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신조(神鳥)의 날개가 폭풍을 일으켰다.
서리와 강풍, 그리고 뇌전을 동반한 폭풍이 위그드라실과 연결된 세계를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르르응!
키아아아아아아!
니드호그의 괴성이 들려왔다.
신경질이 난 모양이었지만 그가 괴성을 지를 수 있다는 것은 뿌리를 물어뜯는 행위를 멈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흐레스벨그가 날갯짓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자비는 없었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켰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짐작하게 했다.
매가 다가와 흐레스벨그의 날개를 부리로 정돈했다.
“베르드 폴니르여, 부탁하겠다.”
“맡겨 두세요, 흐레스벨그님! 나 창백한 폭풍 베르드 폴니르의 깃털 고르는 솜씨는 예술의 경지니까!”
“……알겠다.”
베르드 폴니르라는 매는 총총 다가와 서리가 언 깃털을 깨기도 하고 젖은 깃털은 털기도 했다.
“여기? 여기도?”
“…….”
“얼추 다 된 것 같아요, 흐레스벨그 님! 오늘도 멋진 폭풍이었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성진은 이 하얀 수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권태.
지독한 권태가 그 거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흐레스벨그는 단 한 번도 폭풍을 전력을 다해 일으킨 적이 없었다.
쓰지 않는 근육은 좀이 쑤시기 마련이었고 흐레스벨그는 말 그대로 폭풍을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이 세계는 그에게 따분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딱 하나, 여흥이 존재했다.
“흐레스벨그 님, 저 악룡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미드가르드의 인간들과 온 누리의 필멸자들이 경멸하는데도요. 참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베르드 폴니르, 나는 니드호그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경청하겠습니다!”
“나와 니드호그는 다른 신들과 다르다.”
“어째서죠?”
“다른 신들과 거인은 이미르와 아우둠라에게서 태어난 존재들. 하지만 나와 니드호그는 관념적인 존재다.”
“무슨 차이인가요? 저 창백한 폭풍 베르드 폴니르의 무지를 깨우쳐 주세요!”
“……알겠다.”
흐레스벨그의 유일한 여흥은 그의 미간에 사는 매 베르드 폴니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녀만큼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때문에, 흐레스벨그는 그녀를 총애했다.
“선과 악. 그것을 묶으면 질서가 된다. 이것들은 창조주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세계가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즉, 인간과 다른 종족의 질서가 우리를 창조한 것이지.”
“이렇게나 위대한 폭풍과 저…… 시커먼 죽음을요? 다른 종족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하나는 약하다. 하지만, 모이면 강하지. 그런 아이들이다. 그리고 니드호그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가 나보다 다른 이에게 미움받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가 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악이라는 관념이 왜 탄생한 줄 아느냐?”
“몰라요……. 너무 어려워요…….”
“지탄하기 위해서다. 악한 짓을 벌이고는 그에게 떠넘기기 위해서지.”
“아하! 그렇게 죄책감을 덜어 내는 건가요? 니드호그 때문에 악한 일이 벌어진다! 이런 것처럼요?”
“그렇다. 나 또한 마찬가지지.”
“선한 것은 흐레스벨그로부터! 그런 거였네요…….”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 우리의 존재가 그것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그저 니드호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니드호그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건 신조 님밖에 없을 거예요. 신조 님은 정말 선에서 태어난 분이 맞는 것 같아요! 저 창백한 폭풍…….”
“그건 대체 누가 지은 것이냐?”
베르드 폴니르는 고개를 갸웃하고 웃었다.
“인간들이요! 멋진 이름 같아서 제가 자주 사용하고 있어요!”
“멋진 이름이기는 하다만…… 되었다. 네가 좋다면 그것이 선이다.”
“인간들은 정말 재밌는 존재들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흐레스벨그는 다른 종족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영원을 사는 그에게 찰나와 같은 생명을 태우고 사라지는 종족은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죽음이 예정된 존재들이잖아요. 세계가 확장하면 그만큼 생명이 거두어지고 결국 순환의 일부가 될 뿐인 존재들. 그런데도 저렇게 반짝반짝 삶을 일구는 모습이 경이로워요.”
“반짝인다?”
“아, 흐레스벨그 님은 그다지 관심이 없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좋아해요. 그래서 할 일이 없을 때는 늘 그들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게 너의 무엇을 이롭게 해 주느냐?”
“글쎄요? 음…… 별 무리를 지켜보는 것은 한순간의 만족을 주지만 계속 보면 질리는데 별을 보는 건 그렇지가 않아요.”
“저 작은 존재들이 너에겐 별이라는 말이더냐?”
“네. 반짝반짝,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나아가는 모습이, 또 그들의 반짝임만큼 많은 수의 생각과 마음이 교차하는 게 제 시선을 잡아끄네요.”
“인간은 별이라…… 재밌는 생각을 했구나.”
“그러게요? 이상하게 인간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저는 다음 생이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저들처럼, 타오르는 별 같은 삶을 살고 싶어요.”
“네가 인간이 된다면 내 깃털은 누가 골라 주겠느냐?”
“앗! 그렇네요? 저 창백한 폭풍 베르드 폴니르가 없다면 서리가 덕지덕지 붙어 흐레스벨그 님의 훌륭한 깃털이 축 처질 텐데…… 그건 못 보겠어요! 제 불경한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을까요?”
흐레스벨그는 아무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조금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앙숙인 니드호그도, 위그드라실에 머무는 라타토스크를 포함한 다른 생명들도 결코 그를 외롭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베르드 폴니르만큼은 달랐다.
이 고귀한 매는 자신의 벗이었다.
“흐레스벨그 님, 신들의 황혼이 임박했다는 게 정말일까요? 오딘이 그랬잖아요!”
“그래. 나 또한 느끼고 있음이라.”
“그런데…… 그…….”
“왜 그러느냐?”
“솔과 마니가 불쌍해요. 라그나로크가 일어나면 그들은 죽는 건가요?”
흐레스벨그는 가만히 베르드 폴니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음이 여렸다.
“죽어라 고생만 하고…… 그 끝이 하티와 스콜 같은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라니…… 혹시…….”
“혹시?”
“그…… 저…… 저 창백한 폭풍…… 저…….”
“하고 싶은 말을 하거라.”
“솔과 마니를 구해 주실 수 있나요? 흐레스벨그 님.”
“……그들과 오며 가며 마주친 기억들이 너를 괴롭게 하는 것이구나. 너를 이해한다.”
“하면…… 구해 주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자격이 있을까 싶구나.”
“네? 그게 무슨 뜻이시죠?”
“솔과 마니는 분명 태양 마차와 달 마차를 끌며 세상을 이롭게 했다. 하티와 스콜이 그들을 매일 같이 괴롭혔음에도 성실했지. 그들을 구해 주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 또한 라그나로크와 얽혀 있음이 느껴진다.”
솔과 마니는 태양 마차와 달 마차를 끄는 신이었다.
늘 그들의 뒤를 하티와 스콜이라는 거대한 늑대가 뒤쫓으며 괴롭혔고 솔과 마니가 움직일 때마다 낮과 밤이 바뀌었다.
종말이 찾아올 때, 늑대들에게 솔과 마니는 죽는다.
그런 미래를 베르드 폴니르는 막고 싶어 하는 것이다.
성진은 흐레스벨그가 되어 그의 생각을 엿보았다.
흐레스벨그는 예정된 종말의 톱니바퀴를 하나 빼서 숨기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을까요?”
“세상을 속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만일 그 후폭풍이 덮쳐온다면…… 어떤 혼돈이 일어날지 알 수 없구나.”
“구해 주세요! 책임은 제가 질게요!”
“뭐?”
“솔과 마니는 저를 만나면 늘 반갑게 인사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그들을 구해 주고 싶어요! 어떤 벌이 주어지더라도요!”
“어째서지?”
“구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구하지 않는 건 싫어요! 저는 저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요! 부탁드려요!”
“구할 수 있으니까 구한다라…… 내가 아닌 네가 선일지도 모르겠구나.”
흐레스벨그는 결심을 굳혔다.
딱히 솔과 마니를 구할 이유는 없었지만, 베르드 폴니르가 원하니 들어줄 생각이었다.
“좋다. 내 깃털 2개를 뽑거라.”
“깃털을요?”
“내 신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늑대들을 속이겠다. 내일 솔이 이곳을 지날 때 그녀에게 전하면 될 것이다.”
“감사해요! 분명 벌이 주어진다면 제가 받겠습니다!”
“……결과는 나도 모르겠구나.”
***
솔과 마니는 태양 마차와 달 마차를 흐레스벨그의 깃털 인형에게 맡기고 위그드라실로 숨었다.
누이는 흐레스벨그와 베르드 폴니르에게 감사를 표했고 언젠가 꼭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신들의 황혼이 찾아왔다.
신들의 황혼, 라그나로크.
콰르르으으응!
끼아아아아아악!
온 세상이 수르트의 불길에 불바다가 되었고 신들 대부분이 쓸려나갔으며 위그드라실도 한차례 화마(火魔)에 휩쓸렸다.
흐레스벨그의 몸에 담겨 있는 성진은 그 광경이 너무 끔찍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흐레스벨그는 무정했다.
온 세상이 불타올라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그의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까지는.
“무슨…… 무슨 일이…….”
“흐레스벨그 님?”
“베르드 폴니르여,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저…… 저 대가를 치르나 봐요……. 창조주의 뜻을 어지럽혀서…….”
고귀한 매의 몸에 수르트의 불길이 옮겨 붙었다.
“벌을…… 받나 봐요……. 어떡해요…….”
순식간이었다.
수르트의 불길이 베르드 폴니르의 몸을 집어삼켜 재로 만들고 있었다.
너무도 뜨거운 불길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음을 바로 알게 했다.
“저 창백한 폭풍…… 베르드 폴니르는…… 즐거웠어요……. 제가 없으면 신조 님의 깃털은…….”
“벗이여!”
“누가…… 솎아…….”
“안 된다!”
안 된다는 말.
흐레스벨그의 입 밖으로 무심코 튀어나온 말은 창조주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급한 상황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베르드 폴니르는 재가 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폭풍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폭풍을…… 보고 싶었는데…….”
사아악.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사라진 베르드 폴니르의 사체.
흐레스벨그는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성진에게 흐레스벨그가 느끼는 심적 압박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너무 참혹한 일을 당하면 순간적으로 감정이 마비된다.
지금 그의 심정이 그랬다.
그렇게, 신들의 황혼은 막을 내렸다.
흐레스벨그의 벗인 베르드 폴니르는 이제 없었다.
***
하루, 또 하루.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흐레스벨그는 베르드 폴니르가 떠난 후로 단 한 차례도 폭풍을 일으키지 않았다.
세상이 다시 녹음으로 가득 차고 몇몇 신들이 죽음에서 순환을 거쳤을 때도, 또 그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는 무기력했다.
청설모가 다가와 흐레스벨그의 주의를 끌었다.
성진은 이제 저 청설모의 이름을 알았다.
라타토스크였다.
“니드호그가 또 뿌리를 갉아 먹는군.”
“……그러라지.”
“폭풍을…….”
라타토스크는 말을 잇지 않았다.
흐레스벨그의 눈동자는 탁했다.
그는 더 이상 선의 새가 아니었다.
세계수의 꼭대기에 살 뿐인 덩치 큰 수리일 뿐.
흐레스벨그의 폭풍이 니드호그를 멈추지 않았으니 니드호그가 세계수의 뿌리를 전부 먹어치울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니드호그는 뿌리를 적당히 먹고는 물러나 늪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세계수 꼭대기에 늘어진 흐레스벨그를 보았다.
흐레스벨그가 그를 이해하듯, 니드호그도 흐레스벨그를 이해했다.
니드호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게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창조주의 뜻을 거슬렀으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흐레스벨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유수와 같은 시간이 흘렀다.
불탔던 세계는 다시 차례차례 순번을 따라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던 중, 흐레스벨그의 눈에 인간들이 들어왔다.
-저는 인간을 좋아해요. 그래서 할 일이 없을 때는 늘 그들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전해졌다.
흐레스벨그는 홀린 듯이 인간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탄생과 그들의 번영 그리고 그들의 몰락을.
처음에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반복될수록 묘한 흥미를 끌었다.
흐레스벨그는 좀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흐레스벨그에게는 찰나였지만 문명의 시간으로는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이제 인간들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재밌구나…….”
다시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는 모든 세계의 모든 인간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어떤 점이 다르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미래를 개척하는지.
신성을 갖춘 그에게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신들이 그런 힘을 지닌 건 아니었다.
지극히 막강한 신성을 지닌 흐레스벨그 정도의 신이 그 신성과 비교하여 너무도 사소한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일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흐레스벨그, 그조차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저기 있는 것일까.
흐레스벨그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인간 여인은 그가 아는 이였다.
그의 벗이었던 베르드 폴니르였으니까.
-저는 다음 생이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저들처럼, 타오르는 별 같은 삶을 살고 싶어요.
언젠가 그녀가 남긴 말이었다.
흐레스벨그는 깨달았다.
그녀는 라그나로크 이후, 인간의 몸으로 세계를 순환하고 있었다.
그것을 흐레스벨그는 억겁의 시간이 지나 깨달은 것이다.
흐레스벨그는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삶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행위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고 세계는 소멸했다.
흐레스벨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수색했다.
인간은 그의 계산 안이었다.
모든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그에게 다시 그녀를 찾는 일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새로운 그녀가 다른 세계에 탄생했다.
흐레스벨그의 눈은 이번에도 그녀를 좇았다.
이것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하고 나서야 흐레스벨그는 깨달았다.
“왜…… 왜…….”
그녀는 늘 종말을 맞이했다.
그녀가 있는 세계는 언제나 황혼이었고 그녀는 종말과 운명을 함께했다.
창조주가 만든 규칙이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종말이 예정된 세계에만 태어나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벌이다.
솔과 마니를 구해 창조주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흐레스벨그 자신에게 주어진 벌이었다.
그녀의 비참한 죽음을 영원히 목격하는 벌.
“대가는…… 내가 치르는 것이었구나…….”
흐레스벨그는 이제야 창조주의 진의를 깨달았다.
모든 걸 깨달은 흐레스벨그는 처음으로 베르드 폴니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계속 지켜보는 것도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흐레스벨그의 날개가 펄럭였다.
폭풍을 일으키진 않았다.
조용히 이동해야 했으니까.
그가 도착한 곳은 재건된 아스가르드였다.
오딘과 토르가 사라진 전당.
그들의 아들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조여…… 오셨군요.”
비다르, 오딘의 아들이 그를 맞이했다.
“내가 올 것을 알았군. 오딘인가?”
“제 아버지께선 당신이 아스가르드를 찾게 되면 이것을 내어드리라 했습니다.”
흐레스벨그가 받아 든 것은 룬문자 석판이었다.
그곳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성진도 알 수 있었다.
발할라.
위대한 군대를 만드는 오딘의 기술이 적혀 있었다.
흐레스벨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군…… 오딘이 이것을 만든 건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함이 아니었구나.”
“제 아버지께서는 죽음이 예정된 분이셨습니다. 위그드라실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셨을 때도 미래는 바꿀 수 없음을 아셨지요. 하지만,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신들조차 벗어날 수 없는 이 종말의 율법을 누군가 깨부술 것이라 믿으신 것이지요. 아버지가 미미르의 샘을 마시고 깨달으신 겁니다.”
오딘이 라그나로크에 저항한 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뜻을 이어 누군가 창조주에게 저항할 것임을 알았고 그것이 흐레스벨그인 것 또한 알았다.
“가져가겠다.”
“다시 한번 당신의 폭풍을 볼 수 있기를, 신조여.”
흐레스벨그가 다음에 향한 곳은 위그드라실이었다.
그는 위그드라실에 사는 신들을 불러 모았다.
4마리의 사슴.
다인, 드발린, 두네위르, 두라스로르.
1마리의 산양.
헤이드룬.
청설모 라타토스크.
그리고 숨어 지내는 솔과 마니.
단, 니드호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흐레스벨그는 나직이 선언했다.
“나는 종말의 수레바퀴를 끊을 것이다.”
그의 선언에 다들 침묵했다.
상관없다는 듯, 흐레스벨그는 말을 이었다.
“나를 도울 자가 있느냐.”
솔과 마니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우리의 삶은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끝에 무한한 고통이 있더라도 당신의 뜻에 함께하겠습니다.”
라타토스크는 다른 의견을 말했다.
“나는 돕지 않을 것이다.”
청설모는 조금 물러났다.
헤이드룬과 네 마리의 사슴은 한참을 토론했다.
그리고 말했다.
“벗이여, 그녀 때문입니까?”
“…….”
“대답하십시오. 그녀, 베르드 폴니르 때문입니까?”
“그렇다.”
“어째서…….”
“그녀로부터 이어진 상념이다. 종말의 수레바퀴는 단순히 절차에 불과하다. 세계의 관리를 위해 탄생한 악이다.”
“그것을 어찌 악이라 볼 수 있습니까? 분명 종말이 없으면 세상은 혼돈으로…….”
“혼돈? 혼돈이 종말보다 악하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지?”
“…….”
“선택이 어찌하여 혼돈인가. 이것은 자신의 피조물을 믿지 못한 창조주의 불신이다. 나는 저항할 것이다.”
“……어쩔 생각입니까?”
“모든 것을 걸고 그와 싸울 것이다. 지더라도 싸울 것이야.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산양 헤이드룬이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
“당신은…… 인간 같은 생각을 하는군요. 인간은 자유를 가장 높은 가치로 두니까요.”
“인간이라…… 그래, 닮았군. 단, 다른 부분에서.”
흐레스벨그가 뒤로 돌았다.
그의 음성이 모두를 흔들었다.
“모든 것을 걸고 타오르는 점이 닮게 됐구나.”
“따르겠습니다, 벗이여.”
“…….”
“이 끝은 고난의 길. 분명 신성을 잃고 황혼을 떠도는 베르드 폴니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지만……. 우리는 압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헤이드룬이 말했다.
“맞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위그드라실에 사는 신들의 약속을 받아 낸 그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헬 하임.
죽은 자들의 세계에 그가 찾아왔다.
쏴아아아아.
비가 오는 궂은 날이었다.
“헬.”
“보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이군요.”
“막을 셈이냐?”
“그럴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
“막겠다고 하면 날 죽이겠죠?”
“그래.”
“그럼 돕겠다고 해야겠네요. 내가 뭘 도우면 되는 거죠?”
흐레스벨그는 헬에게 원하는 바를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들은 함께 들은 성진은 경악했다.
무모한 계획이었고 정말 모든 것을 건 싸움이었다.
“대체 이 끝에 무엇이 있기에…….”
헬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흐레스벨그는 답했다.
“그녀가 있을 것이다.”
흐레스벨그는 몸을 돌려 날아갔다.
그는 위그드라실로 향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어딘가에 들렀다.
날개를 접은 그에게 많은 이가 고개를 바닥에 붙였다.
“신조시여! 노여움이 있다면…….”
“도움이 필요해 찾아왔다.”
“무슨 도움을…….”
흐레스벨그는 이들 중 가장 영특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첫 번째 사도들의 탄생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바위와 벽에 당신의 뜻을 새겨 전하겠습니다!”
“알겠다.”
“저희를 믿으시지요.”
“……믿겠다.”
흐레스벨그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믿었을 뿐이지.
그는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위그드라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날개를 펄럭여 폭풍을 일으켰다.
세상이 뒤집힐 정도의 강력한 폭풍이었다.
처음으로 전력을 낸 흐레스벨그는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잠시 후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수리여, 무슨 짓이더냐.
“나는 당신의 종말을 거부한다.”
-……재밌구나.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네 뜻도 내 뜻과 같지 않구나.
“종말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거두어 가라.”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냐?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는 불온하고 불완전하다. 세계가 혼돈으로 치닫는다면……
“네 불신을 강요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쟁취하겠다.”
-하! 영원을 살며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내게 이런 도전이라니…… 당장에 무(無)로 돌려도 분이 풀리지 않겠지만, 마침 심심하던 차다. 좋다! 나와 내기를 하지 않겠나?
흐레스벨그가 의도한 것은 이 상황이었다.
흰 수리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종말의 수레바퀴를 유지하길 원하고 너는 그것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원하니 둘은 함께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직접 너를 상대하는 것은 격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리인을 내세우지.
“대리인?”
-로키, 일어나라.
콰아아아아아앙!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광대 로키가 불꽃 속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리쬐는 빛 앞에 섰다.
-너에게 종말의 힘을 주겠다. 너는 종말의 수레바퀴를 이 수리에게서 지켜 내야 한다. 네가 쓰러지면 끝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빛이 이번엔 흐레스벨그를 비췄다.
-너는 종말의 수레바퀴를 부술 생각이니 그를 이겨야겠지. 지켜보마. 뜻을 관철시켜라!
스으윽.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로키도 사라졌다.
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흐레스벨그는 행동에 나섰다.
그가 벌인 행동은 기괴망측한 것이었다.
모든 세계를 닫으며 그들의 연결 고리를 끊기 시작한 것.
아무리 신일지라도 이것은 영원이 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흐레스벨그는 멈추지 않았다.
세계를 닫는 과정에서 로키와 싸우며 신격이 희미해질수록 싸움이 격렬해졌다.
영원이라고 여겨졌던 싸움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남자는 하얀 공간을 걸었다.
어디까지가 길인지, 방향은 맞는지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그렇게, 남자는 하얀 공간을 빠져나왔다.
맞은편에서 헬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걸 알게 된 당신은 최성진인가요 아니면 흐레스벨그인가요?”
남자는 정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헬을 보았다.
이제는 깃털 한두 개의 신격만이 남은 그일지라도 그 눈빛에 담긴 힘은 막대했다.
그가 말했다.
“둘 다. 폭풍은 멎지 않았다.”
영원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흰 수리의 폭풍은 계속되고 있었다.
단 2개의 세계만을 남겨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