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제 4 장 - 난입 =========================================================================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요. 급하면 고블린들에게 주사할 수도 있고요.”
“아! 그럼 준비해 올게요.”
정윤이 간호사는 두 손을 모으고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소울은 괜히 눈이 어지러워지려고 하자 얼른 눈을 돌렸다. 정혜자가 그런 모습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소울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요?”
“네?”
정혜자가 소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원 원무과와 경비실에 보고했잖아요. 경찰에도 전화해서 구조요청을 했고요. 그런데 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느냐는 말이에요. 그리고 종합병원이라면 당연히 종합 방재실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왜 아무런 연락도, 방송도 없는 거죠?”
소울은 이상했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면 당연히 화재감지기, 공기조화기, 빙축열설비, 원내 전력 공급, 비상전력설비 UPS, CCTV, 주차장, 승강기, 방송통신장비 등을 관리하는 방재실이 있을 것이다.
처음이야 뭐가 뭔지 몰라 우왕좌왕 했다고 쳐도 지금쯤이면 고블린들이 병원에 침입해서 사람을 해치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병원 전체에 방송이라도 해서 경고를 해줬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세월호의 재판(再版)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소울은 정혜자가 잠시 망설이는 동안 불길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원내에 종합방재실이 있어요. 그런데 그곳의 위치가 지하주차장과 가까워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저도 틈만 나면 전화를 해봤는데 받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아!”
소울은 그녀의 말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모르긴 해도 초반에 원내에 방송을 해서 초동조치를 잘했다면 아마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숫자를 보면 단순히 방화문을 잠그는 것으로는 피해를 막을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병원 원내는 그렇다 쳐도 그럼 왜 외부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는 겁니까?”
소울의 말에 정혜자는 좌우를 한번 둘러보더니 그에게 더욱 가까이 왔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소곤거렸다.
“강남경찰서에 제가 직접 몇 번이나 연락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개포동과 도곡동뿐만 아니라 강남 일대가 모두 몬스터의 난동으로 인해 난리가 아니래요. 경찰 인력이 모자라서 군부대가 도와주러 출동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군요.”
소울은 정혜자의 말에 지금의 사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구룡산으로 병력을 투입했다고 지금 뉴스와 인터넷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것도 서울의 노른자라는 강남에 몬스터가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니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당장 구조는 없다고 봐야겠군요.”
“아마도요…….”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이제 자체적으로 살길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 소울은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며 정혜자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혜자 수간호사님은 7층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들을 탕비실 앞 휴게실로 모아주세요.”
“어떻게 하려고요?”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모아 제일 큰 병실에 따로 모으고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은 모두 불러 모아 함께 싸워야지요.”
“아!”
정혜자는 소울의 말을 듣자 절로 목구멍으로 침이 꼴딱 넘어갔다.
“굉장히 불안해 할 텐데요?”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도 아니면 모 입니다. 다 같이 살거나 다 같이 죽는 거죠.”
“그래도…….”
정혜자는 수간호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할 수 없었다. 수호도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지금은 누구 사정을 봐주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7층의 중앙계단으로 모여드는 고블린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며 그들이 지르는 함성도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곤란하시면 그냥 환자들만 모아주세요. 제가 말할게요.”
“알겠어요.”
정혜자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자신도 지금 엄청 불안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혜자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자 소울은 중앙계단의 방화문 앞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송강우와 최우석이 교대를 했는지 최우석의 방화문 틈을 향해 창을 쑤셔 대고 있었다.
“하아, 고 새끼들 더럽게 안 맞네.”
최우석은 입으로 쌍욕을 하면서 고블린들이 얼굴을 드리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뒤쪽으로 떨어져서 안을 살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방화문을 뭔가로 세차게 끊임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쾅쾅쾅 쾅쾅쾅쾅!
“오래 못 버티겠는데?”
“그래요?”
“저길 봐! 방화문이 문제가 아니라 방화문을 지탱하고 있는 벽 자체가 통째로 부서지겠어.”
소울은 송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방화문이 먼저 박살날지 벽이 먼저 박살날지 서로 내기를 하는 형국이었다.
‘방화문이 뚫리면 어떻게 하지? 계단 아래로 이놈들을 밀어 내야 하는데…….’
소울은 지금 자신이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블린들과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을 모두 불러야겠어요. 우리만으로는 안 되겠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좋은 생각이네.”
“진즉에 그랬어야지.”
소울과 송강우의 말에 최우석과 강현우가 반색했다. 죽어도 혼자만 죽는 것은 누구나 다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소울과 송강우는 급히 탕비실 옆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 앞은 이미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중앙, 남쪽, 서쪽에 각각 3개의 계단과 그 앞을 막고 있는 3개의 방화문이 있습니다. 현재 중앙계단 앞의 방화문이 뚫리기 일보직전입니다.”
“정말이야?”
소울은 굳이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고블린과 싸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뚫리면 모두 죽습니다. 누가 먼저 죽고 나중에 죽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모두 죽을 것이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움직일 수 있는 분은 모두 같이 가서 싸워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소울은 휴게실에 송강우를 두고 혼자 자리를 빠져 나왔다. 아무래도 설득은 어린 자신보다 송강우가 날 것 같았다.
“자자, 여러분! 7층에 숨을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린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무기를 들고 같이 싸웁시다. 입구가 좁으니 고블린 몇 놈 밖에는 나오지 못해요. 죽기 살기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송강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복도를 울렸다.
환자 중에는 나이 많은 노인네도 있고 어린 학생과 젊은 청년들도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지금 이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 한결같이 똥 씹은 표정들이었다.
소울은 그들을 뒤로 하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큰 대로에는 차나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았다. 복잡한 강남거리를 기억하고 있는 소울에게는 정말 위화감이 한아름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타타탕 타타탕 타타타탕!
트르르륵 트르르륵 트르르륵!
소총과 기관총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도 위화감을 고조시키는 주범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블린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이렇게 총소리가 많이 들리지?’
그는 고개를 흔들며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가서 고개를 내밀자 바로 건물 아래쪽 소총을 들고 고블린들과 전투를 벌이는 전경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의 구조요청이 전혀 안 받아들여 진 것은 아니었군.’
소울은 병원을 구조하기 위해 나타난 전경들의 모습에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침통한 얼굴로 돌아왔다. 탄창이 비어 새로 갈아 끼우려는 사이 고블린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순식간에 전경들을 덮쳐버렸던 것이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전경 다섯 명을 쌈 싸먹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소울은 전경들의 죽음을 확인하며 고개를 집어넣다. 고블린들이 죽은 전경들을 파먹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씨바! 개 X 같은 새끼들!’
속에서 욕지기가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은 소울은 고블린들에게 이를 갈았다. 나중에 반드시 소총을 구입해서 오늘의 이 원한을 100배, 1000배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그는 7층 전체를 한 바퀴 돌면서 죽어라고 머리를 굴려봤다. 창문을 통해 병원 밖의 상황도 살펴보고 혹시 자기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전투를 제외하고 고블린을 상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중앙계단 앞의 방화문은 이제 고블린의 상체가 다 보일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이건 더 이상 틈이 아니라 개구멍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방화문의 양쪽으로 침대를 엎어서 쌓아 놓은 바리게이트가 보였다. 그 뒤로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은 모두 손에 뭔가를 들고서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침대로 막아도 빈틈이 많네. 결국 저리로 고블린들이 밀고 들어오겠지? 뭔가 막을 것이 필요하다. 전경들이 쓰는 진압방패 같은 것이 있으면 딱 인데…….’
누군가 소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송강우가 철제 의자를 분해하고 구부려서 만든 이상한 모양의 방패를 가져왔다.
“이거 멋진데요?”
“하하하, 좀 모양이 그렇지? 하지만 어쩌겠어? 이거라도 있어야지.”
“아니에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얼른 갑옷을 입어야겠다.”
“갑옷이라니요?”
송강우는 웃으면서 최우석을 가리켰다.
최우석은 어느새 사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청바지에 여름 재킷을 입은 그의 팔다리에는 잡지가 돌돌 말려 있었고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의자에서 분리한 것으로 보이는 알루미늄 판을 달고 있었는데 정말 급한 데로 쓰기에는 괜찮아 보이는 체스트 아머였다.
그러고 보니 소울은 지금까지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복장으로는 고블린들의 무기에 스치기만 해도 부상을 당할 것 같았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요.”
“그렇구나. 그럼 어서 가서 옷 갈아 입고와라.”
“네.”
소울은 다행히 고시원의 총무가 가져다준 가방에 여분의 옷이 충분하게 있었다. 그는 병실로 들어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는 물품보관함을 열고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침대 위에다 안에 있는 내용물을 탈탈 털었다.
와르르르!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그중에서 싸구려 등산복과 청바지 그리고 워커처럼 딱딱한 겨울용 발목 부츠를 골라냈다.
‘이거 좋네.’
그는 망설임 없이 환자복을 벗어 던져 버렸다. 기왕 갈아입는 김에 팬티까지 갈아입자고 마음먹고 홀딱 벗어버렸다.
새 팬티를 한 장 꺼내 입고, 양말을 신고, 청바지를 입고, 긴팔 티셔츠를 입었다. 유명 메이커의 상표와 비슷하게 생긴 싸구려 등산복을 입고, 벨트를 맨 그는 겨울부츠까지 신은 다음 목장갑을 꼈다.
‘옥에 티네.’
가죽장갑을 끼면 참 좋았을 텐데 돈 아까워서 안 사놓았던 것이 이때처럼 후회될 때가 없었다. 그는 목장갑을 낀 두 손으로 손뼉을 쳤다.
팡팡!
전투준비가 끝이 났다. 이제는 고블린과 한 판 승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소울아! 빨리나와!”
소울은 송강우의 다급한 목소리에 입술을 질근 깨물고 달려갔다.
크아아 캬아아 쿠아아아!
옷을 갈아입으려고 들어간 그 짧은 시간에 중앙계단 앞의 방화문은 결국 뻥 뚫려 버리고 말았다. 병원 안의 온갖 시설물을 가져다가 방화문 앞을 막아 놓긴 했지만 고블린들이 달려들자 순식간에 한 움큼씩 계단 아래로 던져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아?’
소울은 방화문 사이로 득실득실한 고블린들을 보며 침을 꿀떡 삼켰다. 그는 강현우에게 자신의 창을 돌려받았다. 녹색의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창의 날이 많이 무뎌져 있었다.
“저놈들이 물건을 하나둘씩 빼서 계단으로 버리고 있어. 이거 무슨 수를 내야지 안 되겠다.”
“수는 무슨 수가 있어요? 그냥 바리게이트로 밀어 붙여야지요.”
“엥? 그거 좋은 생각이다. 여러분! 양쪽에서 힘껏 밀어 붙입시다.”
와아아아아!
소울은 별 생각 없이 얘기했다가 송강우가 하는 말에 정말 참 괜찮은 생각이라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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