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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206화 (206/222)

206화

“애 보기 역할이라니, 쯧.”

정계형은 지금 기분이 언짢았다.

완성자에게도 서열은 있었다.

그중 정계형과 홍성립의 서열은 낮은 편에 속했다.

애초에 서열이 높은 완성자들은 로키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며 그의 눈에 들 기회를 찾고 있을 것이다.

정계형과 홍성립처럼 직접 전선에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서열은 단순히 힘의 강함이나, 능력의 특이성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었다.

서열을 나누는 것은 전생의 업적이었다.

로키의 곁에서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는지가 주요한 지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계형과 홍성립은 별 볼 일 없는 자들이었다.

충성심도, 능력도 애매한 경계선에 놓인 자들.

‘하필 불순물들이랑 엮이다니…….’

완성자가 되지 못한 열성(劣性).

이런 존재와 같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만 해도 신경질이 났다.

그의 능력이 ‘근력 폭증’이 아니었다면 이번 임무에 뽑히지 않았을 텐데.

능력의 파괴력을 즐기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른 능력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완성자 중에서도 타인의 힘에 영향을 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더욱이 불순물들을 이용해 혁명군 본대가 가는 길을 부술 정도의 완성자는 더더욱 드물었고. 정계형은 아마 자신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덜 억울했으니까.

꾸르르.

꿀럭.

고름이 찬 주머니를 얼굴에 매단 불순물 1명과 눈이 툭 튀어나와 뒤통수를 치면 그대로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은 불순물 1명이 그의 뒤에서 걸었다.

“흥, 그래도 홍성립이 일 처리는 확실하게 했군. 이리 와라, 쓰레기들아.”

불순물들이 정계형의 앞에 섰다.

정계형은 불순물의 허리를 양손의 검지를 이용해 찔렀다.

푸욱!

푹!

검지는 저항 없이 불순물의 살을 뚫고 파고들었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지만 비명을 지를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득.

우드득.

끼아아아아!

끄어어어.

“빨리 처리해라, 네놈들이 내뿜는 파장이 요란하니 누군가 올지도…….”

정계형이 말을 마치기도 전, 파육음이 들렸다.

퍽!

꾸직!

“뭐, 뭣?”

펄스가 실린 단검이 불순물의 머리 일부분을 뜯어낸 것도 모자라 콘크리트에 처박혔다.

콰아앙!

“……재미없게 됐네.”

정계형이 입매를 비틀었다.

말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그는 지금 매우 놀란 상태였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둘.

1명은 표정이 없었지만, 1명은 한눈에 보기에도 분노한 모습이었다.

“……부수려고 온 겁니까?”

“아, 이거? 음…… 아니라고 하면? 이대로 보내 주나?”

“아뇨.”

표정 없이 말하는 사람은 성진이었고, 분노한 사람은 조병창이었다.

둘은 130호선 주변에 잠복하고 있다가 불순물이 발하는 파장을 느끼고 나타났다.

“건조하게 말하니까 무서운데? 그리고 그 옆에 표정 좀 풀지? 표정으로 사람도 죽이겠어.”

“네가 사람이냐?”

“놀라운 지적이네. 뭐, 신인류라고 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신인류?”

조병창이 묻자, 정계형은 쓰러진 불순물들을 슬금슬금 살피며 답했다.

“광대의 지배하에 새로운 질서로 성립될 세계! 그곳의 귀족, 완성자! 이것이 신인류가 아니면…….”

“악인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모자라 세계까지 팔아먹는군.”

“스케일이 다르지? 어때, 그쪽은.”

“뭐?”

“덜떨어진 신조 옆에서 무슨 부귀영화라도 누리셨나?”

“…….”

방금 차일국을 잃은 조병창의 표정은 기이했다.

정계형이 그것을 느끼고 비꼬았다.

“하하하! 그 표정은 또 뭐야? 걸작이잖아. 쌓인 게 많은가 본데?”

“……닥쳐.”

“웃으라고, 좀! 최후가 다가왔는데 왜 혼자서 열을 내고 그러나? 이런 싸움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악을 쓰고 있으니 꼭 네가 악인 것 같잖아? 악인 입장에서 영역 침범은 좀 그래.”

조병창이 이를 악물고 성진에게 말했다.

“신조님, 저자는 제가 제압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압? 크하하하!”

우득.

우드득!

정계형이 몸이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쓰러졌던 완성자들의 머리도 재생되어 함께 커졌다.

“어디 해보…….”

쒜엑!

먼저 움직인 것은 성진이었다.

콰르릉!

천둥과 함께 불순물 중 1명의 몸이 반 토막이 났다.

“……뭐?”

성진이 나머지 불순물에게 접근하는 사이, 조병창도 정계형에게 쇄도했다.

정계형은 당황하지 않고 부풀어 오른 오른팔을 휘둘렀다.

후웅!

콰아아아앙!

땅거죽이 뒤집힐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이 현장을 휩쓸었지만, 조병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쉽게 공격을 피해 냈다.

정계형의 힘은 쉽게 볼 수 없었지만, 맞지 않으면 무용했다.

콰아아아!

“이이익!”

정계형은 한편으로 도주를 생각하면서도, 조병창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온 조병창은 전투의 달인이었다.

조병창은 정계형의 오른팔이 안쪽으로 크게 휘둘러진 틈을 타서 손날로 그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푸욱!

“끄, 끄아아아악!”

그가 손에 옅게 두른 펄스가 공격을 날카롭게 했다.

정계형의 몸은 다이아몬드나 마찬가지였지만 펄스 앞에서는 두부처럼 으깨졌다.

조병창은 공격이 성공했는데, 오히려 표정이 누그러졌다.

정계형은 직감했다.

저건 화가 풀린 표정이 아니었다.

표정이 사라졌는데도 그게 느껴졌다.

저건 더 화가 난 표정이었다.

‘도, 도망을…….’

그 순간, 정계형의 오른팔이 거짓말처럼 절삭되었다.

서걱!

“어?”

방금 주인의 몸에 붙어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던 팔은 자신이 분리된 것도 모르는지 꿈틀거렸다.

“끄아아아악!”

“닥쳐!”

“끄, 끄어…….”

“닥치라고!”

조병창은 과하게 힘을 주지 않았다.

적재적소에 정확한 힘을 배분하여 타격했다.

정계형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왼발, 오른발, 그리고 왼팔.

조병창은 일부러 정계형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서늘해서 정계형은 다리를 잃은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도망치고자 했다.

“으, 으아으…….”

땅에 몸통과 머리만 남은 정계형.

과연, 완성자의 생명력이었다.

이런 몰골이 됐는데도 정계형은 바로 죽지 않고 횡설수설했다.

“광대가…… 광대…….”

-아아, 형. 여기는 제압했습니다. 꼴을 보니 곧 자결할 것 같아요.

성진이 불순물들을 갈기갈기 찢은 상태로 인이어에 손을 올렸다.

“그래.”

-거기는요?

정계형은 허공을 응시하며 발작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

조병창의 서늘한 눈이 정계형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인간의 시선을 느낀 개미처럼 몸이 움츠러든 정계형은 소리치려 했다.

“크으아아악! 광대의 나라여! 영세…….”

찌지직!

조병창의 장갑 낀 손이 그의 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밀치자, 몸에서 손쉽게 뜯어졌다.

이제는 그의 몸에서 머리까지 분리되자 절단된 부위 중 어떤 부위를 정계형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죽었어요?

성진이 아무 말 없이 일어선 조병창의 뒷모습을 보며 답했다.

“죽였어.”

***

성진 일행은 정해진 장소에서 합류했다.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낸 건지 일행 대부분이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최별이 물었다.

“괜찮아요?”

질문을 받은 이는 조병창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초췌한 그는 최별의 질문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영종도에 도착하면 좀 쉬어요.”

“네…….”

그 이후로 대화가 뚝 끊어졌다.

다들 생각을 정리하는지 굳이 살얼음 낀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차량은 이제는 통제를 받지 않아 삽시간에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소형 몬스터들을 거슬러 본대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움직이는 차량을 보고 겁 없이 으르렁거리는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성진이 위압을 발동하자 홍해가 갈라지듯 차량에서 물러났다.

송하린이 이 광경을 재밌어하며 몇 마디 말을 던졌으나 가라앉은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그으응.

차량이 마침내 본대와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쏴아아아.

본대는 비가 계속 오는 데도 다리를 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늦었군.

손성일이 음성이 전해졌다.

“연구 시설 수색과 완성자 색출 및 제거 완료했습니다.”

-확실한가?

“네, 죽였습니다.”

-그렇군……. 수고했네. 연구 시설의 생존자는…….

“……없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도착한 후, 듣지. 경계병들을 남기고 전부 다리를 건넌다!

그으응.

촤아아악.

텅빈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각자의 생각은 달랐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종도의 보급기지.

실재한다면, 혁명군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이미 파괴되었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고.

다들 어쩐지 지쳐 보였다.

무미건조한 시간이 흘렀다.

풍경도, 빗소리도 익숙해질 무렵.

산발적으로 출몰했던 소형 몬스터들도 영종도로 들어갈수록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가 인간 입장에서, 유토피아라도 되는 건가?”

“아무도 살지 않는 유토피아는 없어요, 민상 씨.”

“유토피아가 붐빈다고 누가 그럽니까? 한산하긴 하네. 무인도처럼…….”

“저 멀리 공항이 보이네요. 불 꺼진 공항은 처음 보네요.”

“이 세상에 처음 보는 게 어디 한둘입니까?”

“그건 또 그렇소.”

쏴아아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선두 차량에서 통신이 전해졌다.

-감응 장치에 반응이 옵니다. 기술된 대로라면 진입로가 곧 나옵니다.

-알겠네. 일단 가 보세.

그으으응.

속도가 점차 줄기 시작했다.

빗길에 미끄러질 우려도 있었고 이곳에 진입로가 있다면 미리 속도를 줄여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치익.

-통신이 또 오락가락하네. 혹시…….

-반응! 반응이 옵니다!

-뭐? 정말?

-진입로 300m 전! 대비하십시오! 속도를 30km 밑으로…….

-다들 들었지?

촤아.

물살을 가르며 차량이 일렬로 늘어섰다.

성진 일행의 차량은 선두와 매우 가까웠는데, 그렇기 때문에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삑.

-나침반 확인되었습니다. 진입로 개방합니다, 주의하십시오.

통신이 아닌, 안내음이었다.

철컹!

기이이이이잉!

갑자기 땅이 꺼지더니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입구가 형성되었다.

터널처럼 이어진 곳에 불빛이 켜졌다.

팟.

파팟.

“……장관이네.”

“멋있네요.”

-진입! 선두 차량부터 천천히 진입! 2조는 잠시 밖에서 대기! 차량 적재 공간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부터 한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 피노키오가 고래의 입속으로 들어가듯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흥분 상태였다.

삑.

또 다시 안내음.

-신조의 아이들이여.

“……엥? 신조의 아이?”

이민상이 되묻자,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안내음이 다시 들렸다.

-이곳을 찾았다는 것은 최후의 싸움이 임박했다는 의미겠군요.

“신조의 아이가 무슨 말이지?”

차량 곳곳에서 비슷한 물음이 전해졌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어쨌든 환영은 한다는 거네요?”

“그, 그렇소! 그게 중요한 거지!”

“그런데 안내음이 나오는 거로 봐서는…… 사람이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글쎄요, 확실한 건 들어가 봐야 알겠네요. 그래도 우군인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그으응.

차량이 선두부터 가장 깊숙한 곳에 차를 대기 시작했다.

일단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했고, 물자를 정리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공간은 충분하군. 2조부터는 그냥 전부 진입해도 넉넉히 쓰겠어.

-진입!

그으응.

먼저 도착해서 차량이 내려오는 것을 보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었다.

피를 뒤집어쓴 성진 일행은 그렇게 멍하니 모든 인원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모든 인원이 합류하자, 손성일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했다.

“그럼, 들어가자고.”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는 그가 화이트들과 함께 앞장섰다.

정유리와 손동호는 이 공간의 탐색이 원활하지 않은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들어가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중 나온 이가 없군.”

“그럼 아무도 없겠군요…….”

“손님을 알아서 들어오라고 하는 주인은 드무니깐 말이야. 그럼, 섹터 하나만 함께 확인하고 주인이 없으면 탐색부터 시작해야겠군.”

“쉬는 건 그다음이겠죠.”

“그렇지.”

보급기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평택 쉘터든, 수원 쉘터든 이곳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보급 물자뿐만 아니라 군용 차량과 무기도 적재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한 차례 탐색을 마치고 본대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곳에 오길 잘했군.”

“5년 동안 가장 잘한 일 같군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 좀 쉬지.”

일행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흩어졌다.

졸지에 혼자가 된 성진은 그를 찾은 김정우와 함께 쉘터를 조용히 걸었다.

김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옆에서 걷기만 했다.

성진도 먼저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라 가만히 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김정우가 입을 뗐다.

“연구 시설에는 뭐가 있던가?”

“피랍됐던 대원들과 연구원, 그리고 차일국 대원도 있었습니다.”

“……있었다고?”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죽고 차일국 대원만 남았지만요.”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성진은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김정우는 들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눈시울이 붉어지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이런, 미안하네. 나이가 드니 감수성만 예민해지는군.”

“아닙니다.”

“차일국 대원 덕분에 우리가 무사하게 건너온 거군. 그게 아니었다면 연구 시설의 불순물까지 협공해 왔을 테니…… 그랬으면 영종도에 제때 도착할 수 있었을까…….”

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쨌든, 감상적인 얘기와 추모는 이쯤하고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이번 사건을 통해 배울 점을 찾아보자고.”

“네.”

“이번에 알게 된 건 사도는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불순물과 완성자가 탄생하며 등불 대원이나 혁명군 인원 또한 개조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됐고.”

김정우는 인상을 쓰고 말을 이었다.

“피랍되면 사실상 죽는 거나 다름없군. 그렇게 끔찍한 모습을 하게 되니…… 사기에 영향이 가겠어.”

“충분한 주의를 내려야겠죠.”

“그래. 자네 말대로야.”

“……뭔가 걸리시는 겁니까?”

“뭔가 걸리냐고? 당연하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김정우가 말하려던 화제는 완성자와 불순물에 관한 부분이 아니었다.

“사도의 움직임…… 이상하지 않은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딴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는 자들이, 우리가 영종도로 가려 한다는 것도 짐작했으면서 사실상 투입한 전력은 거의 전무하네.”

“완성자 둘과 불순물 둘이 전부죠.”

“그들이 전력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모르겠지만, 꺼림칙하긴 하군. 마치,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느낌이야.”

김정우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런 구도가 발생한 이유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네. 지금 움직이기에는 충분치 않은 전력이었을 수도 있고 서울 내부에서 무슨 문제가 터졌을 수도 있지. 그도 아니면 우리를 깔보거나.”

“또는 이 모든 문제가 복합적일 수도 있죠.”

“그렇지……. 자네, 그런 생각해 본 적 있나?”

“어떤…….”

“우린 아직 서울에 진입조차 하지 못했지. 그런데도 몬스터는 파도처럼 밀려오고 인간을 벗어난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도 우리를 방해하고…….”

“하시려는 말씀이…….”

“그럼, 서울 안에 있던 시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

“물론 게이트 붕괴의 직격탄을 맞은 게 서울이니 대부분이 죽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서울이야. 한국의 심장이라고. 분명히 생존자들이 있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무지 좋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혹시나 살아 있더라도…….”

“사도들에게 당했겠죠.”

만약 살아 있다면 게이트 붕괴 때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사도라는 극악무도한 무리가 그들의 인체를 가지고 장난을 칠 테니.

“……그게 얼마나 될까?”

“모릅니다. 그래도 미리 겁을 먹어선 안 되겠죠.”

“옳은 말이지. 자네의 생각이 옳아. 사도 놈들 제길…… 해볼 테면 해보라는 거지?”

김정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좋다. 해볼 테다. 이곳 병기고 확인했나?”

“아뇨. 다른 곳을 둘러보느라.”

“내가 좋은 구경시켜 줄 테니 따라와 보게. 눈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

철컥.

“후우…….”

이민상은 바이저를 벗어 개인 공간에 두었다.

지이잉.

자동 세척 기능이 바이저에 달라붙은 오물들을 씻어 냈다.

지금 이곳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야…… 광대가 유리하겠군.”

밝은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현 상황을 통찰하는 듯한 어조가 이어졌다.

“이러면 곤란한데…… 신조가 너무 쉽게 패배하면 계획이 어그러져.”

이민상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래, 이민상에게는 없던 버릇이었다.

“신조는 계획대로 하겠지. 그를 따르는 사도들도 그를 도울 것이고……. 하나…… 그게 과연 성공할까? 광대는 미치광이다. 아무리 같은 신이라도 창조주의 비호까지 받는 그를 쉽사리 제압할 수 없겠지. 광대 쪽도 무언가 수를 마련했을 거야.”

광대 쪽의 패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불순물과 완성자뿐.

사실, 지금 겉으로 보이는 전력만으로도 성진의 군대가 훨씬 불리했다.

신조의 계획이 무산되면 곧바로 무너질 정도로.

전력의 열세를 이민상도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고철 나부랭이들과 아무리 백전불태(百戰不殆)의 병사들이라도 이제는 수가 줄어든 에인헤야르들로는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윽…….”

이민상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원래의 인격을 소멸시키며 생긴 부작용이었다.

성진과 부산의 종말을 극복했던 겁 많고 순진한 청년인 이민상은 이제 없었다.

“반발이 심한데…… 거의 백치 상태가 아니었으면 몸이 무너졌을지도 모르겠어.”

이민상은 유리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두통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스칸다에서 무슨 힘을 얻었던 건지…… 내 계획이긴 했지만…….”

이민상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다 화가 치밀어 올라 그것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유리컵이 부딪힌 곳은 이 공간에 왜 있는지도 모를 동그란 거울.

유리컵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거울은 거미줄처럼 금이 갔을 뿐 조각나진 않았다.

그것이 마치, 이민상의 몸을 차지한 영혼의 기억과 이민상의 영혼처럼 느껴졌다.

조각난 유리컵, 금이 갔지만 근원은 멀쩡한 거울.

누가 누구고 누가 누구란 말인가.

이민상이 벌떡 일어나 금이 간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이민상의 모습이 비쳤지만, 그 얼굴을 직접 바라보는 이민상에겐 다르게 보였다.

-저희를 믿으시지요.

-……믿겠다.

신조와 약속한 최초의 사도.

그의 얼굴이 금이 간 거울에 비쳤다.

하지만, 정작 지금 그를 괴롭히는 건 신조와의 기억이 아니었다.

-이봐, 인간.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지?

-맙소사! 신이시여!

애꾸눈 노인과의 기억이었다.

이민상이 거울을 응시하며 으르렁거렸다.

“오딘…… 대체 무슨 속셈이냐.”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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