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철판이 우그러진 자리에 콩알만 한 점이 생겨났다.
우직.
우지지직.
점은 솜이 물을 먹어 불어나듯, 점점 크기를 키웠다.
끼아아아아아!
끔찍한 소리가 구멍 너머로 전해졌다.
그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올 때마다 김우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황홀경이라도 목격한 듯이.
“수르트…… 그만 애태우고 얼른 나오지 그래?”
“…….”
“얼른, 제물도 바쳤고 약속한 것도 있잖아.”
다시, 콩알만 한 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의 밑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신조와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하하, 어차피 싸움이 끝나면 함께 세계를 불태우기로 하지 않았었나? 조금 앞당길 뿐이라고.”
건너편의 존재는 그런 김우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로키, 나는 너를 믿을 수 없다. 너와 함께했던 자들 모두 소멸했다. 요르문간드도, 펜리르도 이제는 빈껍데기만 남았지. 나 또한 영혼만 무스펠하임에 남아 때를 기다리는 존재가 됐지.”
“지난 일은 잊도록 하자고, 내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잖아?”
“네가 직접 하진 않았지만 네가 의도했던 일이기도 하지. 내가 모든 것을 파괴한다면, 너는 모든 것을 혼돈으로 이끄니까.”
“지금 와서 통찰한 척하지 말자고. 자, 원하는 걸 말해!”
“…….”
“이러는 이유는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잖아. 맞지?”
김우열은 상대가 대답하기를 손깍지를 끼고 잠시 기다렸다.
곧, 건너편의 존재가 답했다.
“내가 싸워 주기를 원한다면 네가 독점하려는 종말의 수레바퀴를 내놓아야 한다.”
“농담이지?”
“대답해라.”
“하!”
김우열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입꼬리를 비틀고 물었다.
“그건 과해. 반, 반으로 하자. 어때?”
“……좋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 싸움이 끝나면 너에게 가장 먼저 수레바퀴의 권한을 반 넘길게. 됐지?”
“맹세하는가?”
“맹세해. 맹세한다고!”
“좋다. 그 맹세를 지켜야 할 것이다.”
화륵.
화르륵!
성장을 멈췄던 검은 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김우열은 겉으로는 수르트의 합류를 기뻐했다.
그리고 뒤돌아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김우열은 정말, 이 싸움이 끝나면 수르트에게 종말의 수레바퀴가 가진 힘의 반을 넘길 생각이었다.
수르트가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존재한다면.
아마 그렇지 못할 테지만.
***
혁명군은 성검회의 합류로 전투 방식을 조정했다.
성검회가 합류하기 전에는 전면에서 적들과 맞서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차량과 고층 건물의 요충지를 점하고 성검회를 보조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으로선 성검회만이 엘드요툰과 로키의 군대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콰아아아앙!
현대 병기들이 가진 충격은 엘드요툰이 두른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건, 성진의 펄스 탄환도 마찬가지였다.
기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아!
엘드요툰의 팔 하나가 성진의 펄스 탄에 날아갔다.
그런데도 엘드요툰은 태연하게 소리쳤다.
“홈!”
화르르륵!
한 차례, 불길이 일어나자 엘드요툰의 팔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성진으로서는 적잖은 펄스를 사용했음에도 도리어 손해를 보았으니 입맛이 썼다.
그때, 전장에 삐죽 튀어나온 사람이 있었다.
통!
토옹!
“숨…… 호흡…….”
한눈에 보기에도 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곁에 무지개의 수도사, 홍예들이 서 있었다.
제각기 자세를 취한 그들은 돌파할 준비를 끝마쳤다.
“저들에게 가호를!”
“찬란하라!”
후아아앙!
쩌정!
바스카리의 비호가 그들을 품었다.
신성력은 그들의 몸을 빛나게 하고 육체적인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잭의 몸에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저건…….’
성진은 일전에 잭이 저 힘을 끌어냈을 때를 기억했다.
붉은 기운은 투기(鬪氣)였다.
‘하지만 그땐 저렇지 않았는데.’
대삼림의 전투.
그곳에서의 싸움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했다.
수명을 담보로 잠재력을 태워 시조와 맞섰던 모험가들.
잭과 동료들은 그때 강제로 각성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성진은 그때의 잭이 보여 준 색이 반딧불이었다면 지금 그가 보여 주는 색은 밤하늘을 수놓는 달빛 같다고 느꼈다.
훨씬 풍부하고 깊은 색이었다.
“하압!”
“핫!”
팟!
파파팟!
홍예들과 잭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았다.
인간의 몸이 저렇게 가벼울까 싶을 정도로 바람과 같이 튀어 올랐다.
“데하!”
후우웅!
엘드요툰의 불타는 대검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대검이 품은 기운은 건물마저 녹여 버릴 만큼 강렬했다.
“크아악!”
“양!”
“메에에! 이탈! 메에에!”
털이 조금 그슬린 양이 그대로 통통 튀어 뒤로 물러났다.
한 끗 차이로 대검이 양을 지나쳤다.
엘드요툰은 아무도 대검에 맞지 않자, 그대로 대검을 놓았다.
후아아아앙!
“위험해!”
돼지가 소리쳤다.
대검이 본대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어…… 어?”
그때, 대검이 날아가는 자리에 있던 인원들이 특이한 자세를 취했다.
“개진(開陳)!”
“하!”
“하!”
그들의 몸을 누르스름한 기운이 감쌌고 곧 그 기운이 합쳐져 대검을 떨쳐 냈다.
쩌어어엉!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큰 소음이 울렸으나, 대검을 튕겨 낸 이들은 멀쩡했다.
조각난 것은 오히려 대검이었다.
“맙소사…….”
혁명군은 눈을 크게 뜨고 방금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해를 벗어난 일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콰아아아앙!
이번엔 다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혁명군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대검을 휘두르던 엘드요툰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화르르륵.
그의 불타는 머리가 바닥에 따로 떨어져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방금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엔 잭이 붉은 기운과 축복을 두른 채로 서 있었다.
잭이 조용히 말소리를 냈다.
“소리…… 호흡…….”
***
“와아아아아!”
“좋았어! 잭! 잭! 잘했어!”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 중 잭을 아는 이들이 많았다.
“저, 저 붉은 놈이 잭이라는 거요?”
“아저씨는 모르시는구나! 나는 아는데!”
“어, 어떻게 아는데? 친분이 있는 건가?”
“아, 그건 아니고 저 친구가 올빼미 방송에 나왔던 친구인데 조금 과묵하고 특이한 친구예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진주 등급 모험가였는데 그때부터 떡잎이…….”
“잠깐,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그리고 좀 천천히 말해!”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하던 남자는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의 시선을 살폈다.
남자에게는 버릇이 된 행동이었다.
언제나 좋아하는 것에는 사족을 못 쓰고 이렇게 눈치 없이 행동했다.
남자는 이번에도 주위에서 경멸이 담긴 시선이 쏟아질 것에 대비해 마음을 걸어 잠그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천천히 말하라던 중년의 남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그래서?”
“네?”
“왜 그렇게 남 눈치를 보나? 지금 그래서 저 친구가 도움이 되는 건가?”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남자는 앞의 중년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주변을 보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저 사람이 센 건가요?”
“그래서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건가요?”
“아…… 그, 그게…….”
말을 꺼내려던 남자는 잠시 멈칫하고 자신의 옷차림을 보았다.
후줄근한 옷차림과 더불어 가꾸지 않은 외모.
남자는 하늘 너머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저들이 혹여 자신 때문에 업신여겨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저 게임과 인터넷 방송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
그런 그를 주변은 늘 패배자라고 치부했다.
멀쩡한 직업도 갖고 있었는데도 색안경을 끼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고 훈계하려 들었다.
-이제 그만 현실을 살 때가 되지 않았니?
-너도 정신 차려야지. 좀 건전한 취미를 가질 생각은 없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부정당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이후에는 생각을 달리했다.
‘내가 잘못된 건가?’
이 세계 스칸다를 플레이할 때도 밤잠까지 설치며 플레이했다.
서버 종료가 예정되었을 때는 3일 동안 식사도 거르고 울다가 종말 이후라는 후속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며 웃었다.
물론 게임이 그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그를 이루는 요소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좋아했으니까.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용기를 내서 자신에게 상황을 묻는 직장인들과 중년의 남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한참 얘기를 듣던 직장인들은 필요한 정보를 얻자 이렇게 말하고 떠났다.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됐네요.”
“고마워요.”
중년의 남자는 그에게 말했다.
“저거!”
“……네?”
“저, 하늘에 떠 있는 저거 말이야.”
중년 남자가 계속 하늘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네, 말씀하세요.”
“좋아하지?”
“…….”
“아, 좋아하냐고.”
“네. 좋아합니다.”
“그럼 왜 눈치를 봐?”
“그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눈치 볼 게 뭐가 있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해 주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아버지와 유년 시절에 사별했기에 혹시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이 들면 좋아하는 게 있어도 관절이 시려서 하지 못해. 그리고 여건도 여건이고. 자식 놈들은 좀 빨리 크나? 애들 배 안 곯게 하고 철마다 옷이라도 한 벌 사 주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게 되지.”
“…….”
“그래서 하는 말이야. 좋아할 수 있을 때, 좋아하도록 해. 이 나이 먹도록 취미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내가 하는 말이니까 걸러 듣고.”
좋아하는 걸 좋아해라.
간단한 말이었지만, 남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뭘, 그보다…… 어? 어디 가나?”
“급하게 가볼 데가 있어서요! 죄송해요!”
“어, 그래……. 가 보게!”
다소 허무한 작별 후, 남자가 향한 곳은 캡슐 방이었다.
딸랑.
“허억…… 헉…….”
“뭔 땀을 그렇게 흘리세요?”
“자리…… 자리 있나요?”
“……죄송하지만 지금 꽉 찼습니다.”
“네? 꽉 찼다고요? 지금?”
“네. 한참 전부터 손님들이 와 계셨어요.”
***
[제목 : ㅋㅋㅋ 이제 신까지 나타나서 디스토피아에 분탕을 치네. 레쟌드]
그래서 저는 왜 접속을 못 하는 거죠?
모애오 ㅠㅠ 문 열어 줘요!
-미친 새끼 ㅋㅋㅋ 지금 접속해서 뭐 하게요? 죽기라도 하시게요?
-여기 진짜로 대가리에 우동사리만 찬 애들밖에 없음? 지금 들어가면 백타 뒤진다고 ㅋㅋ 창자 삐쭉 나와서 몬스터가 먹방한다고;;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분들은 다 캡슐 앞에 서 계시지 않은 거죠?
-그건 다른 문제지.
-캡슐 앞에 누가 서 있어? 캡슐 안에 들어와 있지. 문은 왜 안 여는 거야?
[제목 : 디스토피아는 한 번쯤 정화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이다.
겜돌이를 넘어서서 게임에 과몰입하는 사람들이지. 현실의 내 옷보다 게임 속 캐릭터가 좋은 장비를 착용하는 게 더 중요하고.
지금도 봐 봐, 설령 건너간다고 해도 저기서 뒈지면 장례식에 육개장도 대접하지 못하고 끔살 당하는 건데 건너가겠다고 대기표나 뽑고 앉았으니 ㅉㅉ.
그런 의미에서 서버를 열어 우리를 전부 정화시켜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신님? 네? 안 타는 쓰레기라고요?
-ㅋㅋㅋㅋ 어차피 장례식에 육개장 대접할 생각도 없었음.
-아무도 우리 빈소를 찾지 않을 테니까.
-팩폭 자제 ㅡㅡ
-아, 뭐! 과몰입 좀 하면 안 되냐? 무슨 좋아하는 거에 미쳤다고 진짜 미친 사람 취급하면 곤란하지!
-팩트) 미친 사람이다.
-ㅇㅈ. 아무리 좋다고 해도 목숨까지 꼴아 박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ㅋㅋ
[제목 : 현실을 직시하자, 벌레들아.]
너희는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뿐이고, 지금 상황이 저기서 목숨 바쳐 싸우면 사람들이 영웅 취급이라도 해 줄 것 같아서다. 내 말이 틀렸냐?
그냥 너희는 관심이 고플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너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구나, 세계의 영웅들아!
-다 ㅇㅈ하니까 제발 서버 좀 열어 달라고요. ㅋㅋ
-거기 영웅 번호 8291! 적당히 하고 자리에 앉아 있어! 신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 주실 거니까.
[제목 : 접속하고 싶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나도 저기서 싸우고 싶다.
-진짜 광기 ㄷㄷ;
-데자뷰가 만든 조커!
-그래서 님 렙이 몇인데요?
-42 도끼 전사요. 대가리 잘 쪼갭니다.
-풉 ㅋㅋ 방어력 약해서 힐 존나 퍼먹겠네.
-엄살은 안 떱니다. 내 도끼에 걸리면 올빼미도 컷 가능.
-팩트) 걸리질 않는다.
-혹시라도 접속하면 닉네임이나 교환합시다. 나 ‘힐살살킬딸탁’ 임. 37 반전 사제임.
-나보다 렙 낮네, 뭐 ㅡㅡ 내 닉네임 ‘도끼쟝영원히함께야’ 임. 친추 ㄱ
가상현실 게임을 좋아하고 그것에 몰입했던 사람 중, 많은 인원이 캡슐에 들어와 있었다.
신용일도 그중 1명이었다.
삑.
-서버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제발…… 제발 접속돼라…….”
삑.
같은 메시지가 계속 출력되었다.
스칸다의 성검회가 종말 이후의 세계로 건너간 것을 본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확신했다.
‘분명 넘어갈 수 있어!’
방법도 모르고, 어떠한 원리인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가능할 거라 예상했다.
그게 그들을 관을 닮은 기계에 틀어박히게 한 이유였다.
캡슐 속은 깜깜했다.
적막한 공간에 놓인 신용일은 생각했다.
왜 자신이 저 너머로 가야 하는지.
분명 죽을 것이고, 운이 좋아 산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신용일은 평생 휩쓸려 왔다.
대충 산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딱 들어맞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위안 삼았다.
밀수.
미로에 죽치고 앉아 게임 방송을 보거나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 백수들.
그들 중 대부분이 지금 실시간으로 신용일이 하는 성찰과 비슷한 성찰을 하고 있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기에.
건너가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들의 답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한 가지만은 모두 같았다.
‘가고 싶어.’
지금껏 철없이 살아왔지만, 저곳에 건너간다면 뭔가가 바뀔 것 같았다.
자신의 내면이든 무엇이든.
죽을 수도 있다는 우려는 오히려 그들의 심장을 강하게 때렸고 몸에 더 많은 피를 돌게 했다.
몸이 뜨거워진 그들은 짜인 관에서 조용히 안식을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안 되잖아…….”
“안 되네…….”
실망해서 캡슐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된 사람들까지.
신용일은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를…….”
그는 문득 서러워졌다.
변하고 싶었는데, 변할 수 있었는데.
평생을 아쉬워하며 살 것 같았다.
그는 발버둥 치며 양팔로 캡슐의 곳곳을 후려쳤다.
쾅!
쾅!
“제발! 제발 나를 보내 줘!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 새끼야!”
역시나 답은 없었다.
“으…… 으…….”
그는 실망했고, 마음속에 피어났던 불꽃도 서서히 사라지려 했다.
“나는 그냥 이대로 살란 거야?”
그렇게 한참을 캡슐에 뒤통수를 처박고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홀로그램이 돌연 문제를 일으켰다.
삐릭.
-뛟뿗쨃뚋?
“뭐, 뭐야…… 너무 세게 쳤나?”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당황한 신용일이 일어나려던 그때, 홀로그램이 일변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신용일은 심장이 일순 정지한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은 누구인가.
“아, 알아. 아! 이 병신 새끼, 타자로 쳐야지…….”
홀로그램에 자판을 떠오르게 해 내용을 입력했다.
-알ㅇ라.
“오, 오타…….”
삐릭.
-당신이 하려는 짓은 미친 짓입니다. 저 너머에 당신의 자리는 예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신용일은 급한 마음에 서둘러 자음만으로 타자를 쳤다.
-ㅇㅇ.
삐릭.
-묻습니다. 당신은 제정신입니까?
-가갸거겨고교구규
삐릭.
-건너가더라도 스칸다를 경유해야 합니다. 이해했습니까?
-ㅇㅇ
삐릭.
-난 경고했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았고요.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전부 당신 잘못이지만 그래도 당신이 쉽게 뒈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탁해, 보내 줘.
삐릭.
-가.
스르륵.
캡슐 속에서 다른 세계를 염원하던 사람들이 형태를 잃어가며 사라졌다.
그들은 관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을 원하는 곳으로 보낸 데자뷰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죽지 마라…… 제발.”
“우리도 슬슬 건너가야 해요.”
“그래,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 경우엔…… 마지막 수단을 써야 하니까.”
“그러지 않길 바라야지.”
***
퍼어엉!
“크으윽!”
히이이잉!
군마가 아스팔트에 불꽃을 일으키며 잘 달리다 몬스터의 공격에 측면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군마는 잠시 부들거리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척추가 부러져 즉사한 것 같았다.
“제기랄…….”
푸슉!
“끅…… 끄으윽…….”
태양의 군사 1명이 몬스터의 긴 손톱에 찔려 쓰러졌다.
같은 시각, 곳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키의 군대는 혁명군과 성검회를 합친 전력보다 수가 많았다.
또한, 개체로 따졌을 때 더 강하기도 했고.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해요, 형!”
“그래, 민상아. 이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윽…….”
성진의 옆에서 조언하던 이민상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그래?”
“괘, 괜찮아요. 잠시 머리가……. 으…….”
“괜찮은 거야?”
아까보단 훨씬 해 볼 만했지만, 상대를 찍어 누르지 못하는 이상 김우열이 있는 곳으로 쾌속 전진은 불가능했다.
실바가 성진에게 다가와 물었다.
“초모 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우열…… 그 남자에게 가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 너머에 있다는 거죠?”
전선이 팽팽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콰르…….
성진과 등불의 펄스가 불안정했다.
스칸다와 종말 이후가 이어진 다음 나타난 현상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전력에서 잠시 이탈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적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성진은 인상을 쓰고 대책을 궁리했다.
‘어떻게든…… 어?’
하늘이 성검회를 전부 쏟아 냈는데도 닫히지 않고 여전히 일렁였다.
분명 이상한 징조였다.
“하늘이…….”
실바도 성진의 말을 듣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의문을 표했다.
“어머니시여…… 어째서 다리를…….”
그때, 이곳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지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아!
혁명군과 성검회의 곁으로 빛무리가 계속해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콰아아아!
“뭣, 무슨…….”
실바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성검회는 분명히 다…….”
빛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콰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
성진의 곁에도 빛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빛이 내린 그 자리에 어떤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갑주를 입었지만, 신용일과 닮아 있었다.
아니, 신용일이었다.
신용일은 지금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도달한 건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매캐한 시체 냄새, 화약과 피 어느 쪽의 냄새인지 구분되지 않는 철 냄새.
예전이었으면 현실 같다고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씁쓸했다.
“허억…… 헉…….”
성진이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동경하던 올빼미를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신용일은 감회가 새로웠다.
늘 그의 시선으로 이곳을 보았었는데,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곳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는 올빼미에게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툭하고 내뱉었다.
“37,500원.”
“……무슨?”
“내가 당신에게 후원한 금액입니다.”
성진은 눈썹을 찡그리고 방금 신용일이 한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하하하! 내가 왔다! 이 신용일이가 왔어! 나도 할 때는 한다고!”
미치광이들의 자발적 하관(下棺).
신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
지루하지만 안락한 삶, 치열하지만 위험한 싸움.
미치광이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광기에 휩싸인 그들이 참전했다.
종말 전쟁의 승패를 가를 두 번째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