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212화 (212/222)

212화

“정말이야! 정말로 구원이 왔어!”

“이럴 수가…… 그냥 버려진 줄 알았는데…….”

성진은 속속 나타나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방 눈치챘다.

‘그 통신이…….’

-밖으로 좀 나와 줄래요? 혹시라도 아직 살아 계신 분 중에 이걸 듣고 계신 분이 있다면. 우리는 마포에서 시청 방향으로…….

성진이 옥상에서 재빨리 내려가 본대와 합류했다.

본대와 가까워지자 새로 나타난 이들이 하는 얘기가 들렸다.

“무기…… 정말 무기가 있습니까?”

“우리가 싸울 수 있는 겁니까?”

김정우가 위험을 무릅쓰고 차에서 내려 물었다.

“당신들이 서울의 생존자들이라는 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 앞은 지옥이 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애써 연명해 온 게 부질없어질 겁니다. 그래도…….”

“그래도 싸울 겁니다!”

“이따위 목숨! 언제 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때가 아니면 언제 버린단 말입니까!”

“싸우게 해 주세요! 우리에게 싸울 기회를 주세요!”

김정우가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먼 곳을 응시했다.

그르으응.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

본대의 차량은 모두 이곳에 있었으니 저 차량은 다른 세력의 차량이었다.

사도, 혹은 서울의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

성진이 다가와 무기를 내달라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통신을 듣고 찾아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과 멀지 않은 위치에 대피 시설이 있었습니다. 멍청한 사도 놈들은 우릴 찾지 못했죠.”

“…….”

“그…… 그 통신이 거짓이 아니었길 바랍니다. 어차피 죽을 거, 원 없이 싸우기라도 해 봤으면 싶습니다!”

김정우가 외부 차량들이 본대에 접근하는 것을 보다가 그의 업무를 보좌하는 병사에게 말했다.

“이분들을 병기 적재 차량으로 안내해 드리게. 병사들에게 전파하고.”

“알겠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무엇이 은혜이고 무엇을 감사한다는 것일까.

혁명군이 이들을 죽음이 예정된 곳으로 내모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정말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웃었다.

서울 곳곳에서 혁명군 행렬에 따라붙는 자들이 계속 늘어났다.

그들의 차량은 몬스터를 피해서 본대에 도달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곳도 있었다.

줄곧 줄어만 들던 병력이 이제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이 소식은 최전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철판이 7개입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탈, 즉시 현장에서 이탈하라.

끼아아아아아!

커다란 말발굽 자석처럼 보이는 장치.

묠니르에 불이 들어왔다.

기이이이이잉.

-발사!

피이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앙!

키아아아아아아!

게이트가 있던 곳에 묠니르의 탄환이 작렬했다.

등불의 펄스를 흠뻑 빨아들인 만큼, 파괴력 하나는 일품이었다.

-닫았습니다!

-좋았어! 이대로 전진하자고!

기이이잉.

투두두두두두!

투두두두!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개자식들아!”

콰아앙!

콰앙!

투두두두!

새로 합류한 시민들은 그야말로 거칠 것 없이 싸웠다.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억눌려 온 것들을 일거에 해방하는 듯했다.

“밀어! 밀어붙여!”

“전진해!”

기세는 기세.

희생은 희생이었다.

키아아아!

푸슉!

남자가 몬스터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어깨를 물렸다.

“끅…… 끄어억.”

“빌어먹을! 계현아!”

“가…….”

“하, 하지만…….”

“가, 병신아! 나는…….”

“계현아!”

“신경……쓰지…….”

전장 곳곳에서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조금 전진하고, 조금 쓰러지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었다.

“형! 완성자들이에요!”

성진은 곧바로 이민상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완성자들이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철판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막아야 해요!”

이어 붙인 철판의 숫자는 족히 7개는 넘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주변의 철판을 몬스터들을 이용해 계속 옮기고 있었다.

“거인을 부르려는 거야, 가자!”

“네, 형!”

상황을 눈치챈 등불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이런, 막아!”

완성자 중 1명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불순물들이 몸을 부풀렸다.

우득.

우드득.

악취를 뿜어내는 몬스터가 된 불순물들이 벽이 되어 등불을 막아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쉽게 뚫릴 것 같지가 않았다.

-신조 님.

“……예.”

-좌측에 틈을 만들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후우웅.

파직!

5명의 등불이 정면으로 그대로 들이받는 척을 했다.

불순물들은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빳빳하게 굳어 충격을 견뎌 내려 했다.

그 순간, 등불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측면으로 공격을 집중시켰다.

끼긱!

콰아아앙!

크아아아아아아!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불순물.

불순물의 생명력은 기괴할 정도였다.

지금도 뻥 뚫린 구멍을 메우려 살점이 돋아나기 시작했으니까.

-신조 님! 지금!

콰르릉!

불순물의 가슴에 뻥 뚫린 원 안으로 성진과 이민상이 진입했다.

그들이 지나고 난 뒤, 불순물의 가슴은 메워졌다.

성진은 불순물을 지나치자마자 상황을 확인했다.

‘철판은 8개!’

비행형 몬스터가 철판을 등에 묶어 날아오고 있었다.

아마, 불의 거인들을 이곳으로 건너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저 철판들이 더 필요한 듯싶었다.

성진과 이민상의 시선이 교차했다.

둘은 그 찰나에 서로가 할 일을 파악했다.

이민상은 몬스터가 업고 있는 철판으로, 성진은 이미 포개어진 철판으로 향했다.

“어딜!”

후우웅!

완성자에게서 혈액으로 이루어진 꼬리가 튀어나와 성진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서걱!

성진의 검이 그 꼬리를 잘랐다.

“하하!”

하지만 잘린 꼬리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의 형태로 변해 성진을 덮쳐왔다.

‘……뭐?’

일순 당황했지만, 성진은 침착하게 반전을 꾀했다.

성진이 재빨리 품에서 권총을 뽑자 화들짝 놀란 완성자가 엄폐물을 찾아 피했다.

성진은 그때를 노려 혈액으로 이루어진 남자를 펄스로 태웠다.

퍼어어엉!

혈액이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을 적셨다.

“이 자식!”

속았다는 걸 깨달은 완성자가 성진에게 따라붙으려 했지만, 성진은 어느새 철판 앞에 와 있었다.

“크흐흐…… 이미 늦었어.”

뒤에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몬스터를 죽이고 철판을 회수한 이민상의 다급한 음성이 전해졌다.

“형! 물러나요!”

이미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하늘에 가득히 울렸다.

“으아아아악!”

“살려…….”

꾸지지직.

눈앞에서 시민들을 잃은 성진은 펄스를 개방했다.

펄스가 터져 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성진을 비웃던 완성자의 팔이 펄스의 끄트머리에 닿아 절단되었다.

“크아아악!”

완성자가 위험을 느끼고 건물을 건너뛰어 도주하려 했다.

쒜엑!

“커억…….”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이민상의 단검에 목을 꿰뚫렸다.

“형, 처리했어요!”

후우우우웅!

거대한 게이트가 열렸다.

성진은 게이트를 넘어올 괴물에 대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자잘한 몬스터만 게이트를 넘어올 뿐, 걱정했던 불의 거인이나 끔찍한 악마들은 소식이 없었다.

콰직!

콰아아앙!

성진은 게이트를 닫기 전,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불의 거인이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성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인의 입이 열렸다.

“훔, 타라아 데.”

이미 늦었다.

기분이 나빠진 성진은, 펄스를 집중해 게이트를 닫았다.

찌지지직.

찌이익.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려던 몬스터가 신체의 반만 넘어와 사지가 절단되어 허물어졌다.

‘……늦었다고?’

이민상과 등불이 그가 구한 철판의 인원들을 풀어 주고 성진에게 다가왔다.

“형, 왜 그래요?”

“…….”

“그런데 거인은 왜 넘어오지 않은 거예요? 덕분에 일은 어찌저찌 끝났다지만…….”

“모르겠어. 게이트의 입구가 비좁은 건지도…….”

“하긴, 그 빌딩만 한 덩치가 넘어오기엔 좀 작았죠?”

성진이 불길한 생각을 뿌리치고 말했다.

“가자, 거의 다 왔어.”

“네, 조금만 가면 돼요!”

희생된 시민들은 안타까웠지만, 진정 그들을 위하는 길은 보다 빨리 움직여 다른 이들이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거친 전진은 계속되었다.

자잘한 반격이 있었지만, 등불과 대원들의 활약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진의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늦었다니…… 설마?’

삐.

-중구 진입합니다!

-대비해라! 이제부터는 총력전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최후의 전투에 앞서.

각자의 각오를 다지는 사람들.

하지만, 허망하게도 전투는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해 있었다.

화르르륵.

빌딩만 한 불타는 거인들.

이미, 엘드요툰들이 게이트를 넘어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 돼…….”

“이건 아니야…….”

절망이 실재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하나.

둘.

게이트를 넘어온 엘드요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잠시 세다가 포기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다 세지도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 하하…….”

“어떻게……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해요…….”

“우리가 진…… 거야?”

성진이 건물 옥상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시청 건물이 보였다.

쏴아아아.

하늘이 돌연, 비를 쏟아 냈다.

마치 하늘이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앞날을 슬퍼해 주는 것 같았다.

그때, 하늘의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사람의 얼굴처럼 변했다.

먹구름이 변한 얼굴은 김우열과 똑같았다.

“오랜만이야. 참 지긋지긋하게도 쫓아오네, 신조.”

성진이 잠시 입을 꾹 닫고 있다가 답했다.

“그 반대다.”

“뭐?”

“내가 하려는 일을 네가 막는 거지, 광대.”

“하하하하! 그야 그렇지? 하지만 이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미 시작 지점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버렸는데. 그렇지?”

“동감이다.”

“인간들이 하는 말 중에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얘기가 있지. 알아?”

“…….”

“진리에 가까운 말이야. 신들의 싸움도 결국, 마라톤이거든. 결승선을 통과하는 자가 전부 가지는 거야.”

“난 가질 생각 없어.”

“그래? 난 있는데. 그럼 내가 더 간절하겠네. 이제그만 졌다고 인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

“결국에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네가 지금껏 해 온 싸움이나 노력이 부질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알아.”

김우열의 얼굴을 닮은 구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을 때마다 천둥처럼 하늘이 울렸다.

“흐하하하! 그럼 왜 포기하질 않는 거야? 네가 졌잖아?”

“아직, 지지 않았어.”

“나랑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거야? 네 조무래기 같은 장난감 병사들로 종말의 거인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보라고, 라그나로크 때 어렸던 거인들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라서 나를 기쁘게 해 주고 있잖아? 너는 내가 있는 곳까지 닿지 못해.”

김우열의 말이 옳았다.

김우열의 명령만 떨어지면 엘드요툰들이 불타는 대검을 휘두르며 병기와 사람을 가를 것이다.

문명의 발전은 그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 도륙될 것이고.

하지만, 성진은 믿고 있는 게 있었다.

아직,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후우우.

성진이 크게 심호흡했다.

“반드시, 반드시 네가 있는 곳까지 가서 널 죽여주마.”

“뭐? 푸하하하하하! 역시 넌 재밌어! 아직도 그딴 헛소리나…….”

성진은 로키의 말을 듣지 않고 눈을 감았다.

콰르릉!

그의 몸이 폭풍으로 휩싸였다.

성진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김우열이 물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너…….”

성진의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온 건 하나의 깃털이었다.

온 세상을 뒤집어도 이것보다 하얀 물질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우열의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신성! 무슨 짓이지? 얼마 남지도 않은 신성을…….”

신성을 사용하는 것은 성진의 승부수였다.

이후의 계획도 중요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이 승부수가 먹히냐 먹히지 않느냐로 싸움의 승패가 정해질 것이다.

김우열이 소리쳤다.

“그걸로 거인들을 돌려보내기라도 하려고? 하! 늦었다! 이미…….”

“아니, 나도 부를 생각이다.”

“……뭐?”

후우우웅.

깃털이 핑글핑글 회전했다.

하얀 공처럼 변한 깃털이 점점 커지더니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 빛은 문을 만들었다.

안에서는 성스러운 찬송가가 울려 퍼지며 대답이 들려왔다.

-신조여! 맹세를 지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우열을 닮은 구름이 안색을 찌푸렸다.

“신성 군대…… 이미 닫았던 세계였을 텐데…….”

“닫은 척했던 거지. 이때를 위해.”

“이런…… 이럴 수가…….”

성진이 스트리밍을 계속해서 켜 두었던 이유.

미로라는 시스템은 단순한 송출 시스템이 아니었다.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채널이었다.

좌표와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신물.

오래전, 그에게 구원받은 세계는 무수히 많았다.

광대와 종말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 그에게 입바른 말로 돕겠다고 한 존재들도 많았고.

하지만, 맹세를 나눈 세계는 몇 없었다.

만일 신조가 광대에게 패하기라도 한다면 애써 닫은 세계가 다시 광대의 마수에 들어가게 되니까.

닫힌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종말의 눈을 피해 영원한 번영을 꿈꾸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신조의 부름을 듣고 맹세를 지키기 위해 문 앞에 선 세계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지금 성진 측에 있어서는 막강한 전력이 될 것이었다.

저 엘드요툰들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우열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풉…… 푸흐흑…….”

“왜 웃지?”

“신조여, 너는 여전히 어리석구나. 그리고 날 얕보고 있었고.”

“……뭐?”

“내가 네놈의 수작을 모를 줄 알았나? 닫힌 세계에도 틈이 존재한다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모른 척했고.”

로키가 알고 있었다면 먼저 행동했을 것이다.

성진은 그게 이해가 안 되었다.

“어째서? 알고 있었다면…….”

“그야…… 그게 더 재밌잖아? 지금 네 표정을 보라고.”

성진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상황이 그의 생각대로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김우열이 그런 성진을 비웃으며 설명했다.

“완성자들은 신성의 파편들. 이런 부스러기는 그냥 써먹기에는 쓸모없는 존재들이지만…… 방법이야 여러 가지인 거고…….”

“완성자?”

“완성자가 열쇠라는 것을 알겠지?”

완성자는 문을 여는 열쇠.

신성을 터트려 게이트를 만들어 내는 존재들.

“열쇠는 문을 열기만 하는 게 아니지, 잠글 수도 있잖아?”

“…….”

“그럼…… 시작해라.”

로키의 곁에 있는 완성자들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광대의 나라여, 영세하라!”

“광대의 나라여, 영세하라!”

그들은 손에 쥔 단검으로 자신들의 심장을 찔렀다.

“커헉…….”

“끄으윽…….”

“반드시…… 상을…….”

김우열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알겠다고. 그러니까 얼른 죽어.”

휘오오오오.

성진의 주변으로 스산한 바람이 몰려왔다.

그 바람에는 탁한 기운도 섞여 있었다.

붉은 피.

완성자들이 자신의 심장을 찔러 짜낸 피가 뭉텅이로 바람을 타고 왔다.

그리고, 그 피는 신조의 신성으로 짜인 문들에 끼얹어졌다.

촤악!

촤아악!

김우열은 일이 성공했음을 직감하고 웃었다.

“크하하하하! 어디 그 잘난 신성 군대들이 넘어오라고 해 보시지?”

쿵.

쿠웅.

몇 번 문을 꿈쩍한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말했다.

-문이…… 잠겼습니다.

“그러시겠지! 꿈쩍도 안 할걸?”

김우열은 신이 나서 성진을 비웃었다.

“이제 이 싸움이 문 너머에 있는 자들을 찾아 죽일 것이다. 종말을 피한 세계에 다시 절망을 드리울 거야! 흐흐하하! 그리고 세계를 먹어치워 나는 다시금 초월적인 존재가 되겠다!”

하얀 문이 사라져갔다.

성진의 신성이 다해 가기도 했고, 문 너머의 주민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광대의 승리가 확실시되니 마음이 조급해져 숨으려는 것 같았다.

김우열은 그조차 비아냥거렸다.

“보라고, 신조여. 인간은 휩쓸리는 존재다. 결국, 너와 나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사다. 저들은 너를 따르는 척할 뿐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후회하지 않느냐?”

“후회하면…… 뭐가 바뀌나?”

“아무것도. 그냥…… 내가 좀 더 흥분될 것 같거든! 어서 후회한다고 말해라. 오만하게도 이 광대를 이길 것이라 착각했다고, 창조주는커녕 인간들에게조차 배신을 당했…….”

“후회하지 않는다.”

“…….”

“다시 말하지. 후회하지 않는다.”

성진의 곁으로 등불이 모였다.

이민상의 시선이 자꾸 뭔가를 찾아 헤맸다.

이민상은 지금, 오딘을 찾고 있었다.

그라면 신조의 실패를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오딘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까마귀조차도.

성진이 앞을 똑바로 보았다.

김우열이 입매를 비틀었다.

“싸울 셈이로군. 이미 결과가 정해졌는데도.”

성진은 절망이란 감정을 알지 못했다.

단지 패배했다는 것을 직감했을 뿐.

이대로라면 불의 거인들에게 짓밟히는 미래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했다.

본대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싸, 싸웁시다!”

“그, 그래! 까짓 거 어차피 죽는 거 싸워나 봅시다!”

“1명이라도 더 데리고 지옥에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아직 진 거 아니야!”

“그래요, 싸워요!”

“싸우자! 싸우자고!”

사람들은 미친 것처럼 보였다.

이미 두려움은 뒷전이었다.

이들에게는 이기는 것보다 싸운다는 사실이 중요한 걸지도 몰랐다.

성진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영원을 그들 곁에서 지냈어도 여전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조병창이 성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신조 님, 싸워야 합니다.”

“노력했잖아요. 싸우면 분명…….”

그때, 웃고 있던 김우열의 얼굴이 돌연 찌그러졌다.

“뭐, 뭐야 이거?”

성진은 김우열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했다.

“이, 이게 뭔데 지금…… 크으윽!”

저 멀리 시청 건물이 보였다.

시청 건물에서 산발적인 빛이 퍼졌다 작아졌다 했다.

“크아아악!”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김우열이 괴로워하는 이유를 몰랐다.

김우열이 다급하게 외쳤다.

“죽여라! 다 죽여!”

불의 거인들이 화답했다.

“아헴.”

쿠직.

쿠지직.

불타는 대검을 들어 올리는 것만 해도 땅이 진동했다.

그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후웅.

후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시청 건물에서 하늘로 거센 빛이 쏘아졌다.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력 확보 확인. 등대를 작동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해 서로를 쳐다보았다.

성진과 조병창도 마찬가지였다.

성진은 혹시 조병창이 계획한 일이 아닌가 해서 쳐다본 것이었고 반대로 조병창은 성진이 계획한 일인가 해서 쳐다본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고개를 내저었다.

둘이 아니면 누군가 이 일을 계획했을까.

그리고 종말 거부 장치가 작동하는 거라면 동력은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성진이 소리쳤다.

“그래!”

-작동 의사 확인. 종말 거부 프로토콜 준비 중…….

-준비 완료. 프로토콜을 시동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시동어를 말씀해 주십시오.

등불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었다.

혁명군도 종말 거부 장치의 시동어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작동시켜 보기도 했고.

그들이 하늘에 소리쳤다.

“우리는 종말을 거부한다!”

“나는 종말을 거부한다!”

“우린…….”

-시동어 확인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혁명군의 주위로 한줄기 거대한 빛이 떨어졌다.

-종말 거부 프로토콜 ‘빛’ 시동

빛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빛을 타고 누군가 등장했다.

말을 탄 남자였다.

“……누구지?”

“말?”

전신에 붉은 기운을 두른 중세의 기사가 말과 함께 빛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누군가를 찾았는지 허리를 곧추세웠다.

척!

한쪽 팔을 눈썹에 올린 자세.

경례였다.

남자가 경례한 대상은 성진이었다.

성진은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스윽.

투구를 벗은 남자.

중년의 남자는 어딘가 낯익었다.

“이럴 수가…….”

“오랜만이야, 초모.”

“……알란?”

성진과 대삼림의 모험을 함께했던 알란이었다.

그는 피식 웃고 뭔가를 손에 쥐었다.

“늦지 않게 온 것 같군.”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우웁.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

알란이 뿔피리를 불었다.

“무슨…….”

그때, 하늘에서 화답이라도 하듯이 수십, 수백의 빛기둥이 내려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

“에함!”

엘드요툰의 대검이 혁명군의 본대에 떨어졌다.

“위험해!”

“안 돼!”

콰앙!

쩌어엉!

하지만, 대검은 본대를 가르지 못했다.

신성한 물의 장벽이 대검을 막고 도리어 튕겨 냈다.

“실바?”

청년이 된 물의 추기경 실바, 그가 성진을 보고 웃었다.

“낡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실바의 말에 성진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프로토콜 ‘집’ 가동 당시, 스칸다인들이 했던 말들을.

-고맙습니다! 평생 은혜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어떻게든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꼭! 꼭 저희가…….

그들은, 자신들의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낯선 땅을 밟았다.

“이제, 우리가 이방인이군요.”

콰아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빛이 계속 떨어졌다.

멈출 줄 모르고 떨어지는 빛.

그들의 몸에 걸쳐진 휘장.

세 자루의 검이 교차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휘장이었다.

그 그림은 성검회(星劍會)의 상징.

성진은 스칸다 그리고 스칸다의 주민들이 평화를 포기하고 투쟁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말 전쟁의 와중, 스칸다가 참전했다.

종말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첫 번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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