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화
연남동 선술집.
골목 사이에 숨겨진 명소로 저녁만 되면 이곳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업 안 합니다.”
“엥? 그래요?”
“아이…… 다른 날 와야겠네.”
“다음에 올게요.”
“네, 죄송합니다.”
문을 열지 않는데 가게의 불은 켜져 있었고 누군가 올 것처럼 사장이 가게를 청소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른 저녁.
선술집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성 둘이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사장이 기다리던 사람들이 전부 도착했다.
사장은 검은 천으로 창문과 문을 가렸다.
불빛이 새나가지 않자, 선술집은 자연스럽게 모든 이의 방문을 거절했다.
이 선술집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여성들은 송하린과 최별이었다.
송하린이 최별의 옆구리를 푹 찌르자, 최별이 반사적으로 모두에게 인사했다.
“하…… 하하…… 반가워요, 여러분. 오, 오랜만이죠? 다들 잘 지내셨어요? 어, 거기 승희는 이번에 식 올렸다며? 게임 하느라 결혼은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
“저기…… 음…….”
“…….”
“죄, 죄송해요…….”
최별과 송하린이 지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서 조병창이 엄청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염라 앞에 죄질을 심판받는 것처럼 온몸이 굳어서 위축되었다.
죄책감은 사람을 구속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리고 조병창은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조병창은 시선을 돌려 송하린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송하린이 움찔하고 검지끼리 꼬물거리며 반사적으로 답했다.
“보, 본녀도 미안하게 생각하오.”
“……정말?”
“그, 그럼! 조병창이 평소에 쩨쩨하다고 말하고 다닌 것도 사과하겠소!”
“……그건 모르고 있었는데.”
“…….”
“또.”
“……또?”
이번엔 최별이 송하린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 속삭였다.
“무단이탈요…….”
송하린이 이제야 떠올린 듯 환하게 밝아진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 물론, 무단이탈이 가장 큰 죄지. 동료들의 신뢰를 저버리고 떠났던 것! 그것이 가장 큰 잘못 아니겠소?”
“알긴 아는군요, 하린 양. 여태 연락 두절 상태로 잠적하신 것치고는 굉장한 상황 판단 능력이에요.”
“하하하! 본녀가 그런 점에서는 또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편이지.”
쿡.
최별이 다시 한번 송하린의 옆구리를 찔렀다.
“……칭찬 아니에요.”
“……그런가?”
조병창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한 손바닥을 보이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두 분이 가진 정보랑 저희가 가진 정보를 교환해 봅시다.”
“좋은 생각이오!”
“우선 저희가 몇 가지 질문을 할 건데, 거짓 없이 답해 줄 수 있어요?”
송하린과 최별이 서로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조병창이 질문을 던졌다.
“먼저, 대구에서 무단으로 등불을 이탈한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시죠.”
“그건…….”
“대충 얼버무릴 거면 저희도 일어날 겁니다.”
“……말씀드리겠소.”
송하린은 담담히 그녀가 알고 있는 사항들을 말했다.
데자뷰와 실제로 접촉했고 그들이 자신과 최별이 세종으로 향하기를 원했다.
그 때문에 둘이 이탈했고 이민상이 합류한 것은 본인의 의지였다고 설명했다.
“데자뷰와 접촉했다라……어째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죠?”
“때로는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야만…….”
“매번 과격한 수단만 사용하니 그렇죠.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미안하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뭐, 지나간 일이니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오.”
조병창이 질문하다 말고 소매를 걷었다.
그의 의아한 행동에 송하린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조병창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후아아앙!
“허…….”
“이거…… 뭔 줄 아시죠?”
“질문입니까?”
“대충은.”
“펄스로 보이는데, 본녀의 눈이 잘못된 것입니까?”
“맞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몇몇이 펄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약도 심하고 반동도 심해서 함부로 사용할 힘은 아닙니다. 그래도 졸지에 각성자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네요.”
최별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병창과 똑같이 손을 뻗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꾸욱.
화르르르륵!
“……역시!”
“별 씨도 틀림없을 거라 했잖아!”
“그, 그럼 하린 씨도?”
“맙소사…….”
현실에서 각성자는 흔하지 않았다.
특히, 세간의 인식에서 각성자로 대표되는 A-S 급 이상 전투 계열 각성자는 더더욱.
펄스의 가치를 따져서 무엇할까.
당연히 게이트 진압 과정에서도 힘을 쓸 수 있으니 등급을 매긴다면 가장 윗줄이 분명할 것이다.
분명, 기뻐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을 찌푸린 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조병창이 물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질문입니까?”
“그건 이제 관두죠. 대화해요, 우리.”
“아, 좋소.”
“갑자기 생겨난 힘이라니…… 거기다 우리가 플레이하던 게임에서나 쓰던 힘이? 뭔가…….”
“…….”
“두 분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군요.”
최별이 나서서 설명했다.
자신들은 이미 스칸다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런 반동을 느끼고 있었고 게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현실에 이어졌다는 설명.
최별이 단발이 된 것도, 송하린의 어깨에 문신이 새겨진 것도 그러한 과정이었다고.
“역시…… 머리를 잘랐길래 무슨 일인가 했어요, 언니.”
“예은아.”
최별이 등불에 남기고 떠난 김예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전 또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았죠.”
“……아니야.”
화질구지 장석진이 조병창에게 물었다.
“그런데, 펄스를 깨우친 게 꼭 나쁜 일인가? 좋은 일 아니야?”
“음…… 당장은 좋은 일일 수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나도 생각은 늘 하고 있는데.”
“지금 다른 능력을 각성한 것도 아니고 난데없이 펄스를 각성했습니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게임과 현실이 연결되었다! 아닌가?”
“맞습니다. 당연히 게이머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죠. 게임에서 휘두르던 힘은 현실에 온다면 총탄과 폭탄도 막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니까요. 실제로 감각도 대폭 예민해져서 영화 속 히어로라도 된 기분이에요.”
“잠깐! 게임과 현실이 연결되었다는 건…….”
조병창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이제 누구도 능력을 얻은 것을 좋아하는 이는 없었다.
조병창은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아시죠?”
“유명한 말이지. 거미 남자에서 나오는 말이잖아.”
“맞습니다. 각설하고 이만한 힘을 받았다는 건 이 힘으로 해결할 문제 또한 주어질 수 있다는 거겠죠. 현재로서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그렇다는 얘기는…… 이런…….”
“네, 이제 눈치채셨나 보네요. 우리가 플레이하던 게임이 무엇인지를.”
“종말 이후잖아? 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모르죠. 게임이 탄생한 배경처럼 한국의 연쇄 게이트 붕괴로 전 세계가 도탄에 빠질지. 아니면 그냥 종말론자의 시시한 예언처럼 흘려보내도 될 생각에 불과할지.”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각성자가 되었다고 들떴던 것도 잠시, 현실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건 아니잖아. 게임이라고? 고작 게임이라니까? 집에서 에어컨 빵빵 틀어 놓고 솜이불 덮듯이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등불의 수뇌부 중 누군가 한 말이었다.
차일국이 대신 그의 말을 마무리 지었다.
“현실과의 괴리에서 만족을 찾는다. 종말 이후의 모토기도 하죠. 내가 있는 공간이 따뜻한 방구석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부산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것. 또 그곳에서 싸우는 것. 결론적으로는 모두 안락한 본래의 공간과 유리된 전장에서 싸우며 값싼 만족을 얻는, 그런 게임이었죠.”
“그,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아무튼, 그렇다 이거지. 그런데 현실이라니? 현실에서 게이트고 나발이고 몬스터라도 만나면…… 아니, 만나서 싸우다가 중상이라도 입는다면…….”
“…….”
“정말 죽는 거잖아?”
“네, 현실이니까요.”
한낱 게이머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임은 게임이어야 했다.
즐거운 여흥, 또는 다른 세계에서의 역할극.
그런데, 무대가 바뀌었다.
분명 인형에 줄을 매달아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관객들의 즐거움을 얻고 박수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상황이 변했다.
아니, 어쩌면 상황은 처음부터 같았는지도 모른다.
관객이 보면서 웃던 것은 줄에 매달려 열심히 움직이던 인형이 아니라, 그 자신도 줄에 묶인 것을 모르고 해맑게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는 죽기 싫은데…….”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이들의 예상이 적중한다면, 곧 비극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조병창은 건조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데 다른 등불들은 어떨까요?”
“…….”
“뭐, 펄스를 얻은 것은 소수니까. 나머지는 특이한 증상을 겪을 뿐이에요.”
최별이 되물었다.
“특이한 증상?”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진다거나, 손이 끈적해져서 벽을 잘 탄다거나 하는.”
“다른 의미의 각성자네.”
“벌써 정부 쪽 각성자 등록 기관에 찾아간 사람들도 있어요.”
“말리지 그랬어요.”
“말렸죠. 그런데 들어야 말이죠.”
선술집이 조용해졌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뻔했다.
“자, 자! 너무들 침울해하는데, 그렇게까지 바닥칠 필요는 없잖아? 우리가 뭐 죽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럴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슬프기는 하네요.”
“지금 우리를 최초로 불을 발견한 인류라고 가정해 봅시다.”
“전혀 다른데요?”
“가정 뜻 몰라요? 가정한다고.”
“네…….”
차일국은 이 중에서 가장 총명한 편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자, 불을 최초로 발견한 인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고기를 익혀 먹어야겠다?”
“잠잘 때 피워 놔야겠다?”
“땡, 틀렸어요. 정답은 무엇인가입니다.”
“네?”
“이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자신들은 무엇인가.”
“…….”
“불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사용할 것인지 궁리한 게 아니란 말이죠. 일단은 이 힘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을 얻은 게 왜 하필 우리여야 했는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최별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펄스가 무엇인지 이능력이 무엇인지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제기랄.”
“그런 논의는 저명한 학회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뭐 굳이 해 본다면…… 이능력 자체는 아직도 밝혀진 게 많지 않아요.”
“그래도 유력한 가설이 몇 가지 있죠. 예를 들어…….”
차일국이 이능력의 근원 가설에 대해 설명했다.
대부분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고 검증조차 어려운 내용이었다.
“하아…….”
“저기…….”
최별이 머뭇거리다가 차일국에게 말했다.
“가설은 쓸모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데 이능력의 근원을 검증하려 한다는 것 자체도 현시대의 인류에게는 불가능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또 뭐라던가요?”
“인류는 과학을 맹신하고 있다고…… 어쩌면 정말로 과학으로 검증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작용한 건지도 모른다고요.”
“그건 재밌네요. 어쨌든 이 논의는 패스. 다음은 우리입니다. 왜 우리여야 했을까요?”
“왜 우리가 힘을 얻었냐는 말이겠죠? 음…… 종말 이후를 플레이했으니까?”
“종말 이후가 대체 뭐길래…… 하…… 한국 서버가 폐쇄되었으니 이것도 알 방법이 없네요.”
조병창이 턱을 매만지다가 최별에게 물었다.
“데자뷰 측에서 새로운 접촉은 없었나요?”
“네, 아쉽게도.”
“모든 열쇠는 그 사람들이 쥐고 있을 텐데. 참 얄궂네요. 그럼, 다른 방법은…….”
“올빼미를 찾는 거겠죠.”
“그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까요?”
“적어도 우리보다는 많이 알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죠.”
“하하, 이거 의문 하나를 해결하려면 다른 의문을 해결해야 하니 골치가 아프네요.”
“……사실 이 문제를 상의할 만한 다른 분이 있기는 해요.”
“누구죠? 최별 씨랑 가까운 분인가요?”
최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 아버지시니까요.”
***
정부 기관이라고 하여 이상 사태에 손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난 연구소장이 손을 공손히 모으고 피드백을 기다렸다.
회의장의 가장 상석에 앉은 중년 여성이 물었다.
“그래서? 박사, 하고픈 말이 뭐야?”
“에…… 그러니까…….”
“정리해서.”
“……네! 그, 그러니까 공간 균열 좌표가 조금씩 오차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번 천안 게이트도 그 때문에 방비가 늦은 것으로…….”
“장난해? 그러니까 균열 좌표 예측이 왜 빗나갔냐고. 지금껏 국민들 세금 걷어서 너희들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나 지금 국민들 대신 너희한테 생색내는 거야. 이번에 하필 어린이집 차량이 휩쓸려서 여론이 좋지 않아요. 당신 지금처럼 일 설렁설렁하면 바로 모가지라는 얘기야, 알아들어?”
옆에 앉은 중년 남성이 그녀를 만류했다.
“기관장님, 고정하시죠. 최 박사도 사태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실력으로 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니까요. 말주변이 좀 부족해서 그렇지.”
“끄으응…….”
최 박사는 자신을 옹호해 준 이에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후 질문을 기다렸다.
“최 박사, 그래서 오차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거야? 아니면 못 막는 거야?”
“못 막습니다.”
“뭐? 왜? 돈을 그만큼이나 쏟아붓는데?”
“대한민국은 게이트 피해를 적은 인력으로도 방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입니다. 우선, 땅이 좁고 서로 연결이 긴밀하며 인력 풀이 땅 덩이에 비해 훌륭한 편이니까요.”
“계속해.”
“아마 게이트 발생을 예비하고 예측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미국은 쏟아붓는 자본에도 불구하고 땅 덩이가 너무 거대해서 번번이 피해를 입고 있으니까요.”
“왜 이렇게 밑밥을 까는 거야.”
“그런데, 이런 저희도 이번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 전을 기점으로 조금씩 공간 좌표가 틀어지더니 이번 천안 게이트 사태에서는 완전히 무력하게 당해 버렸죠. 아마 때마침 근처에 각성자들이 파견 나와 있지 않았다면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 뻔했습니다.”
“…….”
최 박사는 말을 하던 도중,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연구밖에 모르는 최 박사가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을 때, 가끔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
“이제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발생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처럼, 아마 이젠 게이트 발생도 무질서의 영역에 놓이게 될 겁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의미 없는 존재입니다. 자르셔도 무방합니다.”
“닥쳐, 당신은 그 자리에 콕 박혀서 내 지시나 들어.”
“……네.”
기관장이 입술을 깨물고 양손을 입가로 모았다.
양손을 모아 주먹을 쥔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뜻을 전했다.
“자, 일생일대의 출세 기회다. 공무원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가 않아요. 예로부터 전란이 도래하면 장군들 승진부터 시켜 줬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네.”
“…….”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야. 대가리가 모여야 뭔가 쓸 만한 얘기가 오고 갈 것 같아. 일단 각하께는 내가 회의 끝나고 보고 드릴 건데, 우리끼리 뭐라도 짜내야 단체로 연금 끊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아. 자, 우리의 연금을 지킬 선봉장이 있을까?”
“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일단 국민에게 사실대로 고하고…….”
“기각, 너 병신이야? 국민들이 듣자마자 ‘아,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셔요.’라고 할 것 같아?”
“…….”
“현실 감각 없기는…… 일을 해, 병신들아. 상황을 국민에게 떠넘기지 말고.”
다른 젊은 여성이 말을 꺼냈다.
“저…….”
“어, 미스 리. 항상 총명해서 기대가 많아. 자, 말해 봐.”
“특수적으로 운용되는 부대 있잖아요, 지부장님? 그 옛날부터…….”
“거기? 아서, 일단 수도 많지 않고 뭐 때문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곳이야. 특히나 게이트를 폐쇄하는 데에 특화된 곳도 아니고 각성자들도 아니란 거야. 신경 꺼.”
“네…….”
수많은 대안이 오갔다.
“예산 증편을 요구하는 게 어떻습니까?”
“기각.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안 될 거라며. 그리고 단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군과의 연계를 통해서…….”
“기각. 우리나라 징병제다. 더욱이 게이트 폐쇄가 대민 지원 나가듯이 논농사 도와주는 거랑 같아? 그리고 기본적으로 일반 화기로는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병력을 저지하기 어려운 거 몰라? 우리나라 총기에 대한 거부감도 심한 와중에…….”
나올 만한 대안은 전부 나왔다.
“기각.”
“기각.”
“기각해.”
“너 감봉.”
“넌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내가 지금까지 너 같은 애랑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니…… 국민께 죄송스럽다.”
보다 못한 보좌관이 기관장에게 첨언했다.
“저…… 기관장님,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모두 퇴근했다가 내일 다시…….”
“퇴근? 퇴근 좋지. 근데 게이트가 우리 퇴근하고 회의하는 거 기다려 준대? 게이트 허락받고 결재까지 받아서 오면 퇴근하자고.”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알면. 당분간 퇴근 못 해, 우리는.”
대안은 나오지 않고 애꿎은 시간만 흘렀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기분 나쁘게 공간을 메웠다.
……똑.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응? 누구야. 누가 회의 중에 메신저를 하고 있어?”
“제정신이야?”
“죄, 죄송해요.”
연신 사죄하는 여성은 사실 이 회의와 크게 관련 없는 여성이었다.
회의를 기록할 인원이 해외여행을 간 상황이라 대신 참여해서 타자를 두드리는 인원에 불과했다.
“그래…… 이름이…….”
“정혜리요.”
“혜리 양, 아무리 관련 없는 부서라도…….”
“아, 그게 아니라…… 친구들이 기관에서 일하는 데 혹시 도움 될 만한 정보가 없을까 해서 물어보고 있었어요.”
“흠…… 흐흠…… 말단 직원이 알 만한 내용이…….”
기관장 대신 중년 남성이 대신해서 핀잔을 주려 했다.
“잠깐, 뭐라는데?”
“기관장님?”
“너희도 지금 대한민국 친인척 다 동원해서 뭐라도 좀 적극적으로 해 보려고 해. 미스 정 하는 것 좀 보고 배우라고. 맨날 다른 기관에 떠넘기거나 기획서만 올릴 줄 알지…….”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기관장이 정혜리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 친구는 어디서 근무하는데?”
“아, 게이트 후속 조치 쪽에서 근무하는데 얼마 전에 재밌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이 나서…….”
“재밌는 얘기?”
“재, 재미없을 수도 있어요.”
“말해 봐. 안 잡아먹을게.”
“그 전주…… 있잖아요?”
“응, 게이트 사고. 어찌 보면 거기서부터 공간 좌표 오측이 계속됐지.”
“거기에 초동 조치에 투입된 각성자가 있었는데…….”
“잠깐, 전주는 오측으로 초동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녀 옆의 보좌관이 답했다.
“맞습니다, 기관장님.”
“그런데? 초동 조치에 각성자가 있었다고? 정부 소속이야?”
“제 친구도 이상하게 여겨서 물어보니 정부 소속이 아닌 미등록 각성자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군. 그런 우연이…….”
“근데, 그 각성자가 등록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천안에 출몰했다고…….”
“천안에? 어떻게?”
“친구가 그 사람을 또 마주친 게 이상해서 물어보니까…….”
“…….”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기관장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미스 정, 우리 친구지?”
“네? 네, 네에…….”
“친구된 기념으로 미스 정 친구 좀 보고 싶은데 서울 살지?”
“아! 네…….”
“택시비에 출장비까지 준다고 여기 좀 들러 달라고 해 줄래? 지금 당장.”
잠시 후, 찾아온 정혜리의 친구는 남자였다.
“이제 보니 남자친구였군.”
“하, 하하…… 안녕하십니까, 기관장님!”
“나는 자네가 전쟁터에서 보낸 전령으로 보이네.”
“네?”
“자네가 가져온 소식이 승전보일지, 망국의 눈물일지 너무 궁금해. 자, 어서 얘기해 봐.”
자신을 김종학이라 밝힌 남자는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하고 기관장에게 영상을 하나 보여 주었다.
“이게 뭔가?”
“보시면 압니다.”
후웅.
콰아앙!
몸에 신비로운 기운을 두른 인간이 소형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이 사람, 누구지? 보아하니 이름깨나 날린 각성자일 텐데 나는 본 기억이 없어. 국외로 나간 사람인가? 이 정도면 S급 이상 각성자가 분명한데…….”
“그 사람입니다.”
“……뭐?”
“그 사람이 전주와 천안에 등장했던 미등록 각성자입니다.”
“…….”
기관장의 수하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결론은, 사실이었다.
“그래, 갑자기 미등록 각성자가 등장했고 게이트의 발생을 미리 예견할 수 있다…… 심지어 능력도 출중해.”
“…….”
“희소식이군. 근데 다들 들어 봐. 재밌는 점은 뭔 줄 알아?”
“네?”
“며칠 전부터 각성자 등록 요청이 쇄도했다는군. 태반이 별 시답잖은…… 컵라면 빨리 먹기 대회나 나가면 딱 좋을 법한 능력이지만, 개중 몇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유했다는군. 그래, 아까 본 영상처럼 말이야.”
“그, 그럴 수가. 갑자기 S급 각성자가 줄지어서 나왔다는 말씀입니까?”
“뭐, 대충 그런가 봐. 우린 왜 이걸 몰랐을까?”
“…….”
“내 생각엔 당신들은 조만간 잘릴 것 같아. 앞으로도 이딴 식으로 일할 생각이라면 말이지. 그리고 미스 정.”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여성이 기관장의 말에 흠칫 놀라며 답했다.
“녜, 네?”
“남자친구랑 같이 부서 이동을 좀 해야겠어.”
“어, 어디로요?”
“며칠 내로 조직이 하나 만들어질 거야. 거기에 명함 하나 파 줄 테니까 거기서 일해.”
“네? 제가 왜…….”
“미스 정은 타자만 두드리기엔 너무 적극적이야. 그 재능을 다른 곳에 써 보자고. 내가 생각하기엔 적성이 이쪽이야. 아무래도 미스 정에게 행운의 여신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거든.”
“…….”
기관장이 무능한 수하들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희는 미스 정 집 방향으로 아침마다 절해. 혹시 미스터 킴이랑 결혼이라도 하면 축의금으로 가전 하나씩 선물하고.”
“네, 네?”
“당신들 연금을 지켜 준 고마운 분들이니까.”
기관장은 보좌관에게 턱을 내밀었다.
보좌관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보좌관의 입에 걸치고 불을 붙였다.
“푸후우…… 이제 좀 조각이 맞춰지는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방정식에 들어가는 변수가 달라졌으면 당연히 답도 달라져야지.”
“그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등록 각성자, 전부 찾아내.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