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헬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처음 성진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대화를 주도하는 건 소녀의 얼굴이 아닌 노파의 얼굴이었다.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최성진으로 하지.”
“최성진, 당신이 부탁한 일은 전부 했어요. 인정하나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의 자식인 헬을 믿고 뭔가를 맡긴다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성진은 헬의 심정을 짐작했다.
“나는 싸움이 싫어요, 종말도 싫고.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나를 죽은 자의 세계로 떨어트린 오딘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이 표독스럽게 불탔다.
“나의 아버지 로키지. 나에게 이런 몰골로 영원을 살게 했으니 저주받아 마땅한 자예요.”
“부탁했던 두 세계의 인과율 조작은…….”
“내 힘을 못 믿는 거예요? 영혼들의 기억과 행동 방식 정도는 간단하게 뒤틀 수 있어요. 이곳과 종말 이후의 사람들을 한 곳으로 군집하게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헬이 세계의 많은 부분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이 내기에서 광대나 수리 중 누군가를 편드는 행위는 위험했다.
창조주의 진노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수리가 헬에게 부탁한 것은 다소 특이한 것이었다.
광대와의 마지막 싸움이 임박하기 전에, 싸움에 임할 이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것.
그 전장으로 선택된 곳이 한국이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지만, 흐레스벨그가 위치를 특정한 것은 아니었다.
헬이 전장을 베르드 폴니르의 영혼이 존재하는 곳으로 특정하다 보니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원래였다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위험했지만, 흐레스벨그의 예상대로 균형만 이룬다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작은 나라에 흐레스벨그의 전사들뿐만 아니라 로키의 사도들의 영혼도 몰아넣은 것.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창조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말, 아직도 같은 생각인가요?”
“무엇을?”
“이번에 끝내겠다는 계획 말이에요.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거 맞죠?”
“…….”
“왜 그래요?”
“끝이라는 말이 낯설어서. 너무 오랜 시간이었으니까.”
“하긴…… 이해가 되기는 하네요. 그래서,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모든 걸 끝낼 당신들의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게 맞는 거냐니까요?”
“모른다.”
“그건 최성진의 대답인가요, 내가 아는 흰 수리의 대답인가요?”
“최성진의 대답. 흰 수리의 감정과 생각은 전해졌지만, 계획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전해지지 않았어.”
흐레스벨그는 어째서 전장을 좁은 곳으로 선택했을까.
싸움이 단기전으로 진행되는 것 말고는 크게 이점이 없을 터였다.
오히려 광대의 군대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었고.
‘곧 알게 되겠지……. 그보다…….’
성진은 자신이 흐레스벨그라는 것을 받아들여 성진의 인격을 버리기보다는 공존하는 것을 택했다.
분명 흰 수리가 계획했다면 다음 수가 있을 것이다.
“넌 어쩔 생각이지?”
“글쎄요. 이제 차차 생각해 볼까요? 음…… 광대를 도와줄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어머, 내 마음을 훔쳐보는 거예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나도 네게 호감을 사진 않았겠지만 네 아버지는 더했을 테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라그나로크 때도 네가 직접 나섰겠지.”
“정답! 로키는 이번에야말로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종말을 이끄는 한 죽지 않겠지만……. 정말 그를 소멸시킬 방법이 있어요? 그의 영혼은 강대해요. 신격을 잃은 당신이 어떻게 그를…….”
성진은 건조한 시선을 헬에게 던졌다.
헬은 그의 시선을 무겁다 느꼈다.
“방법이야 하나가 아니지. 굳이 소멸시킬 필요도 없고.”
“네?”
“아니다. 그리고 신격을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그자 또한 대부분의 힘을 잃었어.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창조주가 직접 종말의 수레바퀴를 건넨 자예요. 그의 사도들도 분주하니 뭔가를 꾸미고 있을 거고요.”
“알아. 하지만 이제 모든 걸 부딪혀야지. 그래도 로키가 누구의 몸에 들어가 있는지는 알겠군.”
“……기가 막힌 우연이죠?”
“필연이지. 나와 그는 강운을 타고 나서 서로 투쟁하기 전에는 죽지 않아. 매번 같은 세계에서 만나 같은 싸움을 벌이지. 지겹도록.”
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뇨, 제가 말하는 우연은 그게 아니라 그의 정체에요.”
“그래……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지.”
“김우열이…… 로키잖아요.”
“…….”
“어째서 서로 기억을 되찾기 전에 만났을까요?”
“정과 반은 서로 밀어내기도 하지만 도리어 당기기도 하지. 셀 수 없을 만큼 싸웠기에 마주친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수긍은 가네요. 그…… 김우열과의 최초의 충돌이 없었다면 일이 조금 쉬웠을 텐데.”
성진의 몸에 잠든 신조가 깨어나면서 반대편에 있는 광대도 깨어났다.
광대가 누구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와 지독하게 얽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완성자 김우열.
그를 찾아야 했다.
아마 그도 지금쯤 진실을 깨닫고 그만의 계획을 진행하고 있겠지만.
“그가 당신을 옥상에서 밀지 않았다면, 그 임무에 당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데자뷰가 당신을 찾는 게 좀 더 빨랐을 테죠.”
“그랬을지도…….”
“뭐, 길을 잃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다시 올바른 길에 섰잖아요?”
“그래, 시간이 없어. 마지막 싸움이다. 모든 일이 끝나면…… 보자고.”
“좋아요.”
성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홀로 비 오는 거리에 남겨진 헬은 비가 그친 것도 아닌데 우산을 내렸다.
쏴아아아아.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는 것도 잊은 채 그녀는 성진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금은 당신을 동경했어요. 물론 내 아비가 증오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당신의 당당한 모습이 내 호의를 이끌었는지도 몰라요.”
콰르릉.
번개가 내리치며 거리에 사람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현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선물이나 할까요? 나도 당신의 시청자니 후원이라고 하면 좋을까?”
***
삐이이이이이이!
“빌어먹을! 흰 수리가 깨어났다!”
“시, 신조가…… 신조가 기억을 찾았어요!”
“매번 광대가 먼저 우리를 찾았는데…… 왜 이번에는…….”
“소란 떨지 마라!”
김우열이 깨어났던 연구소의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다.
정과 반의 계측 장치가 기괴한 소음을 만들어 내는 것도 소란에 한몫했다.
연구원 1명이 탁자를 후려쳤다.
쾅!
“우리는 아직, 신조가 누구인지를 특정하지 못했잖습니까?”
“이거야 원…… 이번에는 상대가 먼저 기억을 찾았군. 어차피 정이 기억을 찾으면 반도 기억을 찾는다. 이제 광대가 우리를 찾을 것이야.”
“도대체 그게 언제…….”
“의심하지 마라! 혹여라도 그분께서 아시면…….”
구성원들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뾰족한 대응 방법이 나오고 있지 않은 가운데, 언성만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연구소의 출입을 통과했다.
“누, 누구지?”
“김우열입니다. 저자가 왜…… 지금은 중요한 연구 중이라 하고 돌려보낼까요?”
“뭔가 급한 전달 사항이 있거나 몸에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연락도 없이 이곳을 찾지는 않았을 거니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김우열이 연구실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재밌는 얘기들을 하느라 여기 다 모여들 계시나?”
“……지금은 연구 때문에 상대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면 다음에 찾아오시죠.”
“하하하, 이렇게 문전박대하면 이제 갈 곳이 없는데. 그 연구라는 게 저자들을 말하는 거 맞지?”
꾸르륵.
여전히 실험관에는 많은 인간이 잠들어 있었다.
대체 어디에 이만한 숫자의 각성자들이 존재했던 것일까?
“저런 것들은 어디다 쓰려고 그래?”
“…….”
“훌륭한 일하는 집단은 아닌 줄 알았지만, 가면 갈수록 수상해지는군.”
소장 행세를 하는 사도 1명이 김우열의 말에 답했다.
“당신들 완성자들의 요구는 모두 들어주었지 않습니까? 실험에 참여하는 대신 분명히 힘을 드렸고요.”
“그랬지. 그래서 내 유전자도 제공했고 말이야.”
“한데, 어째서 우리의 일에 참견하는 겁니까?”
김우열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최근 임무를 나가지 않은 것인지 턱수염이 짙게 자라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당신들이 연구하는 거…… 내가 좀 써도 될까?”
“뭐, 뭣? 이 미친 작자가!”
“대들려고? 완성자에게?”
“완성자든 무엇이든! 김우열! 너는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런 난장을 피우는 거지?”
“너희가 누군데?”
“…….”
“대답을 잘해야 할 거야. 너희가 누군데?”
그 말에는 어쩐지 뼈가 있는 듯했다.
말을 하던 소장도 더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사도들을 이끄는 이가 진실을 눈치채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우리는 당신의 영원한 종이자 도구입니다. 영세하라, 광대의 나라여!”
“…….”
“서, 설마…….”
김우열이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도들은 그 시선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쿵!
쿵!
“영세하라, 광대의 나라여!”
“영세하라, 광대의 나라여!”
김우열이 비웃었다.
“킥킥킥…… 장난이야, 장난. 오랜만이네, 다들?”
“주군, 매번 속는 불초 사도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응? 왜? 재밌기만 하면 되는 걸?”
“뜻대로 하시길, 광대여.”
김우열의 눈에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키히힉…… 그래도 저것들을 내가 쓰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괜찮을까?”
“광대께서 예비하신 겁니다. 저희는 의미도 모른 채 벌인 일이고요. 모든 것은 광대의 뜻대로.”
“다들 내 말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네. 재밌어!”
“만족하셨다면 다행입니다.”
“궁금해? 궁금하지? 궁금할걸?”
“딱히 궁금…….”
눈치 없는 이가 내뱉으려던 말을 사도들의 수장이 이어받았다.
“너무 궁금합니다! 딱히 궁금해요! 저 흉물스러운 괴물들로 무엇을 벌일 생각이십니까? 혹시 가르쳐 주실 수는 없습니까?”
“이런…… 너희도 궁금해?”
“궁금합니다! 잠도 못 잘 정도로요!”
“키하하핫, 그럼 어쩔 수 없이 이 광대가 말을 해 줘야겠네. 저건 전부 ‘열쇠’야.”
“네? 열쇠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각성자들은 나와 수리가 싸우느라 탄생한 돌연변이들이야. 신성의 파편이 몸에 침투해 이상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지. 너희는 돼지를 살찌우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상대가 가볍게 질문한다고 자비로울 것이라 오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도들은 전생의 기억을 짊어진 자들.
로키가 그들을 이끌며 벌였던 잔학무도한 짓은 모두 영혼 깊이 새기고 있었다.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맞아! 각성자들은 신성의 파편을 가진 돼지들! 이건 내가 잡아먹기 위해 아껴 두고 있던 것이지. 마지막 싸움이 임박해서 내 힘은 보잘것없어졌거든. 이들의 배를 갈라 문을 열 거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게이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게이트는 신성을 빨아들이지. 내가 여는 좌표들은 특히나 탐욕스러운 놈들이 가득해서 제물도 필요하거든. 어때, 열쇠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어?”
“저들은…… 제물이었군요?”
“맞아, 재밌지? 응? 재밌잖아!”
“하하하하! 재밌습니다! 역시, 광대께서 생각하실 법한 방법입니다! 감탄, 또 감탄할 따름입니다!”
“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
광기에 가득 찬 이들처럼 사도들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었다.
로키는 웃지 않는 자들을 싫어했다.
웃지 않으면 죽이는 자가 로키였다.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아무튼, 저것들은 저대로 잘 보존해서 여기에 조금 풀 거고 나머지는 가져갈 거야.”
“가……져가다니? 어디로 말씀이신지…….”
“어디긴 어디야? 수리가 이곳과 연결을 끊으려 하는 그곳이지.”
“이곳에서 일을 벌여도 되지 않습니까?”
“잘 모르는구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뭔 줄은 알아?”
“그것이…… 자, 잘은…….”
“건너편에서 무슨 짓을 벌이면 이쪽 세계에도 영향을 준다는 거야. 마치 거울처럼. 이해했어?”
“네! 하면…….”
“그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연결을 끊지 못하게 하면 결국 이곳도 엉망진창이 된다는 얘기지. 그리고 몇 가지 계획이 더 있긴 했는데…….”
“알고 싶습니다!”
“음…… 잠깐만.”
툭, 툭.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친 김우열이 말을 이었다.
“머리가 좀 아프네. 정보를 한꺼번에 주입받았더니, 아무튼 이곳에서 일을 벌이기엔 장해 요인이 너무 많잖아? 인간들의 군세는 별것 아니지만 귀찮기는 하거든.”
“그렇군요. 그럼 언제쯤 건너가는 겁니까?”
“오늘.”
“어, 언제요?”
“지금.”
“……네? 지금 제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김우열은 눈을 깜빡이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잘 이해했어. 자, 갈까?”
“잠시…… 잠시만…….”
“또, 왜?”
“최후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날로부터 영원토록 싸워 왔습니다. 약속은…….”
“아하, 내가 약속을 안 지킬까 봐 그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은 누구를 섬기지?”
“광대 로키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변함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창조주의 부름 하에 일하는 중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재미없잖아? 일은 재미없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예…….”
“조금 비틀어 생각하자고. 나는 애초에 유지 보수 이딴 거는 관심이 없었어. 그런데도 창조주는 흰 수리를 막기 위해 나를 깨웠다. 이게 뭘 뜻하는 걸까?”
“그건…….”
아무리 짜내도 답을 생각할 수 없었던 사도들은 김우열을 쳐다보았다.
김우열은 사악하게 웃었다.
“유지 보수 따위는 상관없는 거야. 그가 원한 것은 그저 흥미일 뿐이지. 종말의 수레바퀴 따위는 자신의 흥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인 거야. 흰 수리가 그토록 부수길 바라는 가치는 그저 전부를 걸고 싸울 상품에 불과한 것이지.”
“……로키 님은.”
“……창조주는 나와 닮았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가 굳이 내게 종말의 수레바퀴를 넘겼으니, 나도 재밌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일은 일처럼 하면 재미가 없어! 주도권을 가져야지!”
우지지직!
김우열의 피부가 찢어지고 이마에서 거대한 뿔 2개가 돋아났다.
마치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수레바퀴의 힘으로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신이 되겠다. 창조주도 관여하지 못할걸!”
“하, 하지만…… 창조주가 두고 보겠습니까?”
“응. 난 그와 같아. 그래서 알거든.”
“창조주는…….”
“아무 생각이 없어. 그냥 재밌으면 된 거야! 키히히…… 미친 작자…… 저런 작자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걸 안다면 다들 표정이 볼만 할 거야.”
“저희는 어떤 보상을…….”
“너희는 영원토록 계속되는 종말의 수레바퀴를 거스르게 해 줄게. 처음에 약속한 그대로! 영원히 종말을 피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영세하라, 광대의 나라여!”
“영세하라, 광대의 나라여!”
로키와 그의 사도들이 실험관을 추슬러 게이트를 열고 사라졌다.
잠시 후, 몇 개의 실험관에 잠들어 있던 실험체들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것이 무색하게 몸이 심각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
“꺄아아아악!”
“살려 줘! 괴……괴물이야!”
“다들 어디 간 거야!”
“완성자들은?”
정부는 사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서울에 대규모 게이트 사태가 발생했고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완성자들도 두통을 호소하더니 몸이 쾅 하고 터져 새로운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는 것.
“이걸……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국민들에게 모든 걸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사태가 잘 진정되고 있다고만…….”
“나랑 말장난이나 하자는 건가? 서울에 폭탄이 떨어졌어도 그렇게 태연하게 지껄이겠나?”
“……죄송합니다.”
“원인은! 원인은 밝혀졌나?”
“송구스럽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긴급 대책 마련에 박차를…….”
“또, 또! 세금만 축내는 작자들 같으니라고! 꼴도 보기 싫으니 강부용이 호출해!”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강부용이 긴급 호출을 받고 국존 회의 도중 소환되었다.
강부용은 도착하자마자 추궁을 받았다.
“후우…… 뭔 상황인가.”
“저희 쪽에서도 예측 못 한 국지적 균열입니다. 재수 없게도 서울까지 여파가 미친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태는?”
“현재 정부 쪽 랩에서 몇 개의 덩어리 게이트가 확인되었고 서울 쪽에서도…….”
“서울은 왜! 대체 서울에 게이트가 왜 발생한 건가!”
“……완성자들의 몸이 붕괴하면서 발생했다는 최초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목격자들도 상당하고요.”
“완성자? 가만있어 봐…… 완성자면 자네 소관은 아니었지?”
“네, 제 소관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인프라 중 대부분이 모여 있는 서울이다.
예측된 게이트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탄생한 게이트는 큰 피해를 만들었다.
애초에 그렇게 소규모 게이트도 아니었으니,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 날 것은 자명했다.
“그럼 누구…… 아! 이런 씨…….”
“각하, 이번에 게이트가 발생한 랩과 완성자들과의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둘이 같은 결이 분명한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뭔가를 눈치챈 대통령이 이곳저곳의 인물들을 호출했다.
대부분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자들이었다.
“현재 소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귀신같이 사라졌습니다. 자택과 자주 가는 곳, 어디에서도 목격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치 땅으로 꺼진 것처럼……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분명은…… 지금 분명한 건 서울이 난장판이 됐는데, 막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더군다나 완성자들이야말로 게이트 방비의 선진이라고 대대적인 홍보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야!”
강부용은 노회한 여인답게, 아까부터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즈으으응.
“누구야!”
스마트폰 진동이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다.
분노를 쏟아 낼 곳을 찾던 대통령은 진동의 주인을 확인하고 기가 차 탄식을 했다.
강부용이었다.
“각하, 받아도 되겠습니까?”
“뭐?”
“긴급한 사항이라, 불편하시다면 나가서…….”
“아니, 여기서 받게.”
“감사합니다. 그럼…….”
강부용이 스마트폰을 구부정한 자세로 받았다.
“어, 그래. 뭐? 연락됐어? 그나마 다행이네. 그리고 또? 뭐? 그게 정말이야?”
자연스럽게 강부용의 전화 내용에 관심이 쏠렸다.
강부용은 해맑게 미소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각하,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문제가 발생한 지역이 한두 곳이 아닌데! 자네 인력으로 그게 가능한가?”
“그게…….”
***
성진은 이미 김우열이 떠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순간을 대비했듯, 그도 그만의 계획이 있었으리라.
지금 성진은 서울 한복판, 고층 빌딩의 옥상에 서서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누가 도와줘요!”
몬스터를 쏟아 내는 게이트가 서울 한가운데에 열린 것도 모자라서 규모도 거대했다.
또한, 지역들이 퍼져 있어 성진 혼자서는 대응할 수 없었다.
치이이이익.
광고가 나오던 대형 옥외 전광판이 이상 현상을 보였다.
화면이 일그러지며, 한 여인의 얼굴이 나왔다.
“헬…….”
헬의 마지막 선물.
지금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전광판, 그리고 영상 매체에 그녀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저, 저 여자는 뭐야?”
“저게 뭐야! 얼굴이…….”
“도망쳐!”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광판 속 헬이 말했다.
-종말이 시작됐습니다, 인간들이여.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삶을 얻을 것이고 패배한다면…… 음, 실례.
“네가 누군데!”
“미친 여자 아니야?”
“게이트! 게이트 테러다! 저 여자야!”
-신인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더는 대화할 가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생각해서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종말이야! 종말…….”
“엄마, 전화 받아…….”
-당신들이 직접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남들에게 미루기 급급하니까요. 그렇더라도…….
화면이 일순간 뒤바뀌어 건물 옥상에 서 있는 성진을 비췄다.
전투복과 고글을 쓴 그의 모습은 사람들이 익히 아는 모습이었다.
“블랙이다!”
“2세대야!”
“저 사람을 믿으라고?”
-당신들은 앞으로의 싸움에서 이 사람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누군가 전광판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 저게 뭐야…….”
“누, 누구야?”
“최별? 최별이잖아?”
“맙소사, 이게 뭔데?”
-이 사람들을. 그럼, 즐거운 종말이 되기를! 멀리서 지켜볼게요!
성진의 뒤편에 서 있던 이들이 그와 나란히 서기 위해 가까이 왔다.
족히 백은 넘는 머릿수.
오딘이 라그나로크를 대비해 양성한 발할라의 에인헤야르와 같이, 흐레스벨그가 선택한 전사들.
등불들이 두려움을 최대한 감추려 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나, 나 죽는 거 아니겠지?”
“무섭다……, 무서워…….”
“……잘할 수 있겠지? 내가 신이 선택한 인간이라며?”
각양각색의 색을 발하는 이들이 물결처럼 흩어지는 장관에 모두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