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마인 사냥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최기철은 절도 있게 인사한 채로 멈춰있었다. 마법사모자 아래, 내려 깐 눈을 들지 못하며 내게 완전한 굴종을 표시한다.
나는 흡족했다. 그게 비록 단창에 의한 강압에 의해서였건, 나란 놈이 덤빈다면 정말 창으로 찌를 정도로 무시무시해 보여서였건, 어쨌든 항복을 얻어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단창을 내렸다. 마력을 풀어 흩트렸다. 최기철이 더 반항했으면, 진짜 찌를 생각이었다. 약속한 게 있으면 지켜야한다. 내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면 안 봐줬다.
“······.”
최기철은 침울했다.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굴욕이었다. 5살이나 어린 놈에게 형님이란 소리를 꺼내게 되다니. [거만]을 특성으로 지닌 최기철에겐 견딜 수 없는 치욕이다.
“아무한테나 시비 걸지 마라. 자기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자존심 세우지 마. 괜히 뻗대다간 제 명에 못 산다.”
최기철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건넸다. 지난 회차에 이 녀석이 몬스터에게 거만하게 덤비다 멍청하게 죽어나간 걸 생각하면 지금 무참히 성질을 꺾어두는 편이 좋다.
“형님이라 계속 부르진 않아도 돼. 그러나 앞으로 내 말에 토 달고, 빈정대면 다시 참교육 들어갈 거다. 알겠냐?”
“······.”
최기철의 축 쳐진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겉보기엔 얘가 나보다 5살 형이니 계속 형님소리를 들을 생각은 없었다. 대신 내게 다시는 까불지 않게끔 확실한 다짐을 받아 놓는다.
“대답 안 해?”
“아, 알겠다...”
내가 목소리를 높여 묻자 최기철이 기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뭐라고? 소리가 작다, 다시 말해봐.”
“알았어. 알았다고.”
최기철이 완전한 항복을 선언했다.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모자챙이 위아래로 휘적휘적 흔들린다. 마법사지팡이도 순순히 바닥으로 내리고 있었다. 반항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씨익 웃었다. 예전에 이 녀석이 귀찮게 굴었던 걸 다 보상 받는 느낌이다. 최기철을 압박하던 기운을 풀어냈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한다.
“나한테 진 게 억울하면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와라. 재대결을 신청해. 정정당당한 승부면 그 무엇이든 받아줄 테니, 나를 이기고 나서 복수해라.”
“······.”
“네 [명석] 특성은 엄청난 가능성을 품고 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건방떨지 말고 성실히 연구한다면, 날 한 번쯤 이길 지도 모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기철의 명석(S)은 꽤나 가치 있는 특성이었다. 거만(B) 특성에 매몰되지 않고 노력한다면 대단한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풀죽은 최기철을 다독이고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생전 처음 겪어본 좌절에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주었다. 대결을 훈훈하고 따듯하게 마무리 짓는다.
“나를 이기려면 보다 크고 위력적인 마법이 필요할 거다. 웬만한 기술로는 안 돼. 너만의 기발하고 참신한 스킬을 개발해서 도전해라. 나를 물리칠 만한 대단한 마법을 들고 와. 알겠냐?”
“하. 웃기는 녀석이네. 지금 나한테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널 인정해서 그런다. 상대가 나라서 그렇지, 너도 나름 뛰어난 마법사야.”
내 칭찬에 울 것 같은 표정이 차츰 누그러지는 최기철. 입에 발린 말이 썩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툴툴거리지만 안색이 밝아진다.
‘스킬 많이 개발해서 와라. 화염계열 마법 써보니까 좋더라.’
난 속마음을 밝히지 않으며 진심으로 응원했다. 최기철이 [명석] 특성으로 좋은 스킬을 개발해오면, 날름 [복제]해서 가져갈 생각이었다.
화해하고 잘 지내기로 했다.
최기철의 마법은 내 마법이 될 테니.
*
최기철을 먼저 보내고, 정리 작업에 한창인 던전에 남았다. 적당히 빈 공터에 자리 잡고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뭘 배웠나, 뭘 [복제]할 수 있나.
하나씩 떠올리며 어떻게 써먹을까 연구했다.
[행동복제]
오늘 만났던 헌터들의 행동을 따라했다.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고, 방패로 막고.
얼굴을 찡그리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기뻐서 환호하고, 수다 떨고.
사소한 행동들까지 다 복제해보았다.
그들이 표현하던 감정과 몸짓, 표정과 말투, 등등이 전부 생생하게 기억난다. 완벽히 따라할 수 있었다.
‘진짜’ 각성한 이후에 기억력이 부쩍 높아졌다.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 그 때의 상황과 느낌, 감정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녹화영상을 재생하듯 완전하다.
처음엔 왜 그럴까 했다. 각성 이후로 기억력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내가 겪었던 일들을 쉽사리 까먹지 않는다.
각성과 관련해서 이유를 찾아보았다. 달라진 특성이 맘에 걸렸다. [회귀].
이 특성이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 특성은 스킬과는 다르다. 한 번 작용하고 마는 게 아닌 헌터의 성격과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회귀]가 특성이기 때문에 기억력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내가 원하는 기억을 마음대로 끄집어내어 복제할 수 있었다.
작고 사소한 행동들까지 완벽히 묘사가 가능했다.
끼에엑.
리자드맨의 괴성과 고개 까닥임. 혀를 날름거리는 것까지 따라해 본다.
이런 행동들도 [복제]할 의미가 있나 싶지만 혹시 또 모른다. 언제 어디서 사용하게 될지.
실제로 블랙 리자드 킹의 산성액 공격은 꽤나 유용했다.
그냥 [행동복제]했을 땐 내 침이 나가길래 블랙 리자드 킹이 바닥에 흘려놓은 산성액을 만졌다. 그랬더니 산성액도 복제되어 나가더라.
도준욱의 피부를 태울 때 유용하게 써먹었다. 내 입에서 갑자기 나온 산성액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맞았다. 예측 불허의 공격. 인간의 입에서 독액이 튀어나오리라곤 상상도 하기 힘들 거다.
도마뱀처럼 침을 뱉어내니 좀 모양새가 그렇긴 한데, 실효성은 대단했다. 상대를 기습하기 좋았다.
[물건복제]
오늘 만졌던 물건들을 복제했다.
늪지대의 풀떼기, 축축하고 물렁한 나무, 불타오른 잿더미, 진흙 가득한 물웅덩이.
이건 어디에 써야할지 직관적으로 떠오르진 않는다. 일단 만져두면 필요할 때 써먹을 수 있겠지.
[스킬복제]
오늘 배운 스킬들을 사용한다. 좋은 스킬들을 많이 복제해두었다.
[파이어월]
불의 장벽을 만들었다. 내 주변 늪지대가 빠르게 불타올랐다. 지형을 빨리 태워먹고 싶을 때 쓰기 좋았다.
[파이어 애로우]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화살을 쏜다. 큰 화염덩어리가 화살촉의 형태로 멀리 쏘아져 나갔다. 드높은 파괴력으로 나무 하나를 단숨에 박살내버렸다. 잔해가 타닥타닥 불타오른다.
최기철의 스킬을 베끼는 건 재미있다. 따끈한 불덩이가 형성되니, 태우는 것도, 부수는 것도, 없애는 것도 화끈해서 맘에 든다.
[마력흡수]
이번엔 기대하고 있던 도준욱의 스킬을 사용했다. 근처에 있는 새끼도마뱀을 한 마리 잡아 마력을 빼앗아본다.
1m짜리 조그만 도마뱀. 내게 마력을 빼앗기자 기분이 더러운지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바동거렸다. 나는 도마뱀의 모가지를 잡고 놓지 않았다.
[마력 +0.5%]
소모된 마력이 조금 올랐다. 도마뱀을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별로 없다.
도준욱의 마력을 뺏을 땐 마나가 차오르는 느낌이 혈관을 타고 뚜렷하게 전해졌었는데 그때와는 다르다.
상대가 마력이 많고 내가 적을수록 더 효과를 보는 스킬이었다. 마나가 부족할 때, 비상용으로 사용하기 좋았다.
도마뱀을 놔줬다. 저 멀리 던졌다. 균열이 닫히면 세계가 이어지는 통로가 없어지니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위장]
또 다른 도준욱의 스킬을 사용해본다. 정말 좋은 스킬을 많이 갖고 있던 마인이었다. 상태창을 열어 내 특성을 고쳐보았다.
<이름: 한재복>
<특성>
1. 복제(SSS) → 노력(-)
2. 회귀(SS) → 끈기(-)
3. - → 열정(-)
[*위장]
오랜만에 내 상태창에 돌아온 [노력], [끈기], [열정]. 스킬로 바꿨다는 표시로 [*위장]이 쓰여 있었다.
[*위장]은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인다. 나야 스킬을 복제하기 위해 도준욱이 상태창에 덧씌운 마력을 유심히 살폈지만 일반 헌터들이 그럴 리는 없었다. 덕분에 내 복제, 회귀라는 사기 특성은 완전히 감추어졌다.
“······.”
[위장] 스킬을 다르게도 사용해봤다. 날 숨기기 위함이 아닌, 남인 척 하기 위한 특성으로 바꿔본다.
도준욱의 특성으로 고쳤다.
<이름: 도준욱>
<특성>
1. 헌신(S)
2. 희생(S)
3. 전사(A)
[*위장]
내 상태창이 나를 내가 아닌 도준욱으로 표시한다.
상당히 멋드러진 헌신, 희생, 전사라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마인 녀석들. 이러고 놀았구나.’
상태창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으니 헌터들이 맹신하는 시스템이란 게 참 우스워진다. 아무도 내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내 스킬이니.’
그동안 마인을 숨겨줬던 [위장]스킬을 이젠 마인들을 찾아 제거하는 데 사용하기로 한다.
마인들은 자기들만 [위장]을 사용하는 줄 알 테니, 내가 [위장]으로 그들에게 섞여들 줄은 모를 테다.
모든 점검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어냈다.
이번 던전에서 얻어낸 것은 제법 많다.
보상은 아직도 남았다.
마석을 줍고, 리자드맨의 가죽이나 아이템들을 챙기고 있는 전후처리요원들을 돌아보았다.
D급 던전 클리어여서, 성공보수가 짭짤하게 나올 거다.
*
리테일 길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유익현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겼다.
“잘 왔네, 재복 군.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끝마쳤어.”
칭찬이 쏟아졌다. 내가 위기에 처한 생존자들을 구하고 블랙 리자드 킹을 무리 없이 토벌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별 거 아닙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유익현에겐 세계 최강의 헌터가 되겠단 포부를 밝혀놓은 터다. 이런 조그만 실적으로 기뻐한다면 구색이 맞지 않는다.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도도한 내 모습을 보고 유익현은 더더욱 흡족해한다.
“그리고··· 최기철에게 얘기 들었네.”
“무엇을 말입니까?”
“인간 의태형 특수몬스터. 자네는 다른 적과도 싸우고 있었다는군.”
유익현은 최기철에게 던전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한재복은 강력하고 무시무시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단다. 또한 남들 모르는 적과 싸우고 있다고도 전했다.
최기철이 그렇게 질투 없이 남의 능력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한재복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그 거만한 얼굴에 존경심과 호승심도 엿보였다. 그만큼 최기철에게 인상적이었다. 한재복은.
유익현은 자기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 F급 헌터는 범상치 않았다. 벌써부터 자기가 말한 터무니없는 일들을 3개나 증명해냈다. 가슴속에 믿음이 쌓여간다.
“자네가 강한 이유는 알겠어. 일반 헌터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 테지. 사실 비밀기관의 특수 요원. 뭐, 그런 건가?”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
“대략적으로 설명해드리죠.”
유익현이 잘못 짚었다. 별다른 단서 없이 내 정체를 추측하긴 힘들 거다. 그래서 내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마인이라는 위험한 적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납득이 될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는 길드를 운영해줄 아군. 남들보다 중요한 존재다. 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허어··· 그런 일이··· 마인이라는 위험한 괴수들이 인간사회에 그렇게 많이 침투하고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군.”
“당신이 일성 길드에 들어가 있을 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트집 잡히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마인 때문입니다.”
“그렇군······.”
유익현이 그간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한다. 일성 길드 수뇌부 중에 몇몇 특히 이상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이 전부 마인이라고 생각하니 이치가 맞아 떨어지고 동시에 오한이 스며든다.
인간으로 완벽히 위장하고 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 건가, 자네는 어떻게 할 테지?”
“마인의 세력은 강대합니다. 당장 어찌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요. 서서히 세력을 깎아먹을 겁니다.”
마인의 인적, 물적 네트워크는 강력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게 마인이다. 그들은 정보를 공유하면서 서로를 돕고 있었다. 일거에 토벌해내긴 무리. 견제하면서 내 세력을 키워야 한다.
“알았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묻게나. 나도 최선을 다해서 자네를 돕지.”
유익현은 심사숙고하더니 결정했다. 나를 돕기로. 내 활동을 지원해주도록 한다.
정의롭고 현명한 인물이었다. 내가 괜히 첫 번째로 포섭한 게 아니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존중을 담아 인사했다.
“크게 위험한 부탁은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해오던 대로, 리테일 길드를 성장시키면 됩니다. 전투는 제가 하겠습니다.”
전투원으로 예정해둔 인물들은 따로 있었다. 유익현에게 바라는 것은 길드운영. 서포트 계통이다. 그가 만들어낼 체계 잡힌 균열대응 시스템을 원한다.
“해결이 필요한 문제가 있으면 저를 부르시죠. 저도 원하는 게 있다면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알았네.”
유익현이 내 눈을 직시하며 신중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사이에 완전한 협력관계가 구축되었다.
“제가 지금 원하는 건 말입니다······.”
나는 손깍지를 끼며 말을 늘어뜨렸다. 유익현은 긴장하며 내 말을 기다린다. 과연 내가 어떤 부탁을 해올지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