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피가 강을 이루는 도시, 서울.
이 끔찍한 도시의 풍경을 현대의 누군가 봤다면 거짓이라고 매도했겠지만, 잔혹한 도시의 풍경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무명인은 비칠거리며 걸었다.
그는 전장에서 이탈한 지 오래였다.
하늘에서 무지개 비가 내릴 때도 그는 본대와 거리를 두었다.
키이이이익!
파지직!
서걱!
키이.
목이 베인 악마가 부자연스럽게 쓰러졌다.
“하아…… 제발 닥쳐…….”
무명인의 뇌리에 계속해서 이민상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 쥐어…….’
무명인은 길가에 차이는 장비들을 괜히 걷어찼다.
콰앙!
“신조의 군대가 온 거였어……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거지.”
지금도 장비 중 몇이 주인을 만나 강림했다.
아직 로키 측의 전력을 압도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합류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쿵!
콰아앙!
무명인은 큰 소음이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수르트와 에인헤야르, 그리고 성진 일행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말려들면 죽겠군. 그런데 로키는 왜 지켜보고만 있는 거지?”
수르트는 분명 신성을 지니고 있었다.
에인헤야르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신성을 갖춘 존재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로키가 수르트와 합류해서 함께 싸운다면 신조의 무리는 당분간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갈 게 분명했다.
“……함께 싸운다고? 그럴 리가 없지…….”
무명인은 로키를 알았다.
그가 누군가와 협력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신조와의 끈질긴 싸움에서도 그는 동료를 단 한 번도 만들지 않았다.
수하들과 종들이라면 몰라도.
‘수르트를 겁냈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협력 관계가 아니었던가…….’
아마도 후자일 거라 추측한 무명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신조 측에서도 수르트를 억제할 만한 수단은 딱히…….’
그때, 수르트와의 전투 현장에서 천둥이 울렸다.
콰르르릉!
‘……뭐?’
누군가 신성을 찾았다.
수르트가 아닌 누군가가.
그리고 느껴지는 이 익숙한 기운은 무명인도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신조가…… 신성을 되찾았어?’
물론, 느껴지는 기운은 이 싸움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신조의 기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 저 기운은 신성이었다.
‘어떻게?’
강성한 기운은 2개 더 생겨났다.
신성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훌륭한 전력이었다.
‘신조가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무명인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갑자기 생긴 힘이었다.
무명인은 이대로라면 수르트도 신조 측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다.
‘로키가 나서겠군.’
무명인은 누가 이기든, 모두 피투성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오딘이 약속을 지켰을 때, 그만이 오롯한 신이 될 것이니까.
‘가…… 쥐어…….’
“닥치라고, 제발! 크으윽…….”
일단은 끔찍한 고통을 만드는 이민상의 영혼부터 달래야 했다.
하지만, 무명인에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의 강한 영혼으로 이민상의 영혼을 짓눌러 보아도 이민상의 영혼은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나 그에게 두통을 일으켰다.
결국, 이민상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런 꼴이라니…….”
무명인이 절뚝이며 걸었다.
이민상의 영혼이 계속해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오기를 한참.
다행히 이미 몬스터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있어 그를 막으려 하는 몬스터는 없었다.
거리에는 권역에서 벗어난 장비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빛을 잃은 모습들이 꼭 주인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들의 주인은 신조와 함께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무명인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애초에 신조와 한배를 타는 척만 했을 뿐인 존재였다.
단지, 그들의 사정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혼자서 아무도 없는 거리를 계속 걸었다.
무명인은 그렇게 무언가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다 왔어. 됐어?”
이민상의 영혼은 답하지 않았다.
단지 계속 영혼을 흔들어 무명인을 괴롭혔을 뿐.
“크으윽…… 빌어먹을! 제발 좀 멈춰!”
무명인은 이민상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두통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습관적으로 걸었다.
투욱.
그러다, 발길에 차이는 뭔가가 걸음을 방해하자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야?”
파지직.
파지직!
길거리에 흔하게 박혀 있는 검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 생긴 것도 모자라 손잡이마저 투박한 검.
외날 검의 형태인 그 검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 주변에 산처럼 쌓인 몬스터의 사체가 아니었다면 검의 존재감도 느끼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칠 뻔했다.
몬스터들은 그냥 쓰러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채로 쓰러져서 그 형태만 온전하게 남았을 뿐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여기로 오라고 한 거야?”
이민상의 영혼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끝없는 두통을 일으키는 것을 멈췄을 뿐.
무명인은 그것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이민상의 의견 따위는 상관없었다.
무명인의 눈은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힘……. 그래…… 오딘이…… 오딘이 약속을 지킨 건가?’
신조에게 힘을 보태면 오딘이 그의 신성을 넘겨준다고 했다.
지금,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자 무명인은 웃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너도 신성으로 태워서 소멸시켜 주마. 이제 난…….”
무명인이 검에 다가갈수록 검이 울었다.
파지직!
파지지지직!
검이 저항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한 무명인은 몸에 펄스를 둘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검의 기운에 동화되었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턱.
무명인이 마침내 검을 쥐었다.
벼락이 흐르는 검을.
“끄아아아아아아!”
파지지지지직!
뇌기(雷氣)가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통과했다.
그 힘은 빠져나가지 않고 무명인의 몸속을 계속해서 헤집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끄으으으……. 견뎠어…… 견뎠다고…….”
그런데 뇌기는 몸속에 단순히 똬리를 트는 것도 모자라 사방팔방으로 몸부림쳤다.
“으…… 윽?”
파지직!
그 안에 담겨 있는 규칙성.
무명인은 필사적으로 뇌기를 통제하려고 애썼지만, 노력에 그쳤다.
뇌기는 지금 뭔가를 찾으려는 듯한 움직임을 취했다.
“무, 무슨 짓을…….”
파직!
파지직!
뇌기가 뭔가를 찾아낸 것 같았다.
통제할 수 없었던 뇌기가 자연스럽게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이럴 수가…….”
뇌기가 잡아챈 것은 이민상의 영혼이었다.
이민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스칸다에서 겪었던 일들과 고난들이 무명인의 머릿속에도 흘러들었다.
“크아아아아!”
무명인은 황급히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으득.
무명인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그가 입을 벌리자 탄내가 가득했다.
“날…… 속였구나. 오딘…….”
-당신은 실수하는 겁니다. 난 당신의 신성을 얻어 신이 될 겁니다.
-하하…… 과연 그때에도 세상에 신이 필요할지는 의문이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신성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분명 손잡이도 있었고.
하지만 휘두를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이것은 무명인에게 있어 이 신성이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이 아니라, 정해진 것만을 베어야 하는 작두라는 것을 의미했다.
무명인은 황급히 몸을 실신 상태로 만들었다.
털썩.
검 1자루와 신 1명이 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
로키의 몸은 시청 인근에서 비교할 만한 물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그의 몸에서 수르트의 불꽃이 피어났다.
“푸흐흐…… 결국 이런 수단까지 쓰게 하는구나.”
이미 김우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굴은 누군가 기분이 나쁠 때 그린 추상화를 연상하게 했고 둔부의 주변에 뱀의 머리가 달린 꼬리가 나타났다.
그의 몸은 온통 회갈색 털로 뒤덮여 있었고 손톱은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괴물이었다.
“로키…….”
“신조, 지겨운 싸움을 끝낼 때가 왔다. 너와의 싸움은 나를 즐겁게 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젠 질렸어.”
“…….”
“묻겠다. 종말 거부 장치는 어디 있지?”
성진이 스칸다를 쥔 채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며.
“그건 왜 알려고 하는 거지?”
“날 속일 생각하지 마라. 종말 거부 장치는 나조차 파괴할 수 없는 신물(神物)이다. 그것도 너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지. 세계수에 살던 그 순둥이들의 힘까지 끌어다 쓴 거더군.”
“……그래서?”
“네가 그것으로 뭘 꾸민다는 것쯤은 간파했다. 그러니 그만 패배를 인정하고 순리를 받아들여라. 너는 내게 졌다.”
“웃기는군.”
로키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닥친 종말이다.”
“이쯤 되니 나도 너에게 적응한 것 같다, 광대. 종말의 수레바퀴를 삼킨 거겠지?”
“큭큭큭…… 눈치챘나? 창조주도 수레바퀴를 너에게서 지키라고만 했지 삼키지 말란 소리는 안 했거든.”
“궤변이군.”
“난 원래 그런 존재니까.”
성진이 성검회의 기를 팔뚝에 매었다.
성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성진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로키가 두려웠지만, 믿음직한 아군들이 있었기에 애써 괜찮은 척했다.
다만, 송하린과 최별의 표정만큼은 한없이 어두웠다.
“수레바퀴를 삼켰으면…….”
“안 돼…… 그러면…….”
“결국…….”
성진은 송하린과 최별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깔끔한 미소였다.
그가 평소에 잘 웃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고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송하린과 최별도 억지로 그 웃음에 화답했다.
성진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며 외쳤다.
“드디어 마지막 순간이 왔습니다. 신조의 군대여.”
성진의 선언에 성검회, 혁명군, 그리고 에인헤야르들까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광대를 몰아내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찾읍시다! 다들!”
“신조 님이 우리와 함께했기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광대를 죽이자!”
마지막 외침에 송하린과 최별의 안색이 다시 한번 어두워졌다.
성진이 말했다.
“모두 미안하지만…… 마지막까지 싸워 주셔야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뒤덮은 겁화를 치솟게 했다.
화르륵!
“건방 떨기는…… 모두 죽어라!”
그의 손톱이 수직으로 그였다.
쒜에엑!
다섯 줄의 불꽃이 에인헤야르를 휩쓸었다.
“크아아악!”
“꺼어어…….”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위력이었다.
속도는 물론이거니와 담긴 힘마저도.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와아아아아아!”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성진과 다른 2자루의 성검의 주인들이었다.
캉!
카아앙!
손톱과 부딪힌 송하린과 최별이 어려움을 느끼고 수비적으로 전환했다.
성진은 그 틈을 파고들어 로키의 무릎을 베었다.
팍!
절삭음 치고는 맥 빠지는 소리였다.
그는 로키의 가죽에 상처 하나 못 입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로키가 그를 보고 웃었다.
“킥킥…… 소용없다.”
그 즉시, 로키의 꼬리가 성진을 후려치기 위해 휘둘러졌다.
콰아앙!
하지만 애꿎은 건물만 무너트리고 말았다.
성진은 이미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로키의 꼬리가 아쉬웠는지 뱀의 아가리에서 시커먼 독무를 뿜어냈다.
좋은 친구들의 심대형이 수인(手印)을 맺었다.
휘이이이이잉!
묵직한 강풍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치솟았다.
“가자!”
카이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레이서, 그리고 홍예들이 그 호흡에 보조를 맞추었다.
천(天)의 호흡.
파아아아앙!
카이가 바람을 불자 굉음과 함께 독무가 하늘로 솟구쳤다.
“산개해라! 광대의 표적이 되지 마라!”
실바도 이미 모두를 지키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상대는 억겁을 산 광대였다.
아무런 피해 없이 이긴다는 건 망상에 불과했다.
키아아아아!
몬스터들이 로키의 공격에 호응하여 신조의 군대를 거세게 몰아쳤다.
콰직!
푸슉!
“끄으으…….”
“막아라! 거슬리는 것들은 모조리 치워 버려!”
투두두두!
투두두!
온갖 이능이 난무하는 가운데, 성검의 3인은 그들의 전투에 집중했다.
캉!
카앙!
로키는 비록 몸집은 거대했으나 재빨랐다.
꾸지직!
“크으으…….”
송하린이 로키의 손톱을 막다가 주르륵 밀려나며 악을 썼다.
화르륵!
서걱!
최별의 검이 송하린을 짓누르던 손톱을 잘라 냈다.
“됐어!”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의 손톱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그리고 로키가 볼을 부풀렸다.
“피해!”
최별과 송하린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로키의 숨결은 수르트를 온전히 흡수한 건지, 끔찍한 고열을 품고 있었다.
최별과 송하린이 있던 건물은 상층 자체가 통째로 사라졌을 뿐더러 그 뒤로도 건물들이 주르륵 허물어졌다.
저 불꽃이 어디까지 날아간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좀 실감이 드나?”
로키의 어깨에 성진이 나타났다.
화르륵!
로키는 성진을 놓치지 않고 몸에 불길을 둘렀다.
“크으윽…….”
콰르릉!
성진의 기운이 불꽃을 상쇄시켰지만, 지닌 힘이 달랐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성진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규칙성도, 판단도, 효율도 내버린 공격이었다.
서걱!
푸슉!
콰지직!
성진이 어깨에서 난동을 부리자 로키가 인상을 썼다.
재생을 하면 그뿐이었지만 고통은 분명 동반되었으니까.
“꺼져라!”
로키가 크게 팔을 떨쳤다.
카가가각!
성진은 날아가면서도 로키의 팔 안쪽에 길게 칼자국을 남겼다.
콰르르릉!
폭풍이 로키의 살을 헤집었다.
“크으윽…….”
이번엔 송하린과 최별이 말썽이었다.
양 발목 어림에서 천마도와 엑스칼리버가 각기 날뛰고 있었다.
최별의 엑스칼리버가 로키의 발목을 훑으면 수르트의 불꽃과는 달리 아주 밝은 빛의 불길이 일어나 살점을 재생하지 못하도록 지졌다.
로키가 최별이 있던 발쪽을 걷어차자, 그녀가 반대쪽 발목으로 날아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송하린이 날아오는 그녀를 받아 냈다.
송하린이 신속히 전선에서 이탈하며 소리쳤다.
“나이스 캐치!”
치이이익.
로키는 주르륵 밀려나는 그녀들을 끝까지 추격해 짓뭉개려 했지만, 황급히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성진이 로키의 눈길을 끌고 있었기 때문에.
귀찮게 차륜전을 이어 가는 신조 측의 공격이 짜증난 로키가 소리쳤다.
“어디 해 볼 만큼 해 봐라…….”
성진이 그의 말에 인상을 썼다.
로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아무리 성진 일행이 그에게 상처를 입혀도 결국 그는 재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싸움의 여파로 잠깐 사이에 벌써 수십의 에인헤야르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무를 들이마신 자들, 로키의 발에 짓밟힌 자들, 수르트의 불길에 몸이 새까맣게 타 버린 자들.
“결국 넌 질 것이다.”
“…….”
그때, 로키의 하반신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앙!
“튼튼한지고.”
“조심해라!”
“알았어, 알았어!”
권성과 검성이 틈을 노려 로키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로키는 통증은 없었지만, 방금의 찌릿한 감각이 불쾌감으로 승화되었다.
파아앙!
파앙!
로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 육체에 감히 손을 올리는 것부터,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인간들이 거슬렸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날뛰기 좋게 쓸데없이 거대한 자신의 몸뚱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 해보자고.”
로키가 이렇게 말하며 흉측한 표정을 지었다.
우드드득.
우드득.
그의 몸이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자, 작아진다!”
“그럼 된 거 아니야?”
성진의 안색이 급변했다.
부피가 줄어들었을 뿐, 품은 힘의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피해! 물러나!”
성진의 외침과 동시에 수많은 에인헤야르들이 자리를 이탈했다.
하지만, 피하지 못한 자들도 분명 있었다.
“커억…….”
“카이!”
“꺽…… 끄어억…….”
레이서가 붙잡히려 하자 카이가 나선 것인데, 운이 좋지 않게도 로키의 손에 심장이 꿰뚫렸다.
“푸흡, 꼴좋군.”
화르륵.
카이의 몸이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
“이럴 수가…….”
그토록 강했던 카이가 반항도 못 한 채 허무하게 사라지자 성검회와 혁명군도 주춤했다.
“물러나! 광대의 사정권에서 물러나!”
성진이 소리치자, 혁명군은 애매한 장비는 내버려 둔 채로 성진의 말을 따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그들의 등판에 불길이 쇄도했다.
치이이이익!
“흥.”
불길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성진 일행이 검을 교차해 그의 불길을 막았기 때문에.
로키가 손을 뻗자, 그의 손아귀에 검의 손잡이가 만들어졌다.
화르륵!
그리고 곧 불로 이루어진 검신까지 형성되었다.
생김새가 꼭 수르트가 휘두르던 불의 대검과 같았다.
“이제 장난은 그만 치고 다시 붙어 보자고.”
“…….”
“아까처럼 싸우면 동료들이 다 불타 죽기 전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겠지. 맞지?”
성진은 침을 삼켰다.
로키가 그의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너…… 뭘 기다리는 거지?”
성진이 소리쳤다.
“모두 여기서 물러나세요!”
“하지만…….”
“다 죽을 겁니다. 가서 생명을 지키세요.”
“……예!”
에인헤야르들 중 눈치 없이 끼어드는 자는 없었다.
인간과 같은 크기의 로키는 그 손짓 한 번에 에인헤야르 수십, 수백을 태워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주변을 봉쇄해라!”
“벗어나!”
신조와 광대가 원활하게 싸울 수 있도록 주변을 틀어막으며 기회를 보는 것으로 전투의 방향을 바꾼 그들이 신속히 권역에서 이탈했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성진과 최별, 송하린 그리고 로키만이 자리에 남았다.
“이제 해보자고.”
“……그래.”
콰르릉!
성진의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뿜어 나오며 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니드호그를 쓰러트렸던 그 힘이었다.
로키가 움찔했다.
“역시…….”
“…….”
성진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사라졌다.
팟!
그가 다시 나타난 건 로키의 눈앞에서였다.
캉!
카아앙!
캉!
검의 충돌이 만들어 내는 불규칙한 소음이 단 몇 초 만에 수십 차례 울려 퍼졌다.
성진이 잠시 물러나자, 로키도 따라붙지 않고 숨을 골랐다.
스륵.
로키의 흉측한 볼에 아주 작은 상처가 나 그곳에서 피가 흘렀다.
로키가 뱀의 혀를 내밀어 그 피를 핥았다.
“여전하네……. 킥…….”
성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번엔, 최별과 송하린까지 성진과 함께 사라졌다.
카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