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그렇다고 해서 신용일을 포함한 미치광이들의 숫자가 엄청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몇백 명 수준.
그리고 실력이나 능력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수백 명 중, 잭보다 강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모험가 등급으로 따지면 진주와 남옥 사이에 대부분이 분포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도움이 필요치 않느냐고 혁명군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단연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승리를 위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당신들은…….”
신용일은 이제야 주위에 자신 같은 사람이 몇백 명이나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한 신용일이 자신과 같은 이들과 합류했다.
“여기요! 여기! 당신들…….”
“마, 맞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인원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군집을 이뤘다.
현재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인원은 성검회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혁명군, 그리고 아주 일부만을 차지하는 것이 지금 건너온 미치광이들이었다.
“다들 여기로 모이죠!”
“우, 우리 뭘 해야 하죠?”
“그, 그건…….”
“우리도 도와야 합니다! 늘 하던 거 하면 되잖아요!”
“그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럼, 여기에는 왜 들어오신 거예요?”
“…….”
미치광이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성검회의 지도자인 실바가 눈여겨보았다.
실바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탄식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어머니…… 대체 무슨 일을 대비하시는 겁니까?”
실바는 스칸다의 뜻으로 건너왔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스칸다가 계속 다리를 연결해 두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지금은 실낱같은 틈을 제외하고 전부 닫히긴 했지만, 그녀가 다리를 계속 연결해 두었기에 저들이 건너온 것이었다.
“……알 수가 없군요. 어째서 저들을…….”
마음만 앞서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만을 하는 그들, 솔직히 전력에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치광이들이 얼추 상황을 추슬렀는지 이제는 편제에 들어갔다.
“이쪽에 힐러가 더 붙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인원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그냥 한 덩어리로…….”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주먹구구식으로 싸울 게 분명한데…….”
신용일은 답답했다.
마음은 이미 전장에서 날뛰며 영웅이 되어 있는데, 현실은 지지부진 성검회의 비호를 받으며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느낀 점도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상황이 쉬워 보였는데, 직접 뛰어드니 느껴지는 압박감이 차원이 달랐다.
화르륵!
곳곳에서 치솟는 불길과 들려오는 단말마.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
“제발…… 제발 살려 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사람이 한마디 말을 채 남기지 못하고 떠났다.
“우웁…….”
그 전이었다면 ‘게임이다. 이건 게임일 뿐이다’라는 자기 최면으로 벗어났을 상황이, 지금은 현실로 다가왔다.
“피 냄새가 무슨…….”
“저, 저건…….”
신용일은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밖에서는 명확하게 보이던 상황이 지금은 온통 잿빛이었다.
‘지금 가장 옳은 선택이 뭐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누군가 자신을 이곳에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 올빼미를 도와 이 일을 끝내 주기를 원한 것인지도.
신용일의 상념이 이어졌지만, 적들은 미치광이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콰아아앙!
미치광이들이 다리를 건너옴으로써 전열에 혼란이 생겼고, 이를 파고든 거인들에 의해 성검회의 측면이 돌파당했다.
“끄아아악!”
“막아라! 막아야 한다!”
갈라져 부르짖는 목소리.
곧 멀리서만 바라보던 엘드요툰 둘이 미치광이들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마, 막읍시다!”
“일단 막으려면…….”
“앞에! 앞에 서세요!”
“으아아아!”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만큼 거인의 주변에선 어마어마한 열기와 압박감이 전해졌고, 상상도 못한 강함에 강자가 아닌 그들은 몸보다 앞서던 열의마저 차게 식어 갔다.
후우웅!
불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어?’
신용일은 찰나 간에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저 대검은 지금 자신과 주변 사람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 우아아아아아!”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고함을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몸을 옥죄던 압박감이 사라졌지만, 할 수 있는 건 겨우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지르밟았다.
꾸욱.
“윽…….”
무게가 실려 있지 않았지만 힘찬 걸음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어?”
신용일은 자신의 시야 전부를 가득 메우던 대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는 사실에 놀랐고, 자신의 어깨를 밟은 사람이 올빼미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팟!
서걱!
서걱, 서걱!
“민상아!”
“형! 여기도 끝났어요!”
엘드요툰의 거대한 존재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붉은 산 2개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올빼미와 등불이었다.
세계 간의 연결이 닫히기 시작하자 그들의 날뛰던 펄스가 제대로 구실을 했다.
신용일은 부끄러웠다.
포부에 가득 찬 상태로 이곳에 오지 않았던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이 하찮은 목숨을 버려서 의미 있는 업적을 남긴다면 그것 또한 괜찮다고.
‘아니야…….’
하지만 현실과 마주한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과 달리 적들의 살기는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고, 신용일은 무력했다.
신용일은 자신이 이곳에서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웅은커녕, 짐만 될 뿐이었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누군가 화난 듯 다가와 그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려!”
“……네?”
“정신 차리라고! 죽고 싶어?”
“나, 나는…….”
“대답해!”
“살, 살고 싶어요…….”
신용일은 인정했다.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었음을.
그렇게 인정하고 나자,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가 뒤돌아 전장으로 돌아가는 올빼미에게 발작하듯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은 죽어도 괜찮은 겁니까? 정말 그냥 죽어도…….”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아……. 죄, 죄송합니다.”
올빼미가 물끄러미 신용일을 쳐다보다가 전장으로 사라졌다.
신용일이 마지막에 말을 멈춘 이유는 말하는 도중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막아! 뚫리면 본대가 흐트러진다!”
“제길! 여기 좀 위태위태한데!”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없었다.
죽어도 상관없어서 싸우는 것이 아닌,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뭔가를 해내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신용일은 주변 동료의 갑주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영웅은 무슨…….’
영웅은 이렇게 보잘것없지 않을 것이다.
좀 더 멋진 옷을 입고, 멋진 말을 타고 나타났겠지.
“여기 좀…… 도와…….”
신용일이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작은 악마가 혀를 날름거리며 성검회의 병사를 무너트리려 했다.
신용일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우아아아아아아아!”
키이이이익!
쾅!
콰아앙!
‘너 같은 것쯤은…….’
엘드요툰까지는 무리더라도 덩치가 비슷한 악마라면, 그도 싸워 볼 수 있었다.
캉!
카아앙!
이윽고 검을 휘두르는 팔에, 묵직한 느낌이 찾아왔다.
스으윽.
서걱!
키이…….
악마의 머리가 빙글 회전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용일이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방금까지 아랫배를 찔려 허우적거리던 병사가 바싹 마른 입술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
후우우웅.
신관의 치료를 받은 병사는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무거워진 움직임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몬스터를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아아!”
어설픈 몸짓이었지만, 동료들의 보조 덕에 그는 싸움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다.
신용일이 보기에는 저자도 영웅이었다.
모두가 영웅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웅도 혼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살육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
그런 작은 영웅들이 모여 큰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신용일이 소리쳤다.
“이쪽으로 합류해 주세요!”
“……뭐?”
“거, 거기로요?”
그는 눈을 부릅뜨고 강하게 말했다.
“빨리! 여기가 뚫리면 다른 곳도 위험합니다!”
“아, 알았어!”
“다들 저쪽으로 갑시다!”
성진이 그 모습을 뒤돌아보았다.
그래도 제때, 제자리들을 찾아간 것 같았다.
“으으윽…….”
“민상아?”
그때, 곁에 있던 이민상이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털썩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민상아!”
근처에 있던 신관이 달려와 이민상을 살폈다.
그는 손에 신성력을 그러모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치유가 듣지 않습니다! 다만, 숨은 쉬는 게 조금만 지켜보면 나아질 수도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네!”
성진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했다.
지금도 성진의 군대는 거대한 쇄빙선이 서울의 빙하를 가로지르며 돌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만큼 주변이 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팟!
성진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근처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성검회의 분전으로 점차 김우열에게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김우열이 노리는 것은 성진의 군대가 전진을 멈추고 그곳에서 적들에게 둘러싸여 사멸하는 결말일 것이었다.
그렇기에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전선은…… 뭐?’
성진은 전장을 살피던 도중,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거대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길은 먼 거리에서도 열기를 느끼게 했다.
엘드요툰보다 거대한 불의 거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진은 저 거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낡은 기억에서 그 이름을 끄집어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수르트…….”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도 그의 조소가 들렸다.
“……내가 돌아왔다.”
***
“안 되네…….”
운이 좋은 몇백 명을 제외하고는 종말 이후로 들어가지 못했다.
들어가지 못한 이들 중에는 누구보다 스칸다를 사랑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캡슐을 빠져나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뭐 됐지.”
자신이 아니라 저들이 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부담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근데 왜 나는 들어갈 수 없는 거지?’
남자는 몰랐다.
이미 성검회가 다리를 이용하면서 균열이 약해져 있었고, 강자들이 재차 그 다리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스칸다는 지금, 만들었던 다리를 지탱하려는 노력 대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손바닥만큼 작아진 스칸다의 옆에서 까마귀가 재잘대었다.
“이제 때가 왔군.”
“비가 내린다고 해서 수르트를 쓰러트린다는 보장은 없어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아니, 쓰러트릴 수 있네.”
스칸다는 오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분명 이건 도박수나…….”
스칸다가 말을 하다 멈칫했다.
그녀는 뭔가를 깨달았다.
“이런, 망할 신! 대체 또 어떤 씨앗을 뿌려 놓은 겁니까? 나에겐 왜 얘기를 안 한 거죠?”
“이 일의 얼개를 아는 것은 나뿐이지. 그림의 조각들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지만, 조각이 전부 맞춰졌을 때 비로소 그 그림이 무엇인지 다른 이들도 알 수 있네.”
“오만하기 짝이 없군요. 설마 혼자서 모든 계획을 이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이게 왜 나 혼자 이룬 건가? 자네도 있고, 신조도 있으며 인간들도 있지.”
“……어떤 씨앗을 뿌린 겁니까?”
“클클클…….”
“오딘! 비를 내리기 전에 묻는 겁니다!”
“알겠네, 그렇게 협박하니 이 노인네가 감당할 수가 없군. 화 풀게. 다 얘기할 테니.”
까마귀는 총총 걷다가 뻥 뚫린 하늘을 보았다.
이제 곧 비가 내릴 하늘이었다.
“그러니까…… 음…… 미미르의 샘에서 보았던 그 인간보다 훨씬 뒤에 만났었군.”
“누구를…… 무명인(無名人) 말고 다른 인간을 만난 건가요?”
“그래. 지금도 저기 있군.”
“……저자를?”
까마귀가 누군가를 응시하자, 하늘이 빠르게 확대되어 그 사람을 비췄다.
하늘이 비추는 자는 조병창이었다.
“저자를 왜…… 저자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가요?”
까마귀는 스칸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당신…… 오딘의 까마귀…… 당신은 설마 오딘입니까? 죽…… 죽은 게 아니었습니까?
-신조의 총애를 받는 인간이여,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나는 너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저에게 원하는 게 있으신 거군요.
-영특한지고. 강인한 영혼과 진주처럼 빛나는 지혜로다. 과연, 내가 눈여겨보고 신조가 거둔 자답구나.
-신조 님을 들먹이시는 걸 보니,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거군요.
-그렇다. 인간이여, 묻노니 광대와 신조의 싸움이…… 아니, 인간의 종말을 벗어나기 위한 싸움이 얼마나 계속될 것 같더냐?
조병창을 닮은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색을 굳히고 납작 엎드렸다.
-오딘이여! 지혜를! 부디 무지한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흘흘…… 네 짐작이 맞다. 이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계속될 것이다.
-그, 그런…….
-광대도 힘들겠지만, 그는 애초에 혼돈을 즐기는 자다. 신조 쪽이 문제겠지.
-신조 님이…….
-아니,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너희…… 강인한 영혼을 가진 신조의 병사들이다. 바위가 모래가 되어 바다에 가라앉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를 것이다.
-우리가…… 지치는 거군요.
-너희는 결국 신조를 떠날 것이다.
남자는 바닥을 피가 나도록 후려쳤다.
팍!
파악!
-제길…… 제길!
-왜 그러느냐?
-……분합니다!
-무엇이? 패배하는 것이?
-신조의 믿음을 지키지 못한 것이 분합니다…….
-흘흘…… 그는 너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가 너희를 진정으로 믿겠느냐?
-……니다.
-……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소름 끼쳤다.
-신조 님이 우리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호오. 한데 어째서 분하다는 것이냐?
-우리가 결국 그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신조 님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니까요. 우리를 믿지 않는 게……. 그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틀렸다고, 우리를 믿었어야 한다고.
-뭐라? 하하하하하하! 역시다! 역시나 너로구나!
-……네?
-긴 시간, 비밀을 쥐고 신조의 곁에서 머물 자는 역시나 너였어!
까마귀가 신이 나서 남자에게 말했다.
-후에, 신조의 곁을 떠나 무지의 삶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밉습니다.
-모든 인간이 너처럼 강한 건 아니지. 강인한 영혼을 가졌다 한들, 그것도 인간의 기준에서이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떠날 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라.
-어떤…….
까마귀가 또박또박 말에 힘을 담아 얘기했다.
-언젠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다시 나서 줄 수 있는가?
-하지만…… 그들이 거절한다면…….
-이것은 언어의 형태로 만들어진 각인이다. 각인을 들추면 그들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고, 다시금 선택할 것이다.
-만일 그때에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나, 너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 가장 인간을 얕보는 것은 신조도, 나도 아닌 너라는 걸.
남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이 나선다 한들, 전장에서 벗어나 있었을 텐데 전력이…….
-강인한 영혼들은 늘 본능적으로 전장을 찾아다니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연마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이 끝입니까?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건…….
까마귀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의 설명을 끝마쳤다.
까아악!
기분 좋게 울어댄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스칸다가 까마귀의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까마귀의 울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과연 참전할까요? 이미 한 번 신조를 버린 자들인데요.”
“푸흐흐, 자네는 순진하기 그지없군.”
“오딘이 타락한 것이겠죠. 아닌가요?”
“대충 맞다고 해 두지. 아무튼, 아마 결과는 볼 만할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들로서도 대안이 없으니까.”
“대안? 무슨 대안이요? 혹시…… 신조?”
“그래.”
“인간은 그가 자신들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었나요?”
“흐흐……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고.”
“그거야 오딘이…….”
“나와 신조는 접점이 없어. 신조를 이 싸움에 끌어들인 건 내가 아니야.”
“…….”
“바로 인간이지.”
까마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신조밖에 선택지가 없어. 인간이 고를 수 있는 무수한 선택지 중에 값이 고정돼 있는 부분이지. 인간은 신조를 택하게 되어 있어.”
“……그뿐이니까.”
“그래, 인간을 사랑한 신은 그뿐이니까.”
스칸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까마귀에게 말했다.
“대강 이해했어요. 이제 나도 내가 할 일을 할 차례군요.”
“그래, 어서 비를 내리게나.”
후우우우웅.
스칸다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 나왔다.
후우우웅.
광채는 한동안 계속되다가 수천 갈래로 갈라져 산과 바다로 흩어졌다.
암초의 바닥, 협곡의 틈새, 사막의 모래 속, 누군가의 창고, 화산의 분화구.
피슈우웅.
곳곳으로 파고든 광채들은 전부 무언가를 더듬거렸고 마침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놓지 않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까마귀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빛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마지막 한 줄기 남은 신성까지 쥐어짰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이제 문이 닫힐 거고,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도와줄 수 없죠.”
“그래. 자네는 할 만큼 했네.”
“그런데 데자뷰가 미숙한 자들을 저곳으로 들여보낸 이유가 뭔가요, 오딘?”
“음? 아직 눈치 못 챈 거군?”
“네.”
“길이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그야…… 이런!”
길은 아무렇지 않게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길이었다.
“저들을 길잡이로 쓴 거군요! 강대한 존재들이 넘어오도록 하기 위한!”
“정확히는 길을 넓힌 거지. 규격 외 존재들이 넘어와야 하니까. 다리를 이용하면 분명 부서질 것이거든.”
“저들이 스스로 길이 되게 하다니…… 당신은…….”
“선택한 것은 저들이지. 나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아무튼, 끝이 났나?”
“네.”
스칸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비가 내릴 거예요.”
***
수르트는 걸을수록 몸이 비대해졌다.
그것이 다가오는 죽음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성진뿐만 아니라 전장의 모든 이들이 수르트의 거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주, 죽을 거야!”
성검회에서도 동요하는 이들이 나왔다.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각오하고 왔다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조 님…….”
“수르트입니다…….”
등불 몇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성진은 수르트가 온전한 힘을 되찾은 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만들어 주진 못했다.
신성을 지닌 이가 나타났다.
그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자신의 남은 신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고 신성의 사용처 또한 로키여야 했다.
수르트를 어떻게 쓰러트린다 해도, 결국 패배할 것이다.
모두 그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그에게 더는 남아 있는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신조 님!”
“…….”
성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르트가 이곳까지 당도하면 사라질 사람들을.
그런데, 모두 수르트를 응시하고 있는 이때, 조병창만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오는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지금…….”
성진은 조병창의 말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르릉.
꿈쩍하지 않던 하늘이 돌연, 천둥을 내뱉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뭔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병창이 환희에 차 소리쳤다.
“됐어! 됐다고!”
조병창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고 성진을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