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까마귀 1마리가 스칸다의 별 나무에 걸터앉았다.
까아악.
“때가 됐군.”
“……네. 이별할 때에요.”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이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하는 건가?”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을까요?”
“그 대답이 내 질문을 부끄럽게 하는군.”
별 나무는 잠시 망설이다 까마귀에게 물었다.
“오딘, 약속 하나 해 줄 수 있어요?”
“들어나 보지.”
“내가 떠난 이후에…… 내 아이들을 지켜봐 줄 수 있나요?”
“불가(不可).”
“……어째서?”
별 나무가 까마귀의 대답에 실망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까마귀가 귀찮은 일을 떠맡기 싫어하는 줄 알고.
하지만, 별 나무는 까마귀의 덤덤한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로 보이나?”
“꼭…… 끝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맞게 보았군.”
“당신은 이 싸움의 끝에 존재하지 않을 생각인가요?”
“…….”
까마귀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다가 별 나무에게 질문했다.
“신들의 황혼에 대한 예언을 들었을 때가 떠오르는군.”
“당신들에게 죽음의 선고가 내려졌을 때요?”
“그래, 신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운명은 신조차 피할 수 없는 거였지.”
“하지만 당신은 피했잖아요?”
“내 육신은 죽었고, 지금 후긴과 무닌의 속에 깃든 내 정신에 내 영혼은 없네. 난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럼 어째서 이렇게…….”
“들어 보게. 나는 최강의 신이었네. 그런 내가 악의에 짓눌려 소멸한다니, 그것도 로키 같은 덜떨어진 놈에게 말이야. 이건…… 불합리하잖나.”
“불합리……하다?”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단코 내가 선택한 죽음이 아니란 거지. 신들의 황혼 따위는 거창하게 이름 붙여진 도살극에 지나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변하고 아스가르드가 무너진다? 하! 창조주는 우리를 길가에 널린 돌멩이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겼어!”
“그래서…… 나선 건가요?”
까마귀의 눈에 위엄이 깃들었다.
그 눈이 아주 먼 과거를 회상하듯 뿌옇게 물들었다.
“그래, 우리의 마지막은…… 우리 스스로 정할 생각이었어. 그 일념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세.”
“…….”
“빌어먹을 창조주, 유언 정도는…… 남길 수 있도록 해 줬어야지.”
까마귀가 앉아 있는 별 나무에 누군가 찾아왔다.
“실바…… 그리고 호수의 아이여.”
란슬롯과 실바였다.
란슬롯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였고, 실바는 눈빛에 깊이가 생긴 성인이 되어 있었다.
세계가 닫힌 사이, 성진에겐 고작 1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스칸다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스윽.
란슬롯이 투구를 벗고 별 나무에게 말했다.
“나의 어머니 스칸다시여…….”
란슬롯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 말을 듣는 상대가 어떤 기분일지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란슬롯, 망설이지 마세요. 그건 나와 이 세계에 대한 모욕입니다.”
란슬롯은 입술을 깨물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렇군요…….”
“성검회는 이방인들의 세계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어머니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결정…….”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으니.”
휘이이잉.
별 나무에서 영혼이 빠져 나왔다.
세계령(世界靈) 스칸다.
이제는 신이 된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 인근의 들판으로 날아갔다.
휘오오오.
들판에 도열을 이룬 성검회의 병력.
그녀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그녀가 땅에 내려서자, 작은 아이들이 다가왔다.
“어머니, 이거!”
“이런, 화관이구나.”
“이것도!”
“이건 목걸이고…….”
색색의 꽃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왕관.
스칸다는 그것을 목과 머리에 걸쳤다.
아이들이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어머니!”
“감사해요!”
스칸다가 아이들 너머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투지가 깃든 눈빛.
그녀의 품에서 난 곡식을 먹고, 그녀의 품에서 난 샘물을 마신 인간들은 어느새 그녀의 품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스칸다가 눈을 감고 나직이 말했다.
그녀의 말소리는 산들바람과 같아서 모두의 귀에 속삭이듯이 들렸다.
“듣거라, 나의 아이들아.”
“경청하겠습니다, 어머니.”
“너희가 잉태되기 전부터 나는 살아왔다. 수풀이 우거지는 것도, 비가 바다를 이루는 것도 나에겐 모두 결과가 아닌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
스칸다는 눈을 떠 하늘을 보았다.
“너희가 반목할 때는 남몰래 울었고 너희가 평화를 말할 때는 크게 웃었다. 나는 단순히 이 세계에 탄생한 영혼이었지만 너희를 만나 신이 되었다.”
“어머니…….”
“나는 신이다. 하나, 내가 신이 되어 가장 잘한 일은 너희를 믿고 지켜 본 일이구나.”
“크흑…….”
스칸다는 담담하게 손을 휘저었다.
휘오오오.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늘어선 불의 거인들.
“너희가 찾는 이방인들이 처한 상황이다. 길고 긴 싸움 끝에 패배가 예정되었지. 두고 볼 생각인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저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더냐?”
“친구, 우리의 친구입니다!”
“맞습니다, 어머니!”
스칸다가 빙긋 미소 지었다.
“한때 너희를 불신한 적이 있었다.”
“…….”
처음 듣는 얘기에 성검회는 의문을 품었다.
스칸다가 차분하게 그 의문에 답했다.
“너희는 투쟁했고, 너희들의 피로 대지와 샘이 젖었다. 끔찍한 일이었지.”
“그런…….”
“분명 너희는 자신의 선택을 관철하기 위해 싸웠다. 내가 보기엔 야만적인 행위라고밖에 여겨지지 않았지만.”
전쟁, 약탈.
그리고 혁명.
스칸다는 그 모습에 실망하고 신음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너희들이 전쟁 후에 평화를 이룩하고 약탈 후에 정의를 부르짖으며 혁명 후에 행복을 쟁취했기에.”
“어머니!”
“누구나 처음부터 옳은 선택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내린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것이지.”
“…….”
“꽃이 시드는 게 서글퍼 꽃을 꺾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은 충돌해 최선으로 나아간다. 내가 너희를 오랜 세월 지켜보며 얻은 결론이다. 그러니…….”
스칸다가 말을 잠시 멈췄다.
그녀도 감정을 추슬러야 했기에.
그리고 다시 말했다.
“가서 친구들을 구해라. 그것이 너희들의 선택이라면…… 반드시 관철해 최선으로 나아가라!”
“와아아아아아아!”
“나는…… 신성을 내려놓고 지켜볼 것이다. ……사랑한다, 내 아이들아.”
“……사랑했습니다, 스칸다여!”
그녀의 곁에 매달린 까마귀가 속삭였다.
“비를 내리는 것도 잊지 말게.”
스칸다가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손을 뻗었다.
하늘에 그려진 화면엔 김우열의 손이 나왔다.
그가 손에 쥔 정육면체.
얼핏 보았을 땐 장난감과 흡사해 보이는 그 물체를 스칸다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지잉.
지이잉.
“응?”
김우열이 손에서 점등하는 종말 거부 장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게…… 뭐야?”
지잉.
지이잉.
스칸다가 눈에서 정광을 내뿜으며 말했다.
“좌표 고정, 종말 거부 장치 작동.”
지이잉.
지이이잉.
“크아아아악!”
정육면체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 나왔다.
그리고 스칸다의 영혼이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다른 곳을 비추었다.
초모와 그의 동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우리는 종말을 거부한다!”
스칸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리는 한쪽에서 놓는 것이 아니었다.
양쪽이 호응해야 놓을 수 있는 것.
성검회가 병장기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우리는 그대들의 종말을 거부하겠다!”
“그대들의 종말을 거부한다!”
“친구여! 종말을 거부해다오!”
-종말 거부 프로토콜 ‘빛’ 시동
콰아아아아아아!
빛줄기가 하늘을 뚫었다.
말을 탄 알란이 홀로 앞장섰다.
그에게 이시스가 다가와 당부했다.
“절대, 오랜만에 봤다고 회포를 풀어서도 안 되고 대화를 나눠서도 안 돼요. 아셨죠?”
“알았어. 선봉이 그렇게 노닥거려서야 쓰나?”
“아셨으면, 가세요. 가서 좌표를 확인하고 뿔피리를 부세요.”
“그래, 다녀올게.”
콰아아아아!
빛의 다리를 건너간 알란.
그리고 잠시 후, 스칸다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하늘에서 퍼져 나왔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
실바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뿔피리가 울렸다. 가자!”
“와아아아아아아!”
성검회는 차례차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까마귀 1마리가 스칸다에게 당부를 남기고 사라졌다.
“꼭, 때맞춰 비를 내려야 하네.”
***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전쟁고아.
이들은 전쟁이 벌어진 후에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이다.
다만, 이 소녀는 조금 특별한 상황이었다.
소녀가 휘말린 전쟁은 흔하디흔한 전쟁이 아닌 종말 전쟁이었다.
소녀가 살던 곳은 세종시. 즉, 이 아이는 스칸다에 건너갔다 오는 경험을 했다.
스칸다.
그곳은 대자연의 위대함과 이능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야만 또한 남아 있는 곳이었고.
소녀는 그곳에서 부모를 잃었다.
마물들에게 마을이 습격당해 노예였던 부모님들이 화를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빠아아! 엄마아아…… 흑…… 으아앙!”
그녀는 스칸다 인들을 증오했다.
야만적이고 단순한 사람들.
그리고 소녀의 부모를 앗아간 민족.
소년은 바스카리에 머물렀을 때도 그들과 섞이지 못했다.
-저…… 얘 이것 좀 먹어…….
투!
소녀는 그를 동정해 빵을 건네는 또래의 남자아이에게 침을 뱉었다.
-윽……. 이게…….
“스칸다 인들은 다 싫어! 다 싫다고! 꺼져! 꺼지라고! 아니면 우리 엄마 돌려내던가! ……으아앙!”
-……미안.
금발에 푸른 눈.
왼쪽 눈 밑에 눈물점이 찍힌 남자아이는 소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떠났다.
아무리 소녀가 어리다고 하지만 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혐오가 소녀를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했다.
소녀는 스칸다를 여전히 싫어했다.
스칸다를 떠나오는 그 날, 그 남자아이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소녀는 그렇게 스칸다를 떠났다.
세종에 돌아오고 나서, 부모님의 빈자리는 더욱 컸다.
그리고 허전함을 채우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불순물이라는 해괴한 괴물들 때문에 계속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혁명군에 가담한 후, 자식을 잃은 중년이 그녀를 입양했다.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는 그를 따라 최전선에 왔다.
그가 그녀를 위험하다며 떼어 놓으려 했지만, 두 번 다시 부모와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는 싫었던 그녀가 떼를 썼다.
결국, 그녀는 부대의 식사 준비를 돕는 조건으로 최전방에 따라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그녀의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작전 도중, 그녀의 양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좌절했고 두려움이 그녀의 감정을 덮쳐왔다.
‘죽을 거야! 다 죽는다고…….’
그녀의 양아버지는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괴물에게 짓이겨져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도…… 나도 죽을 거야…….’
이제 최전방에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소녀는 자신이 미련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그것이 그녀가 본대를 이탈해 무작정 달려온 길로 뛰어간 이유였다.
본대는 난리 통에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녀는 이 판단도 후회했다.
키이이익!
서울은 눈알을 번뜩이는 몬스터들이 가득한 도시였다.
소녀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닐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빛기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처음에는 하나.
그리고 곧, 계속해서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
콰아아아!
그녀는 그 빛에 놀라 더 빨리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인근의 몬스터들을 자극했다.
키륵.
키아아아아아!
독수리를 닮은 괴물이 소녀에게 다가왔다.
“아, 안 돼……. 죽기 싫어…….”
키아아아!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아앙!
그리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
“누구…….”
갑주를 입은 늠름한 덩치의 기사.
그가 양손 검을 쥐고 독수리의 발톱에 맞서고 있었다.
소녀는 서울에서 저런 요란한 꼴을 하고 돌아다니다니, 미친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아압!”
남자의 검에 씌워진 붉은 기운은 독수리를 어렵지 않게 두 쪽으로 쪼갰다.
키이익.
쿠웅.
독수리의 사체가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지고 나서야 소녀는 뒤돌아 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넌…….”
“하하, 찾았다.”
금발에 푸른 눈.
눈 밑에 눈물점.
자신이 기억하는 아이와 똑 닮은 청년.
소녀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소녀의 모습이 즐거운지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그런데 넌 아직도 혼자야?”
소녀는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본능은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
청년은 이제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가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함께 가자.”
“…….”
“내가 지켜 줄게.”
“……왜? 네가 왜?”
“친구니까.”
***
혁명군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규모의 빛들이 전부 자신들의 아군이라는 것을 깨닫고 환호했다.
“와아아아아!”
“아군이다!”
“아군이 왔어! 아군이 왔다고!”
절대 대적할 수 없다고 여겼던 불의 거인이 물의 장벽에 튕겨 나갔다.
그 광경은 혁명군에게 전에 없던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성진이 실바에게 물었다.
실바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도움이 필요해 보여 찾아왔습니다. 제법 먼 거리더군요.”
“대체 어떻게……. 종말 거부 장치가 작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동력이 없으면…….”
“스칸다. 우리의 어머니께서 닫힌 세계를 다시 한번 이으셨습니다. 기꺼이 신성으로 다리를 만드셨죠.”
“스칸다가…….”
“그녀가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그녀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되겠죠.”
“실바…….”
실바는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초모, 만일 아버지가 지금의 저를 보고 계셨다면 자랑스러워하실까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부터 그러셨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후웁.
실바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소리쳤다.
“바스카리여! 일어서라!”
“와아아아아!”
“저 거인들이 친구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응당 우리가 길을 터 줘야겠죠.”
“맞습니다!”
“전열을 정비하고 진격합니다!”
“예!”
같은 시각, 충격에 빠진 사람은 성진만이 아니었다.
최별도 마찬가지였다.
“란슬롯?”
“태양왕을 뵙습니다!”
태양왕의 기사단, 성배.
니드호그와의 전쟁에서 잃어 공석이 된 자리는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진 그들.
성배가 최별을 찾았다.
“어떻게…… 그보다 나는 이제 태양왕도 뭣도 아니에요. 내 검은 이곳에 있지 않아요.”
풀죽은 최별에게 란슬롯이 말했다.
“검은 부러지기 마련이고, 필요할 때 찾으면 없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검이 없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신념입니다. 태양왕이시여 저희는 여전히 당신을 섬깁니다.”
“이런…… 이런 건…….”
망토가 치렁치렁 땅에 닿고 있는 성배.
그들은 곧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명을.”
“명을!”
“…….”
최별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하하! 좋아요! 그럼, 가장 먼저…… 하늘에 떠 있는 상판대기에게 한 방 먹여 주러 가죠. 앞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요!”
성배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태양의 군대여! 전열을 정비하라! 길을 뚫겠다!”
우렁찬 대답이 도시를 때렸다.
“예!”
“전열을 정비하라!”
***
“여긴 뭐 하러 왔어.”
“지존께서 계신 곳이 저희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고리타분하네.”
“여전하지요.”
송하린은 월인들의 방문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뚫어야 하는 길은 죽음으로 뚫는 길이었다.
발을 한 번이라도 잘못 디디면 모두 죽는 위험한 길.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원인인 것 같아 울상을 지었다.
“지존, 저희는 줄곧 이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뭐?”
“언제나 월인들은 당신에게 구해졌지요. 사람들의 차별에서, 우리를 경멸하는 시선에서. 우리를 지금껏 살게 한 것은 당신입니다.”
“그건 영감이…… 아니, 사부님이…….”
“그분께선 씨앗을 심으셨을 뿐입니다. 지존을 믿고.”
“…….”
“우리를 거두어 주십시오. 늘 지존께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는 지존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송하린은 운명이란 것이 참으로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점을 사람으로 쳤을 때, 점과 점이 이어지면 선이고 선과 선이 교차하면 운명이었다.
피식 웃은 송하린은 월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희들은 내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그때, 월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매우 작은 자였다.
송하린이 알기로 월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키가 작은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강오? 강오야?”
“하하하하! 망할 년! 내가 돌아왔다!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어 주지!”
“……너 약하잖아.”
“……그렇긴 하지.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야. 우리끼리만 아는 거로 하자고.”
“아하하!”
송하린은 조금 눈물지었다.
그녀의 어깨에 짊어졌던 짐이 사르르 녹아 날개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창공을 날 준비가 되었다.
“가자, 이리들아. 무지한 악마들에게 우리라는 두려움을 심어 주자!”
“하!”
“하!”
송하린의 슈트에 검은 곤룡포가 씌워졌다.
미스 매치라고 할 만큼 조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녀는 곤룡포의 끈을 질끈 감았다.
“가자!”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
***
기세를 올려 밀고 들어오는 신조의 군대.
김우열은 지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결국 이 장치가 사고를 치는군.”
그리고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하지만, 이게 전부겠지.”
김우열의 눈이 검은 불꽃으로 이글거렸다.
“그렇다면…… 내 승리다.”
철컥.
철컥.
남은 완성자 중 태반이 철판에 스스로 몸을 구속했다.
김우열이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광대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권세를 누릴 것이다!”
“와아아아!”
“광대의 나라여! 영세하라!”
꾸득.
꾸드드득.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신성의 부스러기라도 그것의 양이 부족하지 않다면 막대한 힘이 되었다.
열 수 없는 곳을 비틀어 열게 하는 힘이.
“끄아아아아악!”
“아아악!”
차례차례 우그러져 차원 너머로 사라지는 완성자들을 보며 김우열이 조용히 읊조렸다.
“수르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