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OULNET-84화 (84/492)
  • 00084  제 21 장 - 까망이의 첫 수확  =========================================================================

    방을 한번 돌아보고 응접실로 나오자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하얀 거품이 동동 떠 있는 맥주가 가득 담긴 맥주잔 2개가 놓여있었다.

    중앙에는 안주라고 가져왔는지 각종 과자들이 수북하게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일단 우리 건배하고 한잔해요.”

    “좋습니다.”

    두 사람은 살짝 서로의 맥주잔을 부딪쳐 소리를 내고는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카아! 시원하다.”

    “하아, 좋네요.”

    유정아는 자신의 입가에 묻은 하얀 거품을 닦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왕이면 우리 분위기 있게 마실까요?”

    “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는 일단 대답부터 했다.

    유정아는 그의 말에 곧바로 방안의 조명을 간접조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꺼버렸다.

    그리고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

    밖은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세상은 덕분에 주홍빛으로 칠을 해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소울은 신사동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한강이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고도 먼 곳에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보니 마치 한강의 물결이 잡을 수 없는 세경이처럼 느껴졌다.

    유정아는 말없이 소울의 옆에 서서 점점 어두워지는 서울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이제 백치미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백치미가 가득한 멍한 표정은 금세 그의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딩동!

    “편의점에서 배달왔나보네요.”

    유정아는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편의점과 치킨 배달시킨 곳에서 동시에 배달이 왔다.

    소울은 굳이 유정아를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유정아의 얼굴과 몸매에 뿅 간 배달원들이 그녀의 말에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며 헬렐레 거렸다.

    ‘설마 나도 저런 표정으로 유정아의 마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사적으로 만나 술을 같이 마시기로 한 이후부터 너무나도 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유정아로 인해 자신의 가드가 너무 많이 내려간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 아닙니다.”

    “그럼 같이 빨리 술상 만들어 봐요.”

    유정아는 넓은 응접실 테이블 위에 온갖 술과 안주거리를 모조리 꺼내 가득 채워놓았다.

    “호호호, 어때요? 이렇게 채워놓으니까 술 맛 나죠?”

    “하하하, 뭐 그런 것도 같네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응접실 테이블 위로 가득 채워 놓은 술과 안주거리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자! 건배!”

    “건배!”

    그렇게 소울과 유정아는 같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작은 캔 맥주였다.

    한 박스의 캔 맥주를 나눠 마신 두 사람은 배부르다며 소주로 넘어갔다.

    이미 치킨 한 마리는 두 사람이 사이좋게 나눠 먹었고 응접실 테이블 위의 안주거리도 빠르게 하나씩 두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술을 잘 마셔요? 체질이에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소울 씨도 술 잘 마시네요.”

    “그거야 F급 능력자라고 해도 능력자니까 그렇죠.”

    “호호호, 왜 스스로 F급 능력자라는 것을 강조해요?”

    유정아가 소주잔을 비우자 그는 소주잔을 채워주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자격지심(自激之心)인가 봐요.”

    “자격지심이라? 진짜 자격지심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격지심 있다고 말 안 해요.”

    “그런가요?”

    이번에는 소울이 잔을 비우자 유정아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얼굴 좀 피고 마셔요. 누가 보면 실연당했는지 알겠어요.”

    “사실 실연당한 것 맞아요. 오늘에야 내가 제대로 차였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흐음, 아무래도 세경이 얘기 같네요. 맞죠?”

    유정아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곧바로 돌 직구를 던져왔다.

    “맞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죠? 혹시 나보다 먼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건 노코멘트 할래요. 난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것은 질색이거든요.”

    “휴우, 하긴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소울이 소주잔을 거침없이 비우자 유정아는 잽싸게 소주병을 잡아 그의 잔을 채워줬다.

    “두 사람, 이제 확실하게 헤어진 것 맞죠?”

    “헤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제대로 사귀어 본 적도 없었어요.”

    “내 눈에는 두 사람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데……. 뭐라고 할까?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어요.”

    “깊은 관계라……. 요새 여자들은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깊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죠.”

    새롭게 소주병을 딴 그는 약간은 도전적인 말투로 유정아에게 물었다.

    “정아 씨는 어느 쪽이에요?”

    “이런 질문은 좀 예민한 질문인데…….”

    유정아는 자신의 입가에 묻은 술을 빨아 먹으며 소울의 눈을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눈 속에 뭔가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본 것 같아 순간 흠칫했다.

    “굳이 말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난 처음에는 요새 사람이 아니었어요. 좀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의 정조관념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만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요새 사람이 되었죠.”

    유정아의 말에는 뭔가 가슴이 짠한 사연이 있어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할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진짜 사랑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 힘들었겠네요.”

    “네, 아주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난 사랑을 깨끗이 포기했어요. 대신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기로 했어요.”

    “그게 이 연구인가요?”

    “꼭 이 연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를 아주 흥미롭게 만드는 연구에요.”

    “연구가 재밌어요?”

    “재미있냐고요? 글쎄요. 과정은 인내와의 싸움이지만 결과가 나오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정도로 달콤하죠. 물론 그 달콤한 과실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 놈들이 많아서 문제지만.”

    유정아의 말에는 약간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니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그럼 앞으로 사랑은 안하고 살 거예요?”

    “어떤 사랑이요? 결혼이요? 아니면 섹스요?”

    “글쎄요. 사랑하면 결혼하고 섹스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호호호, 순진한 거예요? 아니면 바보에요? 결혼도 섹스도 전부 사랑 없이 가능한 거잖아요.”

    “아! 그렇긴 하지만 제 말은…….”

    막상 말을 하려고 보니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도 처음부터 세경을 사랑해서 관계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경과의 관계 후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설마 지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헉, 아, 아니에요.”

    “얼굴이 다 쓰여 있는데 부인하기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매만졌다.

    유정아는 그런 소울을 바라보며 목젖이 드러나도록 신나게 웃었다.

    “호호호호!”

    “…….”

    자신도 모르게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은 그는 소주잔이 비어있자 새 소주병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소주병은 다 깨끗이 비어있었다.

    “벌써 다 마셨네?”

    “소주가 끝났으면 이제 양주로 넘어가보죠. 이 위스키 어때요?”

    “좋아요.”

    유정아가 든 위스키는 모 대통령이 서거당시 마셨다는 ‘시바스키 리갈’이었다.

    시작은 일단 12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놈으로 했다.

    알코올 도수 40%의 위스키가 미리 꺼내 놓은 위스키 잔을 통해 스트레이트로 목구멍에 넘어가자 식도가 순간 불에 타는 듯 화끈했고 위속이 뜨거워지더니 잠시 후 배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캬아! 화끈하네요.”

    “캬아! 좋네요.”

    두 사람은 그렇게 몇 병이 바닥이 날 때까지 별다른 말없이 그저 서로의 잔에 위스키를  채워주었다.

    “아이유, 12년짜리 다 떨어졌네요.”

    “걱정하지 말아요. 18년짜리가 있으니까.”

    “그거 지금 나한테 욕한 것 맞죠?”

    “호호호, 취했어요? 헛소리를 하게? 아니면 농담이라고 한 것은 아니겠죠?”

    “우씨, 농담이었는데.”

    “어디서 전설의 쌍팔년 농담을 하고 그러세요. 나이에 안 맞게.”

    “그게 쌍팔년대 농담인 것은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기는요. 아저씨들하고 술 마시러 가면 맨날 하는 농담이 그건데.”

    “아저씨들이요?”

    “그런 게 있어요. 지금은 죽었지만.”

    유정아의 얼굴이 금세 슬픈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을 보니 그 아저씨라고 하는 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요.”

    “괜찮아요. 어차피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한편의 코미디라고 하잖아요. 그냥 술이 나 마시고 죽어봅시다.”

    “좋습니다.”

    “이거 잔이 너무 작네. 컵에 따라 마시죠?”

    “사실 감질나긴 하네요.”

    두 사람은 어느새 위스키 잔에서 맥주 컵으로 잔을 바꿨다.

    그리고 사온 술이 모두 다 떨어질 때까지 마셔댔다.

    아무리 능력자가 술을 잘 마신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미 소울의 주량을 한참 넘긴 상태라 그는 기분 좋게 취해 알딸딸한 상태가 됐다.

    그것은 유정아도 마찬가지였다.

    “야! 너 이 누나 너무 미워하지 마. 나도 알고 보면 불쌍한 년이야.”

    “네가 불쌍한 년이면 세상에 태어난 년들은 다 불쌍한 년이다.”

    두 사람은 혀가 잔뜩 꼬부라진 목소리로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아니 그런데 이놈이 왜 자꾸 나한테 이년 저년 하고 있지? 듣는 년 기분 나쁘게?”

    “너도 아까부터 나한테 이놈 저놈 하고 있거든. 듣는 놈 기분 나쁘게…….”

    “그래? 그럼 쌤쌤이네?”

    “그래. 쌤쌤이지. 그러니까 나한테 자꾸 헛소리 하지 마. 진짜 기분 나쁜 놈은 바로 나야. 너 나 죽이려고 했잖아.”

    “언제? 내가 너를 왜 죽여?”

    “아이씨, 지난 번 사건 기억 안나? 그래서 네가 나한테 보상도 해줬잖아.”

    “아아! 그거! 그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난 그냥 명령만 전달 해준 거라고. 내가 한 명령이 아니었어.”

    “정말이야?”

    “그래.”

    두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까지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명령만 전했다고 해도 잘못했으면 내가 죽을 뻔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넌 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해. 아니 나한테 사과해야해.”

    “그건 내 잘못이 아냐. 그 또라이 같은 조장새끼가 괜히 오버해서 일어난 일이야. 그리고 내가 너한테 보상해줬잖아. 그게 모자라다는 거야?”

    “그래.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지. 넌 네 목숨과 네가 한 보상이랑 바꾸자면 바꿀 거야?”

    “아니 미쳤냐?”

    “거봐, 너도 네 보상이 모자라다는 것 이제 알겠지?”

    “어! 그러고 보니 보상이 좀 모자라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난 충분히 보상했는데……. 어떻게 하지?”

    “어떡게 하긴 사과해야지.”

    “사과?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데?”

    “우씨, 너 사과하기 싫어서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지? 맞지? 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가지고 사과해봐. 그럼 내가 받아줄게.”

    “진심을 가지고?”

    “그래.”

    “그걸 어떻게 전해? 아니다. 이렇게 전하면 되겠구나.”

    유정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소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사이에 댔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자, 여기 내 진심 있다. 미안하다. 알았지?”

    “어디에 있다는 거야? 말랑거리기만 하는구먼. 진심을 전하라니까?”

    “알았다. 진심 들어간다. 받아라.”

    유정아는 소울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그의 두 손을 모두 잡아다가 자신의 가슴에 포갰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얼굴을 잡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후우우우우!”

    “우읍, 웁!”

    소울은 고개를 도리질해서 그녀의 입술을 떼어냈다.

    “야! 왜 내 입에 바람을 불어넣고 그래?”

    “그건 내 진심이야. 바람이 아니고…….”

    “그게 바람이지 어떻게 진심이야. 진심은 이 가슴에서 나오는 거야.”

    “내 가슴 너한테 있잖아. 잘 잡고 있으면서 왜 그래.”

    “네 가슴? 어? 내가 언제 네 가슴을 잡았지?”

    소울은 눈을 껌뻑거리면서 자신의 두 손이 그녀의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의아해했다.

    유정아도 소울이 왜 자신의 가슴을 잡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소울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리자 뭔가 간질거리고 기분이 좋아져서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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