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첫 던전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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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앞서가는 헌터 두 명이 보였다.
내 등에는 큼지막한 배낭이 걸쳐져있다. 나는 배낭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꽈악 움켜쥔 채 그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게 뭐지.’
꿈이라도 꾸고 있나. 얼떨떨해져서 멍한 눈으로 멈춰 섰다.
나는 분명 마족과 마수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수원에 있던 마지막 비밀 기지도 발각당해서, 다시 한번 수많은 동료들을 잃고 후퇴하면서, 정처 없이 산등성이를 헤매고 있었다.
피로함을 견디지 못해 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고 눈을 붙였을 텐데, 여기는 다른 배경이다.
몸이 가뿐하다.
등에 무거운 짐이 걸쳐져있지만 그 이상의 부담은 없었다. 눈이 맑고 팔다리가 멀쩡하다. 근육에 누적된 피로가 없고 정신을 짓누르던 압박감도 해소되어 있었다.
이상하다고 되뇌며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다가, 머릿속에 울리던 알림이 기억났다.
[한재복의 진짜 특성이 개방됩니다.]
[멸망한 시간선을 고쳐주세요.]
<이름: 한재복>
<특성>
1. 복제(SSS)
2. 회귀(SS)
3. -
갑자기 떠오른 알림. 소근 대는듯한 따스한 목소리. 헌터가 처음 각성할 때 겪는 증상이다.
‘진짜 특성이 해방된다.’
‘특성 [회귀].’
‘멸망한 시간선을 고쳐달라고?’
회귀(回歸)란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의미한다. 보통 과거로 돌아갈 때 쓰이는 낱말이다. 내 과거의 기억과 지금 상황이 겹친다.
내게 들려왔던 알림을 몇 번이나 곱씹고 눈앞의 배경을 파악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실재인지 허상인지, 판단이 모호하다.
지난 회차.
내게는 결코 풀 수 없는 의문이 있었다.
대체 왜 나는 등급이 주어지지 않는가. (-)은 무엇인가. 보통 특성에는 등급이 있어야 할 텐데.
(-)는 결국 F 이하의 등급으로 해석되었다. 노력, 끈기, 열정이라는 전투와 하등 관계없는 특성을 평가하는 데는 그게 가장 적절했다.
때문에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내 특성은 세상 어떤 헌터보다 안 좋았다.
페널티를 안고 살아왔다. 노력, 끈기, 열정은 내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남들보다 노력하고, 남들보다 끈기 있게 달라붙고, 남들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라는, 그런 의미로 여기고 지내왔다.
‘진짜 특성.’
[복제], [회귀].
‘진짜 각성.’
[멸망한 시간선을 고쳐주세요.]
이제야 모든 퍼즐조각들이 맞춰진다.
지난번의 각성은 진짜 각성이 아니었다.
지난번의 세계는 인류가 멸망한 시간대였다.
내 특성은 노력, 끈기, 열정이 아니다.
[복제]와 [회귀].
이게 진짜 특성이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다. [회귀]란 특성이 발동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 환희와 전율이 말초신경 끝단으로부터 일어나 온몸을 타고 흘렀다. 진한 감동이 퍼져나갔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부르르 떨었다.
“음? 자네 안 따라오고 뭐하나.”
감상을 깨는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린다. 앞서가던 헌터 중 한 명이 뒤돌아서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짐이 많이 무겁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네.”
안타까워한다.
오늘 처음 던전에 들어온 F급 헌터가 배낭을 메고 덜덜 떨고 있었다. 던전이 무섭거나 가방이 무거워서 떠는 거라 이해했다. 혀를 끌끌 찬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상념을 멈추고 현재의 상황에 집중한다. 여긴 고블린 던전. 과거에 내가 각성하고 처음으로 들어왔던 던전이다.
멈췄던 다리를 뻗어 앞으로 걸었다.
속에서 기쁨이 끓어올라 만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등에 매달린 배낭의 무게가 실감난다. 바닥을 걷는 발끝의 감각이, 피부를 스치는 던전의 공기가, 코에 스미는 동굴의 냄새가 생생하다.
악몽 같던 현실이 바뀌었다.
*
<던전 정보>
-이름: 고블린 던전
-난이도: E급
-공략 조건: 던전 내 모든 고블린 처치.
내가 서있는 던전에 대한 정보가 생각난다.
20살의 어렸던 F급 헌터 한재복은, 짐꾼으로 처음 던전에 입장했다.
E급 헌터 둘이 고블린을 사냥하고, 짐꾼인 나는 전리품인 마석과 아이템을 줍는 역할이었다.
“좀 쉬었다 가지.”
내가 지쳤다 판단했는지 헌터 하나가 쉴 곳을 골랐다.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곳. 우린 그곳에 앉아 짐을 풀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니 등이 홀가분하다. 자유로운 감각을 즐겼다.
“쯧쯧. 아직 젊은 친구가, 그렇게 부실해서야 앞으로 헌터생활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내가 상쾌하게 웃는 걸 보고 눈가에 잔주름이 잡힌 헌터가 말했다.
E급 베테랑 헌터. 신체나이가 전성기를 지나 일선에서 물러난 채 E, F급 등의 하급 던전을 돌며 작은 돈벌이를 하는 헌터였다.
“내가 네 나이 때는 말야, 한창이었어. 일주일에 F급 던전 세 개를 돌면서 균열파괴자란 이름이 붙었지. 그 때 내가 잡은 몬스터만 해도 수백을 헤아릴 거야······.”
옆에 앉아있던 헌터가 거든다.
그들은 내가 듣건 말건 옛날이야기를 꽃피웠다. 균열이 막 생성되던 초창기, 초기 던전을 돌며 활약하던 헌터들이었다.
나처럼 젊고 어린 헌터를 보면 그 시절 이야기를 한 번씩 꺼낸다.
“E급 던전을 돌 때는 말이야. 군번줄이 필수였어. 어디 살아 돌아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는감. 아내에게 늘 작별인사를 고하며 헤어졌지.”
“허허. 그랬었어. E급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해서 돌아가는 날엔 술판을 벌였어. 다 같이 생환을 축하했지.”
“크으- 그 때 마시던 소주가 아주 일품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들의 말을 흥미롭게 들었다. 재밌어서가 아니었다. 지난 회차에 하던 얘기와 비슷해서였다.
했던 말을 같은 표정, 말투로 다시 하는 걸 들으니 생소한 느낌이다. 과거로 돌아왔단 생각이 확고해진다.
“자네, 그러고 보니 특성이 뭐라고 했지?”
“예?”
“좀 보여줄 수 있겠는감?”
그들은 한참 노가리를 까다 내 특성을 물었다. F급 헌터에다, 짐꾼이라 관심이 없었는데 한 번 물어볼 여유가 생겼나보다.
나는 품에서 헌터등록증을 꺼내 보였다.
<이름: 한재복>
<등급: F>
<특성>
1. 노력(-)
2. 끈기(-)
3. 열정(-)
현재 헌터관리국에 등록된 내 신상정보였다. 헌터등록증은 주민등록증처럼 카드로 발급된다. 헌터에 대한 기본정보가 쓰여 있다.
“으음? 노력, 끈기, 열정? 이건 무슨 특성인가?”
“자네, 전투 직업이 없나?”
보통 특성에는 검사(A)나 전사(A)처럼 전투와 관련된 직종이 하나씩 끼어있기 마련이다. 이 직종이, 헌터의 싸움 스타일과 전투스킬을 결정한다.
나는 그런 거 없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노력, 끈기, 열정이 다예요.”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 회차에 지겹도록 설명했던 특성이다. 지금은 비록 실제 특성이 [복제]와 [회귀]로 변했지만, 헌터등록증에 표시된 정보는 저게 다였다.
“노력, 끈기, 열정은 어디에 좋은가? 자넨 어떤 스킬을 갖고 있지?”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일평생 듣도 보도 못한 특성이다. 새로운 균열을 발견한 것처럼 입을 멍하니 벌렸다.
“좋은 건······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스킬은······ 없어요.”
저 특성을 갖고 좋았던 점이 있었나.
고생을 많이 했었다. 노력, 끈기, 열정이란 추상적인 개념의 특성들은 내게 아무런 스킬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덕택에 남들보다 배로 애를 써야 했다.
굳이 없는 장점을 살려서 하나 꼽자면 대놓고 힘내라는 특성이라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게 내 운명이다.’ 라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정진했다.
A급 헌터까진 될 수 있었지.
“크, 크흠. 그래... 노력.”
“끈기, 열정... 좋지.”
헌터들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른다. 내 특성이 쓸모없단 걸 깨닫고서 비웃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쓴다.
내 표정을 간간이 살피는 게, 우울해보이면 참고, 괜찮아 보이면 바로 터트릴 것 같았다.
“전 괜찮습니다. 원래 노력하는 자가 재능 있는 자를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고, 개미가 베짱이보다 따듯하게 겨울을 나는 법이죠. 제 특성에 만족합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생각을 읊었다. 내 특성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말을 했었다.
“허허허! 그래, 그래! 맞는 말이야!”
“게으른 천재보다 노력하는 수재가 낫지, 암암.”
“이 친구 성실하긴 하겠구만!”
“정말 믿음직한 특성이야! 같이 다니기에 후방이 아주 든든하겠어!”
“진국이네, 진국이야. 요새 젊은이들 중에 최고야!”
헌터들이 그제야 마음껏 웃는다. 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빵빵 터졌다.
이들은 알까. 예전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걸. 나는 그들을 보며 마주 웃었다.
“노력, 끈기, 열정. 이런 특성을 가진 헌터는 난생 처음 보는군, 하하!”
“[세상에 이런 헌터가] 프로그램에 나와도 되겠어!”
나오는 말들이 똑같다. 내가 예상하는 단어들을 꺼내니 예언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런데 하이픈(-)표시는 뭔가? 이건 무슨 등급이지?”
헌터가 특성 옆에 쓰인 (-)를 보고 묻는다.
“헌터관리국의 측정에 따르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답니다. 등급이 없어 그냥 미처리로 남겨두었습니다.”
각성센터에서 측정할 당시 등급이 표시되지 않았다. 초유의 사태에 관리국 직원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일단 없다고 해두었다.
“뭐? 등급이 없어?”
“하하, 아하하하! 이걸 어떡하나?”
특성등급은 쉽게 말해 잠재력이라 할 수 있었다. 높은 등급의 특성을 가진 헌터들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래서 헌터들 사이에선 능력은 태생부터 정해진다는 말도 떠돌았다.
등급이 없다면 잠재력조차 없다.
말 그대로 노력, 끈기, 열정만 가진 헌터라는 뜻이다.
헌터들은 웃느라 눈물을 쏘옥 뽑았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충분히 쉬었으니 이만 사냥하러 가시죠.”
나는 배낭끈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과거 시점이라는 건 완전히 이해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아, 알았다. 알았어. 사냥하러 가지. 크큽, 하하하.”
“자네 이름이 한재복이라고 했었나? 자주 봤으면 좋겠어. 요새 믿음직한 짐꾼이 부족해서 말이지. 훗훗.”
헌터들은 아랫배를 다잡으며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고 몸을 일으켰다. 낄낄 웃어댄 잔주름이 아직도 깊게 패어있다. 내가 평생 짐꾼 노릇을 할 거라 어림짐작한다.
“예. 저도 선배님들 자주 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짓궂은 농담을 부드러이 받아주었다.
나와 이 헌터들은, 사실 다시 만나지 않는다.
내 기억 상으로 우리는 보스방에서 패배한다. 헌터들은 고블린들에게 실컷 두드려 맞고, 던전 공략에 실패한 채 도망친다. 여기에 숨은 ‘괴물’이 있기 때문이다.
지켜보기로 했다.
[회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았다.
이제 [복제]라는 특성을 확인할 차례였다.
‘괴물’은 지금 내 실력이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만, [복제]의 발현방식이 너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