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성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소녀와 노파의 얼굴을 한 모순적인 존재가 횡단보도를 건너오고 있었다.
신호등의 초록 불이 깜빡여도 그녀의 걷는 속도는 일정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건지, 마치 없는 사람인 양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성진만이 그녀를 인지하고, 바라보았다.
이 거리가 좁혀지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될까.
성진은 그렇다면 후련할 것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이대로 뒤로 돌아 도망친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망상도 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마침내, 헬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성진이었다.
“지금껏 시나리오를 만든 사람은 당신이었습니까?”
“종말 이후와 스칸다에서를 말하는 거라면…….”
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든 게 맞아요.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어째서죠?”
헬은 대답하지 않고 성진을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성진은 그 시선이 기분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다.
아직 잘 모르는 이에게 어떻게 알려 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에.
“급한 일이 아니에요. 모르는 게 많겠죠. 우리 좀 걸을까요? 걷는 거 좋아해요?”
“비가 옵니다. 괜찮습니까?”
“비가 오는 날이어서 더 좋아요. 나는 비가 오는 게 좋거든요. 그때도…… 비가 왔으니까.”
성진은 말없이 걸었다.
대답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는 것은 승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헬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만 미소를 지었고, 노파의 얼굴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 모습이 심히 기이했다.
성진은 조용히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다 말했다.
“이야기를……해 주러 온 겁니까?”
“이야기를 원하세요? 음…… 어떤 이야기?”
“나를 놀릴 셈입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궁금한 게 많을 거잖아요?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약속을 지키러 온 거지.”
“약속? 누구와의…….”
헬의 눈에 지옥 불이 번뜩였다.
그녀가 보인 기세에 성진이 움츠러들었다.
“그야 당연히 나와 당신의 약속이죠. 달리 누가 있을까요?”
“나는 헬과 약속한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이 없는 거죠. 약속한 사실은 어디로 가지 않는답니다?”
약속한 기억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성진이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아도 결단코 이런 여성은 처음 보았다.
이렇게 생긴 여성을 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알겠습니다. 약속은 무엇인가요?”
“당신과 내가 나눈 약속은 꽤 많았어요. 세세한 부분들은 전부 끝이 났고 이제 마지막이 남았네요.”
“마지막?”
“당신의 기억을 찾게 도와주는 일이에요. 손이 많이 가는 남자라니까, 당신이란 사람은.”
“나는 최성진입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기억을 잃거나…….”
“싫어요.”
“…….”
“싫다고요. 그런 얘기는. 재미없잖아요? 나는 이 순간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도록 기다려 온 존재예요. 나는 이 순간만큼은 당신보다 우월하고 경이로운 존재고 싶어요.”
“……헬, 당신은 신이 맞습니까?”
“꺄하하하! 그런 질문은 진부한데…… 다른 질문 없나요? 아, 그래도 일단은 먼저 한 질문에 대답하죠.”
쏴아아아.
우산을 쓴 헬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파의 얼굴은 웃지 않았다.
“나는 헬이에요. 헬 하임을 다스리는 죽음의 신이죠. 이렇게 말하면 무섭게 느껴지겠지만 영혼의 권리를 가진 신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네요.”
“당신이 존재했다는 신화는 사실이었습니까?”
“신화가 어떻게 탄생한다고 생각하세요? 단순히 백지에서 꾸며진 이야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다면 명백하게 잘못 생각한 거예요.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는 법. 나라는 존재가 실재했기에 그것을 꾸며 낸 이야기도 탄생했겠죠. 뭐…….”
헬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 신화라는 게 대부분은 사실이지만요. 놀랐나요?”
“요즘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딱히 놀랍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게임이 현실이라니! 사도들은 무엇이고 데자뷰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미친 여자는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뭐, 이런 생각하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무례! 하지만 용서할게요. 난 아직 기분이 좋으니까.”
성진은 아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째선지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큰 도로에 차 하나 다니지 않았고, 건물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렇게 우울한 도시를 걸었다.
딱히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지금 모든 걸 말해 줄 수 있는 겁니까?”
“너무 큰 것만 아니라면. 한꺼번에 보여 줄 생각이라 미리부터 알고 보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 작은 부분들은 지금 바로 답해 줄 수 있어요.”
“아까…… 나보다 우월하고 경이로운 존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어째서 인간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지 묻는 거군요. 간단해요.”
휙.
탁!
“이건?”
헬이 성진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성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낚아채 손에 쥐었다.
그녀가 던진 것은 성진의 손에 꼭 들어오는 크기였다.
“귤?”
“맞아요. 오는 길에 샀어요. 선물이에요. 맛을 봐도 좋아요. 내가 특별히 허락할게요.”
“괜찮습니다.”
“어허, 먹으라고 하면 이유가 있겠죠? 다 설명을 위한 거예요. 어서 한 입, 콱! 베어 무세요.”
귤을 베어 물라니, 미친 소리였다.
성진은 조금 고민하다 귤의 껍질을 까서 그 안에 든 과실을 먹었다.
다 먹고 나니 귤껍질이 남았다.
이건 쓰레기니 가는 길에 버려야 할 것이다.
헬이 중얼거렸다.
“최성진.”
“네?”
“그게 최성진이라고요.”
“무슨 소리죠?”
“간단한 이치예요. 귤이라고 하면 누구나 그 안에 든 과육을 생각하지 껍질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인 줄 알아요? 껍질은 맛이 없고 과육보다 가치가 덜하니까요.”
“자세히 말해 주시죠.”
“최성진이란 존재는 단지 과육을 감싸고 있는 귤껍질처럼 나에게는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존재라고요.”
“……나는 최성진입니다. 그건 변하지 않아요.”
“롤플레잉. 누구나 역할이 있는 법이죠. 하지만 역할은 하나로 한정되지 않아요.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사회에서 다른 역할을 갖죠. 최성진이라는 사람은 그냥 그 정도의 가치예요.”
성진은 약이 올랐다.
20대의 중반을 넘어서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 지금, 자신의 인생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저 신이 불쾌했다.
“뭐 그렇다고 아예 무가치한 건 아니고…….”
“당신들은 왜 그러는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나를 찾아와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겁니까? 나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요구하면 될 것이고 나를 놀릴 셈이라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음, 뭔가를 오해하고 있어요. 바로잡아 드리죠. 최성진 씨, 나는 당신이라는 껍데기 안에 잠든 영혼에 관심이 있어요.”
“영혼? 나는 나인데…….”
“뒤집어쓴 껍데기가 자신이 될 수는 없죠. 하…… 이런, 세계의 규칙부터 이야기해야겠네요. 최성진 씨는 영혼을 믿나요?”
“영혼? 이제 와 믿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이렇게 친절한 신도 있는데 말이에요. 그렇죠?”
헬이 자신을 친절한 신이라고 표현하고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했다.
“흠…… 아무튼, 영혼이라는 건 분명히 존재해요. 내가 그것을 순환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순환?”
“이 세계가 담을 수 있는 자원의 한도는 정해져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자원에서 대표적인 게 영혼이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혼에도 한계가 있고요.”
“그것을 넘어 버리면?”
“혼돈.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요. 육체가 죽으면 영혼이 되어 헬 하임의 세계로 오죠. 그것을 다시 조형해 또 다른 세계로 보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에요.”
“또 다른 세계?”
“최성진 씨도 보아서 알잖아요? 종말 이후, 스칸다. 전부 다른 세계들이에요.”
“영혼은 순환한다…….”
“당신들 신화에서는 위그드라실과 아홉 세계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건 겉핥기에 불과해요.”
“겉핥기?”
“실제로 아홉 세계는 세계를 크게 아홉 종류로 나누었다는 걸 의미하지, 세계의 정확한 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종류랑 수? 다른 겁니까?”
헬이 한숨 쉬었다.
“하아, 당연한 얘기를…… 실제로 세계가 아홉 개였다면 이 싸움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진작 끝을 맺었겠죠.”
“그럼 다른 세계는 전부 몇 개입니까?”
“셀 수 없……었죠. 그것을 전부 돌아다니기만 해도 인간들이 말하는 영원이란 시간이 필요했을 거예요.”
“과거형? 지금은 아니란 겁니까?”
“지금은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있어요. 그야 2개뿐이니까.”
“……설마.”
“종말 이후와 지금 이곳. 당신이 있는 곳이요.”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세계가 그렇게 많았는데 왜 2개만…….”
“2개만 남았다는 게 다른 세계가 모두 소멸했다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다른 세계는 제 관리하에 작동하고 있어요. 단지 닫혔을 뿐이에요.”
“세계가 닫혔다?”
헬의 말은 언뜻 들어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세계가 닫혔다는 말은 종종 듣긴 했어도 여전히 그 의미가 불분명한 것이었다.
“세계가 닫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최성진 씨는 스칸다에 다녀온 적이 있죠? 그곳이 멸망했던가요?”
“그건 아닙니다.”
스칸다는 새로운 번영을 맞이했다.
그것을 확인하고 떠났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갈 수 없을까요?”
“데자뷰가…….”
“아뇨, 데자뷰도 똑같을 거예요. 데자뷰뿐만 아니라 저조차도. 지금은 스칸다에 갈 수 없어요. 그 이유는 세계가 닫혔고 그로 인해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에요.”
“원래는 연결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데자뷰가 어떻게 각기 다른 세계를 오갈 수 있게 했겠어요?”
“그럼 세계는 왜 원래 연결되어 있던 거죠?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데자뷰는 왜 그것을 닫으려 하나요.”
“일단 설명하기 전에 바로잡을 게 있네요.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최성진 씨. 세계를 닫아 서로의 연결을 끊고자 하는 건 데자뷰가 아니에요. 아니, 정확히는 데자뷰뿐만이 아니에요.”
“그럼 누가…….”
헬이 웃었다.
소녀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었다.
“당신.”
“뭐?”
“당신이라고요. 영원이라는 시간 동안 세계를 닫아 왔던 건.”
***
성진은 대화를 이어 가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정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미친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1. 헬은 신이다.
2. 헬은 자신과의 약속으로 여기에 왔다.
3. 헬이 등장한 북유럽 신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4. 헬은 수많은 세계의 영혼들을 관리한다.
5.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세계들의 연결이 끊어졌다.
6. 그 연결을 끊기 위해 누군가가 줄곧 세계를 닫아 왔다.
7. 그것은 데자뷰, 그리고 자신이었다.
막상, 정리해도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세계를 닫아 왔다는 겁니까?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요. 최성진 씨, 종말 이후에서 뭔가 특이한 것을 발견한 적 없어요?”
“특이한 것?”
“현실과 유사하다거나 현실을 닮아 있다거나 하는 것 말이에요.”
-일 진짜 잘해; 고증 개 쩌는 거 같아. 저거 실제로 있자나.
-님 부산 삼요?
-ㅇㅇ 저거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이자너.
-엥? 와 그럼 근미래 세계관이니까 저거까지 다 구현한 거야? 지어진 모습으로?
-그니까 개 소름 돋는 거지; 저거 혼자 툭 튀나온 거 보기 흉하다고 동네 사람들이 개 ㅈㄹ하고 있음.
성진은 언젠가 부산에 있던 호텔과 관련하여 시청자들이 떠들어 댄 말들이 기억났다.
아직 짓고 있는 건물이 종말 이후에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한 사례.
이밖에도 신축된 다리나 건축물 얘기로 잠시 논란이 일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나중에는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종말 이후가 이곳의 미래인 겁니까? 데자뷰는 미래에서 온 자들이고?”
“땡!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고요. 시간과 공간은 따로 묶어서 존재할 수 없어요. 시공간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단순히 과거 시점의 세계와 미래 시점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어요.”
“어째서죠?”
“미래는 하나가 아니니까. 과거는 하나일지라도 마치 하나의 줄기에서 수많은 가지를 내뻗는 나무처럼 그만큼 많은 미래가 생산되죠. 때문에, 하나의 과거가 단순히 하나의 미래를 만들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것을 미래라고 보기도 어렵죠. 그저 분화된 세계라고 보면 돼요. 음, 너무 어렵나?”
헬이 조금 갸우뚱하다가 정리해서 말했다.
“그냥 평행세계라고 생각하세요. 복잡하게 설명해 봐야 이 이상 이해하지는 못할 테니.”
“어렵네요. 평행 세계라니…….”
“그러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다른 거죠. 그리고 거긴 종말이 일어났잖아요? 물론, 그건 진짜 종말이 아니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게이트 사고로 전 세계가 휘말린다. 종말에 근접하긴 했죠. 하지만, 그건 종말이 아니에요.”
“다른 종말이 있다는 겁니까?”
“그럼요. 종말은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건 그냥 재해라고 부르죠. 재앙을 넘어선 종말은 다른 거예요.”
“어떻게 다릅니까?”
“종말은 신만이 행할 수 있어요. 그 세계에 사는 생명들은 전부 쓰러져 껍데기, 육체를 잃죠. 그렇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돼요.”
“……노아와 대홍수 같은 얘기네요.”
“그것도 다르죠. 전부. 전부가 중요해요. 노아의 얘기와는 달리 종말은 전부 죽어요.”
“어째서죠? 신은 왜 그렇게 가혹한 짓을 하는 겁니까?”
헬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채로 물었다.
“신기하네요. 사고방식이.”
“…….”
“신이 왜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건 인간의 관점에서 아닌가요?”
“하지만…….”
“꺄하하! 장난이에요. 여전히 당신은 같은 생각이군요. 지금도 같은 소리를 하다니. 그냥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장난친 거예요. 아! 그리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정정하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신은 다른 존재예요.”
“다른 존재라니? 헬과 다르다는 겁니까?”
“저를 포함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존재들까지요. 제가 말한 신은 이들과는 달라요.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와 태초의 거인 이미르도 그에겐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죠.”
북유럽 신화의 시초.
아우둠라가 부산물을 핥던 도중 신들이 태어났고 이미르의 땀에서는 거인이 태어났다.
모든 신과 거인들의 시작인 존재조차 먼지에 불과하다니, 헬이 말한 그는 누구일까.
“그라니? 그가 누구입니까?”
“이름을 붙이는 건 우스운 일이에요. 창조주라고 보면 되겠죠. 태초에 먼지로 가득한 세계를 만든 누군가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럼 종말을 행하는 건 그인 겁니까?”
“네, 정확히는 그는 의도했을 뿐이고 종말을 행하는 건 그가 만든 규칙이죠.”
“규칙?”
“세계의 룰인 거죠.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깨달은 것처럼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은 늘 존재했어요. 인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
“종말도 그중 하나라는 겁니까?”
“네. 뭐, 평생 가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 전에 종말이 오거든요.”
“종말은…… 대체 왜 오는 겁니까? 굳이 그런 짓을…….”
헬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제가 처음에 설명하지 않았나요? 이 세계가 담을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고.”
“…….”
“고등 생물들은 참 복잡해요. 다양한 생각들과 다양한 가치관, 늘 골치 아프죠. 그들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선택이에요.”
“선택?”
“생각이 다르니 다양한 선택을 하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들의 선택 하나에도 세계가 분화되어 확장해요. 그렇게 분화된 세계들에는 그만큼의 영혼이 필요하고요. 으…… 지독하죠?”
“…….”
“위대하신 ‘그’는 이것을 보아 넘길 수 없었어요. 태초에 티끌을 창조하여 우리를 만든 그이고, 무정할지라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에게 있어서 우리란 존재는 작은 여흥에 불과했지만, 관리를 안 해 장난감에 먼지가 쌓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죠.”
그라는 존재는 창조주.
헬은 창조주가 티끌 하나로 영원을 창조했지만, 뭔가 부족하다 여겼다고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관리하기엔 귀찮잖아요? 그래서 규칙을 만들었어요. 이 모든 세계를 관통하는 규칙을.”
“그게…… 종말이라는 겁니까?”
“네, 원리는 간단해요. 선택으로 인한 세계의 확장을 허용하되, 일정 주기로 종말을 맞이하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다시 영혼을 회수해서 순환하게 하는 거죠.”
확장한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세계에는 저마다 코드가 붙게 되는데 정해진 순서대로 종말을 맞이하죠. 파괴와 창조의 순환, 그가 생각할 만한 발상이에요. 재밌지 않아요?”
“…….”
“재밌지…… 않나 보네? 음, 아무튼 그렇다는 거예요. 라그나뢰크도 신들의 오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종말의 순서를 맞이한 것뿐이에요.”
“단지…… 그뿐…….”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나요?”
성진은 우울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다른 대답이 나올 수는 없었다.
“네.”
“좋아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니까.”
헬은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전보다 밝아졌다.
성진이 ‘그’의 행동에 반감을 갖는 모습을 보이자 그렇게 변했다.
“최성진, 우리 꽤 걸었죠?”
“왜 그럽니까?”
“나는 다리가 좀 아프네요. 여기까지만 걷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은 좀 더 걷는 게 좋겠어요.”
“지금…… 뭘 하려는 겁니까?”
“당신의 의문…… 아무도 해결해 주지 않고 명확하게 말해 주는 이가 없었겠죠.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도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 사정이라니?”
사라락.
헬이 얇은 종이를 꺼냈다.
“이 종이에 뭔가를 그려 볼게요.”
사사삭.
사삭.
향기 나는 만년필이 그녀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저절로 뭔가를 그렸다.
별 모양.
“자! 그럼 이 반대 면은 어떨까요? 두둥!”
헬이 종이의 반대쪽을 보여 주었다.
“문양이…….”
“네, 반대쪽에서도 보이죠? 누가 보더라도 별이잖아요? 지금 당신의 상황이 그래요.”
“내 상황?”
“당신이 뭔가를 알게 되면, 당신의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도 그것을 알게 되어요. 참 싫죠?”
“…….”
“그래도 이제는 알아야 해요.”
“왭니까?”
“이제…… 종말이 시작될 거니까.”
헬의 목소리가 변했다.
소녀는 입을 다물었고 노파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래된 지기여……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모든 일을 마쳤다.”
“헬?”
“모든 사실과 모든 절망, 그리고 모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이 길을 걷겠는가?”
노파는 성진을 염려하고 있었다.
성진은 빗소리와 함께 어쩐지 과거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과거에, 아주 오래전 그녀를 알았던 것 같았다.
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걸어야지……. 그렇게 선택했으니까.”
노파가 말했다.
“걸어라. 경이로움이여.”
성진은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세상이 지우개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건물도 도로도 전부.
이윽고 성진과 하얀 공간만이 남았다.
성진은 그 길을 걸었다.
헬이 조용히 읊조렸다.
“미련한 자……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켰다.”
노파의 얼굴이 미소 지었다.
***
찬란한 세상.
다시 깨어난 성진의 눈앞에는 화려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세상은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성진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랜 세월 보아 왔기에 어떤 아름다움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여기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이곳은 몇 번 왔던 나무의 위였다.
거대한 청설모를 만났던 곳.
‘몸이…….’
성진은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각이 이전과는 달랐다.
‘이렇게…… 작았던가?’
그렇게 넓던 나무가 지금은 적당한 크기로 느껴졌다.
그리고 전과는 달리 그는 지금 꼭대기에 서 있었다.
드드드드.
나무가 흔들렸다.
“이런! 아침부터 요란하네요!”
자신의 미간에서 누군가 떠들었다.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분명 이상한 광경이기에 성진은 당황했다.
‘누구지?’
총총총.
성진의 미간을 내려온 누군가는 그의 얼굴을 타고 움직였다.
‘부리?’
자신의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리가 달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 광경이었지만, 미간에 있던 존재가 그 부리를 딛고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더 충격적이었다.
매.
날렵하고 고귀하게 생긴 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간특한 검은 용이 또 뿌리를 물고 늘어지나 봐요!”
“…….”
“자! 폭풍을 일으켜 쫓아내죠!”
매는 성진에게 말했다.
“어서요!”
성진이 들어가 있는 몸의 주인이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거대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날개가 펼쳐졌다.
세상을 다 가릴 것만 같은 하얀 날개.
매가 디딘 부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흐레스벨그여! 폭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