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6 제 84 장 - 암운 =========================================================================
“다음 스케줄이 뭐였지? 남포 가는 거였나?”
“개성지부에 잠시 들러서 업무를 보시다가 시간이 되면 남포로 이동합니다. 남포에서 고구려 길드의 고종석 마스터와 독대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그 다음 스케줄은 없는 거지?”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데로 저녁은 비워놓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하루에 한번은 개성큐브로 들어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지하의 던전도 살펴봐야 한다.
보너스로 개성큐브 핑계를 대면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었다.
“개성큐브 입장권 경매는 잘 되고 있어?”
“역시 생각대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중동 산유국인 사우디의 삼파전입니다.”
“잘됐군. 둘 보다는 셋이 낫지.”
처음에는 미국과 은밀하게 협상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중국과 러시아, 유럽, 중동의 산유국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들었다.
미국이야 부동의 초강대국이고, 중국은 이미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넘치는 외화를 보유하고 있었다.
검은 황금인 석유로 오랜 세월동안 엄청난 부를 축척한 중동의 산유국 사우디가 가진 자금동원력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개성큐브 3일 입장권을 가지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다 다 떨어져 나가고 결국 세 나라가 남아 삼파전을 벌이자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루에 30억씩 3일 동안 90억에, 1명 추가 당 1억씩 총 열 명까지만 받아서 100억을 예상했던 서머너즈 길드는 지금의 이 돌발적인 사태로 인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마지막에 보고된 액수만해도 이미 수백억대를 넘기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천억은 우습게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됐다.
“혹시 누가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 아냐?”
“그것에 대해서 저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실비아의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딱 잡아떼는 것을 보니 단단히 주의를 들은 것 같았다.
소울이야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상황이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저절로 다 알게 되는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라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1시간 뒤에 남포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가서 식사 하시고 여기서 대기해주세요.”
“네.”
실비아가 조종사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고는 소울의 뒤를 쫓아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남포로 헬기를 타고 가는 거야?”
“그렇습니다.”
“난 차로 가는 줄 알았는데.”
“거리가 좀 되니까 그냥 헬기로 가는 게 빠릅니다.”
실비아의 똑 부러지는 소리에 소울은 입을 다물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포에 가면 같이 밥 먹자고 할 것 같으니까 그냥 사무실로 올라가서 간단하게 때우지 뭐.”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실비아는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챙기려고 구내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 마스터 전용 사무실로 올라오자 유정아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유정아 고문이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십니까?”
“제가 이 시간에 오면 안 되나요?”
“뭐 그건 아니지만…….”
“저 찾는다고 해서 왔는데요?”
“아! 참, 그렇지. 일단 들어오세요.”
밖에 비서가 있어서 존댓말을 주고받은 소울과 유정아는 사무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곧 서로 말을 놓았다.
“뭐야? 찾아놓고 잊어버렸어?”
“나 방금 세곡동 다녀오는 길이야. 그래서 깜빡했어.”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거야? 후훗, 좋아. 뭐 바빠서 그랬다니 내가 한번 봐주지. 그런데 나 왜 찾았어?”
유정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소울을 쳐다보자 그는 생수를 하나 따서 마시곤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정아가 영입했다는 힐러 있잖아?”
“응? 응! 힐러가 왜?”
유정아는 소울의 말에 깜짝 놀라서 의자에 기댄 몸을 일으켜 바로 세웠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쌍둥이 동생 둘, 이렇게 넷이서 파티를 맺고 개성큐브에서 퀘스트를 하고 있어.”
“그래?”
눈치 빠른 유정아는 소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바로 감을 잡았다.
한결 편안해진 눈빛으로 소울을 쳐다보자 소울은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일단 가족의 안전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의문은 나중에 천천히 풀기로 했다.
“혹시 그 힐러, 괜찮으면 우리 가족에게 붙였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지.”
“아니 내 말은 그 힐러가 믿을만하냐는 말이야.”
“응,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유정아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소울은 적이 안심이 됐다.
“잘 됐다. 힐러의 등급은 어떻게 되지?”
“등급은 별로 높지 않아. 이제 겨우 F급이야.”
“그래?”
등급이 좀 많이 낮았다.
최소한 E급 이상은 될 줄 알았는데 F급이면 낮아도 너무 낮았다.
소울이 잠시 고민을 하고 있자 유정아가 바로 해결책을 알려줬다.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어? 퀘스트 클리어하고 전직하면 바로 E-급으로 성장할 수 있다며?”
“그거야 그렇지.”
“같이 다니다보면 금방 성장하게 될 거야. 다른 직업군과는 달리 힐러는 E-급 만 돼도 제 몫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 거야. 좀 불안하면 포션이나 넉넉히 챙겨가지고 가라고해?”
“아! 그래. 포션이 있었지? 그런데 너 왜 나한테 포션이 준비됐다고 말 안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저렇게 포션 박스 쌓아놓은 것 안보여?”
“엥? 저게 언제 저기 쌓여있었지?”
소울은 유정아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살짝 피하면서 포션 박스를 하나 잡았다.
딱 피로회복제 드링크가 담긴 박스처럼 생긴 포션 박스에서 포션을 하나 꺼냈다.
역시 생각대로 피로회복제 드링크를 연상케 하는 병 모양이었다.
“이거 효과는 어때?”
“레시피를 가지고 온 사람이 누군데 그걸 물어봐? 레시피에 담긴 설명 그대로지.”
“수고했어.”
유정아가 확실히 일은 칼 같이 잘하는 여자다.
그녀의 말대로 포션은 자신이 구해다준 레시피 그대로 만들어졌다.
상급 포션, 중급 포션, 하급 포션으로 나뉘서 제작되었다.
각각의 등급에 맞는 포션이 10개씩 들어가 있는 박스가 10개씩 쌓여 있었다.
쉽게 말해서 상급 포션 100개, 중급 포션 100개, 하급 포션 100개를 가져왔다는 말이다.
소울은 이중 반을 가족을 위해 넘겨줄 생각이다.
비서를 불러 절반을 가져가게 하고, 절반을 인벤토리와 까뮤의 아공간에 나눠넣은 소울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유정아를 쳐다봤다.
“그 힐러는 언제부터 투입이 가능하지?”
“당장이라도 가능해. 지금 나와 같이 지내고 있거든.”
“그래? 여자인가보군.”
“응,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 힐러야.”
“그럼 우리 소망이와 잘 어울리지 않을까?”
유정아는 소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무슨 헛소리야?”
“아, 아니야. 그럼 오늘부터 당장 우리 가족 파티에 합류해달라고 연락해줘.”
“알았어.”
유정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울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힐러는 안 만나볼 거야?”
“당연히 만나봐야지. 하지만 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안 되겠다. 잘 알잖아? 나 지금 남포 가야하는 거.”
“그럼 다녀와서 꼭 만나봐. 네 가족과 같이 다닐 사람이니 네가 보고 판단해야지?”
“응, 알았어. 신경써줘서 고마워.”
“휴우, 내가 지금 뭔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
“응? 무슨 그게 소리야?”
“아니야. 그냥 남포 잘 다녀오라고.”
유정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문을 잡고 나가려던 그녀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소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많은 감정의 편린(片鱗)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참, 너무 오라클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 아니야?”
“왜? 그렇게 보여?”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수가 있어. 너도 잘 알다시피 오라클은 쥐 정도가 아니잖아. 최소한 호랑이야. 물리면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
“쥐가 아니라서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 패트릭 부회장을 앞세우는 거야.”
“그런다고 오라클이 네가 부추긴 행동을 모를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해? 이대로 오라클을 계속 세계능력자협회 회장에 앉혀 놓을 수는 없잖아? 이 상태로 그냥 내버려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단 말이야.”
“네 말이 맞긴 맞구나. 어쨌든 몸 조심해.”
“알겠어. 조심하도록 할게.”
“그럼 다녀와서 보자.”
유정아는 고개를 푹 숙이곤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울은 유정아의 말이 절대 그냥 하는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실비아가 식당에서 김밥과 어묵을 가져오자 소울은 하나씩 김밥을 집어 먹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실비아, 지금 당장 경비등급을 최고레벨로 올리도록 해.”
“네?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냥 그렇게 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책상에 쌓여있는 결재 서류로 소울이 눈을 돌리자 실비아가 즉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김밥과 어묵을 먹으면서 빠르게 결재 서류에 서명을 했다.
실비아가 돌아와 옆에서 도와주자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제는 광속처럼 눈부시게 서명을 하며 결재 서류의 층을 낮추고 있었다.
실비아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다음 서류를 보려고 하는 소울의 손을 잡았다.
“마스터, 떠날 시간이 다 됐습니다.”
“벌써?”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남포로 이미 국정현 사무총장과 김영신 사장, 정일용 변호사와 나인권 정보부장이 넘어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만 헬기를 타고 가면 된다.
소울은 양치질을 하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어때?”
“정장을 입고 가시거나 차라리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흐음, 그렇군.”
소울은 실비아의 조언을 받아들여 둠 플레이트를 풀 플레이트 아머 형태를 변환하고 밖으로 나갔다.
“멋지십니다. 강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느낌입니다.”
실비아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눈빛을 반짝이자 소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실비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헬리포트를 향해 걸어갔다.
헬리포트에는 헬기 조종사가 미리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메인로터를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타시죠?”
“응.”
스치듯 지나치던 소울의 눈에 헬기 조종사의 가슴에 부착된 이름표가 들어왔다.
천낙일
조종사의 이름은 꽤나 독특했다.
‘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만드는 이름이네.’
실비아와 함께 헬기에 올라탄 소울은 헬기 안을 이리저리 두루 살펴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헬기라는 것이 하늘을 날아서 움직이니 교통체증도 없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시간이 갈수록 헬기에 중독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업무용으로 헬기를 하나 구입해볼까 고민 중이야.”
“아무래도 군용 수송헬기는 좀 불편하죠. 그렇다고 빌려서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남포를 다녀오면 내가 쓸 만한 것으로 하나 알아봐.”
“알겠습니다. 최고의 VIP헬기를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비아는 주먹을 꼭 쥐면서 뭔가 다짐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세계 각국의 대통령이 타고 다니는 온갖 VIP헬기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소울은 좀 불안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최종 결제는 자신이 내리는 것이기에 일단은 가만히 내버려뒀다.
“남포로 출발하세요.”
“네, 마스터.”
말은 실비아가 했는데 헬기 조종사는 소울에게 대답을 했다.
헬기는 힘차게 메인로터를 돌리더니 이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빠르게 날아갔다.
푸타타타타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북한의 정경은 하얀 눈을 골고루 잘 뿌려 놓은 설산(雪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험준하고 가파른 산과 산이 서로 연결되어 산맥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실제로 저 산속을 걷게 되면 아마 무척 춥고 고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낭만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의 불쌍한 청춘의 하나가 되는 것 같아 조금은 꺼려졌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계속 보면 질리게 되나보다.
그는 고개를 위로 들어 이번에는 시리게 푸른 맑은 하늘을 쳐다봤다.
누군가 한쪽에 하얀 생크림을 동글동글 짜놓기라도 한 듯, 몽실 거리는 구름의 물결이 파도처럼 흘러왔다.
반짝!
그때였다. 멀리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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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유쾌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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