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은신처에서 등장한 등불과 성진은 한 곳으로 달려들지 않고 서울 각지로 퍼져 나갔다.
사실상 그들이 보유한 전력은 완성자들에 의지하던 기존의 전력과 비교했을 때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후우우웅!
검은 파장을 두른 남자의 주먹이 방금까지 시민을 뒤쫓던 유인원의 모습을 한 몬스터를 꿰뚫었다.
콰아앙!
키.
키아악.
가슴 한복판에 사람 1명이 들락거릴 구멍이 뚫리자 유인원은 그대로 쓰러졌다.
결과를 들여다볼 짬도 없이 등불 단원들이 사체를 짓밟고 지나갔다.
“꺄아아악!”
투두두두!
“도, 도와줘요!”
사도가 직접 개량한 전투복을 입은 등불을 막을 것은 없었다.
성진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현실에서도 펄스를 다루는 훈련을 꾸준히 해 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강북과 강남, 강서와 강동으로 가닥을 잡고 흩어졌다.
인근에 있던 사람들은 뭐가 지나갔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황급히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 했다.
지금도 서울 곳곳에서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끄아아악!”
“살려 줘! 제발!”
까드득.
“끄으…….”
“다, 다리가…….”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 사지 중 일부가 몬스터의 아가리로 들어간 사람 등 그로테스크한 재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진정한 종말이 찾아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성진이 철골이 드러난 건물 잔해에 다리가 낀 남자를 보았다.
“도와주세요……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우직!
우지지직!
성진이 한 손으로 잔해를 걷었다.
콰아앙!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잔해를 던지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아, 아니요…….”
“곧 구급대원들이 올 겁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저…… 가, 감사하긴 한데…… 세상은…….”
“…….”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진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지금도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은 곳곳에 산적해 있었다.
크와아아아아아!
5층 건물 덩치의 몸.
촉수가 가득한 흉물스러운 형태.
완성자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몬스터들은 대부분 이렇게 중형 이상의 몬스터였다.
1세대로는 어림도 없었고 완성자들도 몇이 달라붙어야 처리가 가능할 정도의 강력한 괴물들.
“이런 게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니…….”
-연구소 쪽도 심각합니다! 인원이 부족할 것 같은데 혹시…….
-강서 쪽 인원에 여유가 좀 있습니다! 5인으로 구성된 2팀 정도가 지원 가능할 것 같은데, 충분합니까?
-충분합니다! 지금도 아슬아슬하게는 막고 있으니 그 정도만 되어도 공세로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이어에서 한승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해 상황은? 보고된 것 있습니까?
-전무, 시민 측 피해가 있지만 등불 내부에서는 아직까지 피해 상황 보고된 바 없습니다.
-하면 되잖아! 우리도 하면…….
-조용! 임무 내용 전달 외에는 채널 사용하지 마세요!
-미안해! 최별짱!
-너 한승철이지?
-아닌데요? 뚱인데요?
한승철의 부드러운 농담에 인이어를 타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첫 실전에 잔뜩 긴장했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렵지 않게 호전되자, 훨씬 편한 마음으로 임했다.
3시간이 지날 무렵, 희망적인 음성이 채널을 타고 흘러들었다.
-강북 쪽 처리 완료했습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할 만한 업무가 아닌 것 같아서 손 뗐습니다.
-강동 쪽도 마무리되어 갑니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서울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던 끔찍한 상황은 서서히 정리되고 있었다.
정부의 고위층은 한시름 놨지만, 국민과의 실랑이를 대비해야 했다.
그에 반해, 임무가 끝난 등불들은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불규칙하기도 했고 사태 처리에 집중하고 있던 정부는 그들의 행적을 놓치게 되었다.
***
지금껏 이랬던 적은 없었다.
모든 영상 매체가 등불의 모습을 비추었다가 사태가 해결될 때쯤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시작된 이 기묘한 일은 더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졸지에 폭풍의 눈이 된 한국 정부.
사태 수습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외부의 간섭도 거셌다.
등불이 서울 인근에 있다는 것 정도는 눈감고도 알 수 있었으니 정부는 그들의 추가적인 행적 파악에 인원을 추가 배정한 후, 급한 불부터 끄려 했다.
그리고 대국민 성명 발표가 사태가 종료된 지 30분 만에 시행될 거란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가장 불타오른 건 종말 이후를 사랑하는 디스토피아였다.
[제목 : 내 말이 맞았지? 2세대 각성자는 등불이라고]
5번 말했다. 십새들아.
-ㅔ 뭐 그러시겠져.
-ㅖ 그렇다 칩시다.
-등불 확정된 거임? 최별이 보이긴 했는데 시점이 요상해서 서로 다른 거 봤다는데.
-등불 다 방송 접고 히어로하고 있었던 거야? 배신이야! 평생 우리와 함께한다고 했잖아. ㅠㅠ
-정보) 아무도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정보) 부모님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는 건 싫어하신다.
[제목 : 대국민 성명 저게 지금 무슨 소리 지껄이는 거지?]
자극적인 워딩 에반데.
‘정부에 반하는 테러 단체’라니 ㅋㅋ 몬스터들이 한국 정부에 반한데요? ㅋㅋㅋ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쳐하고 있네.
-근데 그 화면에 나왔던 여자 누구임? 내 스마트 폰에도 얼굴 비춰서 깜짝 놀랐음.
-왜 깜짝 놀람.
-나는 여자인 사람 우리 엄마 말고 등록 안 됐거든.
-뜻밖의 영상통화였구나.
-우리 디스토피아지기들은 그럴 때라도 데이트해야지…….
-와, 근데 무슨 영화인 줄 알았어, 연출이;
-정보) 100이 넘는 국민이 죽었는데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영화다.
-우린 개념이 없는 거고. 영화는 아니지.
-맞아, 인방 좀 좋아하고 게임 좀 좋아하는 게 어때서? 친구도 많아, 나.
-친구 어디서 만났는데?
-이제 와서 시치미 떼기는…… 바보! 너희들이잖아~♥
-5252 네 녀석! 부끄러워서 돌려 말했는데도 이런 돌직구!
[제목 : 근데 그 여자가 한 말이 뭐였을까]
갑작스럽게 서울과 인천 인근에서 발생한 대규모 게이트 사태. 덕분에 서울은 아비규환, 정부는 발만 동동, 국외도 흥미진진.
때맞춰 등장한 등불(로 추정되는 각성자 무리).
엄청난 해커(추정)가 잠시 영상 매체를 독점하고 한 말.
이 모든 것을 추론해 봤을 때, 하나의 결론이 남는다.
그것은.
오늘 점심은 돈까스란 것이다.
돈까스 좋아하세요?
-음, 요약이 훌륭하군요. 특히 마지막 질문은 심금을 울려. 클럽에서 들었다면 당신과 사귀고 싶었을 거예요.
-근데 진짜 무슨 자기가 신이라느니 저들을 믿어야 한다느니 무슨 소리였을까?
-원래 해커들이 자주 하는 말임. 자기가 신이라는 건. ㅋㅋ
[제목 : 아 대국민 성명 끝났네.]
별 내용도 없고 책임 회피만 줄줄이…… 이번에는 싹 다 모가지 해야 한다니까? 것보다 진짜 오늘 일은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다. 그 블랙이랑 2세대 각성자 무리는 대체 뭘까?
-그 사람들이 오늘 완성자들이 못 한 거 다 처리해 준 거 아님?
-ㅇㅇ 그렇지. 와 무슨 100명 넘어가는 인원이 번쩍번쩍하면서 게이트 닫는 거 장관이더라.
-영화 촬영하는 줄; 오늘 강남 나갔다가 변 당하신 분들 어쩌냐 진짜. ㅠㅠ
-오늘 일 때문에 사람들 밖에 잘 안 나갈 듯;
-우린 평소처럼 있으면 되겠네. 근데 저런 일 앞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거 아님? 대책은 있는 거야?
[제목 : 각국 언론들도 한국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단다.]
정작 여기 모인 새끼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새끼가 한 명도 없지만 ㅋㅋ 코미디다 시발.
밑에 짤은 오늘 일어났던 게이트 사태 일부 사진.
-ㅈㄴ끔찍하다. 촉수 달린 거 봐, 우웩.
-야 근데 무슨 2세대 각성자들 영웅 같다. 짤만 보면 진짜 구도 잡고 찍은 것처럼 보이네.
-저건 어떻게 찍었대? 야, 근데 저기 뒷열에 쟤, 걔 아니냐?
-누구? 어? 점이 어디서 본 점인데. 왕 점…… 저거 성현이 아니냐?
-김성현? 등불? 오반데; 진짜라고?
-아니 씨, 잘 봐봥. 눈 밑에 코딱지 점. 저거 보이잖아.
-ㅎㄷㄷ 진짜네.
[제목 : 각종 뇌피셜과 등불 각성 썰 이 난무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도 밀수는 세계가 도탄에 빠지든 총탄에 쳐맞든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했습니다. 바로 데자뷰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서 한국 섭이 언제 열리는지 공지가 뜬 것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평상시와 달리 오늘은 성과가 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국 서버 오픈이 임박했습니다!
모두 쏴리 벗고 팬티질러어어ㅓㅓㅓㅓ!
-ㄹㅇ임.
-어, ㄹㅇ이네?
-그것도 오늘이라고? 미친; 갑자기? 뭔 일 났나?
-뭔 일은 한국이 났지;
-뭐야? 그럼 오늘 한국 섭 오픈하면 등불 돌아오는 거야? 올빼미는?
-‘그’는!!! ‘그’는 오는 거냐고!! 한국 섭이 재오픈해도 우리는 어차피 못 들어가잖아. ㅋㅋ
-모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이에 관련하여 데자뷰 공식 방송이 예정되어 있다는 건 뭐야?
-어디서 하는데? 언제 하는데?
-미로에서 하겠지. 근데 언젠지는 모르겠네?
***
최재국이 불이 꺼진 곳에서 등불을 맞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철컹.
일을 마치고 사라진 등불을 아직도 여기저기서 찾고 있었지만, 미리 얘기된 장소로 향한 이들은 그곳에서 꼬리를 뗄 수 있었다.
오늘 활약한 등불들은 흥분한 모습으로 들어섰지만, 분위기는 다소 침침했다.
“다들 왜…….”
“쉿, 조용.”
“아니, ……아.”
성진이 고글을 올려 쓰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김우열은 기억을 되찾자마자 도망쳤어.’
시간을 끌기 위함인지 아니면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울에 게이트를 열고 사라졌다.
신격을 가진 이가 게이트를 여는 건 쉬웠지만, 현재 로키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마음대로 열어젖힐 수 없었다.
‘완성자가 열쇠였던 건가…….’
신성을 대신할 열쇠.
그것을 던져 게이트를 발생하게 하는 구조.
정부는 대규모 게이트 사태라고 표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겨우 이 정도일 리가 없었다.
로키 정도 되는 자가 작정하고 손을 썼다면 등불만으로는 버거웠을 것이다.
‘이건 단순한 눈속임.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그의 잔향이 이 세계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다른 세계, 종말 이후로 도주한 것이 분명했다.
‘니드호그가 벌이려던 짓을…….’
연결된 세계 반대편에서 일을 벌이면 현실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니드호그가 일을 벌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고, 아마 로키도 같은 이유에서 건너간 것 같았다.
“저…… 캡슐을 이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만져 봤는데, 종말 이후는 외국 서버든 한국 서버든 폐쇄 상태야. 접속이 안 돼.”
“그, 그럼 어떡해요? 적들은…… 적들은 이미 건너간 것 같다면서요?”
“…….”
“우리는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최재국이 끼어들었다.
“성진 씨, 기억을 찾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러 주십시오.”
“…….”
최재국과 사도들은 답답했다.
상황은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고 만약 정부가 등불의 위치를 파악한다면 사태를 파헤치기 위해 귀찮게 굴 것이 분명했다.
“최성진 씨!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같이 얘기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 그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기다리다니요? 누구를…… 헬은 분명히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잠깐…….”
이 일과 관련된 것은 헬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사태에 깊숙이 관련된 자들이 있었다.
“설마…… 그들이?”
짝!
짝짝짝!
어두컴컴한 문으로 누군가 기척도 없이 등장했다.
1명은 2명이 되었고, 2명은 5명이 되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한 이들은 이곳에 있는 몇은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데, 데자뷰…….”
“데자뷰다!”
“데자뷰라고? 저들이?”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등장으로 등불이 술렁일 때, 데자뷰 중 누군가가 성진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기억은 찾았나?”
“…….”
“좀 반겨 주지? 깃털 다 빠진 수리 씨?”
“헤이드룬.”
“날 알아보는군. 여봐들, 너희들은 못 알아봤다며?”
“지금은 기억이 돌아왔다잖아요. 그런 거로 경쟁 붙지 말아 줄래요?”
“하하하…… 뭐 어때, 이번 생은 지낼 만했나?”
성진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다인, 드발린도…… 어째서지?”
“뭐가? 못생겨진 거? 착각이야, 저들은 원래부터 못…….”
“신성을…… 대부분 잃었군. 이상한 일이야, 계획대로였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 계획에 착오가 생겨서. 우리도 여기까지 태평하게 온 건 아니라서 말이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맞아요! 최……수리 때문이에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위그드라실에서 나뭇잎을 뜯으며 잘만 살고 있었을 텐데…….”
성진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게 됐군.”
“아뇨. 사실 나뭇잎은 맛이 없어요. 요즘에 서대문 쪽 사거리에 생선구이 집이…….”
데자뷰는 성진의 일을 돕기로 한 위그드라실에 살던 양 1마리와 사슴 4마리였다.
신성을 잃어 가면서까지 그들은 이 싸움에 참여했다.
“로키가 기억을 찾았어요. 세상에! 어떻게 김우열일 수가 있죠?”
“누군가 운명에 수작을 부린 건 아닌가 할 정도로 놀랍긴 하더군.”
데자뷰의 말에 성진이 고개 저었다.
“이미 영원 동안 그와 얽혔다. 이번 생이라고 다를 리 없지. 다만, 생을 반복하며 그와 충돌했기에 생각보다 일찍 그와 부딪힌 거겠지. 다른 의미는 없어.”
“헬은 어땠지? 약속을 지켰나?”
“훌륭히. 그녀의 역할은 끝났어.”
“쳇, 로키의 자식답게 거하게 사고라도 칠 줄 알았는데 제 믿음을 배신했네요.”
“……그거 편견이야, 인마. 아무튼, 우리 잘한 거 맞지?”
성진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도.”
“이 종말 이후랑 스칸다라는 세계를 게임을 매개로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계획도 훌륭했고 말이야! 이 게임이 어떻게 탄생했냐면…….”
“헬과 함께했겠지. 에인야하르를 양성하는 방법도 교묘하게 섞었을 거고.”
“……아네? 얘들아, 큰일이다. 흰 수리의 지능이 아직 멀쩡해!”
“헤이드룬, 당신은 원래 지능으로는 육천왕 중 최약체였어요.”
“무슨 천왕이 그렇게 많아? 더 뽑았어?”
“흰소리는 집어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헤이드룬이라는 사내가 입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다.
“재미없기는, 그래. 마지막 싸움만 남았네. 각오는…….”
“…….”
“의미 없겠지. 너도 참 지독해. 어떻게 싸움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지…….”
헤이드룬이 성진의 눈을 보았다.
올곧은 눈.
그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한 치도 자신의 길을 의심하지 않는 눈이었다.
저 눈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
“그럼 이쪽은 준비가 되었고…… 당신들은 어떻지?”
헤이드룬이 고개를 돌려 등불을 보았다.
등불은 데자뷰의 등장에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건 너희가 즐겼던 게임이 아니다. 이번엔 인형의 몸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 직접 너희의 영혼이 건너갈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아는가?”
“거기서 죽으면…….”
“죽는다. 완전하게.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처분이 결정되겠지.”
성진이 기억을 되찾으며, 그 파편들도 등불에게 스며들었다.
최초의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온 기억들.
그들도 이제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은 이 싸움을 위해 준비된 자들이었다.
영원토록 계속되는 흐레스벨그와 로키의 싸움에 동원된 병사들.
“우리는 또……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들은 흐레스벨그를 위해 싸웠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끝없는 고통의 나날들.
“나, 나는…….”
“무서워요…….”
그때, 조병창이 나섰다.
“가겠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데도?”
“인간은 언젠가 죽죠. 어…… 제 기억에도 저는 이미 여러 번 죽었었네요.”
“그래, 특히나 이번에 죽으면 어떤 세계에 가게 될지도 알 수 없어. 싸움은 이번이 마지막이거든, 영원히 지거나 영원히 이기거나.”
“괜찮습니다.”
“어째서? 원하는 거라도 있나?”
“아뇨, 없습니다. 다만…….”
조병창의 기억에 남은 것은 끝없는 전투, 영원토록 계속된 로키와의 악연.
그리고 종말을 극복한 이들의 감사였다.
그들은 언제나 영웅이었다.
어떤 세계에서는 명사수였으며, 어떤 세계에서는 대마법사였다.
그들은 그렇게 세계를 구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세계를 떠돌며 그들이 깨우친 진리는 단 하나였다.
-신조의 정예들이여!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이 아니었으면…….
-늘 당신들을 믿겠습니다. 언젠가 모든 게 끝나는 날까지…….
“이런 저라도 믿고 의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전 가겠습니다.”
“…….”
성진이 조병창을 흘겨보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 싸움은…….”
“아뇨, 이번에도 당신의 곁에서 싸우겠습니다. 신조, 아니…… 최성진 씨.”
“…….”
조병창이 먼저 나서자, 최별과 송하린이 다가왔다.
“우리는 처음부터 갈 생각이었어요.”
“형님, 어쩐지 제가 과거에 우리가 엄청 가까웠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거 본 적 없는데요, 송하린 양.”
이들이 나서자 등불 전체가 술렁였다.
죽으러 가는 싸움이었다.
누구라도 이 선택으로 모든 게 갈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척!
“저도!”
“갈 겁니다!”
“등불은 형제입니다!”
“그건 아닌데?”
“나도 그렇게는…….”
“…….”
다들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낸 이들까지 손을 들자 이곳에 모인 전원이 손을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헤이드룬과 사슴들이 웃었다.
그들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말했다.
“그것이 너희가 신조에게 선택받은 이유다. 육체와 정신의 강함은 일시적이다. 하지만, 영혼의 강함은 영원하지. 강인한 영혼을 지닌 자들이여! 최후의 전장으로 향해라. 그리고…….”
헤이드룬이 슬프게 말했다.
“반드시 돌아와라, 너희의 세계로.”
“…….”
헤이드룬이 성진을 돌아보았다.
“진짜, 마지막이다. 준비해.”
“준비됐어, 아…… 잠시만…….”
성진은 꺼진 스마트폰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신아름에게 말을 남기는 것이 좋을까, 강부용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 게 옳은 게 아닐까.
이내 고개를 저은 성진은 그것을 최재국에게 건넸다.
“가지.”
“모두 눈을 감아라, 신성을 쥐어짜 반대편으로 건너갈 것이니.”
등불이 눈을 감았다.
광대를 뒤쫓는 신조의 군대가 차원을 넘었다.
***
쿠웅!
“으윽…….”
성진이 신음했다.
그는 흐릿한 눈을 최대한 크게 떠 몸을 확인했다.
‘옷이…….’
검은 코트와 그의 무장.
총을 확인해 봤지만, 정유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의 본체는 대전에 있을 테니 무사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지?’
자신은 세종을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났으니 세종이어야 했다.
하지만, 부서진 건물 잔해만 가득할 뿐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기척은 분명 있었다.
-올빼미 님의 방송에 입장하셨습니다.
‘5분 대기조’ 님이 5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네! 지금 출동했습니다! 오늘 올 줄 알았습니다!]
-후원 딱 대. ㅋㅋㅋ
-형 ㅠㅠ 보고 싶었어!
-흐아아아아아아ㅠ 데자뷰가 우리를 갈라놓았었어.
-나 형 못 잃어. ㅠ
-엄청난 남초의 현장이다.
-방송 켠 지 5분 만에 사람 수 봐라. ㅋㅋㅋ
성진은 익숙한 채팅 창을 훑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종말 이후다.
-형, 클리어 안 하고 빡종은 이쪽 업계에선 블랙리스트야.
-이번엔 어디까지 갈 거야?
이제, 최성진의 전부가 시작된 이곳에서 모든 게 매듭지어질 것이다.
최초의 싸움은 혼자였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