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9 제 68 장 - 혼수모어(混水摸魚) =========================================================================
허공에 떠 있던 핏덩어리를 뒤덮고 있던 보이지 않는 장막 같은 것이 한 꺼풀 벗겨졌다. 그러자 인간의 달콤한 혈향(血香)이 바람을 타고 솔솔 흘러 미노타우로스의 새끼들의 코를 간지럽혔다.
움메에에 움메에에 움메에에…….
미노타우로스의 새끼들은 어미의 젖보다 더 유혹적인 인간의 피 냄새를 맡자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냄새를 따라왔다.
미노타우로스 암컷들은 잠이 오지 않는 미노타우로스의 새끼들끼리 같이 모여서 장난이라도 치려는 줄 알았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한번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달콤한 피 냄새를 살살 풍기는 핏덩어리는 미노타우로스의 새끼들이 접근하자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너무 빠르면 포기할까 싶어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움직였다.
핏덩어리가 가까워지자 미노타우로스의 새끼들은 더욱 치명적이고 유혹적인 피 냄새에 하나씩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는 핏덩어리를 따라 그들도 다가오는 속도를 올렸다.
움메에에 움메에에 움메에에…….
적당히 거리가 떨어지자 핏덩어리는 노골적으로 이들을 남동쪽으로 이끌었다.
미노타우로스의 새끼들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 피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열심히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달콤한 피 냄새에 취해 자신들이 사지(死地)로 가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달려가던 미노타우로스 새끼들은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안개 속으로 하나 둘씩 빠져 들어갔다.
그 즈음, 새끼들의 기척이 들리지 않자 미노타우로스 암컷 두 마리가 일어났다.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걸어 다니며 새끼들을 찾던 둘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본격적으로 새끼들을 찾아 나섰다.
킁킁!
그때, 냄새를 맡은 암컷 한 마리가 고개를 남동쪽으로 돌리자 옆에 있던 다른 암컷 한 마리도 고개를 같은 방향으로 돌리더니 동시에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우우우 무우우우…….
미노타우로스 암컷 두 마리는 달려가면서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이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되면 오우거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군락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다급한 마음에 둘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미노타우로스가 달리는 속도는 새끼들의 속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치 투우경기장에서 뿔난 황소가 거칠게 달리는 것처럼 둘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스산한 안개가 나타났다.
새끼들이 저 안개 속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미노타우로스 암컷 두 마리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안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두두두두두…….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 암컷 두 마리의 앞에 드러난 참상은 그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적우적 우적우적…….
쩝쩝쩝쩝……
오우거 몇 마리가 미노타우로스 새끼들의 사지를 북북 찢어서 씹어 먹고 있었다.
아직은 연한 대가리는 통째로 아작아작 씹어 먹고, 손가락에 묻은 피는 쪽쪽 빨아 핥아 먹었다.
그 모습에 미노타우로스 암컷 두 마리의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무우우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천금 같이 귀한 내 새끼가 오우거의 더러운 아가리 속으로 자근자근 씹혀 가는데 그 모습을 본 어미가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몬스터나 다르지 않았다.
우두두두두! 퍽!
갑자기 달려들어 냅다 들이받는 미노타우로스 암컷의 공격에 오우거 두 마리가 허공을 날았다.
쿵 쿵!
뿔로 옆구리를 받힌 오우거들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눈에 살기를 품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오우거들도 이내 미노타우로스 두 마리만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차라리 배가 고팠는데 잘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닥에 있는 커다란 몽둥이를 들었다.
그제야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노타우로스 암컷 두 마리는 서로의 눈짓을 하더니 바로 꼬리를 말고 뒤를 돌아 도망쳤다.
하지만 오우거들도 바보들만 모인 놈들은 아니었는지 슬쩍 옆으로 돌아간 오우거 한 마리가 도망치는 미노타우로스 암컷의 머리통을 몽둥이로 냅다 후려갈겼다.
퍽!
음머어어어!
머리통이 깨진 미노타우로스 암컷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더니 얼마쯤 달려가다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옆으로 쿵 하고 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렸다.
그 사이 미노타우로스 암컷 한 마리는 안개 속을 뚫고 들어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트롤과 오우거는 이번에도 야영지를 옮긴 웨어울프들을 공격해서 잡아먹자고 암묵적인 합의를 했고 밤이 되자 오우거들은 웨어울프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은 돌로 된 언덕으로 사냥을 떠났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오우거들을 기다리다 지친 남은 오우거들은 눈앞에 ‘나 잡아 잡숴!’ 하고 달려온 미노타우로스 새끼들을 절대로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맛있게 잡아먹었다.
거기에다 보너스로 미노타우로스 암컷까지 한 마리 더 와서 식량을 보태주니 절대 거절할 일이 아니었다.
오우거들은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될지를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장 눈앞의 먹이를 서로 찢어 먹는데 정신을 팔았다.
오우거들이 미노타우로스 새끼 몇 마리와 암컷 한 마리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나서 얼마 뒤 하얀 안개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상태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미노타우로스 새끼들의 피가 점점이 떨어져 아롱져있었다.
그리고 누가 흘렸는지 모를 그 핏방울을 따라 미노타우로스들이 거대한 전투도끼를 들고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절대 작지 않다. 보통 3m~5m 정도의 거대한 체구를 자랑한다.
방어구는 잘 착용하지 않지만 무기는 커다란 전투도끼를 잘 사용한다. 그리고 보통 집단생활을 선호해서 숫자가 꽤 된다.
숲속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오우거들도 미노타우로스를 만나면 무조건 공격하기보다 눈치를 먼저 살피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평상시에는 온순한 편이지만 화가 나면 트롤이나 오우거들도 한 수 접어주는 광폭함을 자랑하는 미노타우로스 떼가 우르르 몰려오자 미노타우로스 새끼와 암컷을 잡아먹은 오우거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무우우우 무우우우우…….
무우우우 무우우우우…….
수십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들은 오우거의 입가에 묻어 있는 미노타우로스 새끼의 피와 아직도 머리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미노타우로스 암컷의 사체를 보자 광분하기 시작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미노타우로스들의 분노는 곧바로 눈앞의 오우거들에게 쏟아졌다.
쾅!
촤악!
퍽퍽퍽!
쿠워어어억 쿠웨에엑!
수십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들이 거대한 전투도끼를 휘둘러 두 마리의 오우거를 순식간에 짓이겨 놓았다.
쿠와아아아앙 쿠와아아아앙!
그 모습에 남은 오우거들이 크게 소리를 치며 원군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도 즉각 미노타우로스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남은 오우거들은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노타우로스의 전투도끼에 의해 잘게 토막 나 버렸다.
뒤늦게 달려온 오우거 이십여 마리는 미노타우로스들이 동족을 잔인하게 학살하자 화가 났는지 크게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쿠와아앙 쿠와아아앙…….
무우우우 무우우우우…….
기본적인 전투력은 미노타우로스보다 오우거가 좀 위에 있다. 하지만 지금 미노타우로스의 숫자가 오우거보다 3배는 더 많았다.
오우거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적은 것을 깨닫자 즉시 원형으로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방어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것은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올라 광분해 버린 미노타우로스들의 돌진을 불러왔다.
투우처럼 무섭게 달려와 받아버리고 전투도끼로 대가리를 찍어버리는 미노타우로스의 전법은 한마디로 무식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우거들이 도망을 칠 수 없는 포위된 상황이라 이런 전법이 너무나도 작 먹히고 또 효과적이었다.
중대형 몬스터들 중에서도 전투력이 상위권에 든 오우거와 미노타우로스의 살벌한 전투는 무식하지만 정말 박진감이 넘쳐서 구경하는 소울에게 큰 감동과 만족을 주었다.
수컷들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저 선이 굵고 거친 전투장면은 기어코 까망이의 아공간에 곱게 모셔놓은 오징어와 땅콩 그리고 시원한 캔 맥주를 꺼내게 만들었다.
‘아싸, 잘한다. 우리 황소들! 그렇지. 그렇게 오우거의 옆구리를 신나게 들이받아 버려야지.’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안전한 장소에서 자신이 싸움붙인 미노타우로스와 오우거의 전투를 관전을 하면서 그는 이 자리에 프라이드 양념치킨이 없는 것이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역시 관전에는 치맥이 최곤데…….’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오징어와 땅콩으로 안주를 삼은 소울은 남쪽에 있는 드레이크 새끼들을 작업하러 간 본을 불러봤다.
[본, 그쪽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마이로드,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지금 드레이크들이 잃어버린 새끼를 찾아 서쪽에 있는 트롤 진형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흔적은 절대 남기지 않았지?]
[물론입니다. 스켈레톤 마우스를 사용해서 드레이크의 새끼를 유인했으니 절대 발각될 리 없습니다.]
[잘했어. 그쪽에도 전투가 벌어지면 나한테 연락해.]
[예스, 마이로드.]
질겅질겅…….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불량한 표정으로 연신 오징어를 씹어대는 소울의 모습은 영화에서 나오는 삼류 건달을 연상케 했다.
‘크크크크, 역시 구경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군.’
그는 푸티나의 등에 기댄 채 느긋하게 캔 맥주를 들이켰다.
자신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레이칸 부족이 자리 잡은 돌로 된 언덕 사방에서 피바람이 광풍처럼 불어대고 있었지만 소울은 여전히 배가 고팠다.
‘경기에 이긴 선수나 감독들이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인터뷰를 하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군. 이것으로는 아직 한참 부족해. 좀 더 효과적으로 알라야 분지에 모인 몬스터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버리는 방법이 없을까? 이놈들을 전부 미치게 만들어서 서로 물어뜯게 만들면 카람코가 분명히 바로 회합을 소집할 텐데 말이야. 먹는 물에 미치광이풀이라도 집어넣으면 좋겠다. 으응?’
그는 새로 딴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 문득 자신이 머릿속으로 얼핏 떠올린 생각에 뒤늦게 감탄했다.
“아! 그렇지. 독이 있었지.”
생각해보니 수원에 독을 타는 고전적인 방법이 있었다.
물론 감각이 좋은 몬스터들은 물맛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응용은 해볼 수 있는 좋은 작전이었다.
까망이의 아공간에는 소울이 그동안 긁어모은 각종 독과 염산, 황산, 백린 같은 화학약품, 수면제와 최루액 등이 꽤나 들어있었다.
‘골고루 한번 사용해보자. 좋은 데이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네.’
가뜩이나 밤에 서로 공격해서 잡아먹느라 예민해져 있는 몬스터들의 신경을 긁어서 싸움을 붙이는 것은 그들의 새끼를 유인, 납치하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민한 코를 가진 몬스터들이 모인 곳에 최루액을 살포해서 거주지를 이동시키기만 해도 주변의 몬스터들은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한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작은 불씨를 던져주는 것은 소울에겐 정말 일도 아니었다.
레이칸 부족이 있는 언덕의 사방에서 몇 km만 벗어나도 고블린과 오크의 군락지가 보이고 사이클롭스, 그리폰, 와이번들이 모여 있는 암석지대가 나온다.
소울은 결국 새끼 때문에 화가 난 드레이크들이 트롤의 거점을 공격하자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빠져 나와 어두운 밤 알라야 분지를 질주했다.
고블린과 오크는 고블린의 마비침을 이용해서 오크들의 새끼를 몇 마리 잡아다가 피를 내서 고블린의 모인 곳에 던지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두 종족을 싸움붙일 수 있었다.
사이클롭스, 그리폰, 와이번은 각각 둥지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는 것으로 그들을 현재의 자리에서 이동시켰다.
중대형 몬스터들이 야간에 움직이는 것은 다른 몬스터들에게는 공격의 의사로 비친다. 이들의 움직임에 주변 몬스터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주변 몬스터들을 긴장시키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켰다.
원래 좋은 일로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워도, 별것 아닌 일로 주변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은 쉽게 일어나는 법이다.
============================ 작품 후기 ============================
* 감기가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네요. ㅠㅠ 오늘은 한 편만 올립니다.
** 혼수모어(混水摸魚)는 병법의 전술 36개를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모은 중국의 병법서 '삼십육계(三十六計)' 중 제20계에 해당합니다. 물을 흐려 놓고 물고기는 잡는다. - 적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 공격하여 승리를 얻는 전략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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