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0 제 55 장 - 자선모금파티 =========================================================================
정주관이 그때 신애라를 향해 호통을 쳤다.
“당신 고하라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지금 우리 집안 절단 내고 싶어서 자꾸 그렇게 말썽을 일으키는 거야?”
“으으으…….”
신애라는 남편 정주관의 말을 듣고는 솟구치는 치욕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일용은 정주관의 말과 신애라가 짓는 표정을 보자, 기가 막혔다. 이미 소울에게 들어서, 오늘 자선모금파티의 초청장을 보내 준 고하라가 누군지, 그녀의 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울은 굳이 고하라나 그녀의 배경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들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들은 아직 소울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 작정하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낼 수 있는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구나. 이들은 마스터가 굳이 나서서 상대할 자들이 아니다. 내 선에서 처리하자. 혹시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 이 집안을 철저히 감시해야겠다. 특히 저 사이코 같은 미친년은 오늘 자신이 한 일이 천추의 한이 되도록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고 말겠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가진 정일용도 사실 뒤끝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직업상 겉으로 티를 잘 안내서 그렇지 그도 알고 보면 한 성격하는 타입이었다.
아마 신애라는 오늘 이후로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잠들 일은 없을 것이다.
뒤끝 작렬 대마왕의 부하 하나가 그녀에게 원한의 칼을 박박 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주관은 전화를 한 통 걸어 양해를 구하고는 정윤이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둘의 뒤를 따라 걸어 나오는 신애라의 어깨가 비 맞은 개처럼 축 쳐져 있었다.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그녀는 자꾸 뒤를 쳐다봤다.
못 먹는 감이 되어버린 소울이 어지간히 아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 가운데 최악의 고춧가루로 기억될, 또 한명의 뒤끝 작렬하는 사내의 성질머리를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기어코 건들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아직은 알지 못했다.
호텔 주변에서 쏟아지는 불빛으로 인해 일대는 불야성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 * * * *
크리스털 볼륨 한쪽에 세워진 무대 위에 하얀 스포트라이트 하나가 비춰졌다.
주홍색 드레스를 곱게 차려있고 서 있는 아름다운 미녀에게 조명이 비춰지자 소란스럽던 장내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크리스털 볼륨 안쪽에 마련된 둥근 테이블들로 안내된 VIP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 착석을 하고나자 장내는 곧 고요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감탄어린 시선과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금소희는 조금도 미소를 잃지 않고 무대의 중앙에 오롯이 서 있었다.
그녀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신호가 오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러자 넓은 크리스털 볼륨을 가득 채우는 장엄한 음악이 스피커들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금소희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자신의 붉은 석류 같은 입술에 마이크를 대며 입술을 열었다.
♪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
♩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
살짝 허스키한 보이스에 애절한 감정이 실려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이 섞인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크리스털 볼륨을 가득 채워나갔다.
정·재계의 기라성 같은 실력자들도, 대한민국을 호령하는 중·대형 길드의 마스터들도, 지금 이 순간 한 가녀린 미녀가 애처로운 감성으로 부르는 노랫소리에 단단히 세운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녹아버리며 모두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들은 어느새 눈에 습기가 차오르고 있었고, 몬스터의 심장을 생으로 뽑아버리는 철혈부동심의 능력자들도 뭔가를 회상이라도 하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그녀의 노랫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원형 테이블에 놓인 좌석에 앉아있던 소울은 금소희의 노래를 들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성유나를 보며 속삭였다.
“소희는 여배우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노래를 잘해?”
“원래 언니는 가수지망생이었어요. 그런데 워낙 미모가 뛰어나다보니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거예요.”
소울의 질문에 성유나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 제가 다음 차례라서 이만 가볼게요.”
“그래? 알았어. 잘해라.”
“네.”
성유나는 소울에게 가볍게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뒤쪽으로 사라져갔다.
홀로 남게 된 소울은 금소희의 노래를 들으면서 진한 감동에 빠져 들었다.
아마 이렇게 감동에 젖어 있는 것은 비단 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라도 지금 금소희의 단장이 끊어질 듯 애절한 노래를 듣는다면 감동의 물결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노래는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크리스털 볼륨의 모든 사람들도 그녀의 노래에 따라 점점 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녀의 손에 낀 하얗고 긴 장갑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흔들렸고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심쿵하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부디 먼 훗날 나! 가고 슬퍼하는 이 ♪
♭ 내 슬픔 속에도 행복했다 믿게 해 ♩
마지막 노래가사를 부른 금소희의 한쪽 팔이 장내를 향해 펼쳐졌다 내려오며 그녀의 고개가 숙여지자 음악도 같이 끝났다.
순간, 장내가 떠내려 갈 것 같은 열화 같은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자 소울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열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그의 옆으로 정일용이 와서 신나게 박수를 쳐댔다.
“아무래도 금소희는 길드의 홍보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황금보 홍보부장의 자리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요?”
“네? 하하하, 맞네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어요.”
노도와 같은 함성은 결국 앙코르로 이어졌지만 시간관계 상 금소희는 정중히 사양을 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소울과 정일용이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성유나가 마이크를 들고 걸어 나오더니 자선모금파티 행사를 진행했다. 춤과 노래에만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보니 MC로도 대성할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무대 위는 곧 유명 정치인과 재벌들이 소장하고 있던 진귀한 각종 골동품과 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전에 서로 무슨 말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경매에 나온 물건들은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대 뒤 벽에 붙어있는 초대형 LED 화면에 나타난 숫자가 순식간에 수십억을 넘기고 있었다.
‘저런 물건들이 하나같이 억대를 넘긴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구나.’
소울은 도자기로 만든 병 하나, 다 낡아빠진 고화 한 점이 1억을 호가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물론 역사적인 가치와 오래 된 물건들이 수집가들에게 비싼 값에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물건들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자선모금파티의 특성 상 이런 식으로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각자 로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때, 소울의 앞에 50대 중반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소울 마스터 맞죠?”
“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미래백화점그룹 고지선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비서실장 최강수입니다. 고지선 회장님과 고교선 부회장님께서 매화 연회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소울은 미래백화점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고하라를 떠올렸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고문변호사인 정일용 변호사입니다. 같이 가고 싶은데 괜찮겠죠?”
“네, 일행이시니 당연히 같이 가셔도 됩니다.”
최강수 비서실장은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뒤를 따라 크리스털 볼륨을 나서자 곧 건너편에 있는 작은 연회장으로 안내되었다. 연회장 입구에 매화가 그려져 있었다.
소울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매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50대 초반과 40대 후반의 남자들이 자리에서 각각 일어났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옆에는 고혹적인 자태의 고하라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영웅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소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지선입니다.”
“고교선입니다.”
소울은 미래백화점그룹의 회장인 고지선과 악수를 나누고 부회장인 고교선과도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했다.
“이쪽은 제 고문변호사인 정일용 변호사입니다.”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같이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소울의 소개에 정일용도 그들과 인사를 하고는 소울의 옆자리에 앉았다.
최강수 비서실장이 고지선의 뒤로 가서 서자 곧 고교선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소울 마스터께서 여기 있는 제 딸아이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진작 감사인사를 해야 했는데 이렇게 늦어버렸습니다.”
“아닙니다. 병원에 고블린 떼가 난입해 들어와 저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꼭 누구를 구하려고 한 행동은 아닙니다.”
소울은 방금 전, 정윤이와 좋은 인연을 맺어보려고 하다 신애라의 후폭풍을 맞은 충격에 처음부터 고하라와 뭔가 엮이는 것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고하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다고 믿고 이제부터 좋은 만남으로 인연을 이어나가려고 했었는데 본의 아니게 엉뚱한 곳에서 터진 후폭풍으로 인해 괜한 피해를 입은 셈이 됐다.
하지만 이런 고하라의 마음과는 달리 고지선과 고교선은 그의 이런 말에 조금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노련하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울의 영웅적인 행동을 칭찬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커피와 차가 나오고 달달한 쿠키와 파이를 먹자 어느덧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에 고지선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저희가 이렇게 이소울 마스터를 모신 것은 질녀를 구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인사를 드리려고 한 것도 있지만 다른 중요한 용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까?”
소울이 이미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고하라는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 자리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될지도 모를 소울을 소개하는 자리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라야, 내가 오늘 먹을 약을 깜빡했구나. 가서 좀 가져다주지 않겠니?”
“네? 아! 네. 알겠어요.”
고하라는 아버지 고교선의 말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울과 정일용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도 재벌가의 딸답게 아버지가 하는 말의 진의를 금세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라는 제가 지병이 있는 것을 알고 평생 자신의 손으로 간호해주겠다고 간호사가 된 아이입니다.”
“훌륭한 따님을 두셨네요.”
소울의 말에 고교선은 미미하게 쓴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협상에서 자신의 딸과의 인연을 이용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고교선이 시선을 그의 형이자 미래백화점그룹 회장인 고지선에게 두자 고지선은 상체를 앞으로 세우며 소울을 직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미래백화점그룹은 서머너즈 길드의 이소울 마스터와 미래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네?”
소울은 고지선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는 정일용을 쳐다봤다.
정일용이 소울의 뜻에 따라 고지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 실장.”
“네, 회장님.”
고지선이 다시 상체를 뒤로 해서 의자에 기대며 말하자 이번에는 최강수 비서실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미리 준비해놓은 프린트 물을 소울과 정일용에게 각각 하나씩 내어주었다.
“이것은 북한의 길드 배치도 아닙니까? 이걸 어떻게 입수하셨습니까?”
“저희가 비록 재계 22위의 그룹에 불과하긴 하지만 정보력만큼은 다른 어떤 재벌이나 대기업집단에지지 않는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호오, 대단한 정보력이네요.”
============================ 작품 후기 ============================
* 이렇게 나름 아깝고(-.-;;) 불쌍한 정윤이 패를 신애라 때문에 정리하게 됐네요. ㅠㅠ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의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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