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제 19 장 - 별리(別離) =========================================================================
“그건 좀 안타깝네요.”
“하지만 어차피 F급과 E급의 능력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아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네.”
소울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모든 일이 너무 쉽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다 입니까?”
“보상을 말하는 건가요?”
“네.”
“이게 전부에요.”
“정말이죠? 보상을 받는데 다른 조건 같은 것은 없는 거죠?”
“물론 있습니다.”
“아!”
그럴 줄 알았다. 유정아 박사가 이렇게 보상을 하고 깨끗하게 손을 털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울은 오히려 그녀가 조건이 있다는 말에 안심이 되는 모순적인 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비장한 표정 짓지 말아요. 나 그렇게 나쁜 년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소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너 나쁜 년 맞거든. 아니 사이코라고 해야 하나?’
유정아는 마치 실연을 당한 여자 같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소울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절대 당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막상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소울은 마음의 무장해제가 오토매틱으로 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좌절했다.
‘이건 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야. 졸라 예쁘게 태어난 저 여우같은 년이 문제인거야.’
[규!]
[까망아!]
까망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소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만약에 유정아가 적군이었다면 분명히 자신은 미인계에 벌써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소름이 끼쳤다.
“제발 그 이상한 행동 좀 그만하고 빨리 조건이나 말해 봐요.”
“어머, 너무 냉정하세요.”
“조건!”
“호호호, 알았어요. 말할게요.”
소울의 단호한 말에 유정아는 재미있다는 듯 시원하게 웃었다.
“전투슈트 자체에 AI가 내장되어 있어요. 그러니 3일에 한번 나에게 칩을 가져오세요.”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1주에 한번으로 하죠.”
“그런가요? 뭐 좋아요.”
유정아는 의외로 쿨 하게 소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게 조건의 전부인가요?”
“아직 한 가지 더 남았어요.”
“뭔데요?”
“음,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기도 해요. 남들이 알면 안 되기도 하고요.”
“또 무슨 수작이에요?”
“그런 것 아니에요. 사실은 내가 극비리에 연구하고 있는 게 좀 있는데 그걸 테스트 해줬으면 해요.”
“뭘 연구하시는데요?”
“이거에요.”
유정아는 자신의 책상 안에서 숏소드와 쇠뇌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건 숏소드와 쇠뇌 아닙니까? 설마 극비리에 연구를 한다는 것이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거였어요?”
“네, 앞으로 능력자들을 위한 무기시장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게 될 거에요. 난 새로운 무기에 대한 메커니즘을 개발하고 있어요. 그러니 내 연구에 협조를 해줬으면 해요.”
얘기를 듣고 보니 생각보다 유정아 박사의 야망이 큰 것 같았다.
능력개발청과 능력자협회에서 양쪽으로 연구를 의뢰 받아놓고 이렇게 버젓이 개인연구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하하, 설마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이죠. 뭘 원하세요? 혹시 나?”
유정아는 자신의 가슴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푹 찌르며 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소울의 시선이 절로 움직였다.
“크흠, 그런 것 아니거든요.”
“어머, 정곡을 찔리셨나보다. 얼굴이 새빨개졌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대가를 지불하세요.”
소울이 정색을 하자 유정아도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주는 것은 좀 그렇고 나중에 내가 회사를 차리게 되면 지분을 주도록 하죠.”
“거기에다 하나 더 주세요.”
“뭐에요? 지분을 줘도 만족을 못하시는 거예요? 설마 나까지 포함시키라는 건가요?”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소울은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아니요. 테스트 하는 무기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나한테 소유권을 넘겨주세요.”
“그건 곤란해요. 차라리 이렇게 하죠. 매번 더 새롭고 더 강력한 무기로 계속 바꿔주기로 말이에요. 그럼 무기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이득이 될 거에요.”
소울은 잠시 생각해보고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유정아는 소울의 말에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말이었다.
“딜(Deal)?”
“딜(Deal)!”
소울은 유정아의 고운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빠져나와 그의 손바닥을 가운데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역시 정상은 아닌 여자였다.
“전투헬멧을 개조해서 고성능 카메라를 달아놓았어요. 몬스터와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켜서 동영상을 녹화해주세요.”
“동영상의 저작권은 제게 있습니다.”
“좋아요. 대신 제 연구의 비밀이 밝혀지면 안 되니 그런 장면은 삭제하고 줄게요.”
“좋습니다.”
유정아와 소울은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양쪽 다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참, 강남필드 안가요?”
“거길 왜 가요? 혹시 능력자협회 서울지부 긴급재난팀에게 부탁이라도 받았어요?”
“네, 이소울 대원이 쇠뇌를 잘 쓴다는 말을 듣고 차출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어요.”
소울의 미소가 대번에 사라졌다.
“전 거기 갈 일 없거든요.”
“나도 가란 말 안했어요.”
“그런데 왜 물어요?”
“그냥요.”
소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정아가 괜히 물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거지?”
“…….”
“왜 안 물어봐요?”
“뭘요?”
“내가 누구 얘기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는데요?”
소울은 또 무슨 수작을 하려는지 몰라 냉정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경계심을 상향시켰다.
“그렇구나. 세경이가 알면 섭섭해 하겠다.”
“세경이가, 아니 세경 씨가 왜요?”
“오오, 세경이란다. 확실히 둘이 뭔가 있네?”
“있기는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소울은 일단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유정아의 입에서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강남필드 간다고 아침부터 나갔는데 아직도 안돌아왔어요.”
“네에?”
소울은 세경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이소울 대원이 한번 가서 살펴봐줄래요?”
“내가 왜요?”
“싫으면 말고요. 세경에게 전해줄 말도 있는데…….”
낚시였다. 낚시가 분명했다. 하지만 낚시라는 것을 알고도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모르는 척 해버리면 세경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좋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세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중에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저주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건 어느 쪽으로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할 수 없군요. 내가 가볼게요.”
“호호호,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이소울 대원은 참 자상하시네요. 세경이 찾아서 나한테 꼭 전화 좀 해달라고 말해줘요.”
“네? 그게 다에요?”
“네, 그렇게만 전해주세요.”
소울은 세경이 때문이라도 어차피 가야한다고 생각하자 강남필드에 가는 것이 더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 싶어 당장 강남필드로 날아가고만 싶었다.
“그냥 가지 말고 최신형 E급 전투슈트 세트 내어 줄 테니, 입고 가세요. 혹시 원하지 않는 전투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소울은 유정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아는 자신의 캐비닛을 열어서 최신형 E급 전투슈트 세트 꺼내 주었다.
“제가 전투슈트 입는 것 도와줄게요.”
“아니에요. 나 혼자 입을 수 있어요.”
“그래도 둘이 하는 게 더 빨라요.”
소울은 싫다는 것을 기어코 남아서 그에게 전투슈트를 입히는 유정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던 최신형 E급 전투슈트 세트를 모두 장비하고 나자 소울은 기분이 좋아졌다.
확실히 기존의 전투슈트와는 달리 쾌적하고 편안했기 때문이다.
“어때요? 확실히 편안하죠?”
“그러네요.”
“여기는 어때요? 잘 모셔져 있나요? 어디 불편한데는 없고요? 남자들은 여기가 불편하면 전투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괘, 괜찮아요.”
소울은 그녀의 손길이 자꾸 자신의 사타구니 근처를 스치자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말을 들어보면 전투슈트 개발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했고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면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는 것 같아 헷갈렸다.
전투슈트를 입고 전투헬멧을 쓰고 전투화를 신었다.
그리고 간단히 몇 가지를 테스트 하고 나자 그는 겨우 유정아의 손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다.
“그럼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헉, 네!”
유정아 박사가 갑자기 소울의 품에 안겨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울이 그녀의 품에 들어갔다.
물컹하고 푹신한 감촉이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녀의 체향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소울은 마치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왜 이런 아름다운 미녀가 지금 나를 안고 있는 거지? 혹시 날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정말 미치겠네. 이걸 확 덮쳐버릴 수도 없고.’
소울은 자꾸 그녀의 몸과 행동에 격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 일부에 대한 원망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주책없는 심장이 쿵덕거리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소울은 결국 유정아의 부드러운 몸을 꼭 감싸 않았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울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유정아는 슬그머니 그를 안은 팔을 풀어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같이 술 마시고 싶은 술친구가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요. 같이 마셔 줄게요.”
“네? 그럴 리가요?”
“흥, 누가 알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나와 술 마시고 싶어질지?”
“아! 네.”
그는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멀어져가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러다 세경 생각이 나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 이래서는 안 되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난 소울은 유정아 박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보상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뵈요.”
“저도 오늘 고마웠어요. 앞으로 우리 잘 해봐요.”
“네.”
그의 대답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그녀와 뭘 잘해볼 게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곧 그녀의 개인적인 연구를 돕기로 했다는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소울이 유정아 박사의 방을 나서자 유정아는 계속 자신의 손을 귀에 대고 전화하라는 시늉을 했다.
소울은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참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퀵서비스회사를 찾았다.
유정아에게 받은 마석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소망에게 퀵서비스로 쏘아주고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망아!”
-아! 형!
“그래, 나다. 잘 있었어?”
-하하하, 며칠이나 됐다고 그런 인사를 해?
“하하하, 그런가?”
-용건이 뭔데? 지난번에 그건 성공했어?
“응, 잘됐어. 그런데 좀 문제가 있어. 그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려고 해.”
-그래? 그럼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돼?
“필요한 것은 퀵서비스로 쐈으니까 나머지는 까톡으로 얘기하자.”
-알았어. 형!
소울은 전화를 끊고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능력자협회 서울지부 건물 정문 앞 도로에 서 있는 강남필드 행 능력자 전용버스를 보자 제일 앞에 있는 전용버스로 갔다.
“언제 출발해요?”
“지금 곧 출발합니다.”
소울은 능력자 등록증을 운전사 옆에 놓인 감지기에 한번 대고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용버스는 능력자들을 다 태웠는지 강남필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만, 내가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소울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자 스마트폰을 꺼내 까톡으로 소망이와 문자로 대화를 시작했다.
꼬르르륵!
그때 그의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씨바, 2층 뷔페식당에서 밥을 안 먹고 왔네.’
소울은 갑자기 유정아 박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같이 밥먹자고 해놓고 그냥 쌩까버렸네?’
소울은 꼬르륵 거리는 배를 잡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갑자기 그는 집에서 먹으려고 끓였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라면 생각이 났다.
‘젠장 그거라도 먹고 올 것을…….’
소울은 오늘 큰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먹는 음식 버리면 죄받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까운 라면만 하나만 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쓰레기통 속에서 퉁퉁 불고 있을 불쌍한 라면 면발이 아쉽고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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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읽어주시고 건강하시고 유쾌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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