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성진이 잠시 멈췄다.
“대원 중에서 사망자가 나왔다고요?”
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원 너머에서 접속된 대원들은 최전방 인근 쉘터와 합류했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서 사망자가…….”
“그건 가서 얘기해요, 우리. 김정우 박사님이 신조 님을 많이 기다리셨으니까.”
김정우 박사는 성진이 대구를 벗어나면서 다시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소식은 전해졌을 것이다.
분명 5년 전까지는.
성진은 조병창의 뒷모습이 신경 쓰여 최별에게 물었다.
“마음을 쓰고 계시군요.”
“모두가 마음을 쓰죠. 안 그런 척해도 다들 흔들렸을 거예요.”
-등불 벌써 아웃이야?
-오랜만에 왔는데 바로 퇴장이라니;
성진은 채팅 창에서 떠들어 대는 내용에 반응하지 않았다.
시청자들도 곧 진실을 알게 될 테지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믿기는 할지는 그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그저 최후의 싸움을 준비할 뿐이었다.
수원 쉘터의 규모는 평택 쉘터에 못지않았다.
평택 쉘터가 군수품이 모이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병력이 모이는 곳이었다.
성진이 들어오며 마주친 무장한 이들의 머릿수가 꽤 되었다.
지이잉.
“올빼미 님!”
“돌아오셨군요!”
“다들 기다렸습니다!”
쉘터의 주민들이 성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는 슈트를 착용하고 활동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
성진은 그중 몇을 기억할 뿐, 나머지는 그저 한 번쯤 보았던 것 같기도 한 얼굴들이었다.
“……돌아왔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디 가서 객사하실 분은 아니죠!”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것 맞죠?”
이것을 어찌 대답해야 할까.
신조의 싸움은 복잡했다.
로키를 포함한 창조주와의 일전이기도 했고 다른 면에서는 모든 세계의 종말이 걸려 있는 싸움이기도 했다.
신조의 싸움은 비단 그의 싸움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와도 관계가 깊다는 말이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는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각자의 각오에 따라 다를 것이다.
“네. 저는 박사님과 얘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아, 이런! 저희가 붙잡았군요! 죄송합니다, 박사님은 이쪽으로 가시면 우측에…….”
길 정도는 최별과 조병창이 안내할 수 있는데도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주민들은 친절하게 길을 설명했다.
성진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김정우 박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철컥.
군기가 든 경계병들이 경례하고 김정우가 있는 방의 문을 개방했다.
지이잉.
김정우가 작전 테이블에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지도를 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성진에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나?”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이 이상했겠지. 잘 지낼 리가…… 없지.”
수원 쉘터는 최전방은 아니었지만, 최전방의 소식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전선이 어디까지 나가 있는 거죠?”
“여기, 그리고 또 여기.”
김정우가 지휘봉으로 홀로그램의 두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에 동그랗게 마킹이 되었다.
“시흥, 광명? 성남 쪽으로는…….”
“그쪽은 뚫다가 선발대가 괴멸당했다네. 전초기지도 무너져서 복구 불가능. 마땅한 대책이 없어서 전선이 밑으로 당겨졌지. 덕분에 짓눌려 옆으로 늘어진 전선이 형성된 거야.”
“……그렇군요.”
“우리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일 거라고 생각하는가?”
스윽.
성진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자, 그곳에도 동그랗게 마킹이 되었다.
“시청…… 정확하군.”
“서울의 강북으로 가야 하는데…… 방법이 있습니까?”
“벌써 여러 번 돌파를 시도했지. 처음으로 시도한 건 성남과 안양 쪽의 전선을 밀어서 강남을 확보하고 도강을 하든 뭘 하든 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정작 강남은커녕 성남과 안양 쪽의 전선도 밀려서 수원까지 내려온 거야.”
서울 시청은 중구에 있었다.
한강의 위쪽.
한강을 어떻게 건널 건지부터가 문제였고 전선을 밀어붙일 전력은 있는지가 걸렸다.
“현재 전력은…….”
“부족하지. 인원보다 장비가 부실해. 사도에 대한 얘기는 알고 있나?”
“……네.”
“서울은 몬스터의 천국이야. 꿀이라도 발라 놨는지 기이하게도 많은 몬스터들이 존재하지. 특히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중형 몬스터와 대형 몬스터가 먹이사슬을 이루고 살고 있을 정도야. 그런 놈들도 뚫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떡하니 나타난 정신이상자 집단은 우리 진격을 방해하고. 총체적 난국이 이런 걸 말하는 거더군.”
탁.
김정우가 손바닥을 내보이는 제스처를 취하며 고개를 저었다.
성진은 턱을 괴고 홀로그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다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지하철 노선을 이용할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왜 없었겠나? 그 짓도 여러 번 시도하다 기각했지. 애초에 노선이 전장으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고, 상대에게 노출된 지하라는 점이 기각된 이유야.”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는 거군요.”
“정확해. 상대는 빌딩보다 큰 몬스터들도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녀석들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몬스터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지.”
“음…… 전선이 옆으로 늘어진다는 건 그렇게 희망적이진 않네요. 북진에 힘을 집중해도 모자를 판국에……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겁니까?”
김정우가 눈을 번뜩였다.
그는 피식 웃고 손사래를 쳤다.
“전선이 이렇게…… 이렇게 쭈욱 늘어져서 가다 보면 어디로 이어질 것 같나?”
“인천이죠. 설마, 인천에 뭐가 있는 겁니까?”
“공항이 있던 영종도에 군수 물자가 대거 적재된 비밀 창고가 있어. 이뿐만 아니라, 시범 운행도 치르지 않은 신형 장비들도 산적해 있지.”
“위험한 거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
“시범 운행도 치르지 않았다는 건…….”
“탑승자에게 위험하지. 하지만 반대로 적들에게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해 볼 만한 도박이지.”
“사도 측에서 눈치를 챈 건 아닙니까?”
“전혀. 관측해 본 결과 영종도는 현재 텅텅 비어 있어.”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성진이 그것을 언급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강북으로 향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어쩔…….”
“강북과 연결된 지하도를 발견했네. 군용 장비들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고 튼튼하게 지어졌지.”
“공교롭군요?”
“그래, 공교롭지. 그렇지 않나?”
김정우의 눈빛이 변했다.
성진은 그 눈빛을 보고 직감했다.
‘……진실을 알고 있어.’
“……신조, 어떤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이 상황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이게 먼 소리야?
-아까부터 신조, 신조 뭐라 하는데 혹시 복무 신조를 말하는 건가?
“……기이하다고 생각했지. 정부가 신이라도 된 건지 게이트 붕괴를 예견하고 한국에 이런 장비와 인프라를 미리 지어 둔다니. 그건 정부를 너무 고평가하는 거지. 안 그런가?”
“그런 정부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자신들을 정부라고 주장하는 것 치고는 너무 친절했잖나…….”
성진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첨단의 슈트, 거주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쉘터, 그리고 군용 장비와 모든 인프라.
마치 종말 극복의 매뉴얼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절하게 준비된 것들.
이것들을 준비한 사람들은 정부가 아니었다.
사도들이었다.
“자네의 말을 떠받드는 미치광이 작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한 거지. 정말 무섭지 않나?”
“김정우 박사님…….”
“그만!”
“박사님!”
“제발!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게! 소름 끼치니까!”
“…….”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최별과 송하린 그리고 조병창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지이잉.
방 안에는 김정우와 성진만이 남았다.
김정우가 인상을 쓰고 협탁에 놓인 위스키를 크리스탈 잔에 따랐다.
그것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켠 김정우가 금세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성진을 쏘아보았다.
“모든 걸 손바닥에 올려놓고 관찰하는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신 나으리?”
“그만하시죠, 박사님.”
“당신은 모든 세상을 본다죠. 그럼 내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할지도 알 수 있겠네? 안 그렇습니까? 응?”
“그만…….”
“닥쳐! 닥치라고! 빌어먹을 개 같은 신!”
김정우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품에서 권총을 꺼내 성진에게 겨눴다.
철컥!
“실탄이 들었을까 허풍일까, 맞춰 보시죠, 신이시여!”
“……재미없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하! 하긴, 이런 거로는 겁은커녕 비웃음만 사겠지. 그럼, 이러면?”
김정우가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박사님!”
“어느 날…… 내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흘러들더이다. 오래된 기억들이었지. 나도 사도였던 거야…… 수많은 세상을 떠돌면서 기록했지. 어쩌면 나는 당신들이 건너온 세계에도 들렀을지 몰라.”
“…….”
“나는…… 단순히 당신의 전쟁을 위한 장기짝인 겁니까? 숫자로 기록될 뿐인…… 그런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대답해! 대답하라고! 대답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당신은 형체를 가진 내 운명이냐고!”
김정우가 갑자기 이럴 리는 없었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울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제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박사님.”
김정우는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총을 쥔 손을 밑으로 내렸다.
“석찬이가…… 석찬이가…….”
김석찬.
김정우의 하나뿐인 아들.
그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성진도 인상을 썼다.
“석찬이가 못 걷는데…….”
“왜…… 문제가 생겼다면…….”
“아니…… 다리가 잘렸어……. 다리가 잘려서 앞으로 평생 걷지 못한대……. 어흑…… 끄어흑…….”
“…….”
“으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앙!
김정우가 뼈만 남은 앙상한 주먹으로 협탁을 후려쳤다.
“끄아아아!”
“박사님!”
손가락이 부러졌고 피부가 벗겨진 그의 주먹.
그것만으로도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놔! 놓으라고!”
“그만…… 그만하십시오.”
“너는…… 너는 알고 있었어?”
“무엇을 말입니까?”
“석찬이가 다리 없이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거! 그렇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냐고!”
“몰랐습니다.”
“그래…… 몰랐겠지. 하지만, 알 수 있었을걸?”
“…….”
“너는 모든 걸 아는 신이잖아.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 싸움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지부터 어떻게 끝날지까지! 전부 아는 신이잖아!”
흐레스벨그는 모든 세계를 본다.
그의 날개는 폭풍을 만들어 내고 그의 존재는 선을 상징했다.
또한 그는 인간을 알았다.
모든 인간의 행동 원리, 그들의 사고방식, 심지어는 운명까지도 예견했다.
억겁의 세월 동안 그들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흐레스벨그가 모든 인간을 전부 생각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너는 몰랐겠지…… 석찬이가 저렇게 될 거라는 걸…… 왜냐하면…….”
“…….”
“관심이 없었으니까…….”
성진은 침묵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석찬의 운명은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흐레스벨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감은 흐레스벨그에게 닿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너에게 뭔데? 난…… 난 왜 너를 따랐을까…….”
“죄송합니다.”
“…….”
***
-형? 저게 뭔 소리야?
-형? 형? 형? 형? ㅤㅇㅙㄹ케 몰입한 거여?
-신조는 뭐고, 신은 또 뭐야? ㅤㅇㅙㄹ케 ㅤㅇㅙㄹ케임?
-우리 멍청하니까 한 줄로 해명해 줄래?
-절·대·해·명·해.
성진은 초췌한 안색으로 작전실을 나섰다.
김정우는 심력을 다 썼는지 대화를 마치기도 전에 기절했다.
경계병들이 그를 침상에 눕히는 것을 확인하고 성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성진은 쉘터에 위치한 병동을 찾았다.
치유 능력이 존재하는 등불 대원이 합류했음에도 공실인 곳이 없었다.
그만큼 전투가 격렬했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 이 환자가 어느 병실에서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올빼미 님이시군요! 자, 잠시만요…… 원래는 안 되는데…….”
성진이 조금 기다린 후에, 병실 번호를 듣고 움직였다.
병실은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1인실이었다.
성진은 곧 그곳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후에,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들어오세요.”
김석찬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진은 문을 열었다.
지이잉.
“어?”
“하하…… 어쩌다가 두 분이 따로 오셨대?”
성진은 병실에 선객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먼저 와서 의자에 앉아 있는 조병창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조병창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도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의자를 가져와 김석찬의 침상 곁에 앉았다.
김정우를 닮은 이목구비.
든든한 어깨와 물러서지 않는 눈빛.
그리고 침구로 가렸지만 허전한 그의 다리가 있어야 하는 부분.
김석찬이 그 시선을 느끼고 움찔했다.
“하하하,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별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냥…… 아닙니다.”
“그래요? 별일이시네. 그보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올빼미 님.”
“그러……게요.”
“절 위로하러 찾아오신 거예요?”
성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석찬을 똑바로 응시했다.
“위로가 필요합니까?”
“그래 보여요?”
“전혀.”
“네, 전혀.”
“어떻게 된 겁니까?”
“다리요? 아니면…….”
“다리.”
“사소한 걸 궁금해하시네요. 가만있어 보자, 어떻게 된 거였더라?”
김석찬은 오래된 일을 떠올리는 시늉을 하더니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원래는 성남과 안양에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는 아버지한테 들으셨나요?”
“네. 들었습니다.”
“몬스터에게 떠밀려 다시 후퇴했다는 얘기는요?”
“그것도 들었습니다.”
“다 들으셨네요. 그게 전부잖아요.”
“네?”
“제가 그 전선에 속해 있었거든요. 안양에서 과천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어요.”
“후퇴하지 못한 겁니까?”
김석찬이 웃었다.
“후퇴도 후퇴인데, 상대가 나빴어요. 사도에게 당했거든요.”
“……문신을 하고 괴물로 변하는 그들 말입니까?”
“저희는 그들을 불순물이라고 표현하는데, 네. 그들에게 덜미를 잡혀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저는 천신만고 끝에 생환했고요. 기적이나 다름없었죠. 지금도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지 가끔 믿기지 않을 때도 있어요.”
탁.
김석찬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성진에게 건넸다.
성진은 계속 김석찬의 다리가 신경 쓰였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네?”
“죄지은 사람처럼. 그렇게 보지 말라고요. 저한테 뭐 잘못하신 거 있으세요?”
“…….”
“저도……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어요. 아버지도 사도였다는 걸. 바보같이 얼마 전에 기억이 돌아오셨다네요?”
성진이 과거, 신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계획한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김정우는 아마 그것을 말했을 것이다.
“신이라죠? 인생 참 재밌어. 살아생전 신도 만나 보고.”
“석찬 씨.”
“신은 나를 어떻게 위로할 생각이죠?”
“위로할 수 없습니다.”
“위로가 필요 없으니까요. 그러니 표정 피세요.”
김석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진에게 말했다.
“밤마다 뒤척이고 땀을 흘려요. 아직도 무섭고 힘이 드는가 봐요, 그날 밤이.”
“다리를 다친 날을 말하는 겁니까?”
“음, 다리 때문이 아니에요. 그날 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든요. 말했잖아요, 저는 기적처럼 돌아온 거라고. 아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
“제가 힘든 건 다리를 다친 것 때문이 아니란 말이죠. 그날,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들이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이제 이해가 되세요?”
김석찬이 답답해하며 성진의 손을 잡았다.
“저는 제 선택으로 전선에 간 거예요.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구했고, 또 잃었어요.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그렇습니까?”
“네,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모든 일은 내 손바닥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해도 귀담아들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요. 물론, 아버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지만.”
“……석찬 씨를 아끼십니다.”
“제가 죽은 것도 아닌데 꼭 장례라도 치르시는 것처럼 힘들어하시니 저도 불편하더라고요. 저는 살아 있고 제 선택의 대가를 수긍했어요.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요. 이렇게 신이랑 대화도 해 보고요.”
“나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뭘까.
신도 인간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
그리고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일까.
성진은 그 질문의 해답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네요. 나 하나만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네, 얼마든지.”
“당신은 아직도 선인가요?”
“…….”
“아차차,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상 그럴 리가 없지. 질문을 바꿀게요. 신께서 하고자 하는 일은 여전히 선입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최후의 싸움을 앞둔 지금도 변하지 않는 답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네요. 그렇게 의심하는 게 우리를 보다 나은 길로 걷게 해 줄 거라고 믿어요.”
김석찬이 창밖을 보다가 말했다.
“이만 좀 쉴게요. 두 분 찾아와 주신 거 감사하고, 이제 축객령을 선언하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김석찬이 억지로 밝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라니 자꾸 무슨 소리냐고;;
-진짜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왜왜오애애애 뭔 소리들이야, 진짜?
-몰래카메라인가? 뒤에서 PPAP 추면서 나오는 거지?
지이잉.
성진과 조병창은 병실에 들어갈 땐 따로였지만 나올 때는 함께였다.
조병창이 성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걸을까요?”
“그러죠.”
쉘터를 경계하는 이들은 피로해 보였다.
5년.
5년이란 시간 동안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 세월이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김석찬과의 대화는 곱씹을수록 찝찝한 기분을 들게 했다.
“좋은 질문이죠?”
“무슨…… 아.”
-신께서 하고자 하는 일은 여전히 선입니까?
김석찬의 질문.
조병창도 듣고 있었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여전히 선일까요?”
“…….”
“대원 중 둘을 잃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영혼은 최후의 싸움이 끝나고 어디로 갈지 정해지겠죠.”
“…….”
“150명이 넘고 200은 안 되는 인원. 기억 못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기억하죠.”
“그만큼 많은 세계에서 많이 얽혔으니까.”
“네. 원래 당신의 발할라에 모인 이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건너온 이들이 전부입니다. 어째서인지 아십니까?”
“돌아섰을 겁니다.”
“정확하십니다. 이제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모든 세계에서 싸워 온 몇 안 되는 전사입니다. 그리고 매번 당신에게 다른 세계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죠.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조병창은 흐레스벨그의 병사 중 가장 충성심이 깊던 자였다.
그의 영혼은 매번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은 정말 우리를 믿습니까?”
“…….”
그래.
나는 인간을 믿어.
이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매번 저 대답을 들려주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답하고 싶지 않았다.
최후의 싸움이었다.
이곳까지 믿고 따라와 준 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
“나는 인간을 믿지 않았습니다.”
“과거형이라는 건?”
“내가 믿었던 건 신이었던 나였고 당신들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지금은…… 모르겠군요.”
조병창이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이제야 진심을 말해 주시는군요. 신조여.”
“나를 떠날 겁니까?”
“진심을 알아서?”
“네.”
조병창이 갑자기 우렁차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푸하하하!”
“왜 웃는 겁니까?”
“신조여, 당신은 참으로 선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무슨 소립니까?”
“당신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사도,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인 그들조차도 당신을 믿지 않았죠!”
“그럼…….”
“네, 서로를 믿지 않는 동맹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것도 웃긴 일이죠. 인간은…….”
조병창은 진실을 말했다.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단지 이 계획에 동참한 건…… 인간을 믿었기 때문이죠.”
“…….”
“당신이 세웠던 계획과 앞으로 일어날 계획은 조금 다를 겁니다.”
“인간들에게 다른 계획이 있단 말입니까?”
“일단은.”
성진은 조병창을 바라보았다.
조병창은 당당하게 성진의 시선을 받았다.
“우리의 관계는 특이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이용하려 했지만, 우리도 당신을 이용한 거죠.”
“……그랬군요.”
“하지만, 지금 당신의 대답을 듣고 조금은 다른 미래가 그려지네요. 신이여, 저 태양이 보이십니까?”
“예, 보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과 저기 날고 있는 새가 바라보는 태양이 다를까요?”
다르지 않다.
같았다.
“같겠죠.”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이용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광대는 강하고, 우리가 서로를 믿지 않고는 승산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묻노니, 신이여 인간을 믿습니까?”
성진은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 대답이 최선이었다.
“나는 나를 믿습니다.”
“…….”
“그리고 나 또한 지금은 인간입니다.”
“……좋은 대답입니다. 앞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 나란히 서기로 하죠. 당신이 그 고리타분한 나무 위에서 내려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인간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신조의 확신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졌다.
성진은 여전히 인간을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