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제 3 장 - 습격 =========================================================================
“참, 내가 교통사고 나서 이 병원에 입원한 것은 어떻게 알았어?”
“그, 그거? 그냥 우연하게 알게 됐어.”
“그래?”
소울은 날카롭게 오태구를 한번 노려봤다. 오태구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지거나 다그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참 냄새가 나도 심하게 나는데 무슨 냄새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냥 물어보는 것을 깨끗이 포기했다. 물어본다고 곱게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고,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병실에서 소란을 일으키기도 싫었다.
오태구는 좀 말이 많고 남의 뒷담화를 자주 까는 재수 없는 놈이라서 그렇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준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오태구가 아주 착한 놈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일본의 AV와 야한 애니메이션을 모으는 오타쿠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는 오태구는 적당히 이기적인 성향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교묘하게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가는 사악한 말 빨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이소울 환자 있는 병실 아니에요?”
어디선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고 청아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울과 오태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병실 문 쪽으로 돌렸다.
“어? 저거 장경화 아냐?”
“어서와! 이쪽이야.”
소울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경화에게 손을 흔드는 오태구를 보며 대번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개놈의 새끼! 뭐? 내 문병을 하러와? 장경화가 여기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와서 자리를 깔고 있었구나. 그런데, 장경화가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그의 의문은 장경화의 뒤를 이어 병실로 들어온 두 명의 건장한 청년들을 보자 더욱 증폭됐다. 자신이 생각할 때, 저들이 절대 자신의 병실을 찾아 올 놈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동건, 최인성 여긴 어떻게 왔어?”
“이소울, 너 괜찮냐?”
“교통사고 났다며? 김필이 너 이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더라.”
“아! 김필!”
그제야 모든 의문의 퍼즐이 딱딱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100%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필이는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데?”
“하하하! 너 진짜 모르고 물어보는 거야?”
“뭘?”
“진짜 몰랐나보네?”
제일 싫어하는 동창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소울은 거침없이 오재호와 구대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 제일 재수 없는 동창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두 기생오라비 한동건과 최인성이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연예인 뺨치게 잘 생긴 이 두 놈 때문에 고등학교 때 실연을 당해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놈이 없었다. 소울은 비꼬는 듯한 한동건과 최인성의 말에 속에서 뭔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아이, 새끼들! 문병 와서 스무고개 하나?”
“아! 미안! 이 병원 누구 건지 진짜 모르겠어?”
최인성이 슬쩍 장경화를 한번 쳐다보더니 곧바로 사과를 하며 말했다. 소울은 장경화가 자신의 여자도 아닌데 괜히 질투가 일어났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필이 아버지가 운영하신다는 병원이 이 종합병원이야?”
“맞아. 너 전혀 몰랐었구나? 김필도 곧 온다고 했어. 그러니 자세한 얘기는 직접 물어봐라.”
“으음.”
소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필은 고등학교 다닐 때 꽤나 친하게 친했던 녀석이다. 병원장의 아들을 자신이 어떻게 알고 사귀었겠냐마는 거기에는 피치 못할 사건이 하나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잠시 옛날 생각이 나려고 하는 때에 생각의 고리를 끊고 들어오는 맑은 목소리가 있었다. 언제 봐도 예쁜 장경화였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했다면서?”
“응,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차가 달려와서 치였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다. 혹시 속이 많이 아프지는 않고?”
“갈비뼈가 부러진 것만 빼면 대부분의 상처는 타박상이야. 불행 중 다행인 셈이지.”
한때 마음속으로 짝 사랑했던 장경화가 자신을 문병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소울은 겉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살다 살다 장경화가 나를 문병 오는 기적을 체험하다니…….’
물론 자신과는 다르게 서울에서도 최고로 알아주는 대학인 SKY에 다니고 있는, 내년이면 당당히 대기업에 입사해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 될 한동건, 최인성, 장경화 같은 녀석들이 대학 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자신을 찾아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이 종합병원의 병원장을 아버지로 둔 김필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얼굴에 동양적인 호선을 그린 아름다운 얼굴과 서양적이고 육감적인 몸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미녀 장경화와의 대화는 충분히 즐거웠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병문안을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 속에 빠져들고 싶었다.
‘빌어먹을, 여전히 예쁘네.’
집안 좋지, 얼굴 예쁘지, 몸매 끝내주지,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어디하나 나무랄 때가 없는 엄친아인 장경화를 보고 있자니 떨리고 기쁜 마음 한편에서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자기비하적인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거기에다 그녀가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한동건과 최인성의 사이에 서 있자 더욱 속에서 배알이 꼬이고 뒤틀렸다. 괜히 장경화를 괴롭히고 망가뜨려 버리고 싶다는 금단의 감정까지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못난 열등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울은 조금씩 증폭되는 어둠의 기운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힐끔힐끔 장경화를 쳐다보며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오태구를 보게 됐다. 오타쿠 같은 저 새끼가 하는 짓을 자신도 하고 있다고 하니 그제야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아! 이게 무슨 개지랄이야? 내가 못나도 이렇게 못났던가? 웬 열등감 폭발이냐? 소울아! 정신 차려라. 너무 병신 같고 치졸하잖아. 경화가 내 병문안을 왜 왔겠어? 당연히 김필의 얼굴을 봐서 예의상 한번 들린 거지. 동창이기도 하고…….’
소울을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장경화의 얼굴을 쳐다보니 여전히 맑은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장경화, 아니 경화야! 고맙다. 이렇게 네가 문병 와주서 힘이 난다.”
“어머! 정말이야? 다행이다. 문병 온 보람이 있네.”
소울이 약간 어두운 표정을 털어내고 장경화에게 웃음을 보이자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울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첫사랑의 아픔이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푹푹 쑤셔 대고 있었다.
도저히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더 쳐다보기 힘들어진 소울이 고개를 살짝 돌려서 한동건과 최인성을 바라봤다. 두 놈의 눈빛이 마치 자신을 당장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이 흉악했다.
‘어? 이놈들 봐라. 질투하는 거야? 아니면 아직도 장경화와 썸을 못타고 있었나?’
놀라웠다. 만약 자신이 한동건과 최인성의 얼굴과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었다면 장경화가 아니라 스칼렛 요한슨이라도 자빠뜨렸을 것이다. 물론 아직 한 번도 여자 친구와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미남의 썩소를 보고 있는 소울의 마음은 고소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옆에서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오태구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울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저건 오태구가 웃는 얼굴이라는 것을 말이다.
‘별일이네. 그럼 장경화는 누굴 좋아하는 거야? 혹시 김필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소울은 차라리 장경화가 한동건과 최인성 보다는 김필에게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어! 친구! 다들 여기 모여 있었네?”
“김필!”
“필아!”
때마침 김필이 등장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김필은 전형적인 인텔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울은 그가 S의대에 무사히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자신과는 노는 물이 다르다는 이유로 연락을 끊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니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왜 연락도 안하고 지랄이야? 손가락 부러졌냐?”
“어? 나? 군대 갔다 왔잖아.”
“그럼 군대 간다고 말은 하고 가야지.”
김필은 주먹으로 소울의 가슴을 한 대 치려다가 그의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기만 했다. 소울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너 지금 개그하냐?”
“하아, 나 참 이 꼴통 새끼, 정말 미치게 만드네.”
“반갑다.”
“그래. 이 새끼야. 반갑다.”
김필은 소울이 내미는 손을 터프하게 맞잡았다. 화를 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눈으로는 무척 반가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필은 마치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이 오직 소울만 존재하는 것처럼 소울만 바라보고 얘기했다. 장경화는 김필의 그런 모습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봤고 오태구는 장경화의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힐끗힐끗 훔쳐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한동건과 최인성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의외라면 의외였다.
‘재미있는 관계네. 김필은 전혀 마음에 없는 것 같고, 장경화는 김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한동건과 최인성 이 두 놈만 헛물을 켜고 있군.’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은 잘 보이는 법이다. 소울의 짐작대로 김필은 지금 의대 본과 2학년에 올라 임상의학을 배우며 기억전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배우고 일하고 공부하고 기억하는 중이었다. 장경화가 아니라 제시카 알바가 와서 유혹한다고 해도 넘어갈 시간이 없었다.
“나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냐?”
“우연하게 알게 됐다. 교통사고로 들어왔지?”
“그래.”
“차트 다 읽어봤어. 그냥 서너 달 푹 쉬었다가 보상금 잘 챙겨서 나가라.”
“알았어.”
“이제 좀 연락 좀 하고 살자. 스마트폰 줘봐.”
“내 스마트폰은 왜?”
“줘 보라면 줘 봐 이 새끼야!”
“하아, 그동안 욕만 늘었네. 성질 더러운 새끼!”
김필의 강권에 소울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어쩔 수 없이 넘겼다.
“이거 내 직통 전화번호니까 잊어버리지 말고 있어. 가끔 술 생각나면 전화하자.”
“알았다.”
소울은 김필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건 다음 친히 자신의 이름까지 입력해서 저장하는 모습에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잘나갈 놈이 자신을 친구로 대해주는 것이 무척이나 고맙고 가슴 뿌듯했다.
‘김필, 네 놈은 언젠가 내가 한번 크게 도와준다.’
지금은 개뿔도 없는 신세지만 소울은 김필을 보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참, 동창회는 언제야?”
“다음 달에 하려다가 요새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좀 미뤘어.”
김필의 말에 장경화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장경화는 고교 동창회의 총무이다. 남자 동창들이 만장일치로 그녀를 총무로 세운 것은 그녀가 전화해서 안 올 인간(남자 동창)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물론 동창회의 총무는 두 명이나 더 있었다. 바로 한동건과 최인성이었다. 두 놈이 전화를 해서 안 올 년, 아니 안 올 인간(여자 동창) 역시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고등학교 동창회 중 서울 강남고등학교의 동창회 출석률이 전국 수위를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물론 그 출석률을 왕창 깎아 먹고 있는 인간이 바로 이소울이기도 했다.
“경화야! 여기에다 네 전화번호 좀 넣어줘! 이놈 때문에 우리 동창회가 계속 기록을 못 세우잖아.”
“응, 알았어.”
장경화는 김필의 한마디에 소울의 스마트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바로 입력해주었다. 그렇게 전화번호를 따고 싶었을 때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더니 이번에는 철벽방어가 무색하게 너무나도 쉽게 전화번호를 주는 그녀였다.
“소울아, 앞으로 우리 동창회 꼭 참석해라. 알았지?”
“응? 아! 그래. 노력해 볼게.”
“뭐야? 너 내가 이렇게 전화번호까지 넣어 주잖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핑계 대면서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하란 말이야. 아니다. 나하고 지금 바로 약속하자. 빨리 약속해!”
장경화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소울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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