어도 괜찮은데…….”

    “알아. 그래도 내가 먹여주고 싶어.”

    “그, 그래 알았어.”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이라 어머니는 그냥 웃고만 계신다.

    소울은 어머니의 눈치가 조금 보이기는 하지만 고집이 보통이 아닌 엘리스를 이길 수는 없다.

    깨끗하게 자신의 의지를 접고 참치 샌드위치를 손에 들어 한입 베어 문다.

    엘리스는 크램차우더스프가 담긴 접시에 스푼을 집어넣더니 한 숟갈 떠서 호호 불더니 그의 입가로 가져온다.

    잠시 샌드위치를 열심히 씹어 삼키자 스프가 담긴 숟가락이 자동으로 그의 입 앞에 도착한다.

    입을 열자 크램차우더스프 만의 향기와 맛이 혀끝에서부터 춤을 추듯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벌써 출근하셨어요?”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다고 새벽같이 출근하셨다.”

    “네에.”

    막간을 이용해 아버지가 출근한 사실을 알게 된 소울은 그의 얼굴 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숟가락을 보며 다시 입을 벌렸다.

    숟가락이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소울이 스프를 삼키자 엘리스의 눈이 호선으로 변한다.

    그녀가 웃는 얼굴은 언제 봐도 좋다.

    아니 그녀가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보면 괜히 내가 더 행복해진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이렇게 매일 아침 그녀를 위해 베이비가 되고 있다.

    난 아무래도 엘리스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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