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6 제 64 장 - 전조(前兆) =========================================================================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트려놓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 위를 아롱지게 만들어 놓은 구름을 쳐다봤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자연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 몬스터들이 그렇게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마스터!”
비스크의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물기에 촉촉이 젖어 있는 트롤 새끼가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울은 전투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트롤 새끼를 감쌌다. 그리고는 물기를 깨끗이 닦아줬다.
어린 트롤 새끼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소울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며 계속 떨어댔다.
“슬립!”
타이타늄 팔찌에 인챈트 되어 있는 슬립 마법을 걸자 트롤 새끼는 곧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까망아, 시작해라. 눈도 고치고 가능하면 팔다리도 다 고쳐봐!]
[규!]
까망이가 고른 숨을 쉬고 있는 트롤 새끼의 한쪽 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자 소울은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산맥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개성필드의 안과 강남필드의 안은 분위기가 달랐다.
무엇보다 마나의 농도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개성필드 안의 차원의 균열과 강남필드 안의 차원의 균열이 다르다고 하면 지구에 열린 차원의 균열은 모두 각각 다른 차원과 연결이 되어 있는 건가? 아니면 한 차원의 여러 장소가 서로 다르게 연결 된 것인가?’
현재 가지고 있는 그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뭐라고 단정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빌어먹을 개성필드 안은 정말 몬스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풀을 뜯어 먹는 초식동물들은 많이 보여도 몬스터들은 갑자기 한날한시에 모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산맥을 바라보던 소울은 저 산맥 중심부에 차원의 균열 중심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우드득 우드드득!
그때 어디선가 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트롤 새끼의 한쪽 눈에서 피가 흘렀고, 기괴하게 뒤틀려 있던 트롤 새끼의 팔다리가 어느새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까망이가 트롤 새끼를 무사히 치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까망아, 수고했다.]
[규! 규!]
까망이는 트롤 새끼의 배 위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다.
소울은 까망이의 재롱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트롤 새끼를 쳐다봤다.
[까망아, 너 테이밍 능력도 흡수했지?]
[규!]
[그럼 저 트롤 새끼를 테이밍해서 부하로 삼자.]
[규!]
소울은 더 이상 트롤 새끼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제부턴 까망이가 알아서 트롤 새끼를 테이밍 해놓을 것이다.
“비스크는 앞으로 트롤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도록 해.”
“네, 마스터.”
“가서 식사하고 와. 올 때 트롤 새끼가 먹을 것도 좀 가져오고 동물 가죽도 부드러운 놈으로 하나 벗겨 오도록 해.”
“네, 마스터.”
본 것은 있어서 비스크는 본처럼 소울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는 쏜살같이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가 들판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초식동물들 사이로 뛰어 들자 놀란 초식동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스크가 결국 도망치던 임팔라 같이 생긴 초식동물 한 마리를 잡아 통째로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소울은 푸티나의 몸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꽃 냄새가 섞인 미풍이 그의 코끝을 스치자 소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순간이 정말 좋았다.
너무도 조용하고 너무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대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있는 지금의 이 시간이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어느새 비스크가 돌아와 동물 가죽 한 장을 이리저리 다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트롤 새끼도 비스크가 가져온 고깃덩어리를 푸티나가 잘게 잘라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재롱을 떨고 있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트롤 새끼는 정말 귀여웠다. 돌연변이라서 더 귀여웠는지 몰랐다. 아마 정상적인 트롤 새끼는 절대 이놈처럼 귀엽지 않을 것이다.
“이놈의 이름을 뭐라고 짓지?”
작명센스가 없는 소울은 잠시 머릿속으로 수많은 단어들을 조합해봤다.
“트롤, 트로스, 트리탄, 트라바스, 트록바, 트집, 트윈, 트렁스, 트위터, 트륵, 트롤, 트로트, 트로트? 그래 트로트가 좋겠네.”
그렇게 소울은 트롤 새끼의 이름을 간단히 ‘트로트’로 지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까망아, 트롤 새끼의 이름은 이제부터 트로트다.]
[규!]
까망이 트롤 새끼, 아니 트로트에게 이름을 알려주자 트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밍 스킬이 작동하는지 트로트는 소울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배를 발라당 까뒤집고 누워 그의 손가락을 잡고 핥기 시작했다.
완전한 복종의 의미였다.
소울은 한손으로 트로트의 배를 살살 문질러 줬다.
끄윽!
순간, 트로트가 트림을 해댔다.
배를 만져주니 소화가 잘되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소울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트로트와 놀면서 쉬던 소울은 어느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작해보자.”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반대로 뜨거운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결심을 굳힌 것이다.
휘익! 척!
제자리에서 뛰어 올라 푸티나의 등에 올라탔다.
비스크가 잽싸게 트로트를 낚아채더니 등에 업고는 동물 가죽을 둘러 포대기처럼 뒤집어 쌌다.
소울이 작게 출발을 외치자 푸티나가 언덕 아래로 질풍처럼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본과 비스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열심히 따라갔다.
우두두두두두…….
도도도도도도…….
그들이 달려가는 뒤로 먼지가 수북하게 위로 올라왔다.
공중에서 보면 먼지가 올라오는 것이 마치 녹색의 도화지에 직선을 쭉 그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직선이 향하는 곳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산맥의 정중앙이었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구름은 작은 뭉게구름이 떼를 지으며 마실이라도 놀러가듯 몰려갔다.
이(異)세계의 대자연은 지구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맥의 하늘 위에 검은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치는지 계속 번쩍 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는 차원의 균열 안이다.
* * * * *
케룩은 족장의 갑작스런 이동명령에 불만이 많았다.
이제 겨우 쓸 만한 오크 부락을 만들었는데 그걸 포기하고 돌아가자는 말에 분통이 터졌다. 물론 그만 그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 그린 오크들은 대부분 족장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술사를 비롯한 오크전사들이 하나같이 돌아가야 한다는 족장의 말에 절대적으로 찬성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끝도 없이 지겨운 행군을 매일 해야만 했다.
“취익, 무룽! 우리 천천히 놀면서 가자. 누가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케룩의 말에 그의 단짝 친구인 무룽은 주변을 슬쩍 한번 둘러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취익, 그래! 그렇게 하자.”
케룩과 무룽은 그렇게 행군을 하는 무리에서 조용히 이탈했다.
그렇다고 아주 먼 곳을 여행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부족을 쫓아가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사냥을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싶은 곳을 마구 쏘다니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신나게 놀러 다닌 그들은 이제 슬슬 행군하는 부족의 끝에 따라붙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부족을 다시 만나볼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았다.
피잉 핑!
퍼벅!
풀썩!
무룽이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케룩이 고개를 돌려보자 무룽의 뒤통수에 화살 두 대가 깊숙이 박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케룩은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크게 벌렸다.
피핑!
파박!
순간, 두 대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날아와 케룩의 입과 목을 뚫어 버렸다.
목구멍이 뚫리고 목에 화살이 박힌 케룩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풀썩!
그제야 케룩은 조상들이 대대로 전해준 철칙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절대 무리를 벗어나지 마라. 무리를 벗어나는 순간 너희들은 사냥감이 될 것이다.’
케룩은 족장의 명령에 불만을 품고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한 번도 눈꺼풀이 무겁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던 케룩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힘없이 눈을 감고 축 퍼져버렸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작은 일탈을 즐기며 놀던 간이 부은 그린 오크 두 마리는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세상을 떠나갔다.
사박 사박 사박!
사사삿 사사삿!
케룩과 무룽의 사체 위에 검은 그림자 둘이 드리워졌다.
“아무래도 이놈은 너무 작은 것 같아. 내 몸에 맞지 않겠어.”
“마스터, 다른 놈을 골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울이 고개를 흔들자 비스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몸 크기는 네가 딱 적당한데 말이야.”
“하하하, 노, 농담도 잘하십니다.”
소울이 비스크의 몸을 훑어보며 묘한 표정을 짓자 비스크는 왠지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까망이가 그린 오크 두 마리의 몸속으로 들어갔다가 고개를 흔들면서 나오자 소울은 케룩과 무룽의 사체에 꽂혀 있는 화살을 가리켰다.
“비스크, 화살 뽑아와.”
“네, 마스터.”
소울은 자신이 들고 있는 각궁(角弓)의 시위를 한번 힘껏 당겨보며 중얼거렸다.
“로빈의 사일런트 신궁(神弓)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신궁이라고 말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사일런트 보우라고 하면 딱 어울리겠어. 이제 겨우 두발을 연속으로 쏘는 속사만 완성한 셈이니 정말 궁술을 제대로 마스터하는 것은 더럽게도 힘든 일이야.”
비스크가 케룩과 무룽의 사체에서 화살을 뽑아오자 소울은 화살촉과 화살대를 한번 확인한 뒤 화살통에 집어넣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에 장만한 각궁과 죽시를 개량해서 카본과 금속을 섞어 만든 개량살은 참 마음에 들었다.
관리하기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드로우랭스(당기는 길이)를 자랑하는 각궁은 다른 활처럼 소리가 거의 나지 않고 활을 쏠 때 부드럽게 충격흡수가 잘 된다.
아마 각궁 같은 활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괜히 사람들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각궁마니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각궁은 원래 다루기도 어렵고 온도와 습도 등에 예민하다. 그래서 꼭 점화장(點火場)에 보관을 하여 항상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습기로 탄력이 약해져 화살이 제대로 날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소울은 굳이 그렇게 각궁을 어렵게 보관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까망이의 아공간에 넣어놓으면 전혀 관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린 오크 사체를 들고 와!”
“네, 마스터.”
소울은 비스크를 슬쩍 쳐다보더니 커다란 나무 위를 향해 달려가 두 번 나무를 밟고 허공으로 훌쩍 뛰어 오르더니 몸을 틀어 옆의 나뭇가지를 두 손을 잡고 부드럽게 몸을 한 바퀴 돌려 위로 올라갔다.
멋진 아크로바틱(acrobatic)한 동작으로 간단하게 나무 위로 올라간 그는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밟으며 나뭇잎이 무성한 곳으로 몸을 숨기고 사라졌다.
비스크는 오크 사체를 양쪽 어깨에다 들쳐 메고는 소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러다가 훌쩍 뛰어 올라 나무에 자신의 발톱을 차례로 박으며 나무 위로 올라가더니 역시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스스슷 스스슷!
사사삿 사사삿!
소울과 비스크가 나뭇잎을 스치는 미약한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곳은 두 마리의 그린 오크를 죽인 장소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대한 나무 위에 뚫린 커다란 구멍 속이었다.
“마이로드! 잘 다녀오셨습니까?”
“응, 본! 그쪽은 어때?”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몬스터가 산맥을 향해 몰려가고 있습니다.”
“흐음, 역시 예상대로군. 산맥의 이름은 알아봤어?”
“몬스터들이 산맥을 보며 히물레야 라고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히물레야 산맥이 아닌가 싶습니다.”
“히물레야 산맥이라…….”
괴상한 이름을 가진 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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