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제 22 장 -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야. =========================================================================
“이제 세경이 때문에 아프지는 않지?”
“응. 정말 그러네. 어제만 해도 못 견디게 힘들더니…….”
“원래 여자에게 받은 상처는 여자에게 치유 받는 것이 제일 빠르다고 그랬어.”
“혹시 날 위로해주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야?”
유정아는 소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있나? 자기 너무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 난 내 주제를 너무도 잘 알거든.”
“그래. 그래야 오래 살지. 자기를 선택한 것은 파트너로 삼아도 뒤탈이 없을 것 같아서야.”
그녀의 말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뭐야? 이거 너무 솔직한 것 아니야?”
“그럼 거짓말로, 좋아해서 일부러 접근했다고 말해줄까?”
“응, 그렇게 말해줘.”
“좋아해!”
“정말?”
“응. 정말 좋아해.”
유정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자 소울은 심쿵했다. 거짓인지 뻔히 알고도 진실이길 바라는 마음이 속에서 간질간질 댔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응.”
“어디가 그렇게 좋아?”
“여기가.”
그녀의 손이 불쑥 아래쪽으로 향했다.
“설마 여기가 아니라 여기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호호호!”
그녀는 밝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울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개또라이 사이코인줄로만 알았는데 하룻밤이 지나고 나자 그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물론 여전히 위험하고 치명적인 여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녀가 자신을 적대하는 적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최소한 그녀 덕분에 이제 세경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룸서비스를 통해 시킨 아침식사를 우아하게 즐기며 그렇게 서로에 대해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정아야, 혹시 너 엘리스 존슨이나 로이 스미스라고 알아?”
“어? 그 이름 자기가 어떻게 알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어라, 두 사람의 정체도 모르고 묻는 거였어?”
소울은 혹시나 해서 물어본 질문에 그녀가 뭔가 아는 것 같자 눈을 말똥거리며 쳐다봤다.
“로이 스미스는 미국 능력자협회의 회장으로 능력자명이 썬더야!”
“아! 썬더!”
소울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소울넷에 접속할 수 있는 자신 외 2명 중 한 명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그의 본명은 일반 사람은 잘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가 그걸 알고 있어?”
“뭐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어.”
소울넷을 통해 알게 됐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소울은 그냥 대충 웃음으로 위기를 넘겼다.
유정아는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기로 했다.
“썬더의 본명은 인터넷을 뒤지면 알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오라클의 본명인 엘리스 존슨은 절대 쉽게 알 수가 없는 극비사항이야. 나도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거거든…….”
“오라클? 그게 뭐야?”
“엥? 자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럼 도대체 누가 이런 극비사항을 흘린 거야?”
“그냥 나도 우연히 들은 것뿐이야.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몰라.”
“좋아. 굳이 밝히기 싫다면 액면 그대로 믿어줄게.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히 알아둬. 절대 사람들 앞에서 두 번 다시 썬더와 오라클의 본명을 말하지 마. 알았지?”
“응.”
“난 자기 죽는 것 싫어서 그래.”
“아, 알았어.”
그는 유정아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저 정도로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뭔가 대단한 비밀, 아니 누군가는 알아서는 안 되는 위험한 비밀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라클이 누군지 정말 몰라?”
“오라클이 누군데?”
“오라클은 세계 능력자협회 회장이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놀라운 능력자이지.”
“그게 전부야?”
“뭘 알고 싶은데? 더 알고 싶어? 목숨이 왔다 갔다 하게 될 텐데도…….”
“…….”
그녀의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정아는 잠시 소울의 눈을 쳐다보다가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예언자야.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녀가 세계 능력자협회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녀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여기까지야. 내가 자기에게 알려줄 수 있는 범위는……. 사실 이것도 아무에게 발설하면 안 되는 건데……. 그러니까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고 다니면 안 돼!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으니까, 알았지?”
“응. 절대 어디 가서 얘기하지 않을게.”
“좋아. 그래야 내 착한 자기지.”
유정아는 심각한 얼굴을 풀고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녀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그에게 애교를 떨었다.
“자기야. 오늘 아침에 잠깐 운전하고 가면 안 될까?”
“또?”
그녀의 애교는 정말 치명적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사실은 내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
“밤새도록 달려놓고 아주 힘이 넘치네?”
“어제는 시운전이었고 오늘부터는 정식으로 운전을 해야지?”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새벽에 먼동이 터 올 때까지 달려놓고 멀쩡한 그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너 혹시 능력자냐? 왜 이렇게 정력이 좋아?”
“맞아. 나 능력자야.”
“저, 정말?”
“응. 대신 비밀이야. 어떤 능력자인지도 안알랴줌!”
생각해보니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순식간에 옆에 나타나 쳐다보았던 귀신같은 행동들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대충 짐작이 되네. 은신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암살자라고 해야 하나? 뭐 대충 그런 쪽이겠지?”
“절대로 안갈켜줌!”
“그래. 알았다. 가르쳐주지 마라.”
그녀가 도리질을 하자 소울은 그녀가 어떤 능력자인지 묻는 것을 포기했다.
F급 능력자도 능력자가 맞긴 맞나보다. 그렇게 밤새도록 달려놓고 유정아가 유혹한다고 또 달리고 싶으니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아침부터 정식 운전을 시작해서 마구 달려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었다.
* * * * *
승강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601호실 문을 열고 들어간 소울은 허리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웠다.
“에고, 내가 미쳤지.”
그는 허리가 찌릿찌릿 하는 느낌에 아침부터 무리한 것을 후회했다.
잠시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정을 보던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피라미드 모양에 은색으로 빛나는 입체 정삼각형 마나집적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자거나 수련을 하면 더욱 강해진다고 했지.’
세이지가 했던 말이 기억나자 침대 위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려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마나집적진 안에 놓인 은판 위에 올라가 허리를 대고 누웠다.
‘피곤한데 여기서 좀 자다가 일어나야겠다.’
그는 온몸으로 몰려드는 피곤함에 더 이상 꼼짝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누워 모자란 잠을 청하기로 했다.
하룻밤을 폭주(暴酒)와 유정아로 하얗게 달린 소울은 몇 번 숨을 쉬기도 전에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쿨쿨 거리며 잠을 빠지자 그의 머리카락 속에서 까망이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규!]
까망이는 그의 몸통 위에서 몇 번 통통거리다가 허리 쪽으로 굴러 내려가더니 은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마나집적진을 통해 은판 위로 모여드는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규!]
까망이는 몸속에 넣어둔 마석을 하나 꺼내 사탕처럼 살살 녹여서 빨아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정석에서 폭발적으로 기운이 쏟아져 나와 까망이의 배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규규!]
기분이 좋아진 까망이는 소울의 허리에 몸을 살살 비볐다.
까망이의 눈에 살짝 삐끗한 그의 허리가 들어오자 그는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마나의 일부를 살짝 돌렸다. 그러자 마나가 그의 허리 쪽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능력자의 회복능력과 까망이가 밀어준 마나로 인해 소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됐다. 아니 예전에 비해 허리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진 소울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아픈 허리가 낫자 뭔가 편안해진 것을 느꼈는지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 일도 많고, 탈도 많은 하루 뒤의 휴식이었다.
* * * * *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소울넷 포인트가 많이 모여 있지?”
소울넷에 접속한 소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울넷 포인트가 무려 495p나 됐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확인했던 소울넷 포인트가 분명히 95p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된 게 거의 5배로 뻥 튀기가 되어 있었다.
“요상한 일이네?”
그는 로그 기록을 살펴봤다.
그러자 타이로스, 탄탈라스, 세이지가 100p씩 소울넷 포인트를 선물로 보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100p는 전혀 모르는 자들이 영혼체험을 해서 모인 것들이었다.
“왜 타이로스, 탄탈라스, 세이지가 100p씩 선물을 보낸 것일까? 내가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막았다고 뇌물을 주는 건가?”
일단은 그렇게 밖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소울넷 영혼체험 인터페이스로 들어갔다.
그러자 상단에 타이로스, 탄탈라스, 세이지가 보낸 메모가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셋 모두 내용은 동일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계속 영혼체험을 하고 싶으니 막지 말아달라는 말이었다.
특히 세이지는 소울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대기 상태에 있었다.
“이 인간과 내가 굳이 대화를 해야 하나?”
그는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굳이 또 대화를 안 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최소한 그의 변명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소울은 세이지와의 대화를 승낙하고 그를 소울넷 영혼체험 인터페이스로 불러들였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는가?”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다행이군. 긴말하지 않겠네. 혹시 내가 자네 기분을 상하게 한 적이 있는가?”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세이지는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질문을 해왔다.
“일정 시점을 기준으로 더 이상 영혼체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네.”
“그렇군요.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세이지님만 막아 놓은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는가?”
“그것보다 제가 뭘 좀 먼저 묻고 싶습니다.”
“네게 말인가?”
“그렇습니다.”
세이지는 소울이 오늘따라 냉정하고 차갑게 그를 대하자 약간 의아해 하는 것 같았다. 소울은 세이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이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알고 보니 세이지님의 악명이 우주에 자자하시더군요. 혹시 제 육체도 가로채려는 시도를 하신 겁니까?”
“아! 이제 이해가 되는군. 또 어떤 놈이 나에 대한 악담을 했구먼.”
“그렇게 말을 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그런 일을 벌이신 게 한두 번이 아니셨군요.”
“하하하, 누군지 모르지만 자네에게 나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제대로 심어 놓았군.”
세이지는 소울의 말을 듣자 오히려 파안대소를 하며 여유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소울에게는 무척 이상하고 위화감이 들었다.
“변명이라도 한번 해보시라고 모셨습니다.”
“고맙네. 자네는 그래도 공평한 사람이군. 한쪽 말만 듣고 무정하게 끊어버리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야. 그 점은 무척 마음에 드네.”
“그런 말을 듣자고 모신 것은 아닙니다만…….”
소울이 퉁명스럽게 말을 하자 세이지는 돌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어떤 악명을 지녔다고 했는지 얘기해주게.”
“좋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죠.”
소울은 세이지의 요청에 두말없이 자신이 들은 소리를 가감 없이 얘기했다. 물론 탄탈라스로부터 들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세이지가 그의 얘기를 다 듣고 나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고맙네. 내 요구를 두말하지 않고 들어줘서…….”
“천만에요. 양쪽의 얘기를 모두 들어봐야 제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건 무척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네. 그럼 이제 내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도록 하지.”
“말씀하십시오. 한번 잘 들어보겠습니다.”
세이지가 소울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의 말대로 소울넷을 통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면 소울넷은 왜 지금 이 순간에도 소울넷을 마음껏 사용하는 나를 내버려두겠는가?”
“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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