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제 34 장 - 가고일의 공습 =========================================================================
“참 아름다우시네요.”
“호호호, 이제야 제 얼굴을 봐주시는군요.”
무슨 말인가 생각해보니 고하라는 지금 지난번의 통화했던 얘기를 다시 꺼내고 있었다. 은근히 뒤끝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예쁘니까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됐다.
“어떻게 디너 크루즈를 갈 생각을 했어요?”
“마음에 들어요?”
“물론이죠. 사실 저 이렇게 큰 한강유람선은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요.”
“어머, 그럼 이게 처음이세요?”
“뭐 그런 셈이죠.”
“잘됐네요. 디너 크루즈는 소울 씨를 위해 제가 준비한 거니까 마음껏 즐기도록 하세요.”
“네, 덕분에 좋은 구경하게 생겼네요.”
고하라는 소울을 보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밖에서 잘 입지도 않던 하얀 드레스를 오늘 굳이 꺼내 입은 이유가 모두 아일랜드 크루즈의 밤 조명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자타가 인정한 미모, 한 듯 안한 듯 헷갈리게 만드는 자연스런 화장, 석양, 조명 등이 합쳐지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고하라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울이 입고 온 능력자 전투슈트 세트를 보니 이것도 만만치 않았다.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모두 당기고 있는 자신처럼, 소울도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울도 고하라처럼 자신이 전투슈트를 입고 돌아다니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가 입고 있는 전투슈트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른 모양의 E급 전투슈트 세트였다.
당연히 뭔가 좀 더 있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에요? 죽었다는 사람이 버젓이 이렇게 살아 있다니…….”
“설마 제가 지금 죽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호호호, 그럴 리가 있어요? 당연히 아니죠. 소울 씨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하라는 예쁘게 미소를 지으면 연신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아니 시선만이 아니었다.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어느새 그의 팔에 슬그머니 팔짱까지 끼면서 조잘거리고 있었다.
‘어? 이거 봐라? 뭔가 기분이 묘하네?’
소울은 자신의 팔을 통해 느껴지는 부드러운 압박감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피 끓는 청춘인 소울의 나이에는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불끈해지는 법이다. 하물며 E급 능력자로 성장한, 젊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그에게 이런 자극은 당연히 몸에 열이 나는 정상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울은 달궈지는 청춘의 피와는 달리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민세경, 유정아, 정윤이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가고 있었다.
유정아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자꾸 왜 민세경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그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현재 가장 많이 떠오르고 있는 얼굴은 정윤이었다.
만약 어제 그렇고 그런 일만 없었다면 오늘 소울은 고하라의 은근한 유혹에 모른 척 넘어가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오히려 자신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대시했을 것이다.
이래서 남녀관계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는가 보다.
소울과 고하라가 주변 사람의 시선을 끌어 모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서 어느덧 7시가 됐다.
승선 시간을 알리자 두 사람은 미리 구매했던 티켓을 승무원에게 주고 배에 올라탔다.
한강변이 잘 보이는 창가에 마주보고 앉자, 웨이트리스가 두 사람에게 와서 어떤 음료수를 마실지 물어봤다.
“와인 한 잔 할까요?”
“좋아요.”
고하라는 먼저 와인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소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 두 잔 주세요.”
웨이트리스가 사라지자 고하라는 소울을 정면으로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마치 꿈만 같아요.”
“네?”
“정말 죽은 줄 알고 제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르죠?”
“으음.”
“많이 보고 싶었어요.”
고하라는 원래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유형이었는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표현했다.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지는 몰랐던 소울은 오히려 조금 위축이 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소울은 곧 자신감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이 고하라에게 매달리고 있는 시추에이션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시에 여러 여자를 사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모두 한 번씩은 만나 봐야겠다. 한번 결혼하면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데 얼굴만 예쁘다고 무조건 오케이를 해서는 곤란해. 물론 정윤이, 고하라, 채희라 세 명 모두 아름답기는 하지만 말이야.’
소울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의 아내감을 고르는 마음으로 한참을 앞서가고 있었다.
하긴 누구라도 유정아, 정윤이 같은 미녀들과 연달아 운우지락을 나눈다면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할 것이다.
웨이트리스가 와인 두 잔을 가져오자 그들은 맑은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건배를 했다. 와인의 향을 맡고 가볍게 한 모금 입에 넣고 음미하다 목구멍에 넣은 그들은 곧 와인 잔을 내려놓고 나란히 일어서서 크루즈 디너의 메인인 뷔페로 향했다.
소울이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을 가득 담아오자, 고하라도 그에 질세라 자신의 접시를 가득 채워가지고 왔다. 다만 소울이 고기와 해산물 등 육류 위주라면 그녀는 샐러드와 과일 그리고 채소가 주종을 이뤘다.
두 사람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면서 강남 세븐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조금 더 깊이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분위기는 점점 핑크빛 무드로 변해가고 있었다.
쉐프의 품격 있는 특급 만찬을 맛보며 한강의 멋진 야경 속에 묻어나는 로맨틱한 선상의 데이트는 낭만적인 선율이 흐르는 라이브 공연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맛있는 요리로 배가 차고, 포도주와 술이 적당히 들어간 상태에서, 한강의 야경과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악이 울려 퍼지자 유람선 선상에서는 없던 로맨스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 참 좋네요.”
“그러네요.”
“한강유람선을 타는 게 이렇게 즐거울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저도요. 덕분에 이렇게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게 돼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소울 씨와 함께라면 열 번이라도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하하하!”
소울은 느닷없이 툭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돌 직구를 웃음으로 넘기며 고하라와 같이 선상으로 걸어 나왔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는 순간, 맞바람이 불어와 그녀가 입은 하얀 원피스를 강하게 펄럭거렸다.
꿀꺽!
소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녀의 풍만하고 아름다운 몸매가 바람으로 인해 그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고하라는 바람을 맞으면서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왔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이 소울의 얼굴을 절로 붉게 만들었다.
“바람 때문에 조금 춥네요. 안아주세요.”
“아! 네.”
소울은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유혹덩어리를 결국 밀어내지 못했다.
뭉클!
두 개의 부드러운 융기가 제일먼저 자신의 가슴을 압박했다. 그녀의 숨소리가 그의 목을 간지럽히고 이어 자신의 코로 훅하고 들어오는 달착지근한 체향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소울과 고하라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아무도 두 사람의 행사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군계일학의 모습을 자랑하듯 드러내고 있었다.
고하라가 뜨거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소울이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리자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유람선의 조명이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새하얀 살덩이들이 그녀의 옷을 뚫고 위로 밀려올라와 자신의 시선을 붙잡았다.
고하라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꿀꺽!
소울은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냥 나 잡아 잡숴!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그는 1초도 고민을 하지 못했다. 머리는 자제하려고 생각하는데 몸은 이미 그녀의 반응에 격렬히 호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소울의 입술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찍어 누르며 욕심껏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다.
“으음!”
달착지근한 그녀의 신음성이 그의 귀를 간지럽히자 소울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그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막 하얀 성문을 열고 밀고 들어가 본격적인 프렌치 키스를 해보려는 찰나에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에에에에에엥…….
갑자기 영화에서나 들어봤던 사이렌 소리가 서울 전역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울과 고하라는 속으로 각각 사이렌 소리를 원망하며 급히 떨어졌다.
“무슨 소리죠?”
“글쎄요?”
고하라의 물음에 소울은 뭐라고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능력자협회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공지사항을 읽으려는 순간, 능력자협회 서울지부에서 서울의 능력자들에게 보낸 긴급메시지가 수신됐다.
<강남필드에서 가고일로 보이는 비행 몬스터전단 출현! 서울을 향해 북상 중! 현재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울산 전역 공습경계령 발동! 경계태세 요망!>
놀라운 소식이었다.
가고일이라면 하피보다 훨씬 강력한 비행 몬스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가고일이 전단을 이룰 정도라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가 강남필드를 통해 빠져나왔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서울 전역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비행 몬스터가 강남필드를 빠져 나와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에? 몬스터가요?”
고하라는 소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녀도 소울이 고블린과 싸우는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봤었다. 그래서 몬스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요. 비행 몬스터가 다가오면 무조건 탁자 아래로 들어가 숨도록 해요. 절대로 소리를 내거나 주의를 끌어서는 안 됩니다.”
“네.”
고하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단호한 소울의 말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울은 고하라를 배안으로 데려다 주고는 자신의 전투헬멧을 챙겨 썼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전투배낭을 들고 오는 건데…….’
그는 오른쪽 허벅지에 달려있는 도끼집 안에 들어있는 토마호크라도 가져온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했다.
그는 일단 아일랜드 크루즈 승무원을 찾아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선장을 찾았다.
남자 승무원은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하고 쳐다보다 소울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올라온 긴급메시지를 보여주자 허겁지겁 그를 데리고 선장을 찾아갔다.
“이소울 능력자입니다. 여기 제 능력자 등록증이 있습니다. 현재 서울 전역에 공습경계령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즉시 조명을 끄고 회항하셔야 합니다.”
“네, 아니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입니까? 공습경계령이라니요?”
와인이라도 한 잔 걸쳤는지 얼굴이 불콰한 50대 중반의 선장은 보기보다 굉장히 깐깐했다. 하지만 소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선장님도 들으셨지요? 서울 전역에서 들려오는 이 사이렌 소리 말입니다. 이게 공습경계령입니다. 강남필드에서 현재 가고일이라는 비행 몬스터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즉시 저 조명부터 끄도록 하세요. 그리고 조용히 회항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 조명을 보고 비행 몬스터가 이리로 몰려올지 모릅니다.”
“네에?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단호한 소울의 말에 선장은 잠시 고민을 했다.
사이렌 소리로 인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비행 몬스터가 강남필드를 벗어나 한강으로 온다는 말은 동의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선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회항이 힘들면 당장 저 조명이라도 끄세요. 이러다가 가고일이 몰려오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습니다. 지금 돈 몇 푼이나 회사에서 욕먹을까봐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선장은 보기보다 깐깐한 사람이 아니라 꽉 막힌 사람 같았다.
그는 화난 표정으로 소울을 쳐다봤다. 소울이 한 말 중 뭔가가 그의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한 듯 크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이 새끼 뭐야? 왜 이놈의 얼굴에서 네월호 선장의 얼굴이 보이는 거지?’
소울은 씩씩대며 자신을 쳐다보는 선장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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