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성진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 아쉬워할 것 같아서.
계속된 전투로 빛을 잃었던 회색빛 도시.
스으윽.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건물이 사라지니 탁 트인 전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이 기쁘진 않았다.
이제는 사람들마저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끄아아악! 그만! 그만해라, 신조! 지금이라면 돌이킬 수 있다! 돌아갈 수 있어!”
로키가 발악하듯 외쳤지만, 성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덤덤하게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스으윽.
건물이, 사람이.
도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이내, 하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성진이 디뎠던 땅마저 사라져 갔다.
곧, 우주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제는 그마저 사라졌다.
소리가 사라졌다.
이제는 성진과 로키만이 남았다.
로키는 이 사태를 믿을 수 없는지 부정했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 거짓말…….”
성진은 로키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얼마간의 공백.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시간에 익숙하진 성진과 로키는 시간이 흘렀다고 착각했다.
이제 둘에게 시간이란 가치는 의미가 없는 것인데도.
체감하기로는 15년 정도 흐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건 추정에 불과했다.
애초에 ‘시간이 흘렀다면’ 하고 가정한 것이었으니까.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부유하는 성진에게 로키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만족하나?”
“…….”
“어이, 신조. 만족하냐고.”
콰직!
성진의 몸이 한차례 부서져서 흩어졌다.
이성을 상실한 로키는 성진의 몸을 아예 부숴서 화풀이한 후, 욕설을 내뱉었다.
“네가…… 네가 전부 끝낸 거야!”
“……끝나야 했으니까.”
“입 닥쳐! 영겁의 시간 동안 널 찢어 죽여주마!”
콰직!
콰지직!
로키의 행동은 의미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고통조차 사라졌기 때문에.
단지, 그는 분을 풀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크아아아아!”
콰지직!
지지지직!
“죽어라! 죽어!”
콰아앙!
“너 때문이야! 너 때문, 너 때문에…… 위대한 내가!”
성진은 잘게 쪼개진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곳에서의 현상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허상이고 또한 이곳에 갇힌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없는 곳, 허무의 감옥 긴눙가가프.
종말의 수레바퀴는 이곳에서 멈춰 있다.
시간이 또 지났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성진은 속으로 날짜를 셌다.
대충 5년 정도.
성진은 조금 늙었다.
실제로 그가 나이 든 것은 아니었다.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의 육체 그대로였지만, 그가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자 놀랍게도 몸이 그렇게 변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다.
분명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 신아름이 보았다면 손가락질을 하며 잡아당겼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밖으로 나간다면 수염을 길러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밖으로 나간다면…….’
물론, 그럴 일은 없다.
자신이 이곳에서 나간다는 건 이 공간도 불안정해진다는 얘기였다.
자신의 그리움 때문에 모든 이를 고통받게 할 수는 없었다.
종말의 수레바퀴는 반드시 이곳에서 영원토록 회전을 멈춰야 했다.
쿵!
쿠우웅!
“흐흐흐…… 거의 다 팠어! 조금만! 조금만 더!”
로키는 미쳤다.
그가 신성을 사용해 이곳의 벽을 갉기 시작한 지도 오래다.
신이 두더지가 된 꼴이라니, 보기 좋지 않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했다.
성과 없는 도전이 그에게 주어진 형벌의 한 종류일지도.
성진은 졸렸다.
그래서 잠시 잠을 잤다.
-오빠.
신아름의 꿈이다.
사실, 이곳에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안락한 공간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도 신아름이 아닐 것이고 꿈도 아닐 것이다.
그냥, 망상이었다.
“응.”
-우리 말이야…… 결혼할까?
신아름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물었다.
성진은 미소 지었다.
“그걸 왜 네가 말해, 아름아.”
-오빠가 쭈뼛쭈뼛 말을 안 하니까 그러지!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우리 여사님께서 그랬어!
“언제부터?”
-오빠가 돈 많이 벌고 나서부터. 웃기지?
성진의 미소가 진해졌다.
“응, 웃기네.”
-그래도 결혼하자는 건 진짜야! 우리 언제 결혼해?
-글쎄…… 일단 돌아가면…….
돌아가면.
퍼뜩, 현실감이 마음의 벽을 무너트리고 해일처럼 성진을 덮쳤다.
“헉…… 허억…….”
성진은 숨이 가빠졌다.
‘지금…… 얼마나 지났지?’
얼마나 환상에 빠져 있던 것일까.
성진은 세던 날짜도, 머리카락의 길이도 모두 낯설어졌다.
시간을 잊었다는 것이다.
“헉…… 커헉…… 끄아아아아악!”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로키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성진도 미쳐 가고 있었다.
“하…… 하하…….”
탈진한 성진이 허공에 몸을 띄웠다.
생각해 보니 미쳐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자신이 미쳤다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추태를 누군가 볼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미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정신을 놓아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콰앙!
콰앙!
저편에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소용없는 짓을 계속하는 로키처럼, 왜 정신을 놓을 수 없는 것일까.
‘혹시…….’
혹시 돌아갈 수 있지는 않을까.
절대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돌아갈 수 있다면 미쳐서는 안 됐다.
스르륵.
성진은 또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성진의 몸은 야위어 갔다.
고목나무처럼 말라 물 한 방울이라도 주어진다면 스펀지처럼 불어날 것처럼 보였다.
입술은 잇몸에 달라붙었고 턱의 피부는 늘어졌으며 눈두덩이도 허물어져 눈조차 뜨기 힘겨워 보였다.
이렇게 노인이 되었다.
‘미쳐선…… 안 돼…….’
돌아가야 하니까.
미쳐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성진은 방법을 떠올렸다.
이 공간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환상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다시 젊어지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 다시…… 돌아가자. 천천히…….’
빠졌던 치아가 새로 돋아나기 시작했다.
늘어졌던 피부는 팽팽하게 당겨졌고 흐릿했던 동공은 점차 맑아졌다.
하얗게 센 머리가 시커먼 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젊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다시 반대로 늙기 시작했다.
육체의 최전성기에서 임종 직전의 나약한 시기까지.
성진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는 계절이 없었기에, 자신의 회복과 쇠퇴가 곧 계절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삶과 죽음을 번갈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이 도대체 몇 번일까.
몇 번이나 삶과 죽음의 순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일까.
성진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을 헤아려 봐야 가슴만 아파지니까.
콰앙!
콰앙!
성진은 저 멀리 아직도 벽을 파헤치는 로키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내가 돌아간다면…… 전부 소멸시켜 주마…….”
그가 악에 받쳐 이렇게 말할 때마다 성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혹시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는데,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정답이었다.
그는 절대 선해질 수 없었다.
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자니까.
성진은 로키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또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신아름을 만나기 위해.
-좋은 아침이에요! 흐레스벨그님!
떠오른 것은 신아름의 얼굴이 아니었다.
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매였다.
베르드 폴니르.
신아름의 전생이었다.
성진은 몸을 뒤척였다.
순백의 날개와 거대한 부리.
신조(神鳥) 흐레스벨그.
그는 베르드 폴니르에게 말했다.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니드호그가 또 말썽이에요!
-이런.
-그럼, 언제나처럼 폭풍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성진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세계수가 뒤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풍이 일었다.
그가 폭풍을 멈춘 후, 베르드 폴니르가 그의 날개를 정돈해 주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그녀와 대화했다.
신의 모습이어서 그런지, 시간에 대한 관념도 인간과는 다른 듯했다.
베르드 폴니르가 다른 세계를 오랫동안 뚫어지게 보았다.
성진은 그녀의 곁에 다가가 속삭였다.
-무엇을 보느냐?
-인간들이요. 별처럼 빛나는 인간들. 참으로 멋진 생명체에요…….
-이해할 수 없구나.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구나.
베르드 폴니르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인간들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 저렇게 보잘것없는데, 어떻게 보면 이 광대한 우주에 찍힌 점 하나나 다를 바 없는 존재잖아요?
-너와 나 또한 그렇다.
-에이! 신조 님은 우주에 찍힌 점 중에서 가장 큰 점이죠! 저는 그 옆에 자리 잡은 좀 작은 점!
-……그런가?
-아무튼…… 저런 작은 점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으스대지만, 곧 우주의 광대함을 깨닫고 좌절하죠.
-모든 필멸자들은 그런 운명을 맞이하지.
-하지만…… 하지만 저들은 달라요.
-……어째서?
베르드 폴니르가 성진을 돌아보았다.
-혼자가 아니잖아요!
-…….
-비록 점 하나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무려 점이 2개! 그리고 그 점들이 이어지면 선이 되고…… 또…… 선이 이어지면……
-면이 되겠지.
-네! 그렇죠! 바로 그거!
-그래서?
-그래서 생각해 보건데, 언젠가 인간들이 이 우주를 가득 메우지 않을까요?
-헛된 망상이구나.
베르드 폴니르가 조금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 말했다.
-정말…… 망상일까요?
-너를 꾸짖으려 한 말은 아니었다.
-헤헤…… 알아요, 신조 님은 상냥하다는 걸. 그래도…… 혹시나 미래에 종말이 사라지고 인간이 번영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건 확신할 수 없구나. 나로서는 종말의 수레바퀴는 사라지는 미래도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인간들은 상상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해요, 그 말이 신이라고 다를까요?
휘이이잉.
그때, 다른 세계에서 불어온 바람이 세계수를 시리게 했다.
성진은 한쪽 날개를 펼쳤다.
-들어오거라.
-하지만…….
-어서, 몸이 얼 것이다.
베르드 폴니르는 총총 걸어서 성진의 품으로 들어왔다.
-따뜻해요…….
-몸을 아끼도록 하여라.
-신조 님을 오래도록 보필하게요?
-너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신경이 쓰이니까.
-……알겠어요. 신조 님, 저는 혹시 다음 생이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날 거예요.
-……어째서?
-저도 저 별 무리 속에서 빛나고 싶어요. 생명을 태워 빛을 발하는 저들처럼. 그런 의미에서, 신조 님은 제가 인간이 된다면 어쩌실 거예요?
성진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답했다.
-너를 지켜봐 주마.
-…….
-제대로 걷는지, 모진 풍파와 운명에 휩쓸리지는 않는지 말이다.
-신조 님…… 감동적인 말이지만 됐어요! 저는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아요! 제가 바라는 건…… 신조 님이 제 곁에 계셔 주시는 거예요.
-신인 내가 인간이 된 너의 곁에 있어서 무엇이 이로울 것이라고.
-헤헤…… 신조 님! 제가 인간이 된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잖아요. 그럼 신조 님이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는 거죠. 불경했나요?
-불경하구나.
-용서해 주시겠어요?
-당연한 것을.
베르드 폴니르가 성진에게 머리를 비볐다.
그녀의 애정 표현이었다.
성진은 가녀린 그녀에게 느껴지는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무심코 내뱉었다.
-베르드 폴니르여, 너를 아낀다.
-……저도요, 신조님. 저 창백한 폭풍 베르드 폴니르 또한 우주의 절대 선인 흐레스벨그님을…….
콰아앙!
그때, 로키가 만들어 낸 소음 때문에 성진은 조금 일찍 회상을 마쳤다.
“으…… 흑…… 으으…….”
돌아가고 싶다.
“크흑…… 흑…….”
그녀의 곁으로.
“으아아아아아!”
쾅!
콰아앙!
가상의 벽을 두드리는 것은 이제 로키만이 아니었다.
성진도 벽을 두드렸다.
“왜…… 왜…….”
그녀의 곁에 설 수 없을까.
가혹한 운명에 몸서리쳤다.
그런데 성진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이질적인 소음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쩌어엉.
뭔가가 깨지는 소리.
아니.
찌지지직.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찌찌직!
로키가 광소했다.
“드디어! ……드디어!”
***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필멸의 형벌이자 소멸의 축복이었다.
고통스럽고 영원하진 않지만, 반드시 끝은 있었다.
“끄아아아아!”
이민상과 무명인의 영혼은 대립했다.
무명인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영혼이었다.
반면 이민상의 영혼은 무명인의 영혼과 비교했을 때 살아온 세월이 비할 바 없이 초라했다.
그러니 무명인이 이민상을 제압할 것이다.
분명히 그래야 마땅한데, 어째서.
어째서 무명인의 영혼이 밀려나는 것일까.
“너, 너는…… 누구…….”
이민상의 입에서 비틀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시, 머리를 부여잡았던 이민상은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뇌기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젊은 육체.
그리고 막대한 정신과 힘.
그는 신이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몸 안에 용솟음치는 힘을 느낀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콰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
최후의 프로토콜이 작동하고 있었다.
신이 된 그는 이 상황이 대체 어떤 상황인지,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곧바로 알아챘다.
“가야 해.”
가야 한다, 저곳으로.
‘가면 안 돼!’
그의 내면에서 무명인이 반대했다.
무명인은 지금 저 빛기둥을 보고 오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챘기 때문에 이토록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오딘이 나 뿐만 아니라 너 또한 속인 거야!’
이민상은 무명인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난 속지 않았어.”
‘……뭐?’
“알고 있었어.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그럴…… 수가…….’
콰아아아아아아아!
성진이 로키를 빨아들인 후,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프로토콜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찰나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민상이 달리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파직.
파지직!
곧, 그가 뛰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신이라 할지라도 그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그가 성진이 사라지는 곳으로 뛰어 들어간 것을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은 작은 생물도.
‘이 미친 자식!’
후우웅.
이곳은 긴눙가가프.
무명인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았다.
허무의 감옥이자, 신이라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
‘네가 지금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기나 해!’
무명인은 이민상에게 더 추궁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그가 이미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발을 들였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맙소사. 대체 뭐 때문에…….’
새하얀 공간.
이민상은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틀렸어! 찾을 수 없다! 긴눙가가프는 시간이 없어! 찰나의 차이더라도 안에서는 수백, 수천 년이 흘렀을 것이다! 그는 이미 미쳐 버리고 먼지로 변했을 거야!’
“아니.”
‘내 말을 들어!’
“네 말은 듣지 않아.”
이민상은 확신에 찬 듯이 말했다.
“형은 살아 있어. 포기하지도 않았을 거고.”
이민상이 새하얀 공간에서 무언가를 계속 찾아 헤맸다.
이민상이라는 인간에게 할 말이 없어진 무명인은 그를 대신해서 날짜를 세었다.
‘1년쯤 지났다. 이제…….’
“여기다! 찾았어!”
‘맙소사…….’
이민상이 찾던 것은 긴눙가가프의 틈이었다.
완전무결한 감옥에 있어도 안 되고 있을 리가 없는 틈.
이민상은 그것을 찾아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민상이 긴눙가가프에 틈이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틈이 존재한다.
당시, 성진이 검은 공간에서 니드호그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성진은 지금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니드호그의 이 말만큼은, 성진에게 전하려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것이 네 결론에 도움이 되길 바라마.
성진이 검은 공간에서 사라졌을 때, 니드호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노인이었던 이민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신조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대가라니? 죽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검은 새끼용이 고개를 저었다.
-죽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 그는 허무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둘 것이다.
-허무의 감옥? 그곳에…… 형이 왜…….
-너희와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겠지. 종말의 수레바퀴를 안고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니드호그는 이민상에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막, 막을 방법은…….
-없다.
이민상은 힘을 끌어 올렸다.
비록 영혼만이 니드호그에게 이끌려온 것이었지만 그의 힘은 건재했다.
파지직.
파지지직!
-날 놀릴 생각이라면…….
-하나, 그를 구할 방법은 있다.
-……저, 정말? 형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허무의 감옥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나였으니까.
니드호그는 담담히 말했다.
-하나, 그곳은 너무도 위험한 곳이며 신이라 할지라도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겁니까?
-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너라면 할 수 있으니까.
-……말하세요.
-허무의 감옥에 좌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길이란 것도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지나다니며 만든 것이지.
-그래서?
-그곳에 흠을 내두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라. 공간이 깨지기 시작하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틈? 당신이 흠을 만들어 두었다고?
니드호그가 허무의 감옥에 틈을 만들었다.
이민상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어째서?
-그곳에 수레바퀴를 던져 버리는 것은 나 또한 생각했던 바다. 하나…….
-어째서 그러지 않았지?
니드호그의 눈은 조금 슬펐다.
-나는 로키와 맞설 수 없다. 또한 설령 그를 붙잡아 봉인하더라도…….
-…….
-나를 구할 존재가 없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버려질 테니까. 나는…….
니드호그가 말했다.
-혼자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쓴 거군요. 하지만…… 내가 그 틈을 벌린다면, 수레바퀴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째서?
-이 방법을 생각한 존재가 1명 더 있으니까.
이민상은 그 1명이 누구인지 물었으나 니드호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형에게 직접 말하지 않은 겁니까?
니드호그는 이번에 질문엔 답했다.
-그곳에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니까, 그 사실 자체에 미쳐 버릴 것이다.
-…….
-이제, 가거라. 이 기억을 네 영혼 깊숙한 곳에 각인시켜 두도록 하마. 언젠가 되찾게 된다면 내가 했던 말들을 기억하도록 해라.
이민상은 니드호그가 언급했던 틈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웁…….”
콰릉.
콰르릉!
외날 검이 진동했다.
그리고 푸른 번개가 되어 틈을 갈랐다.
쩌정!
틈이 벌어지더니 허무의 공간이 깨졌다.
하지만, 이어서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들은 마치 우주처럼 보였고 누구라도 이곳에서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하! 그것 봐! 어차피…….’
콰릉!
느껴졌다.
세계를 구하고 끝도 없는 허무에 몸을 던진 사람의 기운이.
파지지직!
이민상의 눈에 정광이 깃들었다.
그는 신이었고 전능했다.
푸른 뇌전이 그를 감쌌다.
우레가 된 이민상이 허무의 공간을 찢기 시작했다.
쩌정!
찌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앙!
직선으로 꿰뚫자, 우주가 비틀리며 숨겨 둔 공간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곳도 아니었다.
계속, 계속 가야 했다.
‘……네가 먼저 미칠 거다. 신이 이런 데서 허망하게…….’
“닥쳐, 난 신이 아니다.”
‘…….’
“인간 이민상이다. 나는 이곳에 형을 버려 두고 가는 짓 따위는 배운 적 없어.”
‘……그것이 너인가. 아니, 우리인가?’
“멋대로 생각해. 선의는 반드시 보답받는다. 마땅히 그래야 해.”
무명인은 이민상을 거부했었다.
새로이 탄생한 그의 기억.
이민상의 모습 또한 그 자신이었다.
무명인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랬군, 오딘. 참으로 교활하구나…….’
무명인의 영혼은 피식 웃었다.
상황이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분명, 달라진 점이 있었으니까.
나와 네가 우리가 되었으니까.
‘정신을 잃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뭐?”
‘내가 너를 지탱할 테니.’
“…….”
콰르릉!
쩌저저적!
이민상의 푸른 번개가 계속해서 세계를 찢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또 얼마만큼의 신성을 사용했는지 이제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이민상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신성을 한계까지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그는 지금 백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으으어…….”
찌지직!
‘힘을 내라, 거의 다 왔어! 신호가 오고 있다!’
콰아앙!
콰앙!
누군가 계속 벽을 두드리는 소리.
소리로 들었을 때는 이곳을 찢으면 도달할 것 같았다.
‘정신 차려라!’
그리고 마침내, 이민상의 벼락은 푸른 창이 되어 세계를 찢었다.
-무지개의 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샘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푸른 창이 세계를 찢을 것이다.
쫘아아아아아아아악!
푸른 창에 찢겨 너덜거리는 공간.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리고 이민상을 확인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는…… 누구지?”
이민상은 백치가 된 상태로 누군가를 찾았다.
그의 눈에 축 늘어진 성진이 보였다.
“헤헤…… 형…… 돌아가자…….”
이미 정신을 놓아 버린 이민상.
성진은 그를 보자 경기를 일으키며 천천히 다가왔다.
“민상…… 민상이니?”
“형…… 형…… 가야 하잖아. 왜 여기 있어…….”
“민상아…….”
“내가…… 내가 데리러 왔어. 함께…… 돌아가자.”
“…….”
“집에…… 가자.”
그때, 로키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어딜!”
우지지지직!
로키가 수레바퀴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몸을 부풀렸다.
이민상의 육신 따위는 그가 한 손으로도 찢어발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백치였던 이민상의 기세가 일변했다.
탁했던 동공은 금세 맑아졌고 웅혼한 기백이 넘쳤다.
파지지직.
콰르르릉!
“흐아압!”
그가 쥐었던 검이 뇌전으로 변해 로키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콰지지지직!
“끄아아아아!”
파직.
파지직!
검은 로키의 가슴에 박혀 그를 봉쇄했다.
“후우…….”
이민상의 달라진 모습에 성진이 멈칫했다.
분명 이민상이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이민상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성진이 의문을 품을 때쯤, 뒤편으로 멋쩍은 웃음이 들려왔다.
“하하하하! 이거 참, 언제부터 알아챘나?”
“한참 전부터입니다. 오딘.”
이민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답했다.
까아아악!
그러자, 까마귀 2마리가 날아들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들 했군. 신조도, 그리고…… 자네도.”
“…….”
말을 하는 까마귀를 뒤로하고 다른 까마귀 1마리가 로키에게 부딪혔다.
“끄아아아아악!”
로키의 비명에 성진이 소리쳤다.
“무슨 짓을!”
“수레바퀴에 붙잡힌 원혼들을 해방한 걸세. 놀라지 말게.”
“오딘…….”
이제는 까마귀 1마리만이 남아 성진과 이민상을 보았다.
“다들 떠나게. 이곳에는 내가 남겠네.”
“당신이?”
“이곳을 안에서부터 봉합하지 않으면 저 미치광이가 또 뛰쳐나갈 테니까.”
“하지만…….”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이제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알아서 굴러갈 테니…….”
오딘의 말에 이민상이 성진의 팔을 붙잡았다.
성진을 붙잡고 뒤돌아서는 그에게 오딘이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아주 오래전 기억.
-자네는 누군가?
무명인을 처음 만났던 오딘이 물었던 말이었다.
그때에, 무명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이 없었기에.
-이름은 다른 이가 자신을 정의할 때에 쓰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정의할 때에도 쓰이지.
무명인은 평온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줄곧 인간을 증오해 왔다.
보잘것없고 부족한 종족으로 태어난 자신마저도.
하지만, 결국 그것이 자신의 핑계였음을 깨달았다.
신이든 인간이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민상이 허무의 감옥에 스스로 몸을 던져 백치가 되어서까지 신조를 구할 때, 그것을 깨닫고 말았다.
누구든 위대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본인의 선택으로.
그러니 이제는 답을 내려야 했다.
어찌 보면, 무명인으로서 마지막인 대답이었다.
“나는 이민상입니다.”
후우우웅.
그 순간, 백치가 된 이민상의 영혼과 그를 지탱하던 무명인의 영혼이 하나가 되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까마귀가 기쁜 듯이 웃었다.
“하하하! 제법 좋은 이름이군 그래. 그래서 신성의 씨앗이 발아했는데 아직도 같은 생각인가?”
“같은…… 생각?”
“신이 될 생각인지 물었네.”
이민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크하하하! 어째서?”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신성을 대가로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인가?”
“……그리고.”
이민상이 한숨 쉬었다.
“이제 세상에 신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자네의 결론이군.”
오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민상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뒤로 돌아 공간을 벗어났다.
콰아아앙!
이민상과 성진이 빠져나간 공간.
그들이 빠져나간 통로가 스르륵 메워졌다.
그러자, 로키의 가슴에 박혀 있던 번개도 사라졌다.
“오딘! 또 만났구나!”
“로키, 네 존재는 정말 지긋지긋하구나.”
“……억겁의 세월을 함께하게 됐으니 너를 영원히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해 주마!”
콰직.
콰지지직.
로키가 까마귀의 사방을 막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로키는 오딘의 관심사 밖이었다.
-그건…… 아마도 저자가 이름을 가지는 그때, 내 뜻을 알게 될 걸세.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오딘!”
“아, 로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네. 네 감옥을 안에서부터 메워야 하는 건 맞네.”
“……뭐?”
불길함을 느낀 로키는 재빨리 까마귀를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오딘이 더 빨랐다.
푸스스.
까마귀가 흩어졌다.
오딘은 마지막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하하하! 그게 자네와 함께 이곳에 갇힌다는 얘기는 아니야. 애초에 후긴과 무닌은 정신체거든! 그럼, 나도 이만 퇴장하겠네. 독방 잘 쓰게! 넓구만, 넓어! 수영도 하겠어!”
“오디이인!”
오딘과 무명인, 그리고 이민상의 선택.
종말 전쟁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승패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이루었다.
선의는 보답받는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