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6 제 69 장 - 어부지리(漁父之利) =========================================================================
“젠장!”
소울은 욕을 하면서 자신의 천막을 향해 걸어가다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천막의 앞에는 하일리가 죽치고 있다는 비스크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의 천막을 자신이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자 소울은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에잇, 그냥 미친척하고 휴대용 대공미사일로 와이번을 쏴버릴까?’
그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체를 발각당할 확률이 너무 컸던 것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발리스타를 많이 만들어서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투벅 투벅 투벅…….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 레이칸 족장의 천막을 향했다.
다행히 레이칸 족장은 천막 앞에서 창촉을 갈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의 마스터가 아니신가?”
“안녕하세요?”
“나야 항상 안녕하지.”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할 말이 있으면 어서 말해보게. 내가 창촉을 갈고 있는 것 안 보이는가?”
레이칸이 웃으면서 소울을 쳐다보자 소울은 그에게 와이번이 공격해올 것을 대비해 발리스타를 만들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레이칸 족장도 와이번이 레이칸 요새 위를 빙글빙글 돈 것을 봤는지 그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흐음, 역시 자네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장궁(長弓)을 만들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간들이 사용하는 공성무기를 만들자니……. 확실히 스케일이 남달라. 푸하하하하!”
호쾌한 웃음을 터트린 레이칸을 잠시 지켜보던 소울은 넌지시 카람코의 동향을 물어봤다.
“혹시 가디언 카람코가 회합을 연다는 소리는 없었습니까?”
“아니. 아직 그런 소식은 전혀 없었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야. 알라야 분지가 아무리 넓어도 이 많은 몬스터들을 이 상태로 이렇게 오래 방치하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아! 그렇군요.”
소울은 의외로 레이칸 족장의 상식에 가까운 말에 크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괜히 조급하게 생각했나 보구나. 레이칸 족장의 말이 맞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당연한 결과를 유추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역시 급한 마음이 문제야.’
모든 것에는 다 그것에 맞는 시간과 때가 있다.
봄이 와야 꽃이 피고 겨울이 와야 곰이 동면에 들어간다.
뜸을 들여야 밥이 제대로 되고 달이 차야 기우는 법이다.
레이칸 족장의 말을 듣고 나자 소울은 마음이 조금은 느긋해졌다.
“거기에다 요새 알라야 분지가 매일 밤, 몬스터들 간의 전투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쯤 회합을 열수도 있을 거야.”
레이칸의 말을 듣자 확실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가서 바실리스크가 중대형 웨이브의 핵심이라고 알려주고 싶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코어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은 말도 안 돼. 어차피 회합은 곧 열릴 거야. 그때까지 난 열심히 부수입이나 챙겨야겠다.’
소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칸이 하는 왕년의 자기자랑을 건성으로 들어줬다.
잠시 레이칸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비스크가 오자 소울은 레이칸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발리스타를 만드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레이칸 족장에게 충분히 설명을 해뒀으니 알아서 잘 만들 것이다.
“마스터, 북쪽으로 가시죠?”
“어딜 가는 거야?”
“제가 따로 천막 하나를 더 얻어 놓았습니다.”
“그래?”
비스크가 눈치껏 어디서 천막 하나를 확보해 놓았나 보다.
소울은 그런 비스크의 어깨를 툭툭 쳐주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아담한 천막이 나오자 소울과 비스크는 천막으로 들어가 발라당 누웠다.
밤마다 하도 싸돌아다녔더니 이제는 낮과 밤이 뒤바뀌는 것 같았다.
“한숨 자볼까?”
“네, 그러세요.”
소울은 비스크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막상 누우니까 잠이 오질 않았다.
마음도 싱숭생숭, 몸도 싱숭생숭했다.
‘기다리는 게 이렇게 지루한 일인지 몰랐네. 그러지 말고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알라야 분지에 있는 몬스터들을 더욱 요동치게 할 수 있을까? 들판에다 확 불을 질러버릴까?’
모르긴 해도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 불을 싸지른다면 허리만큼, 머리만큼 풀이 자라있는 알라야 분지를 태우는 것은 정말 순식간일 것이다.
그때였다.
“마스터, 마스터! 일어나보세요.”
“으응? 뭐야?”
갑자기 비스크가 소울을 깨웠다.
“밖으로 나가서 직접 눈으로 한번 보세요.”
“엥?”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느닷없이 나가서 보라니 소울은 일단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북쪽 끝의 경사진 절벽 위로 올라갔다.
알라야 분지의 사방에서 먼지가 수북이 올라오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카람코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낮인데도 서로의 거점과 군락지를 공격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광범위한 구역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크게 일어났다는 것은 절대 이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스크가 왜 자신을 급히 깨웠는지 알 수 있었다.
‘크흐흐흐, 미치광이 풀이 이제야 제대로 제 역할을 하고 있구나?’
소울의 입 꼬리가 그의 귀를 향해 올라갔다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큰 난리가 일어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북쪽으로 세찬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느긋하게 기다려보려고 했더니만 그럴 팔자가 아닌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볼까? 오늘은 정말 불 싸지르기 딱 좋은 날이로구나.’
소울은 마음속으로 오늘 제대로 분탕질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까망아, 너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규!]
까망이가 그의 앞으로 다가오자 소울은 까망이에게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까망이는 한참동안 소울의 말을 듣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사라졌다.
“비스크, 가서 잠이나 한 숨 자도록 하자. 오늘 밤은 정말 긴 밤이 될 테니까.”
“네? 아! 네.”
소울의 말에 비스크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자신의 주인이 오늘 또 뭔가 대형 사고를 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소울과 비스크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동안, 알라야 분지의 곳곳에서 도난 사건이 벌어졌다.
알라야 분지에 있는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몽땅 도둑맞은 것이다.
특히 고블린과 오크들은 동물의 내장 지방을 긁어서 모아놓은 단지들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태양이 서쪽으로 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하늘이 노을로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라야 분지도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륵 화르르륵…….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불일까?
알 수 없지만 알라야 분지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불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알라야 분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알라야 분지 북쪽 끝을 향해서 빠르게 달려가는 불길은 자칫 히물레야 산맥으로 옮겨 붙어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됐다.
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때론 불이 인간을 삼켜버리기도 한다.
대도시에서 연일 일어나는 갖가지 화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불은 공평하다.
몬스터를 특별히 차별하지 않는다.
불에 타면 인간이나 몬스터나 죽기는 마찬가지란 말이다.
사람은 불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니 때론 무서워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털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는 불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한다.
이것은 신이 몬스터의 DNA에 새겨놓은 절대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다.
인간처럼 불을 문명의 이기로 이용하지 않는 몬스터들은 그래서 불 자체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원인모를 화재가 일어난 알라야 분지의 불길이 히물레야 산맥을 향해 꾸역꾸역 다가가자 몬스터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를 느꼈다.
불은 탈 것이 많은 곳에서 무소불위의 권능을 발휘한다.
특히 알라야 분지 같이 사방 천지가 풀로 덮여 있거나, 히물레야 산맥 같이 원시림이 빽빽한 숲속은 불이 그냥 불로 남아 있지 않는다.
화마(火魔)로 변신한다.
그리고 화마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켜버린다.
화르르 화르르륵!
쿠웨에에에 꾸워어어어…….
우두두두두 우두두두두…….
미치광이 풀이 살포된 물을 며칠 동안 장복해온 몬스터들이 살짝 맛이 가서 난리를 피웠지만 화마라는 공포를 만나자 곧바로 광기(狂氣)가 폭발해버렸다.
이제 몬스터의 난리는 광란(狂亂)으로 변해버렸다.
몬스터들의 눈에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화마로 가득 차있어 가만히 있으면 이대로 타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본능은 그 어떤 것보다 위에 있다.
목숨이 당장이라도 끊길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느껴지자 몬스터들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화마가 따라오지 않는 곳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중대형 몬스터 한 종족이 이렇게 움직여도 사방에서 난리가 날 텐데, 거의 모든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동시에 움직여대자 알라야 분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고블린이 트롤을 공격하고 오크가 오우거의 눈깔을 창으로 쑤셔댔다.
자기 새끼 인지도 모르고 잡아먹는 몬스터가 있는가 하면 동족을 불문하고 무조건 죽이려고 달려드는 놈도 있었다.
좌충우돌(左衝右突), 천방지축(天方地軸)…….
알라야 분지는 끝을 모르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광란의 불길을 따라 마구 들끓어 올랐다.
‘잘 탄다. 정말 화끈하게 타는구나. 온 세상이 마치 불지옥이 된 것만 같구나.’
자다가 일어난 소울에게 든 첫 번째 생각은 자신이 지금 혹시 불지옥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마스터, 이거 정말 난리가 났네요?”
“그렇구나. 넌 가서 레이칸 요새의 세 개의 출입구에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소울은 일단 비스크를 보내 레이칸 요새의 안전을 도모했다.
돌로 된 언덕 입구가 불타고 있다면 절대 몬스터들은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치광이 풀과 까망이의 방화로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막상 일을 저지르고 보니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더 일이 커져있었다.
이건 누구도 수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북쪽에서 하얀 불빛이 번쩍거렸다.
‘저건 누군가 불을 끄려고 빙계나 수계 마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소울은 즉각적으로 반짝 거리는 불빛이 뭔지 이해했다.
하지만 이미 불을 끄는 것은 화이트 드래곤 히마가 나와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지켜보자 아까처럼 광범위하게 불빛이 반짝거리지 않는 것을 보니 이제는 불을 끄는 것을 포기하고 불이 더 이상 히물레야 산맥 쪽으로 더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것에 집중하는 것 같이 보였다.
‘화이트 드래곤 히마에게는 일곱 가디언이 있다고 했는데 아마 그들이 모두 총출동이라도 한 모양이구나. 오늘 밤은 욕심 부리지 말고 이 근처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챙겨야겠다. 절대 저 근처로 가면 안 된다.’
S급 몬스터, 아니 SS급 몬스터, 화이트 드래곤 히마의 일곱 가디언이라면 최소한 A급에서 S급의 ‘굇수’들일 것이 뻔했다. 괜히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잘못 날아온 마법에 빗맞기라도하면 아마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소울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쉐도우 스텝을 밟으며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부터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부수입을 챙겨야할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까망이가 앞장서라.]
[규!]
[본, 스켈레톤 부대는 그대로 두고 너만 와라!]
[예스, 마이로드!]
소울은 까망이와 본만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이런 일은 숫자가 많아서 좋을 일이 아니라 스켈레톤 부대는 두고 왔다.
또 덩치 큰 푸티나를 타고 다니면 빠르기는 하겠지만 괜히 엉뚱한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은밀하게 돌아다니며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다.
본에게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으니 몬스터가 공격해올 이유가 없다.
까망이는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놈이라 당연히 싸우거나 발각당할 일이 없다.
유일하게 몬스터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쉐도우 스텝이 있었고 얼마든지 몬스터들을 피해서 다닐 자신이 있었다.
며칠 동안 밤을 새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미 몸을 숨길만한 비트도 몇 개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자! 이제 작업을 시작하자.]
[규!]
[예스, 마이로드.]
소울과 본 그리고 까망이가 그렇게 불타는 알라야 분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부수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불타는 알라야 분지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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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이제 막 끝나서 바로 연재 1편 올려 봅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대신 따끈따끈 합니다.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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