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제 13 장 - 옥탑 방에서 =========================================================================
둘은 다시 밖으로 나와 강남대로를 활보했다.
그녀의 가냘픈 팔이 스르륵 그의 탄탄해진 팔에 감기는 기분은 소울의 피로를 단번에 날려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가만 세경이는 힐러 아냐? 그런데 아버지의 병은 치료를 못하는 건가? 하긴 힐러 라고 모든 병을 다 치료하면 세상에 아픈 사람은 하나도 없겠구나.’
소울은 가만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더니 세경의 아버지의 병은 암이나 뇌졸중, 치매 같은 중병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지간한 병은 다 치료한다는 힐러인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그대로 내버려둘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의 힐러 등급이 너무 낮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뇌리를 스쳐갔다.
소울은 호기심이 치밀어 올라 그녀에게 물어보려다가 아직은 자신과 그녀가 그런 것까지 물어 볼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꾹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다.
소울은 대신 세경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액세서리를 구경했다.
역시 여자라서 그런지 조명에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를 보자 이것저것 골라보더니 자신의 머리에 하나 둘씩 해보며 거울을 살폈다.
“오빠, 이거 나 잘 어울려요?”
“응,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소울은 이미 마음속으로 찍어 놓았던 하얀 꽃 모양의 머리띠를 그녀에게 건네줬다.
세경은 웃으면서 머리띠를 받아 자신의 치렁치렁한 머리를 뒤로 묶었다.
“남자 친구 분의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참 잘 어울리세요.”
“…….”
“아! 네.”
민세경은 액세서리 가판대 주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슬쩍 소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울은 굳이 그런 말에 일일이 해명을 할 필요성을 못 느껴 그냥 넘어갔다.
“이거 마음에 드네요.”
“그럼 내가 하나 사줄게.”
“정말요?”
“응, 오늘 세경이와 데이트하는 기념으로…….”
“고마워요.”
세경의 고맙다는 말에 소울은 침을 꿀떡 삼키며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
‘예스!’
그냥 한번 찔러본 것인데 그녀가 덥석 물어오자 두 사람의 오늘의 만남은 이제 공식적인 데이트가 되어버렸다.
소가 뒤로 걷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한결 달달해졌다.
소울은 내친 김에 용기를 내서 그녀의 손을 잡아 보고 싶었지만 손잡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자제하기로 했다.
영화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했다. 소울은 SF판타지나 액션, 어드벤처 영화가 좋았지만 오늘만큼은 세경에게 선택을 양보하기로 했다.
“골랐어?”
“우리 이거 봐요.”
“러브 앤 캐시?”
“네.”
소울은 두 말 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커플석으로 구매했다.
세경도 굳이 말리지 않는 것을 보니 싫지 않나보다.
시간이 얼만 남지 않아 팝콘과 음료수를 서둘러 산 그들은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커플석을 찾아 올라가 나란히 자리에 앉자, 중간에 팔걸이가 없어서 그런지 서로의 몸이 딱 붙기 좋았다.
‘역시 커플석!’
음료수를 음료수 거치대에 올려놓고 팝콘을 오른손으로 들자 세경의 오른손이 자동으로 팝콘 안으로 들어오며 그녀의 몸이 소울의 오른팔에 닿았다.
소울은 순간 찌르르 한 느낌이 들며 몸이 굳어갔다.
걸을 때 팔을 통해 그녀의 가슴의 볼륨감을 익히 느끼고 있었지만 정말 가냘픈 몸매와는 완전히 비견되는 반전 글래머 몸매였다.
한쪽으로 피가 몰리면서 급격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소울은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가늘고 깊게 호흡을 하며 몸을 뒤로 뉘어 등받이에 편하게 기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팔에 쥐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소울은 영화의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탄력감과 따스한 체온 그리고 물컹한 감각만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다.
소울은 문득 그녀가 영화를 잘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때 동시에 세경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둘은 중간에 서로 눈이 딱 마주치자 피하지 않고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뭔가 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소울은 본능적으로 지금 남자가 뭔가 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느꼈다.
타이로스, 라펠, 탄탈라스의 삶을 영혼체험을 통해 경험한 것이 그의 용기에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고 팝콘 봉지를 한쪽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잡아 살짝 들고는 그녀의 귀 뒤쪽으로 넘겨주었다.
세경은 그 상태에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말똥말똥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됐다. 이건 허락한다는 뜻이야.’
타이로스가 염문을 뿌릴 때였는지, 탄탈라스가 귀족의 영애들을 유혹했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소울은 체험적으로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감으로 잡아냈다.
소울은 조금씩 그녀의 얼굴로 다가갔다.
절대 서두르지 않고, 어떻게 보면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그녀가 놀라지 않게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다가가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마 마음속으로 그녀도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세경의 눈이 파르르 떨다가 잠깐 감겼다가 떠졌다.
그 순간 소울은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고 부드럽게 눌렀다.
“으음!”
세경은 살짝 고개를 뒤로 빼며 급히 코로 숨을 들이켰다.
소울은 그대로 더 가까이 다가가며 오른손으로 그녀의 목을 받쳤다.
그러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그녀의 입술과 소울의 입술이 한 치도 용납하지 않고 딱 붙어버렸다.
‘성공이다.’
달콤했다.
과거에 불장난으로 저질렀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지금의 키스는 단순히 서로 입맞춤만 하고 있는데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녀가 충분히 키스라고 인식할 정도의 시간동안 가만히 입술만 대고 있던 소울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빼냈다.
그녀의 입술과 소울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감겨있던 세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소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흥분과 기대와 갈망의 빛이 살짝 떠올라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소울은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침없는 파고 들어가는 프렌치 키스를 선사했다.
세경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설육(舌肉)이 호응을 해오자 소울은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자신의 품을 향해 잡아당겼다.
그러자 세경의 팔이 그의 목과 등을 감아왔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이제 그의 가슴과 배 사이를 묵직하게 압박해왔다.
“흐응!”
세경의 입에서 달콤한 비음이 살짝 흘러나왔다.
이제 두 사람의 안중에 영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둘 사이에 원초적인 본능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입술과 혀를 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설왕설래(舌往舌來)가 이어지며 둘 사이는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뭔가 끝장을 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울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작전을 조금 바꿨다.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목을 쓰다듬고 팔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며 스킨쉽을 유도했다.
그녀가 경계하거나 놀랄만한 곳은 철저히 피한 채 그녀의 무릎과 히프, 허리와 등을 스치듯 만지며 마음껏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잊을만하면 간간히 입맞춤을 하고 가끔 불붙듯이 프렌치키스를 했다.
그러자 이제는 소울보다 세경이 더 달아올랐다.
마치 키스를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그의 품에 안겨 보채기 시작한 것이다.
세경은 키스를 해도 부족하고, 안아도 뭔가 아쉽고, 그의 손길을 통해 찌릿찌릿 거리는 느낌 속에 점차 갈증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드디어 영화가 끝이 났다.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일어나자 두 사람도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후와아! 덮네?”
“왜? 난 시원한데…….”
정말 밤바람은 시원한 편이었다.
하지만 세경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확실히 그녀의 눈에는 열정과 갈망이 진하게 배어져 있었다.
소울은 자신이 어떻게 이런 것을 아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느낌으로 딱 감이 왔다.
“나 서초동에 사는데, 내 옥탑 방으로 라면 먹으러 갈까?”
“우리 좀 빠르지 않아요?”
“그럼 냉면만 먹던지…….”
“네? 냉면이요?”
“덥다며?”
세경은 소울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살짝 헷갈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쿨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빠와 같이 술 한 잔 하려고 했어요. 장소가 문제는 아니죠?”
“그래. 좋아. 그럼 여기서 우리 집까지 택시타고 가자.”
“그래요.”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란히 택시에 올라탔다.
옥탑 방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두 사람은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택시에서 내려야했다.
“여기가 내 옥탑 방이 있는 건물이야.”
소울의 말에 세경은 고개를 들어 옥상을 쳐다봤다.
건물 바로 아래에서 쳐다보니 각이 나오지 않아 전혀 보이지 않았다.
“1층에 편의점이 있네요. 여기서 캔 맥주하고 안주 좀 사가요. 라면은 집에 있어요?”
“아니. 사가지고 가야해. 먹고 싶은 것 다 사자.”
“좋아요.”
소울과 세경은 나란히 편의점에 들어가 시원한 캔 맥주와 오징어, 땅콩, 쥐포, 라면, 냉면, 과자 등을 잔뜩 샀다.
“오빠, 캔 맥주와 라면은 제가 살게요.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화장지와 세제도 사가요.”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꼭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래요.”
세경이 캔 맥주와 라면, 화장지와 세제를 꼭 자신이 사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소울은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물건을 둘로 나눠 계산대에 올려야 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청년이 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옥탑 방에 사는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를 불금에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는지 무척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소울은 쿨 하게 세경의 어깨를 감싸고는 한손으로 큼지막한 비닐봉지를 번쩍 들었다.
그동안 체력강화훈련을 한 보람이 있어서 이 정도 무게를 드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편의점을 나와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사이좋게 들어갔다.
두 사람이 계단을 통해 옥상 끝까지 올라가자 곧 옥탑 방에 불이 켜졌다.
소울이 살고 있는 길 건너 편의점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넉넉한 몸집의 젊은 여자 하나가 자신의 입을 막고 놀라는 모습을 소울과 세경은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여자는 소울과 세경이 들어간 옥탑 방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밤이 늦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별도 많고 탈도 많은 불금이었다.
* * * * *
“오빠, 집이 생각보다 넓네요?”
“그렇지. 이 집을 얻을 때 그게 제일 마음에 들더라고.”
세경은 옥탑 방에 들어오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울은 일단 불을 다 켜고 문을 잠그고 얼른 안으로 들어와 에어컨을 틀었다.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넣어 놓고 주방에 있는 그릇들을 꺼내 쇼핑해온 안주거리들을 담았다.
“남자가 사는 것치고는 참 아담하네요.”
“하하하, 그래?”
“생각 밖으로 잘 꾸며 놓고 사시네요.”
“뭐 보통이지.”
소울은 비록 자신이 꾸며 놓은 옥탑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월세를 내고 사는 사람이니 자신의 방이라고 생각돼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도와줄게요.”
“고마워.”
역시 뭔가를 예쁘게 담아 내오는 것은 여자가 잘하는 것 같았다.
소울은 금세 자신의 자리를 세경에게 빼앗겼다.
‘아차, 음악!’
소울은 스마트폰을 거치대에 내려놓고 스피커로 선을 연결해서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방안에 가득차자 뭔가 확실히 분위기가 더 사는 것 같았다.
‘조명이 너무 밝구나.’
그는 간접조명을 키고는 슬그머니 스위치가 있는 벽으로 가서 불을 차례로 껐다.
“너무 밝은 것 같아서…….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그러네요. 아까보다 이게 확실히 좋아요.”
세경이 웃으면서 말하자 소울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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