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제 5 장 - 전투 =========================================================================
“여보세요? 아! 미진이니? 나야 혜자, 정혜자라고!”
다행히도 8층 간호 데스크에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칫 여자들의 폭풍 수다가 시작되려고 하자 국정현이 정혜자에게 손짓을 해서 전화기를 가져오라고 했다.
“잠깐만, 자세한 것은 나중에 우리끼리 따로 얘기하기로 하고, 전화 바꿔 줄 테니까 그쪽 상황을 이분들에게 자세히 말씀드려!”
정혜자가 빠르게 말하고 전화를 국정현에게 넘겨줬다. 국정현은 예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8층의 상황을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정현이라고 합니다. 7층 병동에 있는 사람인데 8층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쪽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소울은 국정현이 상황을 주도하자 뭔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아니 무거운 책임을 벗는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래서 책임을 지는 자리에 앉으면 피곤한 거구나.’
소울은 지금부터 모든 일을 국정현에게 떠맡기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신이 나서서 무리를 이끄는 것보다 국정현처럼 나이가 지긋하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소울은 데스크 위에 있는 생수통을 집어 조금씩 마셨다.
먹을 것이 없다고 하니 물이라도 꼭꼭 씹어 마시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중앙계단을 통해서 8층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움직이기 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국정현은 전화를 끊고 나서 모두에게 8층의 상황을 설명해줬다.
8층 병동은 7층 병동의 수간호사인 정혜자와 친한 친구인 이미진 수간호사가 있어서 고블린이 병원으로 들어온다는 낌새를 채자마자 곧바로 방화문부터 잠갔다고 한다.
덕분에 정형외과 입원환자가 많은 8층 병동도 7층처럼 안전을 확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고블린들이 8층의 방화문을 부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7층에 있는 우리가 고블린들의 시선을 끌어주는 바람에 그들은 피해 없이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쪽에도 우리 소울처럼 힘을 쓸 수 있는 청년이 몇 명은 더 있을 겁니다. 8층 병동과 힘을 합치면 우리는 그만큼 더 안전해질 겁니다. 무엇보다 8층에는 우리가 먹을 식량이 있습니다.”
국정현은 몇 마디 말로 8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당위성을 사람들에게 잘 이해시켰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8층 진입은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이미 중앙계단의 방화문이 부서졌으니 언제까지 잡동사니를 쌓아서 지킬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잡동사니와 바리게이트로 쓰고 있는 침대를 중앙계단 아래로 밀어 버려 계단으로 올라오는 통로 자체를 막아버리면 고블린들의 침입을 막아 훨씬 안전할 겁니다.”
“아!”
국정현의 말에 다들 옳은 소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올라갑니까?”
“일단 중앙계단 아래쪽을 막으면 그쪽을 지킬 사람과 8층으로 올라갈 사람이 나뉘어야 합니다. 8층과 옥상 사이의 계단에 고블린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옥상 문이 열렸다면 아마 고블린이 옥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옥상문은 아마 잠겼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하지만 확실하게 확인은 해 봐야 합니다.”
국정현의 말은 물이 흐르듯 거침없었다.
“지동한, 이병태, 김순호, 오범근 네 명은 중앙계단 아래쪽을 지킵니다. 이소울, 송강우, 최우석, 강현우는 8층으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바로 들어가지 말고 옥상까지 고블린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면 모두 제거하셔야 합니다. 만약 옥상이 잠겨 있다면 모르지만 열려 있다면 고블린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잠가버려야 합니다.”
“네,”
“예!”
다들 무언중에 국정현을 무리의 리더로 삼는 분위기였다.
소울은 잘됐다 생각하고 그의 말에 조금도 불만을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국정현이 지금까지 리더는 소울이었다고 생각하는 지 살짝 그의 눈치를 봤다.
“10분 후, 준비가 다 되면 8층으로 올라가도록 합시다.”
“네.”
소울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다 된 상태였지만 송강우와 최우석은 아닌지 소총을 만지작거리고 화장실을 들락 거렸다.
그 사이에 소울은 자신의 병실로 가서 잠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꼬르르륵!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서 그런지 배속에서 식충이들이 아우성을 쳤다. 다름 사람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소울은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소울은 혹시나 싶어서 냉장고를 살펴봤다. 다행히 마실 음료수는 충분했다. 그는 제주 감귤 주스를 따서 통째로 입에 넣고 벌컥벌컥 마셨다.
거의 반통을 먹고 나자 살짝 배가 불러왔다.
‘이런 것을 보고 물배를 채운다고 하는 거구나.’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뉴스에 집중하고 있는 환자들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에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생을 포기하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유리 멘탈은 아닌 모양이었다.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내렸네.”
“예비군동원령도 내렸어.”
“결국 전방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네.”
“처음부터 저렇게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하면 좀 좋아?”
“누가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겠어?”
“하긴 난 내 눈으로 고블린이라는 몬스터를 보고도 아직 꿈인지 생신지 믿어지지가 않아.”
“내가 따귀 한 대 쳐줄까?”
“그래 대신 내가 이 주먹으로 네 옥수수 다 털어줄게.”
“하하하, 농담이야.”
“그래. 나도 농담이다. 이 새끼야.”
나이도 많으신 노인네 두 분이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며 뉴스를 시청하고 계셨다.
소울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보는 뉴스를 보게 됐다.
뉴스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몬스터들의 난동은 비단 대한민국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호주 등 지구의 모든 대륙에서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했다.
차원의 균열이 처음 생겼을 때 대구에서 100만이 넘는 피해자가 생겼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점에서 또다시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최악의 몬스터 사태가 일어났다는 말에 누군가 ‘몬스터 웨이브’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렇게 갑자기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몬스터들이 범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뉴스에서 긴급방송을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긴급방송입니다. 지금 세계는 몬스터들의 범람으로 인해 극심한 인명피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몬스터 웨이브라는 말로 표현하는 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지금 국민 여러분은 얼마나 불안하시고 걱정이 많으십니까?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 방에 날려주는 시원한 소식이 있습니다. 먼저 현재 강남 일대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고블린 사태가 일어난 현장을 보시겠습니다.”
소울은 긴급방송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영상이 바뀌고 10여명의 능력자들이 고블린 무리와 정면으로 붙어서 다 때려잡는 모습을 왜 저런 방송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시청자 여러분, 보이십니까? 지금 이것은 생방송입니다. 저들은 현재 강남 일대를 침입한 몬스터인 고블린들을 총과 대포가 아닌 초능력으로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터넷에서 나돌던 초능력자들의 동영상이 조작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몬스터 웨이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초능력을 가지 능력자들의 궐기는 비단 저희 대한민국 안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초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이 일제히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고 합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소울의 귓속으로 쏙쏙 들려왔다.
TV를 통해 보여 지는 능력자들의 활약이 동공에 팍팍 꽂혔다.
“대박이다.”
외국의 능력자들이 올린 동영상을 봤을 때와는 달리 강남 사거리 한복판에서 고블린들과 싸우고 있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대한민국 능력자들의 활약을 보자 소울은 절로 피가 끓고 몸이 뜨거워졌다.
인원은 1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나 걸치고 있는 방어구도 급조한 티가 역력한 것이 누군가의 지원을 받고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무기 또한 어디서 구했는지 일본도나 쇠파이프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나마 뒤쪽에 있는 사람들과 여자들은 그런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달려든 고블린들은 처참하게 도륙되어 버렸다.
무기가 없다고 무시하던 자들에게 다가간 놈들은 순식간에 몸에 불이 붙어 새카맣게 타죽던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혀 안면이 다 찌그러져 버렸다.
그들이 손을 들 때마다 허공에 불화살과 물화살이 날아갔고, 누군가 다칠 때마다 그들의 몸에 성스러운 하얀 빛이 터져 나와 상처를 말끔하게 치료했다.
그들의 힘은 주먹 한 방에 고블린의 머리가 터져 나갈 정도로 강했고 그들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힘과 스피드를 겸비한 이들은 누가 보아도 몬스터 웨이브 사태를 해결할 영웅들이었다.
‘세상에 영웅들이 나타났구나. 나도 저런 힘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소울은 TV화면에 보이는 능력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며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정부가 수도방위사령부의 병력을 몽땅 동원하고도 피해를 양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 대한민국의 용감한 능력자들은 너무도 빠르고 정확하게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고위층 관계자는 앞으로 이런 능력자들과 잘 협력해서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데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울은 정부의 고위층 관계자라는 놈이 어쩐 일로 제대로 일을 하겠다고 하는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아나운서의 말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국은 이미 이런 능력자들을 규합하여 ‘미국 능력자협회’를 발족시켰습니다. 미국 연방정부는 미국 능력자협회와 몬스터 퇴치에 관한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미국 연방정부는 ‘능력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능력자들이 몬스터를 퇴치하는데 전폭적인 지원을 해 나갈 것을 천명했습니다. 이로 인해 능력자이면서도 정부에 끌려가서 모르모트처럼 실험만 당하다가 죽을까봐 걱정하는 다른 국가의 능력자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능력자들의 지위와 대우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소울은 미국이 참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괜히 세계 초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감한 결단과 빠른 지원책을 통해 자국의 능력자들의 지위를 보장하고 적절한 대우를 해서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은 제발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좀 배웠으면 했다.
“썬더(thunder)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미국 능력자협회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에 있는 모든 능력자는 각 주(州)와 대도시 마다 만들어 지고 있는 미국 능력자협회 지부와 지점을 통해 능력자 등록을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능력자 등록은 현재 일본의 과학자가 만들어 전 세계로 보급중인 ‘능력자 테스터’라는 이름의 기기를 통해 능력이 있는지를 테스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능력자 테스트를 받아 정식으로 능력자 등록을 하게 되면 미국 연방정부에서 1만 달러의 지원비를 현찰로 지급한다고 합니다. 능력자 등록만 해도 우리나라 돈으로 1천만 원이 넘는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혹시라도 우리의 능력자들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우리 정부도 미국처럼 발 빠르게 움직여서 뛰어난 능력자들이 외국의 스카우트들에게 유혹을 받아 타국으로 귀화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능력자 지원책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소울은 뉴스를 보면서 앞으로 세상은 능력자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될 것 같았다.
몬스터를 퇴치하여 영웅의 이미지를 가진 자들이 선거에 나와 정치를 하게 되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다.
‘하긴 나 같아도 능력자를 뽑겠다.’
소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중앙계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작전 시간이 다 됐다.
국정현이 휠체어를 끌고 다가와 직접 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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